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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6;15-31. 어처구니 앞에서도 already와 not yet!!! 2026. 7. 5.
여러분, 사람들의 출생도 중요하고, 삶의 과정도 중요하고 마지막의 삶, 또한 중요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삶의 부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출생과 함께 없음과 가장자리에서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릴리와 나사렛 같은 지역은 힘든 삶에서 출발한 사람들이며 광야와 보호자가 없이 삶의 가장자리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없음과 가장자리에서 출발한 사람들도 주의 은혜와 은총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주목을 받고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왕궁에서 자라고, 배경이 좋고 많은 유산을 받아서 시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시작을 한 사람들이 비참하게 가장자리로 몰리고, 없음으로 곤두박질하고, 모서리에서 신음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있음으로 시작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출신과 환경은 좋은데 가장자리와 모서리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또한 있는데, 삼손처럼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렇게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님과 사람 앞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 이런 환경으로 내 몰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출발이 좋았지만 삶의 과정에 가장자리를 경험하게 되는 2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후자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어이가 없고 어처구니가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처구니가 없다, 어이가 없다. 무슨 말씀입니까? 생각지 않은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경험을 했을 때, 허탈하거나 당혹감을 느낄 때, 어처구니가 없다고 합니다. 어처구니없다는 사전적 의미는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처구니가 무엇입니까? 어처구니는 놀랄 만한 큰 기계를 움직이는 중요부분이 어처구니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것이 없으면 아니되는 긴요한 것이 어처구니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큰 물건이나 바윗돌을 부수는 농기계의 쇠로 된 머리 부분입니다. 궁궐이나 성문의 기와지붕 위에 있는 사람이나 갖가지 기묘한 동물 모양의 토우(土偶)를 가리킵니다. 토우인 어처구니는 잡상이라고 불리는 작은 조형물로서, 히메지 성의 용마루 끝과 처마 끝에 마무리하는 십장생의 동물형상이고 또 맷돌을 돌릴 때 사용하는 나무막대, 맷돌의 손잡이입니다. 그러니까? 하찮은 것 같은데 이것이 없으면 의미가 없고, 보호가 되지 않고, 이것이 없으면 열매를 위한 과정과 열매가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냥 두면 하찮은 것인데 다른 것과 함께 하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처구니입니다. 여러분, 맷돌을 돌리는데 가장 필요한 부분이 손잡이 아닙니까? 그런데 손잡이가 없으면,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돌리는데 허탈하고 당혹스럽습니다. 여러분, 어처구니가 있어도 맷돌 돌리기가 힘이 드는데, 어처구니가 없다면 맷돌을 돌릴 수도 없고 그 맷돌을 사용하지도 못합니다. 아무런 결과를 가져 올 수가 없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엄청나거나 너무도 뜻밖인 일이어서 기가 막혀 어쩔 수 없을 때에 어처구니가 없고 어이가 없다고 합니다. 요즘 세상의 곳곳에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일어납니다. 현재만 그렇습니까?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과 일은 역사와 함께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요즈음은 평안이 없고 살롬이 되지 않습니다. 2017년 가을 주일인가요?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어떤 사람이 기관소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미국시간으로 주일 오후 10시, 밤에 59명이 사망을 하고 527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일을 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수 천만 달라 자산가입니다. 은퇴한 회계사입니다. 조종사 면허를 가지고 있고, 임대 빌딩을 3채나 가지고 있고, 자신의 항공기를 2대나 있는 사람입니다. 전과도 없고, 나쁜 일은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혼자서 이 사건을 일으키고 그 자리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해됩니까? 정말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나 사건을 일으킨 본인이나 참으로 더욱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힙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인이지만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관계나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 보시면 어떨까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요. 어처구니가 없는 맷돌을 돌려야 하시는 주님의 심정이 어떨까요? 청교도 신앙의 모토인 미국에서의 사건일 때 주님이 얼마나 애통해 하실까요? 여러분, 어떻게 해야 주님의 뜻대로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이미와 아직 입니다. 과거의 경험과 되어 질 미래를 뜻하는 이미와 아직입니다. 여러분,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은 맷돌을 돌렸습니다. 이미 결정되어진 상황일 찌라도 아직 이라는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며 주님의 또 다른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음성과 은혜에 심령과 귀를 기울이고 사모하시기를,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도 늘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의 소견대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already but not yet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에게 이미와 아직의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 주님의 뜻이 있고, 여기에 우리의 삶의 행동반경이 있고, 여기에 오늘 가장자리에서 벗어 날 길이 있고, 여기에 내일과 미래의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과 끝이 아닙니다. 오메가가 아닙니다. 오늘의 문제를 탈출하고 내일을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미와 아직 사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미와 아직의 뜻이 무엇입니까?
1-1. 이미와 아직은 예언과 예언의 성취와 재림인데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빌3;12-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노라. 이 말씀은 이미와 아직을 잘 설명해 줍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 잡은 줄로 여기면 아니 됩니다. 이미를 잊어버려야합니다. 잊고 아직을 향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와 아직이라는 부분에 대한 통계가 있는데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70%는 과거를 회상하고, 27%는 현재와 관련지어서 살고, 단지 3%만 미래를 위하여 투자 하며 산다고 합니다. 과거인 이미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미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현재를 살려고 합니다. 아직은 3%밖에 안 됩니다. 아직에 큰 기대를 걸고, 아직에 관심을 가지고, 아직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데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을 합니까?
갈4;4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때가 차매의 플레로마는 플레로오에서 유래 했는데 충만히 차서. 가득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때가 넘쳐흘러서, 때가 차서 예수님께서 우리 안으로 오셨습니다. 2000여 년 전의 이미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세상 끝 날과 신천신지가 열리는 아직 입니다. 사실 현재는 그 것이 무엇이든지 때가 차고 가득해서 흘러넘칩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는데 이것도 주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였고,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오심이 성취되었습니다. 성경의 단어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오심에 대하여 의미심장하고 함축적인 단어들로 그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넓이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신약시대에 이루어졌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놀라운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성전에 계시고, 성소에 계시고, 그리고 지성소에 머물러 계신 하나님으로 의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삶의 한복판과 내 육신 가운데 오셨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우리가운데 거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변화를 받아 연합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먼지 같고 한줌의 흙과 같은 존재인 나에게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리는 신호이었습니다. 지성소로 임하신 것이 아니라, 낮고 천한 모습으로, 연약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임재 하셨습니다. 사51;3,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예수님의 오심으로 새 에덴과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이 새로운 이미로 시작이 되었으며, 그래서 이미는 열렸습니다. 이미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에덴과 여호와의 동산이 되어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미 이 땅에서부터 영생이 시작되었지만 궁극적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입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기다리며 기대하며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부끄럼과 부족함 없이 주님을 기다리며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너는 정말, 나를 기다렸구나. 말씀하시도록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다시 오심을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라나타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이미와 아직은 신앙의 자세가 부여됩니다. 승리와 염려의 문제도 이미와 아직이고, 이미와 아직 사이에 존재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사역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승리를 주셨으며 이미 다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부단히 세상과 싸우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부단히 싸워야하는 신앙 때문에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롬8;31-37,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러분, 세상 근심 걱정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넉넉히 이기도록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넉넉히,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탄이 이것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미 이기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벧 후1;10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불러 주셨고, 택하셨고 굳게 하셨으며 실족하지 않게 길을 밝히셨습니다. 눅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마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여러분, 이미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와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탄, 마귀 귀신의 권세를 당당하게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 용어 중에 이미-아직 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많고 신앙인답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완전한 자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빌3;12.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니고,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이미 초대를 받았고 참여했으나 아직 완성에 다다르지 않은 성화되어 가는 중입니다. 시작은 되었으나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달려 갈 길을 달려야만 하는 신앙인입니다. 세례 요한이 마3;2에 말씀하고 예수님이 마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복음을 선포를 하고 선언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첫 멧세지는 마5장의 팔복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포하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선언과 선포를 할까요? 이런 선언과 선포가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와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 아직 완성하지 못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미 와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상들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계속해서 승리와 기쁨과 소망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삼손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이 믿음의 반열에 세운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미 맷돌을 돌리는 삼손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서 이 어처구니를 깨닫는 삼손입니다. 삼손은 역사 속에 분명히 존재했던 인물이고, 사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삼손을 성경이 어떻게 취급하고 있느냐? 삿15;20, 그가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더라. 놀랍게도 이 사실을 반복하여, 삿16;31에 다시 한 번 더 상기시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손을 히11;32에 아브라함, 이삭과 같이 믿음의 반열에 우뚝 세워놓았습니다. 삼손에게 믿음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삼손이 갇혀있는 감옥은 무엇입니까. 21절, 맷돌을 돌립니다. 더 정확하게 블레셋 적들이 삼손으로 하여금 맷돌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미 마음으로 품었던 그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끝난 인생의 삼손이 아직 남아있는 소망을 붙잡았습니다. 삼손은 블레셋의 모든 영토를 폐허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미인계로 삼손을 사로잡았습니다. 사형 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붙잡자마자 두 눈을 뽑아버렸을까요? 그만큼 증오심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21절에 두 눈 뽑힌 삼손, 놋줄에 묵힌 채 깊은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언제, 어떻게 사형이 집행될지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옥문이 철커덕 열렸습니다. 어디론가 끌려 나간 삼손은 두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엄청난 군중들의 야유소리와 함성 때문에 상황을 판단했습니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를 공개처형하려는 구나. 이제 끝났다! 백이면 백 다, 이렇게 직감하면서 스스로 포기를 합니다. 그 상황이 삼손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상황에서 삼손은 어떻게 합니까? 세 가지의 액션을 취합니다. 첫째, 26절 그는 자기 곁의 소년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나로 이 신전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해 다오. 둘째, 28절 그 상황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여호와여, 이번 한번만 나를 생각하사,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셋째, 29절 버틴 기둥을 찾은 후, 그것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온 힘을 다합니다. 이 세 가지의 액션은 분명히 포기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삼손의 행동, 삼손의 기도는 한편 강도의 그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무엇인가 아직 소망하면서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강한 의지입니다. 여러분, 객관적으로 삼손은 이미 끝난 인생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끝이 났습니다. 20절에 하나님도 삼손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삼손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을 외칩니다. 내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포기할 수 없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이미 끝난 인생이 아직을 외칩니다. 삼손은 가장 가까이 있는 이미를 보지 않고 먼 아직을 외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좌표는 어디입니까? 마25;13 이하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본문에 하나, 둘, 그리고 다섯 달란트 받은 세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 셋, 다섯이 아니고, 하나, 넷, 다섯 달란트가 아닐까요? 바로 이 부분이 묘미이고, 이 부분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셋 중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두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두 달란트인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한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사이에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그 사이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한 달란트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왜냐구요? 셋 혹은 넷이 아니라, 두 달란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섯보다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매사에 불평, 불만, 부정적이며 악하고 게으른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원망을 합니다. 인생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정 반대입니다. 부지런하고,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하며 포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누구를 향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긍정적입니다. 바로 이 두 사이에 내가 끼여 있는데, 한 달란트 쪽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때문에 불평과 불만과 게으름과 부정을 배우고, 욕부터 배우고 못된 일에 더 흥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악이 나를 지배하도록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 달란트에 가까운 두 달란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황에서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을 보십시오. 마25;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그렇습니다. 한 달란트의 영향권을 벗어나, 저 멀리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바라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같이 행동하고, 닮으려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부지런히 최선을 다하여 땀을 흘립니다. 원망,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넷이 아닌, 두 달란트에 불과하지만, 거리가 멀고, 될 것 같지 않지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의 일을 하고 그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이것이 달란트비유의 핵심이고 천국의 비밀과 사이의 비밀이며 좌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삼손처럼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습니다. 두 달란트로 한 달란트에 가깝지만 다섯 달란트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보다 가까운 쪽에서 이미 끝났다. 포기하라. 손 털어라. 더 이상 헛수고 말라는 사탄의 음성이 들려오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저 멀리 아직 이라는 속삭임이 있습니다. 아직 끝이 아니야. 포기해서는 안 돼. 내일 일은 알 수 없잖아. 무엇보다 주님이 계시잖아. 성령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두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어느 쪽을 결정하시겠습니까. 삼손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직을 붙잡았습니다. 이미가 아닌 아직을 외칩니다. 이미에 더욱 가깝습니다. 거의 이미와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보이지 않는 아직을 외치고, 되지 않는 아직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삼손을 실망시키지 않았고, 아직을 붙잡는 삼손에게 놀라운 은총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26절에 그를 도와줄 소년을 가까이에 두셨습니다. 여러분, 천하의 삼손을 누가 끌고 나오며, 또 감시해야 정상입니까? 힘센 무장 경비입니다. 군대입니다. 여럿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어린 소년이 그것도 한 명뿐입니다. 이것이 은혜 아닙니까? 둘째, 27절, 버틴 기둥을 가까이에 두셨습니다. 지붕에만 삼천 명이 있을 정도로 큰 다곤 신전 아닙니까? 그런데 그 집을 버틴 기둥 두 개가 양쪽 팔로 껴안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세째 26절, 20절에서 떠나셨던 하나님이 26절에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삼손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은 떠나신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 계십니까. 이미 쪽에 더 가깝게 서 있습니까? 포기하고 싶습니까? 주저앉고 싶고 끝내 버리고 싶습니까?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이미가 아닌 아직을 붙잡아야 합니다. 믿음은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아직을 붙잡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삼손처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이미에 가까운 사이에 있지만 이미가 아니라, 아직을 붙잡고 바라보면서 결국에는 약속하신 복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믿음은 현재의 자신과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3;17절, 열매는 없을지라도 무화과나무는 있고, 소는 없지만 외양간은 있고, 양은 없지만 우리는 있고, 식물은 없지만 밭은 있지 않습니까? 신앙은 없는 이미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지금 현재 있는 것과 하는 일과 형편으로 아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시는 그 모든 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고, 한심하지 않습니다. 롬8;26, 모든 것이 합력하여 결국은 선이 되게 하십니다. 누가 합니까? 예수님이 하십니다. 성령님이 하십니다. 나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것을 주님의 열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현재 돌리고 있는 어처구니는 돌리고 또 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중에 내 삶에 어떤 극적인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은 삼손에게 몇 가지를 노렸습니다. 첫째는, 감옥에서 조차도 편히 쉬지 못하게 했습니다. 둘째는,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천하의 삼손이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다! 재롱을 부려야 하고, 재주를 넘어야 하는 모멸감이 얼마나 삼손의 자존심과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구기게 합니까? 셋째는,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기 위한 계략이 숨어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맷돌은 삿9;53에, 생명을 끊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은 삼손으로 하여금 멧돌을 돌리게 했습니다. 의도에 말려들고, 책략에 말려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블레셋의 간교한 책략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묵묵히 맷돌을 돌립니다. 어처구니를 붙잡고 돌리되 끝까지 돌립니다. 재롱을 떨고, 재주를 부리는 일을 계속합니다. 이런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렇다고 자포자기 않고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그 한심한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언제까지 일까요? 어떤 지점에 올 때까지!!! 때가 차기까지, 머리털이 자랄 때까지, 떠나셨던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처지입니까? 이미 끝이 난 그래서 어처구니를 돌려야 하는 삶일지라도 어처구니를 붙잡고 아직을 향하여 전진하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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