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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사랑할 시간] 03
1. 대학 교정 (낮)
단풍이 물들고 낙엽이 떨어지는 쓸쓸한 가을 캠퍼스.
<2006 년도 토익 특강> 류의 플래카드로 현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런 풍경들 위로 남성 중창단의 목소리로 <샌프란시
스코> 합창곡이 들린다.
캠퍼스 한 쪽에서 연습하는 합창 동아리 학생들, 차분
하고 건조하게 노래한다.
그 합창단 뒤로 있는 건물의 유리창을 비추면, 이들을
보고 서있는 지석.
주머니에 손 넣고 표정 없는 얼굴로 서서 이들의 합창
곡을 듣고 있다.
2. 지석 연구실 (밤)
불 켜진 형광등에 탁탁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나방. 퇴
근할 차림으로 그런 나방을 올려다보는 지석. 잡기는 뭐하고, 그
냥 서서 나방의 행동을 지켜보는데, 나방은 현광등에서 떨어져 나
와 서류 더미 구석에 처박힌다. 안 보인다. 날개 파닥거리는 소리
만 작게 들린다. 지석 문 닫고 나간다.
3. 지석집 (밤)
# 욕실
지석, 샤워호스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을 가만히 맞고
서 있다.
# 드레스 룸.
거울을 자신을 보며 로션을 바르고. 옷장을 열어 와이
셔츠를 꺼낸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얼굴.
# 거실.
어슴푸레한 실내등에 드러난 정갈한 거실의 벽에 신
랑 예복 차림의 지석 얼굴이 보인다. 신부는 앉은 자세를 취해 얼
굴이 안 보인다.
지석, 출근차림으로 옷을 챙겨 입고 나오다가 어두운
창문을 보고 가만히 선다.
허망지고 맥 빠지는 얼굴로 넥타이를 푸는 지석, 거울
을 보며.
지석 정신 좀 차려라 임마. 밤이잖아 밤.
씻구 출근할 시간이 아니라구, 씻구 잘 시간이라구...
답답한 듯 자기 얼굴을 보다가 거울 앞에서 사라진다.
E) 빠앙-!
자동차 경적소리가 선행된다.
4. 대학 교정 (낮)
덕구가 차 옆에 서서 손을 차 안으로 넣어 빵빵빵! 경
적을 울리고, 그 소리에 연구실 창문이 열리고 지석이가 내려다본
다. 덕구가 앙증맞은 경차 옆에서 뿌듯해서 코를 훌쩍인다. 지석
의 얼굴에 간만에 미소가 번진다. "저 자식 차 샀네?"
5. 대학 교정 / 달리는 차안 (낮)
덕구가 긴장해 천천히 운전을 하고 있고, 옆 좌석엔 지
석이가 앉아있다. 지석은 이전과 달리 신나서 이것저것 들쳐본다.
지석 (작아도) 있을 껀 다 있네. 야-, 박덕구가 오너드라이
버도 다 되고. 오래 살구 볼 일이다.
덕구 (시선은 운전에 집중) 나도 몰랐어. 이런 날이 올지. 아
침에 차 몰고 오는데, 햐, 그냥 미끄러지는 게, 구름 위가 따로 없
더라. 어때? 죽이지?
지석 좀 있다 사지, 왜 연말에 뽑았냐? 한두 달 지나고 연식
바뀌면 바로 일이백 떨어지는데.
덕구 (허걱. 첨 듣는 정보다. 지석이 봤다가 앞에 봤다가 정
신없다)
6. 대학병원 앞 (낮)
대학병원 간판이 보이는 건물.
그 앞에서 차를 세워두고 밖에 나와 쪼그려 앉아 있는
지석과 덕구.
지석은 병원현관에서 누군가 나오길 기다리며 지켜보
고,
덕구는 아직 생각이 연식에 묶여있다.
지석 잊어 임마. 어차피 뽑은 거.
덕구 쥐꼬리만한 보따리 강사 월급에 일이백이 쉽게 잊혀지
냐? 방학 때 손가락 빨 꺼 각오하고 산 건데. 진작 얘기해주지 씨.
지석 진작 차 산다구 말을 하지? 어디 가서 혼자 쭉 빼오고.
덕구 (할 말 없고)
지석 차 끌고 와서 놀래켜줄라구 그랬지? '요것 봐라~ 나
차 뽑았다~'
덕구 (맞다)
지석 쓸데없는 데 치밀하게 굴지 마라. 그러다 변태된다.
덕구 (뿌한)
지석 (병원 보다가, 순간 성질나는) 간만에 셋이 이빨 좀 까
나 했더니. 이 자식 진짜.
하며, 일어나서 쳐들어갈 것 같이 병원 쪽으로 가다가
다시 덕구에게 오며,
지석 전화 왜 안 받어?
덕구, 뚱해서 다시 핸드폰을 해본다.
7. 술집
지석과 덕구, 둘만이 술을 마시는데, 덕구는 오징어 하
나 입에 물고 술잔 내려다 보며 침만 꿀꺽 삼키고 있다. 술은 지석
이 혼자 마신다.
지석 논문 프로포잘은 잘 끝냈어?
덕구 한참 떠들고 있는데 학과장이 그러더라. '도대체 뭐래
는지...' (자조 섞인 웃음) 하긴, 나두 모르겠더라 내가 뭔 소릴 하
는지...
지석 긴장하지 말래니까.
덕구 청심환 먹구 했어. 이번에도 박사논문 통과 못하면 그
냥 다 접구 공사판 나갈라구. 나 제끼고 착착 앞서 가는 후배들 보
기도 민망하고. 아무리 봐도 공부는 돈 있는 집 자제들이나 하는
고급 레저가 아닌가 싶다. 너 같은 놈들이 하는 레저.
지석 우리 집 돈 없다. 거덜난지 오래다.
덕구 뽕빨은 뽑았잖아. 유학두 갔다오구.
지석 ...
덕구 하... 덕구... 양덕구... 빈이었으면 어땠을까? 빈... 양..
빈? 더 깬다.
지석 ...
덕구 아무리 봐도 내 인생은 이름에서부터 꼬인 거야. 이름
이 이렇게 후지고 촌스러운데 인생이 세련되게 풀릴 리가 있나.
( 지석 보며) 봐봐, 현지석.
지석 ...
덕구 벌써 이름에서 풍기는 냄새부터가 다르잖어. 글이 그
냥 뚝뚝 묻어나는 게, 똑똑해 보이고. 그니까 인생도 술술 풀리지.
태어나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있나, 아쉬운 게 있어봤나,
지석 (씁쓸한 얼굴)
덕구 젊은 나이에 교수자리까지 올라,
지석 아직 전임강사다.
덕구 (갑자기) 너어, 잘 나간다고 나 버리면 안된다, 응? 운
빨 있는 놈 옆에 붙어서 그 기운이라도 좀 쐬고 어떻게 살아가야
지. 안 그냐? 우리 끝까지 친하게 지내자. 응? (잔을 들어 부딪치
며 앙증맞게) 내가 잘 하께에?
지석 (잔을 부딪히며) 징그러 임마, 마셔. (마시는)
덕구 됐어.
지석 그냥 대리하래니까.
덕구 싫어! 새 찬데 대릴시키냐?
지석 ...에으씨!
지석, 혼자 왈칵 잔을 비운다.
8. 달리는 차 안과 도로 일각 (밤)
덕구, 운전하고 있는 지석, 빗방울 부딪치는 창밖을 보
고 있다.
덕구 (한 손으로 핸드폰을 띡띡 눌러대며) 새끼. 끝까지 안
오는구만. 전화한다더니.
병찬이 이 새끼 변했어.
지석 레지던트 3년찬데 바쁘겠지.
덕구 옛날엔 안 바빠서 그렇게 마셨냐? 흰 가운 입더니 목
에 힘만 들어가서.
지석 ...와이프 없어. 우리 집에 가서 제대로 한잔 하자.
덕구 니 집에 니 와이프 보고 온 날은 골방에 홀애비인 내
신세가 더 서럽다.
에으씨! 새차 뽑은 날 비라니... 양떡구우~!
다시 우울해지는 덕구. 지석은 그런 덕구가 웃기기도
하면서 안 됐다.
주룩주룩 가을비가 내린다. 스르륵 차가 멈춘다.
덕구, 차창 밖으로 하늘을 본다.
덕구 하늘도 주책이지, 늦가을에 비를 뿌리면 어쩌자는 거
야... 꽃 피우자는 거야...? 그래 피워라... 내 인생도 좀 피워줘라...
신호에 걸려 있는 지석의 차. 조용히 비만 온다.
지석 상념에 젖어 내리는 비를 보는데,
미연 (NA) 내가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겨 넣고 살아온 9년
동안... 그는 눈을 감고도 운전해갈 수 있는 평탄한 일방통행로에
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 ...유턴할 곳이 없는 고속도로 한복판에
서 그는 유턴을 꿈꾸며 그렇게 서 있었다...
그 순간, 끼이익--! 퍽! 사고다.
옆 차선에서 차가 정지하고 못하고 횡단보고까지 들어
왔다.
누워있는 사람의 손과 옷자락... 빗물에 번지는 피...
소란스런 발소리...
떨린다. 누군가의 인생이 저렇게 끝난다. 두근두근...
빵-!하는 경적 소리에 지석, 움찔 놀란다.
신호가 바뀌었는데 덕구가 모르고 서 있었다.
차는 서서히 빠지는데, 지석, 두렵고 허망한 얼굴로 사
고현장을 돌아본다.
9. 거리 일각 (밤) - 회상
눈 내리는 겨울이다.
뮤지컬 의 화려한 광고판 앞에 서있
는 미연.
샌프란시스코... 지석과 가기로 한 그곳이다.
미연은 멍한 얼굴로 그 포스터를 한참 보는데...
태훈 (E) 뮤지컬 같이 보실래요?
미연, 돌아보면, 태훈이 서 있다.
눈을 맞으며 커다란 <샌프란시스코> 벽보를 배경으
로 선 미연과 태훈.
10. 포장마차 (밤) -회상
미연과 태훈,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앉아있다. 소
주와 간단한 안주.
미연 (취했다. 시선 안 준채) 그쪽은... 술 마시면 무슨 생각
나요?
태훈 ... ?? 그냥...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요...
미연 (피식) 좋아하는 사람이 없구나. 사랑을 못해봤던가.
남자한테 버림 받은 여자는요, 술 취하면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나
요. ... 그 사람, ... 그 놈. (마신다)
태훈 ...
미연 나한테 관심 갖지 마요. 나요... 이렇게 만신창이가 돼
있을라구... 그 놈이 다시 와서 나 보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
지... 똑똑히 보여 줄라구요.
태훈, 씁쓸하다. 눈 내리깔고 말없이 잔을 든다.
11. 대학병원 응급실 / 간호사 카운터 (낮)-현재
싸이렌을 울리며 도착한 119차에서 피투성이 환자가
수술실로 들어가면,
수술실에서 지친 병찬이 땀을 닦으면서 나와 간호사
데스크로 간다.
차트에 싸인을 하다가... 데스크에 쌓인 서류철을 힐끗
거리는 병찬.
병찬 뭐에요?
간호 우리 대학 교수들 건강검진 한 거요. 재검진대상자에요.
병찬, 빼들어 본다. 대충 보다가 뒤로 넘겨본다. 쭉쭉
빠르게 넘겨본다.
그러다 한 곳에 멈춰서 뚫어져라 보는...!
12. 대학병원 / 의국 (낮-밤)
#( 낮) 컴퓨터 화면에 뜬 복부 초음파 사진.
그 초음파 사진을 유심히 보고 있는 병찬. 뭔가가 보인
다.
#( 밤) 컴퓨터만 켜진 어두운 진료실에 앉아 창밖을 보
고 있는 병찬. 핸드폰이 진동으로 울리나, 병찬은 신경도 쓰지 않
는다. 진동이 끊기고 음성 메시지가 도착한다.
지석 (F) 어이 부병찬, 바쁘신가? 내 전화도 막 씹네. 오늘
은 나오라. 이번 주에도 안나오면 덕구랑 나 쳐들어가서 땡깡 핀
다. 너 오늘 당직 아닌 거 다 알어. 내가 거기 간호사 하나 심어둔
거 모르지? 젤 이쁜 간호사로 심어 놨다. 그 여자 나 총각인줄 안
다, 히히히. (다시 정색하고) 흠. 나와라.
13. 덕구 원룸 (밤)
누워서 핸드폰 통화하고 있는 지석으로 넘어 온다.
지석 너 오늘도 안 나오면 이바구 클럽 제명이야...
전화를 끊는다. 덕구는 앉은뱅이책상의 노트북 앞에
앉아서 정신없이 작업하고 있다. 책상엔 A4용지물과 책들이 가득
하고.
덕구 (일하며) 와이프 낼 모래 온대매? 집에 들어가는 연습
좀 해라 쫌!
지석 와이프 나랑 안 놀아줘. 좀 바쁜 사람이냐?
덕구 병찬이 와도 난 못 나가. 이번에도 프로포잘 통과 못하
면 끝장이야, 나.
지석 이번에 못하면 다음 학기에 하면 되지.
덕구 (답답, 크게) 나도 장가 좀 가자, 응? 박사학위 따고 장
가 좀 가자고.
지석 븅... (할일 없이 외투 주머니에서 담배 곽 빼들고) ...
담배 안 필래? (한손으로 바닥 짚고 일어날 태센데)
덕구 (일하며, 발로 재털이를 밀어준다)
지석 아가씨 들어올 때 됐잖아, 임마!
덕구 (??) 아항! 그렇지.
그새 신나서 쭐레쭐레 따라 일어나는.
14. 덕구네 원룸 옥상 (밤)
벌건 눈을 해서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는 지석 덕구. 미
동도 않고 가만히 한곳을 보고 있는 두 사람 손엔 모두 담배 연기
가 나고 있다. 뭘 보고 있는고 하니, 맞은 편 원룸에 브라자만 걸치
고 왔다 갔다 하는 여자를 보고 있다.
지석 ... 이 집 전망 좋다.
덕구 ... 운 좋으면, 가끔 올 누드도 봐.
그때 지석의 핸드폰 벨이 울린다.
덕구 (기대) 병찬이야?
지석 (기대) 여보세요.
정란모 (F, 차갑고 차분한) 나네.
지석 ... 예.
정란모 (F) 어딘가?
지석 ... 아직 학교에요. 잘 지내시죠?
누군가하고 기대했던 덕구는 관심 끄고 여자를 응시하
고.
지석과 정란 모친은 약간 껄끄러운 분위기다.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사위와 장모사이.
정란모(E) 잘 못 지내네. 혜진이, 지 에미 품에서 안 떨어지겠다고
어찌나 애간장을 녹이는지... 정란이 출발했네. 자네 바쁘다고 연
락하지 말라더라만, 공항에 나가보게.
혜진이랑 생이별을 치루느라 정란이도 맘이 안 좋을
거야. 그만 끊네.
지석 네...
전화를 끊고 공허한 얼굴로 앉아있는 지석.
덕구, 앞집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턱이 헉!
빠진다.
지석이 일어나려 하자, 지석을 냅다 끌어 앉히는 덕구.
지석, 갑작스레 몸이 숙여지며 어디 부딪친 데도 없는
데, "윽-!' 하며 옆구리를 잡고 통증에 얼굴을 찡그린다.
덕구 왜 그래?
지석, 아니라고 고개 설레설레 하는데, 생각보다 통증
이 심하다!
(F.O)
15. 휴양림 오두막집 앞 (낮)
단풍이 물든 가을 산속에 뜨문뜨문 떨어져 있는 오두
막집.
한 오두막집에서 미연이가 상기된 얼굴로 웃음을 참으
며 나와, 맞은편 오두막집으로 걸어간다. 미연의 뒤에선 우우우-
응원해주는 피디(30대 중후반 남자)와 작가들(여자들로 네명).
모두 잘해! 파이팅!
미연, 맞은편의 오두막집에서 멈춰서, 흠흠하다 노크
를 한다.
문이 안에서 열리면, 상기된 얼굴의 미연이 해맑게 웃
으며 서 있다.
한 남자의 뒷모습에 걸려서 보이는 미연.
미연 죄송한데요, 저기 저쪽 오두막집에 있는 사람들인데
요,
오두막집 문 앞에서 휘파람 불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피디와 작가들.
미연 저희가 술이 떨어져서요. 가게에 갈려면 차 끌고 가야
되는데, 다들 한잔씩 해서요. 혹시, 술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소주
맥주 상관없어요. 돈은 드릴께요. (호기 있게 술을 꾸려는 미연. 신선한 느낌)
# 점프
미연이 얻은 양주병을 트로피처럼 머리 위로 들어 보
이며 자신의 오두막집으로 간다. 우우우! 환호해주는 피디와 작가
들.
16. 오두막집 / 거실 (낮)
술을 마시다가 동난 상황이라, 바닥에 빈병과 안주들
널려있는 사이로 탁! 양주병을 놓는 미연.
미연 자, 됐지? 난 이제 아이템 안내도 되지?
정피 (얼른 술 뚜껑을 열며) 당근이쥐. 집에 때 까지 푹-
셔.
미연은 손을 뒤로 짚으며 늘어지고, 작가들이 다들 신
나서 '따라 봐요', '나두 한잔' 하며 잔을 들이대자,
정피 (양주병을 뒤로 빼며) 아이템 하나에 한잔씩이야.
모두 에잇! 궁시렁대며 일어나 흩어지는.
정피 (작가들 뒤통수에 대고) 술 마실라구 아무거나 아이템
이라고 들이밀면 안 돼.
통과되면 한잔씩이야.
미연 등장인물 두세 명 바꾸는 걸로, 너무 진 빠지게 회의하
는 거 아녜요?
정피 (마시고) 크으... 시트콤도 점점 없어지는 판에 우리까
지 무너지면 끝이야.
나두 댁들도 백수 안 되려면 악착같이 해야지 별 수 있
어?
미연 (핸드폰 챙겨 들고 일어나며) 아~ 몰라. 난 술 얻어왔
어.
17. 동 / 베란다 (낮)
조용한 분위기.
미연, 이전과 달리 그윽한 분위기로 통화하고 있다.
미연 비와? 여긴 안 오는데. 서울만 오나부다... 응.. 저녁, 집
에 가서 먹으라구. 냉장고에 반찬 다 있으니까 찌개만 데우면 돼
요... 뭐어... 혼자 곧잘 먹으면서, 응 내일 갈께요... (부끄러운 듯
웃으며) 음... 나두...
한쪽에 쪼그려 앉아 있던 작가 넷이 동시에 똑같은 톤으로,
모두 음~ 나두~ (낄낄낄)
미연 (그제야 그들을 돌아보고) 뭐야?
작가1 무슨 말인지 톤이 너-무 뻔해주시니까~ 음~ 나두~
작가2 아냐아냐. 그럴지도 몰라. '나 지금 똥 사. 당신은?'
모두 '음~ 나두~' (낄낄낄)
미연 (장난스레 안을 향해 크게) 감독님, 얘네들 아이템 고
민 안하구 놀구 있대요.
모두 (E) 어으~
18. 대학 / 연구실 (낮)
연구실 창문에 주룩주룩 비가 온다.
지석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본다.
오랫동안 컴퓨터를 손대지 않았는지 순간 어두운 보호
화면이 뜬다.
그와 동시에-핸드폰이 울린다. 못 보던 번호다. 누굴
까?
지석 (약간 조심스럽게) 여보세요?
여자 (뻔한 하이톤 목소리의 여자, F) 안녕하세요. 오늘 날
씨 참 좋죠? 밖에 하늘 보셨나요?
지석 ..비오는데요?
여자 (살짝, F) 아차... (습관화되어 있던 멘트라서)
지석 누구세요?
여자 (F) 예, 이번엔 저희 회사에서 아주 좋은 보험이 나왔
는데, 원금 보장되면서 혜택은 혜택대로 다 받으 실 수 있는 보험
이에요... (이어지는)
지석 ...
유리창엔 두두두둑 줄기차게 떨어지는 비...
19. 공항
간단한 트렁크 하나를 끌며 공항건물에서 나오는 정
란.
도회적이면서 쓸쓸한 느낌, 간만에 귀국한 사람처럼
멀리 둘러본다.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20. 택시 안 (낮)
화창하게 갠 영종대교를 달리는 택시 안.
정란이 뒤에 앉아 통화중이다.
정란 (정중하고 상냥) 네 지금 도착했어요 사모님. 네, 신경
써주신 덕분에요. (필드에서 볼 수 있나?) 그럼요, 뵈야죠. 피곤하
긴요. 집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필드 나가서 움직이는 게 피로
가 더 빨리 풀려요. 네, 그럼 그때 뵐게요. 네.
전화를 끊고 창밖을 보는 정란. 가을 햇볕이 따뜻하게
들어온다.
창문을 조금 열어보는 정란.
정란 (E) 샌프란시스코는 햇살이 너무 따뜻해서.. 정원 벤
치에 혼자 누워있으면 꼭 하늘에 안긴 기분이죠... 하늘이 날 위로
해주는 거 같았어요...
21. 갤러리 / (낮)
빨간색, 노란색, 흰색 등등으로 햇살의 따뜻함을 표현
한 그림으로 넘어온다.
그 그림을 보고 있는 정란.
정란 그 느낌이에요. (얼른 감삼을 접고, 사무적으로) 좋네
요. 하죠.
화가 매니저(여자)와 그림을 보며 얘기하던 중이었다.
둘이 테이블로 가 앉으며,
매니 역시 이 화랑 큐레이터는 빨라서 좋아요. 딴 데는 그림
이 너무 쉽다, 어쩠다, 안 할꺼면 안한다고 하면 되지, 뭔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정란 언제쯤 되죠?
매니 열여섯 점으로 연말에 했으면 하는데요. 작가가 다음
달에나 영국에서 들어올 수 있대서요. (슬쩍) 그리고 김기훈 화백
말에요.
정란 됐어요. 그분. 이모저모 사람 힘들게 해요.
매니 (기분 좋게 접는) 에이 그래요. 저도 별로 안 내키는
데, 하도 부탁해서요.
친정 나들인 좋았어요? 어린 따님 두고 오시기 힘드셨
을 텐데.
정란 아 그 얘긴 그만해요. 또 눈물 날라고 그래.
매니 어, 죄송해요. (가방 챙기며) 그럼 이 화가 일정 잡히
는 대로 연락드리고 다시 들를게요.
정란 네.
매니 (일어나) 안녕히 계세요.
정란 (일어나) 네, 가세요.
매니저가 가고 나며, 정란, 또각또각 다시 걸어가서
그 그림을 다시 본다.
22. 작업실 (낮)
입에는 볼펜을 물고, 다리를 떨어가면서 마감 시간에
쫓겨 대본을 치고 있는 왈숙.
미연이 들어온다.
미연 안녕. (바로 자기 자리로 직행)
왈숙 (시선은 모니터에서 안 떼고, 계속 치면서) 웬일이야?
안 나올 줄 알았드니.
미연 (자리에 앉아 노트북 열며) 기획회의 한 거 정리해줘야
지. 너도 밤샐 거지?
왈숙 기획회의는 무슨. 핑계대고 술 마시러 간 거지. (자판
을 확 내려치고, 입에 문 볼펜 던지며) 아씨... 돌아버린다. (손가락
을 계속 튕겨가면서, 시선은 자판에) 야, 요걸 뭐라 그러냐 요거!
미연 '손가락 튕긴다'
왈숙 어, (치며) 손가락... 튕기고... (손가락 튕기고, 모니
터 보며 연기 섹시한 마녀 톤) 좋아! 그렇담 여기서 쌕쌕이를 불러
보는 거야. (멀리) 쌕쌕아--! 쌕쌕아--!
미연 (돌아보는) 조용히 좀 하자. 입으로 대본 써?
왈숙 (쳐다도 안 보고) 너 같은 시트콤 인기 작가가 못되는
개그 작간 온몸으로 써 년아. (치며) 쌕.쌕.아...
미연 (다시 모니터 보는데)
왈숙 (치며) 불러도 대답이 없자... (손동작 정지. 갸웃. 미
연 보고) 야, 이건 뭐라 그래야 되냐? (입으로 소리 내면서, 입에
손바닥을 빠르게 붙였다 뗐다 해서 울림이 있게)
미연 (한숨)
왈숙 아 몰라 몰라. 대충 써. 무조건 3주 삐지 깔면서 들이밀
면, 뜬다구 우기면 돼 (자기에게 기 넣는) 아자아자아자---!
24. 대학병원 /레지던트 의국 (밤)
병찬, 가운은 벗고 퇴근차림으로 소파에 앉아있다.
가운을 갈아입던 후배가 돌아본다.
남자 부선생님, 퇴근 안하세요?
병찬 (시선 안 주고) 먼저 해.
남자가 나가면, 병찬은 핸드폰을 열어 지석을 클릭한
다. 통화버튼을 누른다.
병찬 (잠시 후) 나야.
25. 술집 (밤)
지석 덕구 병찬, 술잔을 기울이는데, 병찬은 눈 내리깔
고 술도 잘 마시지 않고, 대화에 끼지도 않는다.
지석 어릴 땐 남자 나이 서른이면 폼 날줄 알았는데, 세월
만 잡아 처먹으면서, 아무 소득도 없이 늙어만 간다.
덕구 (담배 곽 꺼내며) 후... 언제까지 이러구 살건지... (담배
가 없다. 담배 곽을 꾸기며)... 담배는 언제까지 못끊을 껀지.
병찬 (핸드폰 플립을 열어 시계를 본다)
지석 (병찬의 태도가 못마땅하다) 시계 좀 그만 봐 새꺄, 술
맛 떨어지게시리. 뭐하러 왔냐 그럴꺼면?
병찬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덕구 들어가 봐야 되냐? 당직이야?
지석 (술을 마시자)
병찬 (지석에게) ... 그만 좀 마시지?
지석 지루한 인생, 술마저 안마시면 어떻게 살라고오? (마시고)
덕구 옳소! (마시고)
병찬 (OL 냉정하게 일어나) 먼저 간다. (나가는)
덕구 (황당한) 저... 저... 싸가지!
지석 ... (독기 어린 시선) 내가 오늘 저 새씨 잡는다. (벌떡
일어나 아웃)
26. 동 / 앞 (밤)
병찬이가 뚜벅뚜벅 가는데, 뒤에서 지석이가 쫓아온
다.
지석 야!
병찬 (대답 없이 가는)
지석 야 부병찬--!!
병찬 (멈춰 선다. 돌아보진 않고)
지석 뭐하는 짓이야 새꺄 너! 이럴 꺼면 나오질 말든가! 입
은 댓발 나와 갖구.
병찬 ...
지석 너 나 귀국해서 일년 넘도록 몇 번이나 만났어? 첨엔
그냥 바쁜가 부다, 그래 의사가 힘들겠지, 그래 우리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지, 옛날 같진 않겠지! 그래두 임마 술 마시자구 해서
나왔으면 분위기 잡치게 하진 말아야 될 꺼 아냐? 누가 너한테 옛
날처럼 자전거 타고 달리재? 그냥 술이라두 마시자는 거 아냐? 이
바구라도 떨자는 거 아냐? 인생 심심하니까! 친구니까! ...자식이
건방이 아주 머리끝까지 차서... 할 말 있음 해봐 새꺄!
병찬 (덤덤히 말한다) ... 너 암이야.
지석 ...!!
병찬 ...췌장암.
지석 .......뭐래는 거야 이거.
병찬 이번에 너 건강진단 받은 거, 재검진 나왔길래, 이상해
서 봤어. 초음파, 피검사, 다 확인해 봤어. 혹시나 싶어서 교수님한
테도 보여줘 봤어. 엠알아이 찍고 더 정밀 검사 해봐야겠지만... 현
재 결과로 봐서는... 그래...
지석 ...
병찬 자각증상이 거의 없으니까 몰랐을 거야. 췌장암이 그
래. 많이 진전 되도 옆구리 땡기는 정도 증상밖엔 없어.
지석 !! (옆구리가 땡겼다)
병찬 하루라도 빨리 정밀 검사 받고, 수술해야 할지, 항암치
료 해야 할지 결정해야 돼. 내일 오전 열시에 정밀검사 잡아 뒀어.
나와. ...질문?
지석 ...
병찬 질문?
지석 어처구니없게, 지금 니 기분이 어떨까 궁금하다. 사
람들한테 이렇게 통보하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해... 통보 받은 내
기분은 모르겠는데, 니 기분, 니 심정이 어떨지 궁금해...
병찬 ...기분 같은 건 없어. 여태 어떤 기분 갖고 환자한테
그런 말 해본 적 없는데, 너한테 어떻게 말할까 계속 고민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앞으론 기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
지석 ...나한텐 애정이 있어서 기분이 생겼단 얘기냐?
병찬 ...
지석 ...돌팔이. 나보다 공부도 못했던 놈이.
지석이 뒤돌아 천천히 걸어간다. 병찬이 말없이 보고
있다.
27. 거리
네온사인이 찬란한 밤거리를 어깨를 움츠리고 걸어오
는 지석.
충격에 멍하니 눈 내리깔고 가다가 허리를 천천히 이
리 저리 비틀어본다.
발을 하나씩 들어서 가슴에 끌어당기는 동작도 해본
다.
점점 빠르고 격하게 해본다.
제자리에서도 폴짝 폴짝 뛰어본다.
망가졌다고 하는 췌장을 건드릴 법한 짓을 해보는 거
다.
이상하다는 듯 지석을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지석, 헉! 주저앉는다. 옆구리 뒤쪽을 누르며 주저 앉
아있다.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있다. 눈빛이 떨린다. 확실해지
는 공포.
28. 지석집 / 서재 (밤)
컴퓨터 화면 인서트: 췌장암에 대한 검색자료다.
췌장암이란 단어들이 굵은 글씨로 보이고,
'3 기로 판명되면 대개 3개월 이내에 사망한다...' 라는
글귀가 보인다.
등 뒤로는 그런 컴퓨터 화면이 켜져 있고,
지석, 시선을 떨구고 가만히 앉아있다.
멍한 눈빛, 머릿속이 백지 상태이다.
29. 지석 집 / 거실 (밤)
대형 TV에선 코믹한 주성치 영화가 흐른다. 지석, 캔
맥주를 마시며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영화를 본다. 그것도 피식피
식 웃어가며, 몇 캔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온다. 문득 맥주 캔
의 경고문을 본다.
지석 (읽는) 지나친 음주는 간경화나 간암으 일으키며 운전
이나 작업 중 사고 발생율을 높입니다...
# 지석, 냉장고를 연다. 맥주가 떨어졌다. 페트병에 든
먹다 만 맥주가 눈에 띈다. 꺼내들어 뚜껑을 열려고 하는데 너무
꽉 조여 놨는지 잘 안 열린다. 이리저리 애쓰는데... 결국엔 페트병
의 몸통에 과도 칼이 푹! 꽂힌다.
# 칼집 낸 곳에 빨대를 꽂아 마시면서 영화를 보는 지
석. 하나로는 빨려오는 양이 성에 안 차는지 빨대도 서너 개다. 벌
건 눈... 취했다. 취해서 일까. 미연이가 눈앞에서 태연히 지나간
다. 지석, 미동도 하지 않고 눈빛만 떨린다.
미연 (냉장고 문을 열고) 난 술안주론 김이 젤 좋더라. (별
거 없다는 듯 탁! 닫고, 거실로 가며) 하나도 안 취한 상태를 0, 알
딸딸하니 기분 좋게 취한 걸 5, 완전히 쓰러지기 직전을 10, 이라
고 했을 때! (한쪽에 도도하게 앉아) ...몇이야?
지석 ...
미연 맞춰볼까? ... (차가운 미소) 마이너스 일!
지석 ...
미연 마실수록 말짱해지지?
지석 ...
무표정하게 지석을 바라보는 미연. 낮게 말한다.
미연 .......... 쌤통이야.
지석 .......... (그저 보기만)
미연 .......... (쌤통이라고)
지석 .......... 그지...? 쌤통이지...?
풀샷 잡으면 미연이가 앉아있던 자리엔 아무도 없다. 지
석만 덩그러니...
그때 아파트 문이 열린다.
지석 (시선은 화면에) 밥 안 차리셔도 돼요.
아무 대답도 않고, 문도 닫히지 않자,
지석 아주머니, 오늘은 밥...
하며 보는데 정란이가 서 있다.
지석 !!
정란 마중 나오지 말란다고, 정말 안 나와요?
지석 ...
30. 미연집 앞 / 주차장 정도 (새벽)
밤을 샌 초췌한 몰골의 미연, 노트북과 출장 가방, 식
료품이 든 쇼핑백을 가득 들고 안고 오는데, 주차장 안쪽에서 자동
차 사이를 지나 누군가 따라오는 소리 나고.
미연은 정체모를 남자의 구둣발 소리에 불안해하며 발
걸음이 빨라지는데,
뒤에서 쫓아오는 남자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그때!
태훈 (뒤에서 미연의 허리를 확 안으며) 아가씨!
미연 (헉! 놀라곤, 이내 풀어지는) 아우 놀랬잖아요. (살짝
때리는)
태훈 (자신의 외투로 미연을 감싸고 걸으며) 안 본 사이 많
이 이뻐지셨는대?
미연 더 자지. 왜 나왔어요?
태훈 도둑놈이 당신 훔쳐갈까 봐 잠이 와야지... (자신의 외
투로 미연을 감싸고 걷고)
미연 (웃으며 태훈 품에 싸여 걷는)
딱 달라붙어서 행복해하며 걸어가는 두 사람.
31. 미연집 . 거실 (새벽)
욕실에서 태훈 샤워소리 들리는데,
미연, 익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식사 준비를 하고 있
다.
무 썰어, 말갛게 끓고 있는 냄비 안에 넣고, 데친 콩나
물 건져 양념 넣어 무치고,
갈치도 한 토막 굽는다. 욕실에서 젖은 머리 닦으며 나
오는 태훈.
태훈 (놀라며) 뭐해? 바쁠 땐 그냥 빵 먹으면 되자, 안 피곤
해?
미연 밤새는 게 내 일인데 뭐... 잠 설쳐서 낮에 힘들어서 어
떡해요?
태훈 ... (애틋하게 미연을 바라본다)
32. 지석 집 / 침실 (밤)
돌아누워 자고 있는 지석과 정란.
정란(E) 공항에서 혜진이 안 떨어질라고 해서 혼났어. 갈수록
더 한 것 같애.
뭘 몰랐을 땐 웃으며 빠이빠이 하면서 잘 헤어지더
니...
지석 (움직임 없는데) ...
정란(E) 혜진이 당신 벼르고 있어요. 이번에도 안 왔다구.
지석 (감은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흐른다)
(F.O)
33. 지석 아파트 / 전경
정란(E) 그날은 골프 있어서 안돼요.
34. 동 / 주방 (밤)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 정란은 통화를 하면서, 수저통
에서 수저와 젓가락을 빼들어 수돗물에 헹구고 지석의 앞에 놓는
다. 지석은 자리에 앉아 그런 수저와 젓가락을 내려다보다가 묵묵
히 먹고, 정란은 그 외에도 물을 따르고 왔다 갔다 하면서 통화.
정란 난 4시 이후가 좋을 꺼 같은데, 내 그러죠. 그 껀은 김
부장이 알아서 해요. 네. (통화 끝나자마자, 바로 버튼 누르고) 여
보세요? 네 아줌마, 제가 전화했었어요. 냉장고에 장볼 것들 써서
붙여 놨어요. 자반은 한 마리씩 포장된 걸로 사세요. 한 손씩 말
고, 한 마리씩 포장된 걸로요. (자리에 앉으며) 그리고 제 트렁크
열어서 정리해주시고요. (아줌마가 트렁크란 말을 못 알아듣는다)
트렁크요. 여행 가방 말에요. 네.
정란이가 통화하는 와중에 지석이가 젓가락을 떨어뜨
린다. 앉은 채로 옆으로 숙여서 집으려는데 허리가 안 접힌다. 의
자를 뒤로 빼고 앞으로 숙여 집는다.
정란 (전화 끊자마자, 쳐다보지는 않고 먹으면서) 벌써 몸
이 그렇게 굳어서 어떡해요? 웬만하면 골프하죠? 허리 잘 돌아가
는데, 우리 갤러리 앞에 있는 프로가 잘 가르쳐요.
지석 취미 없어.
정란 취미로 골프 시작하는 사람 없어요. 다 접대 때문에 하
지.
지석 접댄 당신이 잘 하잖아.
정란 남자가 해야 되는 경우도 있어요. 시간 내서 한번 나와
요.
지석 ... (묵묵히 밥을 먹고)
35. 다른 병원 / MRI실 (낮)
환자복을 입고 누워서 MRI 기계 안으로 들어가는 지
석.
지켜보고 있는 위사들. 상체를 당겨 모니터를 자세히
본다.
모니터를 짚어가며 심각한 얼굴이다.
36. 동 / 진료실 (낮)
의사와 지석의 독대.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의사 딴 병원에서 이미 검사 다 하셨다구요?
지석 ... 네.
의사 ... 췌장암 소견엔 이견이 없습니다.
지석 !!
의사 이 상황에선 열어서 수술하는 것보단, 항암치료를 하
시는 게...
지석 ... 열어 봤자란 말씀이신가요?
의사 ...
지석 몇 개월이에요, 저?
의사 ...
지석 몇 개월 남았어요, 저?
37. 골프장
땅! 강하게 맞아 날아가는 골프공.
톡... 그린에 안착하며 또르르 구른다.
연희 나이스 샷. (박수)
정란 나이스. (박수)
정란 인범 연희(부은행장 내외), 골프를 치는 중이다.
티샷을 한 인범 내외, 정란과 걸어가며 이야기 한다.
인범 아버님은 여기선 골프 재미없어 하시더니, 미국에선
골프만 치신다면서?
정란 네.
인범 이상하다아, 왜 이 맛을 모르실까 했더니, 이제야 맛
들리셨군. 늦되셨어. 죽을 때까지 못 끊는 게 이거지.
정란 (미소)
인범 이젠 사위도 여서 자리 잡았겠다, 아버님 내외도 들어
오실 때 되지 않았어? 일 손 놓긴 아직 이른 나이시잖아. 자네가 그]
만 들락날락하고, 이리 모셔. 아버님 기다리는 사람들 많아. 아직
할 일도 많으시고, (할 얘긴 아니지만) 그땐, 누구라도 그랬을 꺼
야. 사위도 자식인데, 사위 집안 일으키고 싶으셨겠지.
정란 ... (불편하다)
연희 (센스 있게 말 돌리는) 손녀를 끼고 사셔서 그래요. 눈
에 넣어도 안 아픈 소녀를 거따 안겨줬으니, 일 할 생각이 나시겠
어요?
인범 가 혜진이 뺏어 와.
정란 (미소)
인범 웃지만 말구.
정란 ... 네.
다음 홀, 연희가 동을 치기 위해 이리저리 각을 재고,
인범과 정란이가 한 켠에서 보고 있다.
인범 현교순 학교생활 괜찮지?
정란 덕분에요.
인범 거기 학과장이 현교수 자리에 자기 제자 박을라고 꽤
나 로비했었던 거 같은데, 아마 당분간은 못살게 굴 꺼야. 너무 오
래 끈다 싶으면 말해.
정란 (조아리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행장 근데 현교순 늘 볼 때마다 왜 그렇게 쓸쓰해 보이나 몰
라. 쓸쓸해 보이는 게 현교수 컨셉인가?
정란 ...
연희가 공을 홀 안에 정확히 넣고 모두 좋아라 박수친
다.
38. 대학 / 연구실 (낮)
책상 위의 핸드폰이 진동으로 계속 울리고 있다. 핸드
폰의 액정을 비추면 부병찬. 지석, 전화 받을 생각을 안 하고 하얀
재털이 안에서 날개를 차분히 접고 죽어있는 나방을 보고 있다.
지석 ... 뭐하러 힘들게 겨울까지 버텼니? 결국 줄을 꺼.
39. 동 / 조교실 (낮)
덕구는 밤을 새우고 소파에서 곯아떨어져 있는데,
발로 침대를 거칠게 툭툭 찬다. 지석이다.
지석 야!
덕구 (꿈결)
지석 (뻥 차며, 크게) 야!
덕구 (벌떡 일어나 무릎 꿇고 앉아) 예, 메일 보냈는데요. 프
로포잘 수정해서 보냈는데... (잠결에 헛소리)
지석 나와.
지석이가 앞서 나가고, 덕구는 앉은 채로 얼굴을 슥슥
문지른다.
40. 노래방 (낮)
지석 덕구의 목을 한 팔로 감아쥐고 모니터를 보며 노
래한다. 덕구는 중요부분에서 같이 추임새 넣어주며 따라하고, 덕
구를 감싼 팔을 놓고 제 감정에 취해 부르는 지석. 공포와 절망감
을 떨치려는 발악.
지석 (노래 후, 간주 나갈 동안) 여서 댄스-살짝 들어가 주
시고-! 오버하면 재미없다. 살-짝!
지석은 간혹 율동도 넣어가며 익살맞게 부른다.
( 춤추고 발광하는 게 아니라 손은 주머니에 넣고 머리
만 움직이던가, 포인트만 줘서 움직인다)
< 시간 경과>
조용. 테이블엔 빈 술병만 나뒹굴고 아무도 보이지 않
는다.
덕구는 저쪽 소파에서 대짜로 뻗어 코골며 자고,
지석은 이쪽 소파에서 누워있다. 눈은 말똥말똥 뜨고.
덕구한테 말하듯이 혼잣말한다.
지석 우린 고등학교 땐 참 노래두 많이 불렀는데... 밥 먹다
가두 부르구... 공부하다가도 부르구... 그지 않냐?
덕구 ...
지석 ... 고등학교 때 서울루 전학 와서 사내놈들이나 어른
들이나 전부 다 '밥 먹었니? 그랬니? 저랬니? , '니' 자로 말하는 게
낯 간지럽구 어색해서 적응 하느라구 힘들었는데, 유학 갔다 오니
까 전부 '밥 먹었냐? 그랬냐? 저랬냐' , '냐냐' 그리더라. 깜짝 놀랬
다. 나한테 뭐 감정 있는 줄 알고. 덤비는 건 줄 알고 그냥 주먹 나
갈 뻔했어. ... 말을 개같이 해서 그런지, 세상도 점점 개 같아져.
옛날에 그랬니 저랬니 했을 때가 좋았던 거 같애. (기지배처럼 장
난스레) 안 그러니? ... 덕구야, 자니?
코 골며 자는 덕구. 지석은 다시 혼잣말이 된다.
지석 ... 세상이 나한테 너무 막 해. 나한테 너무 막 해.
잠시 후, 갑자기 울컥해 눈물이 차는지 한 팔을 얼굴에 얹어 눈을 가린다.
41. 방송국 / 엘리베이터 앞 복도 (낮)
딩동~ 엘리베이터를 내려 마주치는 사람들과 상냥하
게 인사를 하며 걸어오는 미연. 이전과 달리 깔끔하게 차려입고,
한 손에 음료수 가득, 한손에 피자가 세 판이 들려있다. 기우뚱거
리면서도 잘 들고 가는 미연.
42. 동 / 시트콤 세트장
배우들, 세트장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대본 들고 외우
느라 정신없고, 스텝들은 녹화 준비에 정신없고, 한마디로 시끌벅
적, 정신없는 세트장. (세트장 콘셉트는 옛날 병찬의 피아노 학원.
세 놈이 몰래 여관을 몰래 훔쳐봤던 그 곳이다)
미연 피자 배달 왔습니다!
미연이 들고 있는 먹거리에 "오오오.." 환호성 외치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빼앗아 가는 사람들. 다 뺏기고 달랑 혼자 남겨
지는 미연.
미연 나도 좀 반가워 해주죠?
정피 아, 고작가 참, 멜로 씬 잔뜩 써놓고 저런 거 사옴 어떡
해?
애들 애절한 대사 하다가 트름 끄윽.. 하잖아!
미연 더 재밌고 좋네요, 뭐.
정피 (피자에 달려드는 배우들 머리통 톡톡 때리며) 야! 니들은 먹지 마! 손 떼!
그러나 악착같이 먹는 배우들, 미연에게도 한쪽 건네
준다.
배우1 (젊은) 고작가님, 시트콤 쓰지 마시고, 진짜 멜로드라마 쓰시는 게 어때요?
배우2 (중년, 대본 넘겨보며) 아주, 그냥 대사가 착착 붙는
게, 나 드라마에서도 대사 이렇게 깔끔하게 떨어지는 거 못해봤어.
배우3 (젊은) 대본 너무 좋아요. 코메디로 녹이기엔 너무 아까워요.
스탭 (카메라감독, 피자 한쪽 들고 지나가며 툭) 한번 써봐.
내가 괜찮은 드라마 피디 소개해 주까?
정피 (열받아) 아-증말! 왜들 이려나고오? 누구 굶어 죽는
꼴 보고 싶어?
고작가 바람 넣는 놈들 다 짤라 버릴 꺼야!
미연 (웃으며) 걱정 마세요, 감독님. 저 멜러 안 써요. 못 써
요.
43. 동 / 세트+부조정실
여드름 덕지덕지한 고등학생 세 놈이 피아노 학원 연
습실 창문에 매달려 넋을 놓고 있다. 한 놈은 건성으로 피아노 건
반을 두들기며 엉덩이는 의자에 부치지도 못하고 왔다갔다 하며
" 나도 좀 보자" 징징 댄다. "오....." 격정이 오르는 두 놈. 한 놈이
한 놈 어깨에 손을 짚자, "흐으응..." 괴상한 신음 소리. 스텝들과
정피디, 웃음 참으며 간신히 녹화하고 있는데, 미연, 뒤쪽에서 무
표정하게 보고 있다가 자리를 뜬다. 나가는 미연의 뒤로 "컷!" 소리
와 함께 들려오는 와르르르... 웃음소리.
44. 미연집 앞 / 현관 앞 (낮)
미연, 빌라의 계단을 올라오며,
미연 많이 늦어? 음... 오랜만에 같이 저녁 먹을라구 했더
니. 밥 먹구 일해요, 거르지 말구.
미연, 전화를 끊는데 영화, 미연집의 문을 걸어 잠그
고 돌아서가다 미연을 본다.
미연 형님!
영화 (당황해) 에우. 몰래 왔다갈라구 했는데 들켰네. 알타
리가 맛있게 익었길래, 김치냉장고에 넣어놨으니까 꺼내먹어. (서
둘러) 나 가께, 얼른 들어가 씻구 밥 먹어.
미연 차라두 한잔 하시구 가세요.
영화 아우 됐어됐어. 피곤한테 얼른 들어가 씻구 셔.
미연 (잡으며) 제가 마시고 싶어서 그래요. (끌고 들어가
며) 들어가세요.
영화 (끌려 들어가며) 아우...
45. 미연집 / 거실 (낮)
미연, 쟁반을 놓고 찻잔을 들어서 영화의 앞에 내주는
데,
옆에 놓인 영화의 가방에서 실타래가 삐죽 나온 걸 보
고.
미연 손목 아프시다면서요? 뜨개질 이제 그만 하시지...
영화 (실타래를 꺼내서 다정하게 감으며) 그래도 이건 절대
로 못 멈춰. 태훈이랑 자기가 어떻게 연결됐는데.
미연 (옛날 생각에) 하긴. 그죠.
영화 우리 예종이 대학 들어가서 과외도 끝나고, 더 이상 자
네 볼일도 없는데, 아-고때 진짜 안달나드라. 어떻게든 우리 태훈
이랑 연결시켜주고 싶은데, 그 놈은 입사초기라고 맨날 밤새고 들
어오지, 내 주변머리론 내 동생하고 선 보란 말은 죽어두 못하겠
지. (히히) 근데 누가 알았겠어? 내가 떠 준 똑같은 옷 입고 밖에
서 만났을 줄.
미연 그때 되게 난감했었어요.
어떤 아저씬 우리가 커플인 줄 알고 자리 붙여 줄라구
그러구.
영화 엄마 아부지 일찍 돌아가시고 내 손에 커서 그런지, 우
리 태훈이 정 주는 걸 겁내는 놈이야. 남들은 걔보고 차갑다지만,
난 걔 그러는 거... 눈물 나게 안쓰러웠었어. 어미 잃은 새끼, 맘 다쳐
서 그러는 거 왜 몰라. (살짝 눈물 찍고).
미연 (마음 짠하고)
영화 고마워.
미연 (시선 내리고) 뭘요...
영화 그냥 하는 말 아냐. 정말 고마워. 한번 정 부치면 아주
끝자을 봐야 되는 놈이라, 쉽게 정 안 주는 놈인데... 자네한테 정
부치고 사는 거 보면, 이제야 사람 냄새 풍기면서 사는 거 같고...
고마워.
미연 저도 그거에 반해서 결혼했잖아요. 한번 정주면... 안
거둘 사람.
영화 절대 안 거둬. 못 거둬. 자네도 그런 거 같고. 잘 만났
지.
미연 ... (짠한 마음 거두고) 드세요.
46. 술집 앞 (밤)
술집 앞에서 지석과 주인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주인이 지석을 밖으로 끌고 나온 상황, 지석은 많이 취
했다.
지석 아니, 노가리 배 갈라서 구워달라는 게 죄에요? 에? 죄
에요! 아저씨 노가리 배 안 갈라봤어요? 축축한게 얼마나 기분 드러
운 줄 알아요?
덕구 (지석을 잡고) 왜 그래? (무조건) 죄송합니다. 죄송합
니다.
지석 내가 죽을 때까지 노가리 배 가르다가 기분 드러워야
겠냐고요오? 에?
주인 에잇! (그냥 들어가버리는데)
지석 (쫒아가며) 이봐요! 이봐! 야!
덕구 (잡아챈다) 왜 그래?
지석 (뿌리치며) 아 놔봐!
덕구 (지석의 힘에 나동그라졌다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꽉
안는다) 아 왜 그래애?
지석 아 놔봐아!! 가방 안 갖고 나왔어!
그와 동시에 지석의 얼굴로 날아드는 가방, 주인이 안에서 던져버렸다.
지석 저 씨이!
47. 지석집 / 엘리베이터 안 (밤)
지석, 만땅 취해 벽에 기대어 올라가는 숫자만 보고 있
다. 똑바로 서려고 하나 비틀거린다. 덕구, 얼른 슬쩍 잡는다. 덕
구, 가방을 세 개 (노트북, 자기꺼, 지석꺼)나 엇갈려 매고 숨찬 듯
땀을 닦는다.
48. 지석 집 / 거실 (밤)
쿵!하며 소파 앞에 주저앉는 지석. 소파에 등을 기댄
다.
지석을 끌고 온 덕구가 힘들어 헥헥 댄다.
덕구 실연당했냐? 혼자 술 푸게? (엇갈려 맨 가방을 힘들게
풀어내며) 뭐야? 왜 그래?
지석 3개월이라는데... 그 말 듣고... 할 게 아무 것도 없더
라. 술 마시는 거밖엔 할 게 없드라. 취미가 있어봤냐, 종교가 있어
봤냐. 남들은 이럴 때 뭐할까...
덕구 알아듣게 말해 임마.
지석 덕구야. 나 참 착하게 살아오지 않았니?
덕구 내가 더 착하게 살아왔어.
지석 (덕구의 머리를 팍 때리고) 그냥 들어 씨이!
덕구 (황당)
지석 지랄 같은 우리 아버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꾹-참구
다 하고, 하지 말라는 거(미연을 버린 생각에 목메는), 하지 말라
는 것두 꾹- 참구 안하구... 근데, 더 이상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
니? 억울하잖아. 평생 그러긴... ('남은 3개월까지 그러긴')
안 그러니 덕구야? 이젠 내 맘대로 살아야 되는 건 아니니?
덕구 ...
지석 난 이제... 그래도 된다고 봐... (일어나 베란다 쪽으로 간다)
덕구 어디 가게?
지석 오줌 누러 간다 임마.
덕구 (화장실) 이쪽이야 임마.
지석 (베란다 문 열고) 말했잖아. 이젠 내 맘대로 살 거야.
지석, 베란다로 나가 밖을 보며 아래 춤을 잡는다.
그제야 기겁하는 덕구, 달려 나가 말린다.
덕구 얌마! 뭐하는 짓이야!
지석 이제 내 맘대로 살 거야. 내 맘대로.
덕구 인터넷에 대학교수가 베란다에서 오줌 쌌다고 뜨면...
끝이야 임마.
그때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
남자 (E) 좀 조용히 좀 살자 새끼들아!
49. 동 / 현관문 앞 복도 (밤)
덕구와 아래층 남자가 마주 서 있다.
남자 (성질 난) 아니 한 두 번도 아니고 말야. 몇 시냐고 지
금이?
덕구 (안절부절) 죄송합니다. 좀 취해서...
50. 동 / 거실 (밤)
남자 (E) 애가 그런다면 이해해. 이건 어른이 진짜...
지석, 머리를 잡고 소파에 앉아 있다가 도저히 못 참겠는지 나간다.
51. 동 / 현관문 앞 복도 (밤)
덕구와 남자 있는데,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며 지석이 나
와
지석 (들이대는) 내가 집에서 농구를 하냐 마라톤을 하냐?
( 거의 동시에 덕구가 지석을 말리며 집안으로 들여보내려고 하고)
내가 내 집에서 걸어 다니지도 못해? 툭하면 올라오구!
덕구 왜 그래애? 죄송합니다...
지석 집구석에서 할 짓이 없으니까 윗집 소리에나 신경 쓰
지!
남자 (달겨들듯) 저 씨이!
덕구 (기겁해 말리며) 죄송해요. 취해서 그래요. (우격다짐으로 지석을 밀어 넣고)
남자 아우 진짜. (내려가며 낮게) 저런 놈의 새끼가 무슨 교수라고.
그 얘기가 지석의 성질에 불을 당긴다.
덕구를 확 밀치더니, 그 남자의 목에 올라타는 듯 풀쩍 뛰어내린다.
덕구 (기겁해서 뛰어 내려가며) 얌마!!
지석 교수가 아니고! 전임강사다 새꺄!
밖에서 보이는 복도 창으로, 지석과 남자가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 보이고, 말리는 덕구의 모습도 보인다.
덕구 (E) 그만 해! 얌마! 현지석!
52. 대학병원 / 치료실 (밤)
간호사가 지석의 상처 난 손을 마무리 처치 작업 중이
고,
덕구와 병찬이가 옆에 서 있는데,
아래층 남자가 목에 깁스 같은 보호대를 하고 격하게
퍼붓고,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말리며 끌고 나가려 한다.
남자 넌 합의 같은 거 없어. 합의 다 뭐다 얘기 꺼낼 생각하
지도 마!
여자 그만 해 여보. 나가. 상대할 꺼 없어. (지석을 흘겨보
며, 남편을 끌고 나가는데)
남자 어디 콩밥 배터지게 먹어봐 새꺄.
지석 먹여 새꺄! 어차피 먹어봤자 3개월이다 임마!
남자 3개월 좋아하네. 내가 1년은 멕인다 임마!
지석 1년 먹여주라 제발! 10년두 좋다! 30년두 좋아! 멱여줘
제발!
병찬 (남자를 잡으며) 잠깐 얘기 좀...
남자 (손길 치우며) 아 됐어. 얘기 할 것도 없어. 경찰에 연
락 했으니까 사과할 필요도 없고! 경찰한테 말해!
병찬, 남자와 여자를 밖으로 몰며 나간다.
덕구, 그제야 한숨을 쉰다. 잠잠해진 후...
지석 (다시금 눈빛이 떨린다)
덕구 ... 뭔 일 있냐?
지석 ... 높은 곳에 서면 꼭... 오줌을 갈겨주고 싶었어. 에
이, 드러운 세상... 먹어라...
덕구 ... 치. 조마조마해서 뭐 나오기나 하냐?
지석 ... (웃긴 놈)
53. 지석집 / 주차장 (밤)
정란이가 차(지석의 차, 차가 한 대밖에 없다) 트렁크
에서 힘들게 골프채 가방을 내린다. 그 외 짐도 많다. 전화를 한
다. 신호만 간다.
54. 지석집 / 거실 (밤)
# 정란, 낑낑대며 골프 가방과 여러 짐을 들고 들어와
서 보면, 난장판인 집안. 베란다 창문도 열려있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는 정란.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가서 문을 닫는
다. 그 소리에 손을 얹은 채로, 후...
핸드폰을 꺼내 1번을 꾹 누른다. 핸드폰 진동 소리가
어디선가 들린다.
소파에 혼자서 진동으로 울리고 있는 지석의 핸드폰.
정란, 귀에서 핸드폰을 내리고 소파에 기운 빠지는 듯
앉는다.
벽에 걸린 두 사람의 결혼사진. 그 사진 앞에, 넓
은 거실에, 혼자 앉아있는 정란...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꾹 참는
얼굴.
55. 대학 병원 / 앞 정원 (푸른 새벽)
덕구는 옆 벤치에서 웅크리고 누워서 자고 있고
한쪽 벤치에 지석과 병찬이 앉아있다.
병찬 ... 아래층 남자, 치료비만 물어주기로 하고 끝냈어.
지석 나 죽는다고 했냐?
병찬 ...
지석 ... 빙신.
병찬 ... 니 말대로 나 돌팔이일 수도 있어. 제발 정밀검사하
지.
지석 너 돌팔이 아냐. 다른 병원에서 엠알아이 다 했어. 췌장암 맞아.
병찬 ...
지석 ... 나, 3개월 남았다더라.
병찬 !!
지석 (풍경을 본다) 야... 가을 아침이 이렇게 멋졌었니? ...
아씨... 드럽게 멋지네.
지석이 울컥해진다. 쓸쓸히 앉아있는 지석과 병찬의
모습에서.
(F.O)
56. 거리 (이른 아침)
인적 없는 이른 아침의 거리를 덕구, 앞서서 걷고, 지
석이 뒤따라 걷는다.
지석, 걷다가 하늘을 본다.
덕구, 움츠리며 걷다가 뒤돌아본다.
덕구 춥다아. 얼른 가자.
지석, 다시 걷는다. 덕구, 걷다가 멈춰서 김이 모락모
락 나는 포장마차를 본다.
땡기는 표정이다. 그때 지석이가 덕구를 앞질러 간다.
덕구 우동 먹고 가자.
지석 (그냥 간다)
덕구 우동 먹고 가자아!
지석, 분노와 아쉬움에 떨리는 눈빛, 빠르게 걷더니 달리기 시작한다.
덕구, 그걸 보자 울컥한다. 에이씨! 또냐? 힘들어죽겠는데.
덕구 (쫓아 달리며) 또 어디가~? 나지석~! (힘들고 짜증나
눈물난다) 너 잡히면 죽어!!
지석, 고개를 젖히고 바람을 맞으며 달린다. 힘껏 달린
다.
결국엔 소리를 내지른다.
지석 아아악~~ 아아악~~~ (왜 내가 죽어야 돼? 왜? 왜?)
그렇게 달린다. 달리다가 헉! 주저앉는다. 옆구리가 땡
긴다. 눈이 벌겋다.
고통이 밀려온다. 뒤늦게 덕구가 허둥지둥 쫒아온다.
덕구 (숨 차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너... 너... 왜... 왜 그래... (헥헥)
지석 ... 미연이.
덕구 ...!!
지석 ...... 미연이 보구 싶어.
덕구 ...!!
황량한 두 사람의 부감 샷.
57. 덕구 원룸 (새벽)
어둡고 지저분한 초라한 방.
지석과 덕구로 넘어온다. 격정해서 잠잠해진 상황.
덕구 미연일 어디서 어떻게 찾어? 연락철 아냐, 집을 아냐... 졸업도 못하고 그냥 사라졌는데...
지석 ... !! (첨 듣는 얘기다)
덕구 ... 졸업 못했어. 빠듯하게 벌어서 간신히 한 학기씩 마
치는 애였는데... 그때... 너랑... 그렇게 되구...
지석 (마음이 아프다)
덕구 (지석을 본다) 다 잊은 즐 알았는데...
지석 ...
덕구 갑자기.. 왜 그러는데?
지석,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그때, 휴대용 버너 위의 주전자에서 삐이!! 소리가 난
다.
덕구, 허둥지둥 주전자를 내리다가 손을 덴다. 아뜨!
아뜨아뜨!
기겁하며 수돗물을 트는데, 물이 안 나온다.
수도꼭지를 올렸다 내렸다하다 화장실로 뛴다.
지석 (혼잣말) 덕구야... 나 죽는대... 죽기 전에 미연이 한번
은 만나야 되지 않겠니? (헛웃음이 나온다) 나 미쳤나부다... 죽는
다는데... 미연이 만날 생각하니까... 설렌다...
58. 피비센타 (낮)
미연, 손 갓을 만들어 유리창에 달라붙어 피비센타 안
을 훑어본다.
김태훈이라는 명패가 있는 책상에 시선 꽂힌다. 그런
데 빈 책상, 사람이 없다.
59. 동/ VIP 룸 (낮)
세련되고 으리으리한 실내.
태훈, 중년 부인 고객과 쌍방향 모니터를 보며 앉아있
다.
태훈 먼저 거래하시던 곳에선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중년 우리들이 하는 말이 있어. '자식은 못 믿어두 피비는
믿는다.' 근데 그쪽은 이상하게 신뢰가 안 가더라고. 김팀장이 이
동네 피비 중에 젤 믿을 만한 사람이라구 들었어. 고객들한테 쓸데
없는 립서비스도 안하고. (대뜸) 결혼은 했나?
태훈 네.
중년 (쩝) 아쉽네. 중매하고 옷 좀 얻어 입을랬더니.
태훈 (미소)
60. 동 /휴게실 (낮)
미연, 태훈 앞에 한 눈에도 손이 많이 들어간 찬합을
꺼내 펼친다.
미연 (미소) 대본 넘기고 녹화한 다음날은 이상하게 정신이
더 또록또록해.
태훈 ... (어쩐지 별로 감탄하지 않는)
미연 먹어. 많으니까 남는 건 직원들도 주고.
태훈 (미연 본다. 입술이 부르터 있다.)
미연 ... 왜요?
태훈 안힘들어?
미연 (설레설레) 아니. 이까짓 거 하는 게 뭐..
태훈 내 색시 일하다 죽을까봐 걱정돼..
미연 미안해.. 일 한답시고 신랑 밥도 제 때 제 때 못 챙겨줘서...
태훈 (간단한 응급처방 약이 든 비품 통에서 연고를 꺼내
고, 미연의 입가에 발라준다)
미연 ... (상처가 난 줄도 몰랐다)
태훈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아프다면 아프다고 말하고...
미연 ...
태훈 안아달라면 안아주고, 울고 싶으면 눈물도 받아줄게.
나 그럴려고 당신하고 결혼한거니까...
미연 (미안하다 못해 죄를 지은 것 같은) ...
61. 개인병원 /상담실
조심스런 얼굴로 앉아있는 미연.
미연 돌팔이.
의사 (차트 보다가 뜨악한 얼굴로 미연 보는)
미연 일부러라도 웃고, 떠들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
면... 그러면 된다면서요.
의사 ...
미연 그러면 되기는커녕... 다 들켜버렸잖아요. ..쪽팔리게..
의사 ...
미연 아직 멀었는데... 그 놈 잊을려면 아직 멀었는데.. 다 들켜버려서 이제 못하잖아요.
의사 (차트 보며) 고미연씨, 그래도 우울증 수치가 많이 낮
아졌어요. 일부러라도 웃으면서 사세요. 웃음이란 게 몸에
퍼지는 속도와 그 중독성이 강해서...
미연 (O.L. 문 닫는 소리, 쾅. 나가버린다)
' 뻘쭘' 해지는 의사.
62. 동 / 건물 앞 (밤)
화난 듯 걸어와 차 안에 타며 문을 쾅! 닫는 미연.
안전벨트 매고, 시동 걸고, 기어 넣고, 도로 빼고,
운전대 붙들고 이마를 기댄다.
불안감에 두근대지며 숨을 몰아쉬고는 일어난다.
미연 ... 나쁜 놈!
미연, 주자장을 빠져나가 도로로 나간다.
63. 도로 (밤)
지석의 차가 길게 늘어선 차들 뒤에 와서 선다. 음주검
문 중이다.
지석, 라디오를 켠다. 미연과 같이 들었던 음악이 나오
자 약간 출렁이는 눈빛.
가만히 음악을 듣는다. 금방 쓸쓸해지는 지석의 얼굴
이 숙여지며 눈이 젖는다.
지석, 차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다.
그런 지석의 차 옆으로 미연의 차가 천천히 프레임 인
되며 겹쳐진다.
지석의 앞차들이 천천히 빠지고, 뒤에서 빠앙! 간격 좁
히라는 클락션이 울리자 그제야 지석은 핸들을 잡고 앞으로 전진
하려는데, 문득 옆 차로 시선이 간다.
미연을 본다.
어? 설마.. 멍...
멍하니 쳐다보는 와중에 지석의 차는 계속 천천히 앞
으로 가고.
지석은 고개가 완전히 돌려질 때까지 보다가 확신!
맞다 미연이다!
세상에!
미연의 얼굴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 순간 번
쩍 정신이 들면서 끼익! 급정거를 하는 지석. 검문선 앞이다.
경찰이 지석의 차에게 더 다가오라는 신호를 보내는
데, 지석이 갑자기 차에서 내려 뒤로 간다. 미연의 차로 가기 위
해.
그러자, 주변에 있던 경찰들, 우르르 지석을 잡기 위해
뛴다. 잡어!
지석, 미연의 차에 거의 닿을 쯤 경찰들에 의해 잡힌
다.
지석, 거칠게 저항한다.
지석 놔아! 미연아! 미연아!
지석의 힘이 만만치 않다. 경찰 서너 명이 못 당할 지
경이다.
경찰들은 발버둥치는 지석을 끌어 반대편 차선까지 넘
어간다.
미연은 소란스런 분위기에 밖을 보는데, 경찰들과 옆
차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음주 운전자가 도망가다가 잡혔
나보다 생각한다.
미연,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에, 앞차와의 간격을 좁
힌다.
그렇게 지석은 경찰들에게 잡혀 꼼짝 못하고, 미연의
차는 서서히 빠진다.
지석 미연아! 고미연! 고미연!
미연, 검문선까지 다 와서 차 문을 내리려 버튼에 손
이 올라가는데, 경찰은 그냥 가라는 식으로 빠르게 봉을 제친다.
한 남자의 갑작스런 돌출 행동에 상황을 정리하는 분
위기다.
결국 미연의 차가 빠져 나가 달리기 시작한다.
지석, 눈에 불이 난다. 경찰들을 뿌리치고 차를 쫓아
달린다. 경찰들 따라 달린다. 지석, 있는 힘껏 달린다. 미연아!! 소
리치며,
미연, 룸미러로 누군가 달리는 걸 본다. 잘 안 보인다.
그냥 한바탕 소란으로 보인다.
미연과 지석의 사이는 점점 벌어진다. 결국 차는 완전
히 멀어진다.
지석, 그제야 달리는 걸 포기한다. 완전히 사라진 차
쪽을 보며 멍하니 선다.
경찰들, 헐레벌떡 뛰어와 지석을 잡는다. 지석, 허망하
게 경찰들에게 붙들려 멀어지는 차를 본다. 들을 리 만무하지만,
너무 억울해서, 미연아---! 소리치는 지석의 얼굴에서.
(F.O)
64. 지석집 / 침실 + 거실 (아침)
' 촤악-' 젖혀지는 커튼. 방안으로 하얀 햇살이 눈부시
게 쏟아진다.
커튼을 젖힌 정란, 눈이 부신 듯 가늘게 실눈을 뜨고
는,
침대 쪽 보면, 어젯밤에 안 들어온 듯 비어있는 지석
자리.
후... 답답한 듯 낮은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나가는데
현관문 따는 소리 들린다.
정란, 지석인가 싶은데, 밑반찬을 바리바리 싸 든 지석
모가 들어온다.
정란 (당황) ..어머니..!
지석모 아이고, 내가 잠을 깨웠나보네, 우리 며느리.. 지석
인?
65. 대학 / 연구실 (아침)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의 핸드폰만 보고 있는 지석.
가슬가슬한 턱수염, 반쯤 폴려진 넥타이, 밤 세워 고
민 한 듯 초췌한 모습.
그때 핸드폰이 울린다. 기다렸다는 듯 다급하게 전화
받는 지석.
지석 여보세요? (초조하게) 어, 알아봤어?
남자E 차적 조회는 범죄자 아니면 안 되는 거 알지? 이거 들
통 나면 나 정말 옷 벗어야 돼. 형.
지석 알았어. 새꺄. 불러 봐. (펜 들어 메모하는) 응. 010.9724.. 어. 고마워. 걱정 마.
종이 적힌 연락처를 보는 지석.
' 고미연 010-9724...'
지석의 눈빛이 떨린다.
66. 미연집 앞 / 주차장 (밤)
서둘러 나오는 미연과 태훈. 태훈 손에 커피 잔 들려
있다.
미연, 급하게 차에 타 조수석에 노트북을 놓고 안전벨
트를 메는데,
태훈 (똑똑 노크한다)
미연 (입모양으로 왜?하면 창문을 내리면)
태훈 (커피잔 건네주며) 신호등 걸렸을 때만 마셔?
미연 응. (한 모금 마시는데)
태훈 (미연의 볼에 쪽, 뽀뽀를 하고 제 차로 가고)
미연 (커피 쏟을 뻔 하면서, 웃는)
자기 차에 오른 태훈, 미연에게 먼저 나가라는 손짓을
한다.
미연, 손을 흔들고 먼저 차를 빼는데 핸드폰이 울린
다.
미연 (핸즈프리로 밝게) 여보세요?
지석 ...
미연 ... 여보세요?
지석 (F) ........ 여보세요?
미연, 순간 온 몸이 굳는다. 익숙한 음성. 절대 잊을
수 없는 음성.
빵-! 크락션을 울리며 미연의 차를 추월하는 태훈의
차.
태훈 손을 흔들어줬다.
그대로 굳어 있는 미연의 얼굴.
(F.O)
67. 어느 공간 (낮-해질녘)
# 국회의사당 뒤쪽 갈대밭 옆의 고수부지 같은 곳. 지석
의 차가 스르륵 와서 선다.
지석, 룸미러를 내려 거울 속의 자신을 본다. 옷깃과
머리칼을 매만진다.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며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말한다.
지석 안녕? 오랜만이다.
이건 아니다 싶다. 룸미러를 보며 더 발랄하게
지석 잘 지냈니? 여전히 이쁘다. 난 쫌 늙었지?
해맑게 웃던 얼굴이 점점 굳는다. 고개를 떨구고 다시 연습하는데 마치 속마음을 내비치는 혼잣말 같다.
지석 미연아! 나... 벌 받았나 부다... 너 한테 못되게 해서 나
벌 받았나 부다... (목이 맨다) 근데.. 나도 석달 밖에 못 산대... 나
제대로 벌 받고 있는 거지? ...(헛웃음) ...죽는다는데... 너 만날 생각하니까... 너 처음 만날 때처럼 설렌다... 나 미쳤나부다...
# 밝았던 해는 점점 기울고, 결국 해는 떨어진다.
지석, 차 밖으로 나와 미연을 기다리고 있다.
그때, 하얀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진다.
몇 개가 날리는데, 개 중 한 송이가 눈에 띈다.
지석, 그 한 송이로 손을 뻗는다. 눈은 손 위에 앉을
듯 하다가 바람을 타고 다시 올라가 지석의 이마에 앉아 사르륵 녹
는다. 지석,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잠깐 까먹는
다. 그때! 저 멀리서 어떤 여자가 뚜벅뚜벅 걸어온다. 미연이다.
지석, 눈빛이 떨린다. 9년을 그리워했던 여자.
미연, 지석을 보고 멈춰 섰다가... 이내 다부진 표정으
로 걸어온다.
거리는 좁혀지고, 마주 선 두 사람.
한참 만에 지석이 먼저 입을 뗀다. 연습했던 건 잊고
본능적으로 나오는 말.
지석 ...잘 지냈니?
미연 ...잘 지냈을 꺼 같애요?
지석 ...
미연 ...그쪽은요?
지석은 미연의 반문으로 인해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
이었는지 느낀다.
다시 한참 만에 지석이가 입을 뗀다. 미소는 하나도 없
고 진지한 얼굴로.
지석 ... 우리... 3개월만 살자.
미연 ... !!
지석 ...나랑 3개월만 살아줘라, 응?
미연 ... 미친.. 놈!!
지석 ...!!
미연 ...!!
미연이 뒤돌아 뚜벅뚜벅 간다.
맥 놓고 멀어지는 미연을 보는 지석.
그렇게 멀어지는 미연을 보다가 지석이가 울부짖듯 소
리친다.
지석 3개월만 살자--! 미연아--! 미연아--!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미연 (NA) 미친놈, 이라고 말한 순간, 9년 동안 참아왔던 재
채기를 한 것처럼 시원했다. 그러나 10초 뒤... 조바심이 나기 시작
했다. 내가 지금 똑바로 걷고 있는 건지, 행여 내 뒷모습에 내 마음
이 묻어나는 건 아닌지... 똑바로 걷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했다.
-3 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