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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續六
■ 감역(監役) 유명뢰(兪命賚) 묘갈명.
[생졸년] 1652년(효종 3)~1712년(숙종 38) / 향년 60세
자교당(慈敎堂) 유공 명뢰 필경(兪公明賚弼卿)은 자신이 태어난 갑년(甲年)인 임진년(壬辰年, 1712, 숙종 38) 4월 4일에 서울의 집에서 별세하였다. 나는 이때 병으로 청풍산(淸風山) 골짜기에서 은거하고 있었으므로 영연(靈筵)에 달려가 곡하지 못하고 1백 40자의 시(詩)를 지어 슬퍼하는 마음을 붙였었다.
얼마 후 그의 아들인 광기(廣基)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3백 리 먼 길을 찾아와 나를 뵙고는 울면서 묘문을 청하기를 “우리 선인을 자세히 아는 분은 당신만 한 사람이 없으니, 감히 이것을 부탁합니다.” 한다. 내 가장을 받아 읽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른다. 아, 내 차마 내 벗에게 명문을 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또한 어찌 차마 내 벗에게 명문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은 기계인(杞溪人)이다. 조고(祖考)는 관찰사로 좌찬성에 추증된 휘 성증(省曾)이며, 선고(先考)는 관찰사로 이조 판서에 추증된 휘 황(榥)이다. 모친은 은진 송씨로 직장 송시욱(宋時煜)의 따님이다. 공이 처음 태어날 때에 관찰공이 이상한 꿈을 꾸고는 인하여 이름을 명뢰(命賚)라 하였다.
공은 4세 때에 부친을 잃으니, 숙부(叔父)인 대헌공(大憲公)이 사랑하기를 자기의 소생과 같이 하였다. 모부인도 또한 훌륭한 여사였다. 그리하여 입으로《소학(小學)》과《통감(通鑑)》등을 가르쳐 주었으며, 가정에서 훈도하여여 형공(呂滎公)의 모친 신국부인(申國夫人)과 같이 하였다.
자라서는 또 당숙(堂叔)인 참판공에게 찾아가 수학하였는데, 공부를 엄격히 하고 강해(講解)하는데 취미를 두니, 같은 동류들이 교화되고 감복하였다. 17세에 우암(尤菴) 선생의 문하에 집지(執贄)하니, 선생은 한 번 보시고는 가르칠 만한 사람이라고 허여하였다.
공은 선생을 친히 모시기를 오랫동안 하였으므로 문견이 더욱 넓어졌으며, 간간이 과거 공부를 하여 과장에 출입하였으나 마음은 항상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갑인년(庚申年, 1674, 현종 15)에 세상일이 크게 악화된 것을 보고는 집안 식구를 모두 데리고 단양(丹陽)으로 돌아가 삼베 옷에 갈건(葛巾)을 쓰고서 날마다 수석(水石)이 좋은 사이에서 노닐었으며, 또 선생을 봉산(蓬山)의 유배지로 찾아가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책을 더욱 연구하였다. 돌아와서는 다시 양산(楊山)의 선영 아래에 집을 짓고는 어버이를 받들어 농사를 지으며, 날마다 학도들과 아침저녁으로 경전을 강론하고 외웠다.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 이후로 조야(朝野)가 청명하여지자, 공은 나가서 친구들과 교유하니, 훌륭한 명성이 대단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향하였다. 얼마 후 세도(世道)가 점점 악화되어 사문(斯文)이 장차 곤궁해지자, 공은 또다시 사론(士論)을 자임하여 선악을 분별하니, 사림들이 공을 의지하였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반목하는 자가 많이 있었다.
우암 선생은 일찍이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경계하기를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 손으로 큰 파도를 막으려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하였으며, 또 정자(程子)의 시세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권면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에 우암 선생이 최후의 운명을 받으시어 세상의 변고가 더욱 망극하여지자, 공은 문을 닫고 빈객을 사절하고는 아름다움을 감추고 스스로 정도를 지켰으며,마도견(磨兜堅)이라는 세 글자를 자리의 오른쪽에 손수 써서 뜻을 나타내었으니 이는 서 시랑(徐侍郞)의 벽 위에 있는 말을 취한 것이었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에 천운이 다시 좋아졌으나, 공은 마침 귀가 먹어 스스로 폐인이 되고는 마침내 세상에 진출할 것을 단념하였다. 공은 평소에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하고는 여러 아들들에게 훈계하기를 “나는 이제 끝났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부지런히 공부하여 부디 독서 종자(讀書種子)를 끊지 말라.” 하였으며, 또 뜰에 네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어왕 진공(王晉公)의 고사를 본받았다. 혹 벼슬하기를 권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웃고 답하지 않았다.
경인년(庚寅年, 1710, 숙종 36)에 이조에서 벼슬하는 친구들이 헛되이 늙는 것을 애석히 여겨 비로소 사산 감역(四山監役)을 제수하였으나 공은 병으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공은 명문가의 화려한 자제로 태어나 명성과 이익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내면 공부에 힘을 썼으니, 그 뜻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불행히도 몸이 고질(痼疾)에 걸려 그 원대한 학업을 다 채우지 못하였으나, 분수를 지키고 곤궁함을 굳게 지키면서 즐거워하고 후회하지 않았으니, 어찌 구구한 녹사(祿仕)가 그의 절개를 바꿀 수 있었겠는가. 공의 시(詩)에 “우뚝하게 요순의 군민 만들려는 뜻 품었다.[落落君民志]”는 글귀를 관찰하면, 공이 품고 있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은 임종할 때에 한마디도 다른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잠꼬대에서도 오직 모부인을 그리워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원근에 서로 알고 지내던 자들은 모두 놀라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올바른 선비가 죽었다.” 하였다. 이해 7월 임인일에 포천의 천주산(天柱山) 신륵사(神勒寺)의 옛터인 신향(申向)의 언덕에 안장하니, 새로 정한 곳이었다.
유씨(兪氏)는 동방의 대성으로 상조(上祖)인 의신(義臣)이 고려 초기에 충절을 드러냈으며, 그후에 벼슬이 대대로 이어져 수백 년 동안 끊기지 않았다. 경안공(景安公) 여림(汝霖)과 숙민공(肅敏公) 강(絳)은 모두 정경(正卿)으로 중종과 명종, 두 조정에 큰 명망이 있었다. 숙민공이 휘 영(泳)을 낳았는데 군수를 지냈으며, 군수는 휘 대의(大儀)를 낳았는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니, 실로 찬성공의 부친이시다.
공은 반남 박씨(潘南朴氏) 승지 세성(世城)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바로 광기(廣基)이며, 차남은 하기(廈基)인데, 모두 진사이다. 다음은 도기(度基)와 응기(應基)이다. 딸은 진사 조정빈(趙鼎彬)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언탁(彦鐸)과 언일(彦鎰)과 언전(彦銓)과 언상(彦鋿)인데 모두 큰집 소생이며, 나머지는 어리므로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천품이 이미 아름다웠고 일찍 대현(大賢)을 따라 종신토록 스승으로 삼고 본받았기 때문에 동정(動靜)과 언행이 순수하게 정도에서 나왔다. 성품이 또 지극히 효성스러워 모부인을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젊어서부터 늙도록까지 부지런히 봉양하고 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뜻을 받들어 물건을 봉양함에 일반인들이 미칠 수 없는 점이 많이 있었다.
공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렸을 때에 자친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실로 아버지와 스승의 은혜를 겸하였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양산(楊山)에 집을 지은 다음 우암 선생에게 당호를 지어줄 것을 요청하자, 선생은 자교당(慈敎堂)이라고 편액하고 아울러 기문을 지었으니, 공이 자교라는 호를 가진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다.
처음 판서공의 원배(元配)인 유 부인(柳夫人)이 후사가 없으므로 당질(堂姪)인 명기(命蘷)를 양자로 삼았었다. 후배(後配)인 송씨(宋氏)가 공을 낳았는데 마침내 공에게 종사(宗事)를 주관하도록 명하였으니, 이는 국조의 법을 따르고 선친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공이 장성하자, 스승에게 여쭙고는 호 문정공(胡文定公 호안국(胡安國)의 시호)의 가법(家法)을 따라 정통(正統)을 명기에게 양보하니, 군자들은 공의 처사가 의로움을 훌륭하게 여기고형만(荊蠻)의 일에 비교하기까지 하였다.
공은 정성을 다하여 선조를 섬겼으며, 종형(宗兄)이 별세한 뒤로 종사(宗祀)가 날로 더욱 침체되자, 공이 모든 일을 경영하였고, 종손을 보호하여 군색한 빛이 있지 않게 하였다. 제사하는 의식을 정하여 되도록 풍부하고 검소함에 맞게 하였으며, 또한 사시(四時)에 일정한 제사를 지내어 세속의 잘못된 폐습을 바로잡았다.
상기(喪期)가 지난 뒤에도 기일(忌日)을 당하면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초상 때와 같이 하였으며, 종족들에게 돈독히 하고 사람을 대함에 간격을 두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사모하였다. 공의 마음이 인자하고 성실한 것은 타고난 성품이 그러하였다.
젊었을 때에 사부(詞賦)를 전공하여 문세가 솟구쳐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의 유풍이 있었으며, 만년에는 유가(儒家)의 책을 좋아하여 경전(經傳)으로부터 송유(宋儒)의 여러 문집에 이르기까지 연구하고 탐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좋아하여 항상 책상 위에 놓고 우암 선생이 지은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참고하여 공부를 지극히 하였다.
《소학(小學)》과《가례(家禮)》 두 책을 평소에 강하고 시행하여 다반사와 같이 여겼으며, 태극도설(太極圖說)ㆍ서명(西銘)ㆍ《사물잠(四勿箴)》 등을 모두 외우고 그 속에 빠져 있었다. 공은 일찍이 각고(刻苦)라는 두 글자를 우암 선생에게서 받고는 족자를 하여 걸어 두고 마음을 다하여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였으니, 공이 만년에 효력을 얻은 것은 모두 이 두 글자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아, 우암 선생은 사람을 가르침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지금 문하에 있던 여러 사람들 중에는 한 가지 일이라도 체득(體得)한 자가 없거니와 오직 공만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아니하여 드높이 군자가 되었으니, 아, 거룩하다.
하늘이 이미 이와 같은 사람을 탄생시킨 것은,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서 그런 듯한데 도리어 벼슬길이 막혀 그대로 침체되어 있다가 한을 품고 지하로 돌아갔으니, 아, 애석하다. 나는 젊어서부터 공과 나이를 따지지 않고 교분을 정하여 정의(情意)의 돈독함이 늙어서도 한결같았다.
저 옛날 신사년 봄에 공은 한번 노를 저어 거슬러 올라와서 나를 한수재(寒水齋)로 방문하였으며, 또 직재(直齋 이기홍(李箕洪)) 이공(李公)을 한벽루(寒碧樓)로 방문하고는 며칠 동안 묵으면서 학문을 탐구하고 토론하여 다시 옛날이택(麗澤)의 즐거움을 회복하였다. 이때 봄에 새로 나온 물건이 풍성하였는데, 공은 가야산(伽倻山) 단구(丹丘)의 선암(仙巖)으로 들어갔으나 나는 병으로 함께하지 못하였다.
나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노쇠하였으나 다시 이 모임을 도모하면 어찌 후일의 기약이 없겠는가.”라고 여겼었는데, 이 모임을 다시 하지 못하고 공과 이공을 이미 만나 볼 수 없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천지를 우러러보고 굽어봄에 나만이 홀로 외로이 서 있으니, 세상에 음악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백아(伯牙)의 비감이 항상 가슴속에 있었다.
이제 나는 공의 묘갈명을 씀에 있어 가슴속에 느끼는바를 이와 같이 쓰니, 가령 공의 영혼이 있어서 이것을 안다면 반드시 빙그레 웃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하남의 문하에 /河南門下
늦게 사숙이 있었네/ 晩有思叔
묘년에 종통(宗統)을 사양하니 / 妙歲讓宗
고죽의 풍도가 드높아라/ 聞風孤竹
숨고 나타나기를 때에 따라 하였고 / 隱見隨時
효도와 인자함으로 정사를 하였네 / 孝慈爲政
아름다운 덕 안에 충만되었으니 / 德美內充
근원이 깊음에 흐름이 길어라 / 源深流永
공경하고 공경하는 훌륭한 아들 / 翼翼令嗣
묘에 비갈을 세우네 / 樹碣幽堂
이 벗이 시를 새기니 / 故人銘詩
천추에 길이 빛나리라 / 千秋耿光
[각주]
[주01] 여 형공(呂滎公)의 …… 신국부인(申國夫人):
형공은 송 나라의 명신인 여희철(呂希哲)의 봉호이며, 신국부인은 그의 어머니로 참정(參政) 노종도(魯宗道)의 따님인데,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 아들을 심히 사랑하였으나, 모든 일을 반드시 예법을 따르도록 엄격하게 가르쳤다.《伊洛淵源錄》
[주02] 마도견(磨兜堅):
말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마도건(磨兜鍵)이라고도 쓴다. 양주(襄州) 곡성현(穀城縣)의 성문 밖 길가에 석상(石像)이 있는데, 그 배
위에 “마도견은 부디 입을 삼가 말하지 말라.[磨兜堅 愼勿言]” 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유래한 것이라 한다.《輟耕錄 磨兜鍵》
[주03] 왕 진공(王晉公)의 고사:
진공은 송 나라 초기의 명신인 왕호(王祜)의 봉호. 그는 직간(直諫)을 하다가 송 태조의 노여움을 사 정승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손
수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뜰에 심고서 “내 자손 중에 반드시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를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후 둘째 아
들인 단(旦)이 진종황제(眞宗皇帝) 때에 18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남기고 명재상이 되었다. 《蘇東坡集 卷20 三
槐堂銘》
[주04] 형만(荊蠻)의 일:
주(周) 나라 태왕(太王)의 큰아들인 태백(泰伯)이 막내인 계력(季歷)에게 제후왕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당시 오랑캐로 인식되던
오(吳)로 피해간 일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결국 계력이 즉위하였고 문왕(文王)을 거쳐 무왕(武王) 때에 이르러 천하를 통일하게 되
었다.
[주05] 이택(麗澤)의 즐거움:
이택은《주역》태괘(兌卦)의 상사(象辭)로 친구 간에 학문을 강론하고 덕업(德業)을 권면하는 즐거움을 뜻한다.
[주06] 하남의 …… 있었네:
하남(河南)은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거주하던 곳이며 사숙(思叔)은 문인(門人) 장역(張繹)의 자(字)이다. 장역은 집이 몹시 가
난하여 학문을 못하다가 뒤늦게 이천의 문하에서 공부를 독실히 하여 이천의 인정을 받았는데 특히 행실이 뛰어났다. 여기서는 우암
의 문인 유명뢰(兪命賚)가 그와 같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주07] 묘년에 …… 드높아라:
종통은 적통(嫡統)을 말하며, 고죽은 은(殷) 나라 말기의 제후국(諸侯國)으로 요서(遼西) 지방에 있었던 나라임. 고죽국 군주가 작
은 아들인 숙제(叔齊)를 후계자로 세우라고 유언(遺言)하였으나, 숙제가 천륜(天倫)을 중시하여 형에게 양보하고 도망하자, 백이
역시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야 한다 하고는 함께 도망간 일이 있는데 유명뢰 역시 양형(養兄)인 명기(命蘷)에게 종통을 양보했으므
로 이를 비유하여 칭찬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백효 (역)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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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兪命賚 墓碣銘[權尙夏]
慈敎堂兪公命賚弼卿, 以其生年之周甲壬辰四月四日歿于京第。 時余病伏淸風山谷中, 不能趨哭靈筵, 爲詩一百四十言以寄哀焉。 旣而其孤廣基持狀謁余于三百里之外, 泣請墓文曰: “知吾先人者, 莫如子。 敢以是托之。” 余受而讀之, 不覺涕蔌蔌下也。 噫! 吾尙忍銘吾友哉, 亦何忍不銘吾友哉?
公杞溪人也。 祖曰觀察使、贈左贊成諱省曾。 考曰觀察使、贈吏曹判書諱榥。 母曰恩津宋氏, 直長時煜女。 公始生, 判書公得異夢, 仍賜名焉。 四歲而孤, 叔父大憲公撫愛如己出。 母夫人亦女士也, 口授《小學》、《通鑑》等書, 浸染薰陶, 若滎公之於申國夫人及焦先生也。 旣又就堂叔參判公學, 嚴於課誦, 味於講解, 同隊化服。 十七, 束脩于尤菴先生之門, 先生一見許以可敎, 公親炙日久, 聞見益博, 間治擧業, 出入公車, 而意恒不屑也。
甲寅, 見時事大非, 盡室入丹陽, 布衣葛巾, 日倘徉水石間。 又從先生於蓬山謫中, 益究性理諸書, 歸復築室於楊山先墓下, 奉親治農, 日與學徒晨夕講誦。 及庚申以後, 朝野淸明, 公出遊士友間, 華聞藹蔚, 一時爭傾嚮之。 俄而世道潛爍, 斯文將厄, 公又身任士論, 激揚淑慝, 士林倚以爲重, 然世多有側目者。 先生嘗移書戒之曰: “不量時勢, 隻手障瀾, 非道理也。” 又引程子“知時識勢”語以勖之。 己巳, 先生受後命, 世變益罔極, 公閉門屛客, 含章自貞, 手書“磨兜堅”三字于座右以見志, 蓋取徐侍郞壁上語也。
甲戌, 天運回泰, 而公適病聵自廢, 遂絶世念。 平居却掃一室, 敎誨諸子曰: “吾今已矣。 爾輩須孜孜, 愼毋絶讀書種子。” 又植四塊於庭, 以效王晉公故事。 或有勸之仕者, 輒笑不答。 庚寅, 親友之在銓地者, 惜其虛老, 始除四山監役, 辭以病不就。蓋公以名門華胄, 不喜聲利, 專心向裏, 其志可謂不淺, 而不幸身嬰痼疾, 未能充其遠大之業。 方且守分固窮, 樂而無悔, 則豈區區祿仕, 可以易其介哉? 觀於公“落落君民志”之句, 可知其所存矣。
公臨沒無一語及他事, 惟思念母夫人, 諄諄發於啽囈。 訃出, 遠近相識, 莫不驚悼, 曰: “正士亡矣。” 是年七月壬寅, 窆于抱川天柱山神勒寺故址申向之原, 新卜也。
兪氏爲東方大姓, 上祖義臣, 著節麗初。 其後冠冕奕世, 累百年不絶, 有景安公汝霖、肅敏公綘, 官皆正卿, 有大名於中、明兩朝。 生諱泳, 郡守。 郡守生諱大儀, 贈吏曹參判。 寔贊成公之禰也。
公娶潘南朴氏, 承旨世城之女。 生四男: 長卽廣基, 次厦基, 俱進士: 次度基: 次應基。 一女適進士趙鼎彬。 孫男彦鐸、彦鎰、彦銓、彦鏛, 皆長出, 餘幼未錄。
公天稟旣美, 早從大賢, 爲終身師法, 故其動靜云爲, 粹然一出於正。 性又至孝, 事母夫人, 盡其愛敬, 自少至老, 服勤不衰, 凡於志物之奉, 多有人所不能及者。 自以幼時受敎於慈闈, 實兼父師之恩。 當其屋成於楊山也, 請所以名其堂者, 先生扁以慈敎, 而幷爲之記, 公之取號, 職由於此。
始判書公元配柳夫人無嗣, 取堂從子命夔爲後。 後配宋氏生公, 遂命承主宗事, 蓋倣國典而遵先志也。 公旣長, 稟於師席, 依胡文定家法, 讓宗于命夔, 君子多處義, 至擬於荊蠻之節。 奉先愨刱, 自宗兄沒後, 宗祀日益零替, 公經紀庶事, 扶護宗孫, 不令有窘色。 定祭式, 務中豐約, 又行四時常祭, 以矯世俗弊習。 喪餘之日, 哀慕如袒括時。 篤於宗族, 待人不設畦畛, 人皆悅而慕之。 蓋其子諒雅性然也。
少治詞賦, 渢渢乎有屈、宋遺韻。 晩好儒家書, 自經傳以及宋儒諸文, 靡不硏索, 最喜《朱子大全》恒置案上, 參以先生所著《箚疑》, 交致其功。 《小學》、《家禮》二書, 尋常講服, 如啖茶飯。 若《太極圖說》、《西銘》、《四勿箴》, 皆諷誦而淫液焉。
公嘗受“刻苦”二字於先生, 簇而張之, 潛心服膺, 豈公晩年得力, 皆從此二字中出來耶! 噫! 老先生敎人, 不啻摑血捧痕, 而至今門下諸人, 未聞有一事之體得者。 獨公能不負師誨, 卓然爲君子人, 韙哉!
天旣生如此人, 似若有意於世, 而顧乃坎壈沈晦, 齎志入地, 嗚呼惜矣! 余少與公忘年定交, 情意之驩, 白首如一日。 記昔辛巳春, 公一掉溯上, 訪余於寒水齋, 又訪直齋李公於寒碧樓, 留連探討, 復續昔日麗澤之樂。 于時春物正新, 公入丹丘仙巖, 余病未偕焉。 嘗謂: “吾輩雖已衰老, 重謀此會, 豈無後日?” 孰謂此會不再, 而公與李公已不可見耶? 俯仰乾坤, 獨立踽踽, 常有人世絶絃之悲。 今於銘公之辭, 書其所感於中者如此。 使公有知, 必莞爾而笑也。 銘曰:
河南門下, 晩有思叔。 妙歲讓宗, 聞風孤竹。 隱見隨時, 孝慈爲政。 德美內充, 源深流永。 翼翼令嗣, 樹碣幽堂。 故人銘詩, 千秋耿光。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