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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십일조
<글/헬몬산>
(히 7:1-10)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성경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십일조와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어떤 연관을 가지고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 해답을 찾아보자.
그런데 저자는 1절에서 이미 그 앞에서 멜기세덱에 관한 얘기를 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즉 히브리서 5장 11절 이하에서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이젠 제발 때가 때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붙잡고 앉아서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고 권하고 있다.
따라서 히브리서 6장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권하는데 그렇다면 버려야 할 그 초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사람들이 매일같이 새벽기도, 철야기도에서 회개하는 기도의 내용의 절반은 이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들,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등이다. 이런 것들이 초보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이런 내용들을 이젠 버리라고 말한다. 아직도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 세례가 어떻고 안수가 어쩌며, 부활이니 심판이니 그따위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2천 년 전에 꿰뚫어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런 글을 적어 놓은 것을, 오리려 당시의 불신자를 향한 책망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이 말씀으로부터 멀리 도망가 있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하튼 히브리서 5장에서 수신자들의 수준 때문에 「멜기세덱」을 설명하지 못하는 저자는 6장 마지막에 가서야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班次)’를 좇아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다고 언급한다.
여기에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이 멜기세덱의 계통을 좇아 나온 직분이란 말이다. 즉 이스라엘 있어서 제사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레위 지파의 사람만 할 수 있는데(아론의 반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만인이 다 아는 대로 유다 지파로 좇아 나셨다. 여기서 우리는 제사 직분이 바뀌고 제사장의 계통이 바뀌는 모습을 본다.
• 아론 반차 → 레위 지파 → 제사장들
• 멜기세덱 반차 → 유다 지파 → 예수 그리스도
쉽게 말해서 예수는 레위 지파가 그동안 독식해 오던 제사장 직분과 그에 따른 모든 권위와 권세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버린다. 기득권층의 반발이 예수에게 쏠릴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때 이들 기득권층(제사장들)이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제사 직분만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로 인해서 자기들이 받아 챙길 수 있는 백성들의 십일조였던 것이다. 염불이 있어야 잿밥이 있을 터인데 염불 직분이 자기들에서 예수께로 옮아간다는 것은 잿밥까지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제사의 종류와 제사의 직분, 그리고 그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의 계통들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여기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십일조였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뿐만 아니라 레위 지파 전체가) 자기들의 기업(땅)이 따로 없었고, 자기 형제들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받아서 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는다. 즉 제사장은 백성들 대신 제사를 집행하고 그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는다. 그래서 이 십일조로 생활을 꾸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십일조는 당연히 오늘날처럼 무슨 성전도 짓고 교회 버스도 사고 이웃도 도와주고(율법에는 이웃 구제를 위한 십일조를 따로 규정하고 있다) 하는 십일조가 아니었다.
그러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받았던 것처럼 당연히 유다 지파의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도 무슨 받을 것이 있어야 할 터인데-이것이 또 하나의 다른 십일조다. 이 십일조에 대하여는 오늘날 교회가 입 싹 닦고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가 율법의 규정대로 레위 지파의 제사 직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로 말미암아 온전해졌고 따라서 그를 따르는 것이라면 십일조 역시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받았던 십일조 아닌 다른 십일조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쳐지는 십일조는 레위 지파의 십일조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는 당연하고도 자명하다. 레위 지파의 십일조를 받는 교회는 레위 계통의 제사를 드리는, 아직도 율법에 속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의 십자가도 저희에게 아무런 실질적 의미가 없으며 그러니까 할 일이라곤 십자가 모형으로 교회나 장식하고 목걸이나 만들어 차고 다니는 것이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라는 얘기가 맞는다면, 둘 빼기 하나는 하나라는 얘기도 맞아야 한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고 하면서 둘 빼기 하나는 하나가 아니라고 우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도 율법에 속하여 은혜를 모른다는 말에는 발끈하면서도 왜 십일조는 계속해서 ‘율법의 십일조’를 받고 있는가?
또 하나, 신자의 입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값없이 구속되었고, 따라서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고 떠벌이면서도, 왜 십일조는 ‘율법의 십일조’를 그대로 하고 있는가. 앞뒤가 좀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십일조의 구체적인 내용을 비교하기 전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제사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기로 하자.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즉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그 가운데 나오는 제사의 모든 것을 포함하여) 원래 의도하는바 실체, 본체, 참 형상이 아니라 그러한 실체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율법이 하라고 강조하는 제사, 즉 해마다 늘 드리는 제사는 그 제사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을 실질적으로 온전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온전의 그림자적 역할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이다.
(2절)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즉 율법적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있다면, 율법적 제사가 그림자와 모형의 역할이 아니라 실질적, 실체적 제사였다면, 더 이상 죄의 문제로 두 번, 세 번 제사 드릴 일이 없어야 했을 터인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제사의 연속이었으니 그들의 역사 자체가 율법적 제사의 그림자적 성격을 증명하는 것이다.
제사는 죄에 대한 속죄의 의미를 지니는데 속죄를 이루지 못하는 제사가 곧 ‘율법의 십일조’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또 문제가 생기는 것이 그럼 하나님은 왜 이처럼 속죄도 이루지 못하는 쓸데없는(?) 제사를 드리라고 그렇게도 구구절절이 꼬치꼬치 말씀하셨던가.
(3절)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렇다. 이 제사들은 죄를 없이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죄가 있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 자기가 죄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더라도 하여간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니까 자기에게 죄가 있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무슨 말 같지 않은 말이냐고 웃을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제로 그랬다.
자기들은 전혀 죄인이 아닌데-이방인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죄인이지-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죄를 위하여 매년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니 자기들이 죄인인 것 같더라는 말이다. 제사 드림이 없었다면 영영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몰랐을 터인데 제사 드리는 것을 보니 그게 분명히 자신들의 죄를 증거하고 있더라는 말이다.
오늘날 신자들 역시 이와 비슷하다.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니면 무엇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자기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는지는 모르면서, 그저 교회에서 배운 대로 원죄가 어떻고 자범죄가 어떻다는 거짓말에 홀랑 속아서 자기는 죄지은 것 하나도 없으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앉아 있으니 참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신자들도 세상 법정에서 가끔 불신자 내지는 신자들끼리 법정 투쟁을 할 때가 있는데 이때도 서로 자기가 죄인이라고 우겨댈 건지 참으로 궁금하다. 세상살이에서는 그렇게 어리숙하게 죄인 되지 않으면서(왜냐하면 죄인 되면 된 만큼 손해기 때문이다) 신앙 문제에 들어오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서로들 죄인이라고 설쳐대니 거 참 묘한 일이다.
하여튼 율법의 제사는 그것의 기능이 죄를 없이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생각나게 하는 데 있으므로,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제사 드릴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믿고 있는 요즈음의 신자들은 왜 그렇게 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가.
그저 눈만 뜨면 죄, 죄, 죄, 밥만 먹으면 죄인, 죄인, 죄인, 정말 죄인이어서 그러는가 아니면 그래야 천국 간다니까 그러는가. 어쨌거나 율법에 속한 제사로서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않으며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신 말씀은 당연하다.
그러면 요사이는 이런 제사와 예물, 전체로 번제함이 없어졌는가. 성경은 분명히 이 모든 것을 폐했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무엇인가 드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인간들의 심리는, 그 형태만 바꾸어서 아직도 교묘하게 제사와 예물을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떳떳해지고 자랑스럽고 싶은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이 아무리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떠들어도 말 그대로 쇠귀에 경 읽기다. 한 술 더 뜨기는 제사와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 다시 도둑질을 하고, 남의 것을 속여 취하고, 회사를 말아먹고, 탈세를 하고,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가난한 이웃을 멸시하고,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아 날고 기고 있는 판이다. 사람이 얼마나 제사와 예물 드리기를 좋아하는지!
예수께서 얼마나 답답했으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했을까.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뜻을 좀 배우라. 이건 믿을 문제가 아니라 배울 문제다. 도대체 이 말의 뜻이 무슨 말씀인지부터 좀 배우자. 그저 내가 긍휼을 원하노라 하니까 긍휼을 베풀려고만 하지 말고 도대체 무슨 뜻인지 생각을 좀 해보자.
우리는 제사 드릴 능력은 있어도 긍휼을 베풀 능력은 애시 당초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베푸는 긍휼은 대부분이 제사의 다른 표현이다. 제사가 긍휼의 옷을 입고 나타났을 뿐이지 실제로의 긍휼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데서 늘 속는다. 호세아 6장에서도 선지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는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여, 제사와 긍휼, 제사와 인애, 번제와 하나님 아는 것, 등을 모두 병렬구조로 같이 비유하고 있다. 또한 미가 선지자도 6장 6~8절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한바 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사(예배)나 예물이 아니다. 사업체를 통째로 갖다 바치는 것도 원치 않으며 아들 삼형제 키워서 몽땅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는 것도 원치 않는다. 왜들 하나님은 원치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 것을 하라고 강조하고, 또 구원받은 삶은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공갈, 사기 치고 앉아 있는가. 이런 성경 말씀은 그야말로 무지무지하게 많아서 모두 다 인용이 곤란할 정도지만 하나만 더 인용한다면 이사야 1장 10절 이하를 보자.
“너희 소돔의 관원(사사)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찐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다시 가져오지 말라. 다시 가져오지 말라.”
이래도 돈 들고 하나님 앞에 바칠 것인가? 자기가 돈을 좋아하니까 하나님도 돈만 좋아하실 줄 알면 오산이다. 자기가 쇠고기 좋아한다고 아버지도 쇠고기 좋아할 줄 알면 곤란하다. 아버지는 돼지고기 좋아하시는데 쇠고기만 잔뜩 들고 가서 ‘아니 왜 안 드시느냐’고 볼멘소리 해봤자 서로 마음만 상하니까 아버지께 효도를 안 하려면 몰라도 하려면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알자. 힘써 아버지의 원함을 알자. 성경을 알자 하니까 성경만 읽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되는 일만 하는 세대이다.
우리가 잘 아는 유대인 가운데 다윗 왕 이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는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울이 군대를 소집하여 출정하는데 전투는 승승장구 드디어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울과 백성이 아각(아말렉의 왕)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하니 하고 가치 없고 질 낮은 것만 골라 진멸하는데, 이 사건에 대하여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삼상 15:18-19)
사무엘의 책망에 사울의 대답이 걸작이다.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삼상 15:20-21)
양과 소를 남겨둔 이유가(그것도 자기는 상관없는데 순전히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그랬단다. 전혀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그랬단다. 자기는 설교할 때 십일조 같은 것은 하나님이 원하지도 기뻐하시지도 않는다고 얘기했는데 하나님께 무엇을 좀 드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신자들의 충정이 모여서 이렇게 헌금이 모였단다.
자기는 인간들이 벽돌로 지어 놓은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힘들여가며 ‘성전’ 지을 필요 없다고 그랬는데도 어찌나 신자들의 정성이 갸륵한지 이렇게 큰 성전을 봉헌하게 되었단다. 이런 일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영광인가. 그러므로 이어지는 사무엘의 책망은 당연하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감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여호와의 말씀을 버린 주제에 제사는 무슨 제사며 번제는 또 무슨 번제인가. 제사가 말씀을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며 제사가 있어야 말씀이 말씀되는 것 아니다. 말씀은 제사와 상관없이 말씀이지만 제사는 말씀과 떨어져서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다.
흔히들 신앙생활의 중요 요소로 말씀, 기도, 전도 등을 꼽는데, 말씀은 그 중의 하나가 아니라 홀로 하나며 홀로 전부다. 왜냐하면 기도, 봉사, 전도 등은 모두 그 근거를 말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과 맞지 않는 기도라면 오히려 하지 않음만 못하고(마 20:22) 말씀을 제쳐둔 봉사는 그로 인해 오히려 원망과 불평만 생기게 된다(눅 10:40).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역시 이와 비슷했다. 제사가 의미하는 뜻, 그 내용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당위성만 강조하고 있었다. 히브리서에 있어서 율법적인 제사의 의미는 오로지 하나, 해마다 죄를 드려야 한다는 당위성만 강조하고 있었다.
히브리서에 있어서 율법적인 제사의 의미는 오로지 하나,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율법적 제사들을 통하여 영원한 제사를 바라보고, 소망하며, 믿으라고 준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 내용은 버리고 껍질만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멸시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율법적 제사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제사 모습과 그림자와 참 형상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거기 등장하는 모든 소도구들 역시 그러한 그림자-참 형상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제사장의 계통, 제사장의 모습, 제사에 필요한 예물의 내용, 제사장이 받는 십일조, 그리고 제사장이 베푸는 축복의 내용 등등이 모두 그런 관계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바 십일조 역시 이러한 이중성의 모습을 지닌다. 여기쯤 오면 독자들은 대개 지금 십일조로 드리고 있는 헌금이 실제로서의 십일조가 아닌 그림자로서의 십일조임을 눈치 채셨을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말라기서의 제사장들이 어떤 십일조를 바쳤기에 하나님이 그토록 "너희가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 한 마디로 쓸모없는 것들을 가져 왔느니라"고 나무랐던가 하는 이유도 대충 감이 잡히시리라.
두 가지 십일조
히브리서 7장에는 이상의 두 가지 십일조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는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며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열한 지파가 그들의 형제 레위 지파에게 바친 십일조 즉 율법의 십일조다. 흔히들 창세기 14장의 십일조나 나중에 율법에서 등장하는 십일조나 그 의미나 계통이 같은 줄 알고 있는데 이것은 오해다.
자, 우선 그 십일조를 받는 주체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창세기의 십일조는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이 받고 있으며 율법의 십일조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받고 있다. 그들이 제사장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같으나 드리는 제사의 모습은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림자와 실체의 관계에 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멜기세덱이라는 살렘 왕의 모습은 히브리서 저자의 표현대로 본다면 과연 신인지 사람인지 제대로 분간이 안 될 지경이다. 즉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으며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이신 분이다.
그러나 율법의 제사장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으며(28절) 또한 저들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을 수 없음으로 제사장의 수효가 많을 수밖에 없다(23절). 그렇다면 오늘날 십일조를 받는 제사장은 과연 멜기세덱 반차를 좇는 예수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율법의 제사장 같은 목사인가. 목사들은 자기들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주장한다고 되는 일인가.
십일조는 율법의 십일조 그대로 받고 있으면서 제사장 ‘직분’만 멜기세덱 반차라고 우길 수 있는가?
그러면 십일조를 바치는 주체는 어떻게 다른가.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바치고 있고 율법에서는 레위 지파의 형제인 나머지 열한 지파가 바치고 있다. 자.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하고 레위 지파와 나머지 열한 지파의 관계가 도무지 비교가 가능한 관계인가. 레위와 나머지 열한 지파라는 것은 누구의 자손인가. 히브리서 저자도 지적하고 있지만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 십일조를 바칠 때에는 레위는 세상에 나오려고 생각도 못할 때다. 레위와 열한 형제는 아브라함에게는 증손자들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레위도 아브라함에 속하여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주체에 속하지 감히 멜기세덱과 짝하며 더불어 놀 수는 없다.
정말 폐일언하고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복을 비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닐진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향하여 복을 빌었던가. 아니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행하여 복을 빌었던가. 속지 말라. 레위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브라함보다 높지 못하다. 높기는커녕 정말 그 앞에서 말 한 마디 함부로 못 놀릴 위치다. 그런데 그런 레위가 자기 조상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바치고 있는데, 자기는 그의 형제들에게 십일조를 받으면서, 그 십일조가 아브라함이 바친 십일조와 동격이며 동질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미심쩍어서 입맛을 다실분들을 위하여, 도대체 ‘창세기의 십일조’와 ‘율법의 십일조’는 각각 무엇으로 바쳤느냐를 생각해 보자.
무엇으로 바치다니? 그야 당연히 소득의 십일조지, 자기가 일해서 벌은 총소득의 십분의 일이지, 세금을 공제한 다음 순소득의 십분의 일이냐 아니면 세금 공제 전 총소득의 십분의 일이냐는 논란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하여튼 소득의 십일조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는가. 옳다. 소득의 십일조다. 율법의 십일조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도 기도할 때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고 했다.
민수기 18장 20절 이하를 보자.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 이는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니라.”
현대의 십일조
십일조는 목사들의 기업이요 하나님 일에 대한 갚음이요 보수니 그것으로는 오직 목사들의 생활이나 하면 된다. 십일조는 그것으로 교회 운영하는 데 보탤 일도 아니고, 또 그 돈이 십만 원이건, 백만 원이건 아니면 천만 원이건 신경 쓰지 말고 몽땅 가져다 목사들의 생활비로 쓰면 된다. 십일조를 교회 건물 짓는데 전용하고 구제하는데 생색내고 예배당 유지비로 사용하는 것은 십일조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당회원들도 목사님 봉급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 것이다. 그리고 목사들은 십일조에 대해서 떨떠름하게 가르치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야 한다. 요리조리 돌려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고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가 어떻고 은혜에 감사가 어떻고 떠들지 말고, ‘당신들이 하나님 믿고 싶으면 소득의 십일조를 내시오. 이건 영원한 율례요’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라. 그리고 걷히는 십일조는 몽땅 가져다 외제차도 사고 아파트 평수도 늘리고 고급 가구도 들이고 마음대로 하라.
하나님의 종입네 하고 비리비리 비실비실 살지 말고 화끈하게 확실하게 보여 주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일 테니까. 절대로 이것 때문에 망하지는 않는다. 괜히 쓰라고 주는 것도 못 챙겨 먹는 바보 되지 말고 갖다 쓰라. 어차피 하나님의 종들이 안 쓰면 그 종의 종들이 쓸 것들이니까 전혀 양심의 가책 느낄 필요 없다. 그리 풍족하면 작은 수익의 주의 종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한 가지 그것은 율법의 십일조, 레위 지파가 그들의 열한 형제들로부터 받은 십일조라고 분명히 가르칠 일이다. 이 십일조를 혼동하거나 뒤섞지 말라는 말이다.
창세기 14장의 아브라함은 그의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저자도 명쾌하게 밝히고 있지만 그는 그의 소득에서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 아니라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아브라함은 그의 산업이 없었던가. 그는 소득원이 노략질(?) 이외에 다른 것은 없었던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득의 십일조는 드린 적이 없다.
창세기 14장에서는 구체적으로 노략 물 중 좋은 것이라는 언급이 없다. 다만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그때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 연합군과의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이었고 거기서 아브라함이 얻은 것이라고는 소돔 왕의 연합군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에게 빼앗겼던 것들을 도로 찾은 것뿐이었다. 아브람의 십일조와 구약의 제사장의 십일조와 복음시대의 십일조는 구분되어야 한다.
첫댓글 성소 뜰에 있으면 소란스럽고 비린내도 나고 정리가 잘 안된 장소입니다.
성소로 진입하셔야 하지요. 떡상과 촛대와 향단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셔서 성령에 힘입어 말씀과 기도를 가지고 지성소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뜰은 밟는 마당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읽고 은혜가 되고 뭔가 깨달아 지는 듯 한데..결론을 확실히 명쾌하게 내 주셔야죠..우둔한 소생들은 그럼 어떻게 하란 얘기인지? 심히 고민됩니다. 십일조를 내란 말인가요? 내지 말란 말인가요?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 십일조의 개념과는 어떻게 풀라는 말씀인가요? 친절하게 다시 현대교회 신자들의 기준에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