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에 신사가 들어서다
목멱산이라고 불리는 서울의 남산은 예부터 개천도 많고 경치 좋은 골짜기도 많아 서울의 모산(母山)으로 꼽히던 곳이다.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가 남산에 나라의 안녕을 비는 수호신당으로 국사당(國師堂, 또는 목멱신사)을 세운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남산은 단지 서울의 한 산에 그치지 않고 백두산과 더불어 우리 민족에게 어머니와 같은 산이었다. 애국가 가사 2절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885년 일본인의 서울 성내 거주가 허용되고 일본공사관이 남산 기슭에 들어서면서, 남산 아래 진고개 일대(지금의 충무로 3, 4, 5가)는 일본인 거류 지역으로 바뀌었다. 우리 민족의 어머니 산이 이제 일본인의 근거지로 바뀐 것이다. 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남산 일대에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각종 시설물을 건설했다. 한국주차군 사령부, 통감부, 통감관저, 헌병대 사령부 등이 남산의 곳곳에 빼곡히 들어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남산을 일본인의 성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일본인이 처음 신사를 세운 곳은 일찍이 일본에 문을 연 부산이었다. 부산의 일본인들은 이주 초기에 용두산신사를 세웠다. 이어 원산과 인천 등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한 곳에 크고 작은 신사가 세워졌다.
한반도 침략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서울이 예외일 수는 없었다. 1892년 남산에 일본인의 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운다는 계획이 입안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뒤에는 전사한 일본군을 기리는 충혼기념탑까지 세우려고 했다. 실제로 1897년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왜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왜성공원이 남산에 조성되었고, 다음 해에는 일본인의 조상이라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모신 남산대신궁이 건립되었다.
일본의 전통종교는 ‘신도’였다. 애초에 신도는 민간신앙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지만,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신도를 국가화했다. ‘국가신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신도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다. 천황이 신의 아들인 현인신(現人神)으로서 대대로 일본을 통치했다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국민에게 심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 신도였다. 그러면서 신도의 공간인 신사 가운데 일부를 국가에서 지정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취했다. 일제는 한반도를 침략할 때도 당연히 신도와 신사를 적극 활용하려고 했다. 서울의 상징이자 우리 민족의 상징인 남산에 신사를 세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남산대신궁 이후 서울 각지에 신사가 세워졌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1916년 남산대신궁을 정식 신사인 경성신사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경성신사의 주신은 아마테라스오미카미 외에도 개척삼신(開拓三神), 곧 일본 국토를 개척한 세 신으로 알려진 오쿠니타마노미코토(大國魂命), 오나무치노미코토(大己貴命),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少彦名命)로 확대되었다. 개척의 신을 제신으로 모신 데는 한반도가 일본제국의 영토임을 종교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까지 경성신사는 단순히 일본인의 종교적 공간에 머문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중심인 서울을 일제가 통치하고 있다는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나 일제는 경성신사에 만족하지 않았다. 일본이 한반도를 통치하고 수호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경성신사보다 더 격이 높은 조선신궁을 남산에 세우려고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부터 조선신궁 건립예산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조선신궁의 건립 예정지는 남산이었다. 그리고 1920년에 조선신궁 기공식이 열렸다.
조선신궁 공사는 조선총독부의 예산을 바탕으로 1918년부터 시작되었다.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려고 한 데는, 단순히 서울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는 이유 외에도 조선인의 성역인 국사당을 내몰고 남산을 일본인의 성역으로 만들겠다는 속내가 작용하고 있었다. 실제로 개화기에 서울의 여러 신당이 철거될 때도 국사당만은 철거되지 않았을 정도로, 국사당은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조선신궁을 만들면서 무당들이 사신(邪神)을 섬기고 있는 국사당을 남산에 둘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제로 이전시켰다.
조선신궁은 1925년 10월 완공되었다. 조선신궁에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와 메이지천황이 신으로 모셔졌다. 처음에는 신라인의 피가 섞였으며 삼한(三韓), 곧 한반도를 정벌했다고 일본인들이 믿는 진구황후(神功皇后)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제신으로 거론되었다는 데서도 조선신궁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국가 제사 공간인 조선신궁에 일본 황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모심으로써 천황 중심의 우주적 질서가 한반도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한편 메이지천황은 식민지 조선의 개척신으로 일제가 추진한 동화 정책에 부합하는 신이었다. 실제로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많이 제신으로 모셔진 것이 아마테라스오미카미와 메이지천황이었다. 매년 10월 17일에는 조선신궁에서 제사가 열렸다. 조선신궁은 조선인에 대한 동화 정책 및 전시 황민화 정책을 앞장서서 수행한 국가신도의 전진기지이자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신사였다.
만주사변(1931.) 이후 일제의 대륙 침략이 점점 더 노골화되고 있던 1934년에는 남산에 노기신사(乃木神社)가 세워졌다.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타이완총독, 러일전쟁 당시 제3군 사령관 등을 지낸 육군대장 출신으로, 메이지천황이 죽자 부인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일본에서 충신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노기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메이지천황의 무덤 근처를 비롯해 여러 곳에 노기신사가 세워졌다. 그런데 서울 남산에까지 노기신사가 세워진 것이다. 1934년이라는 시점에 노기신사를 건립한 데는, 노기의 죽음을 본받아 조선인도 천황과 일본제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으라는 요구가 담겨 있었던 셈이다.
일제가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1937.)을 일으키면서 일본군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나남의 제20사단은 중일전쟁에 투입되었고, 서울의 제19사단도 소련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원래 일본은 국가를 위해 죽은 영령을 제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초혼사(招魂社)를 세웠다.
그런데 침략전쟁의 확대 과정에서 국가신도를 관장하는 주무부서인 일본 내무성은 전사한 일본군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위령제’를 위한 공간으로 기존의 초혼사를 도쿄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를 정점으로 하는 ‘지방호국신사’로 바꿀 것을 결정했다. 1938년의 일이다. 이어 다음 해에는 호국신사와 관련된 법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서울과 나남에 새로 호국신사를 만든다는 방침이 세워졌다.
경성호국신사는 1943년 11월 제19사단 사령부가 있던 용산의 용산정(현재 용산중학교 뒤편)에 세워졌다. 부지는 약 2만여 평이었다. 경성호국신사의 제신은 중일전쟁과 아시아 · 태평양전쟁 전사자들의 영령(英靈) 7,447주(柱)였다. 영령은 메이지 정부가 신도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결합시켜 만든 것이었다. 호국신사에 영령으로 모셔진다는 것은 국가, 곧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로서 ‘호국의 신’이라는 상징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했다.
경성호국신사의 영령 가운데는 일본군 전사자뿐만 아니라 조선인 전사자도 있었다. 이미 조선인에게도 징병제를 실시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징병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조선인 전사자에 대한 합사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합사는 국가신도의 중심인 야스쿠니신사에서도 이루어졌다. 이제 조선인도 천황과 일본제국을 위해 피를 흘리면 일본의 신으로 신사에 영원히 모셔진다는 것을 보여준 예가 야스쿠니신사와 호국신사의 합사였다. 호국신사에서의 전사자 영령에 대한 합사제와 위령제는 전시체제 아래 조선인 징병을 위한 선전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일제는 강점 말기 조선인의 정신세계마저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서울에서 신사 참배가 강제된 곳은 조선신궁, 경성신사, 경성호국신사, 노기신사였다. 특히 조선신궁과 경성신사에의 참배가 가장 심하게 강제되었다. 조선신궁 입구에는 거대한 ‘황국신민서사의 탑’까지 세웠다. 이들 신사의 침략신은 조선신궁의 아마테라스오미카미와 메이지천황, 경성신사의 아마테라스오미카미와 개척삼신, 경성호국신사의 전사자 영령, 노기신사의 노기 등이다.
이들에 대한 참배는 결국 일본 황실의 조상 및 충신을 섬기고 일제의 조선 통치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신사 참배는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개조하려는 상징적 폭력이었다. 일제강점 말기 보성전문학교에서 강의하던 김병로는 한글과 일본어를 섞어 “남산니 아갔데 가만히 스왔데 장안을 나가메루토 가슴이 답답하단 말야···”라고 개탄했다고 한다. 굳이 풀어 쓰자면 “남산에 올라 가만히 앉아 서울을 바라보니 가슴이 답답하더라”라는 말이 된다.
신궁과 신사, 짓눌린 남산과 서울의 모습은 뜻있는 이들에게 개탄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해방 이후 서울에서 민중의 손으로 가장 먼저 철거된 것이 바로 조선신궁이었다. 경성신사, 경성호국신사, 노기신사도 조선신궁과 마찬가지의 경로를 밟아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출처:(일제강점기 사회와 문화)
2026-04-18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