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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실리아Hersilia 푸생 [Nicolas Poussin, 1594~1665.11.19]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8.30~1825.12.29] 지오반니 볼로냐[Giovanni Bologna, 1529-1608] Pietro Paolo Raggi Peter Paul Rubens Bernini picasso Sherrie Wolf Movie : Rape of the Sabine Women Art in America Wayne Schoenfeld
결혼. 한남자와 여자가 만나 앞으로의 인생을 같이하며 모든것을 공유하고 책임을 나눠지며 자녀를 낳아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핵을 만들어내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는 입문 과정입니다. 단지 두남여뿐 아니라 두사람이 속해 있던 두개의 사회가 결혼의 끈으로 묶여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뜬금 없지만 결혼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찿아 보았습니다.
사전1.- 결혼은 신랑·신부의 가족과 결혼 자체를 통해 형성되는 새 가족 모두에게 중요한 사건이다. 젊은이는 결혼을 함으로써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고 새로운 가족의 형성에 중요한 단계를 수립한다.
사전2.- 배우자의 권리와 의무를 정하는 법·규약·관습·신념·태도를 통해 규제되며, 그 자손은 법적·사회적 지위를 갖게 된다. 모든 사회와 문화에서 결혼이 행해지는 것은 결혼이 여러 가지 기본적인 사회적·개인적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본적 기능으로는 생식, 성적인 충족과 조절, 자녀 양육과 교육 및 사회화, 혈통 정하기, 성별 분업, 경제적 생산과 소비, 그리고 애정·지위·동료애같은 개인적인 욕구충족 등을 꼽을 수 있다.
서양 결혼식의 관습에 신랑이 신부를 안고 방에들어가는 풍습이 있는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이 의식의 의미는 물론 지역마다 약간 틀리기도 하지만 그 기원은 로마 건국신화에서 시작되었다는설이 지배적 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결혼과 결혼풍습을 통한 로마건국신화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푸생 [Nicolas Poussin, 1594~1665.11.19]
Rape Sabine Louvre (1637-1638)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푸생은 한국에서는 그의 미술사적 위치의 중요성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에 속합니다. 푸생은 프랑스의 본격적인 고전주의적 작업의 시조라고도 할수 있읍니다. 르네상스 이후 모든 예술의 중심지는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1520년경까지) 르네상스 후기이후 매너리즘 작업이 본격화되며 1600년대 초반 바로크 미술이 시작 될때 까지도 이탈리아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이자 근원지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푸생은 프랑스 출신의 작가로서 시기적으로보면 바로크 미술기를 살아간 작가이긴 하지만 미술사에서 그를 바로크 작가로 분류하지는 않는듯 합니다. 그는 라파엘로를 숭배했으며 30살에 이미 로마로 가서 카라치파의 그림수업을 받으며 베네치파의 라파엘로 화풍도 섭렵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고대 로마에 심취하게 되고 고대로마의 풍경과 균형과 비례에 정확한 고전에 충실한 독창적인 작업을 시작합니다. 성 베드로성당의 제단화를 그리며 명성이 높아지자 프랑스왕 루이 13세의 구애로 14년간 조국 프랑스에서 수석화가로 활동하긴 하지만 다시 로마로 돌아와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머물렀습니다. 신화와 고대사, 성서등에서 소재를 골라 자신만의 장엄하고 세련된 고전적 기법으로 표현한 그는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자 프랑스 근대회화의 시조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위 그림은 푸생이그린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란 그림입니다.
전편에 로마의 건국신화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렸다시피 로마를 건국 - 사실 건국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겸연 쩍은것이 건국시 로무루스 집단의 인원은 약 3천명 가량이었고 대부분이 양치기등을 하는 거칠고 젊은 남자들이었습니다.- 로물루스가 건국후 최초로 첫 사업이 바로 위 그림에 나타나는 여인 강탈이었습니다. 첫 사업 치고는 조금 거시기 하죠?
그러나 그들(남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다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아무리 급했다고 해도 같은 남자로서 부끄럽고 치사하다는 생각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로무르스의 3천명의 집단이 자리를 잡은곳은 로마의 일곱개의 좁디 좁은 언덕이있던 구릉지역. 남쪽 해안지역은 그리스의 막강한 세력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북쪽은 에트루리아인들이 역시 월등한 군사력과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쪽으로도 북쪽으로도 갈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겁니다. 다행인것은 그리스인이나 에트루리아인 그 누구도 지금의 로마지역인 반도 안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는것.
젊고 거칠고 혈기왕성한 남자 3천명이 좁은 지역에 와글거리며 모여있으면 어떤 일들이 생겨 날까요? 욕구불만 - 현명한 로물루스는 자신의 세력안정을 위해 신부감 구하기에 나섭니다(물론 본인 신부감도 찿아야 겠지요) 그래서 꾀를 내어 한 일이 옆지역인 사비니족들을 축제에 초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라틴 지역에서는 축제 기간중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것이 관습화 되어있었기에 사비니족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로물루스의 초청에 응하게 됩니다.(게다가 로물루스의 온 가족 초청에 응하여 부모, 부인, 자식들까지 모두 데려가죠)
신나는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음악이 흐르고 술은 넘쳐나며 과일과 고기가 그득한 축제에서 그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축제가 최고조에 이르러 모두들 술에취해 비틀거리며 즐거워할때 붉은 망토를 한 로물루스가 신전위에 올라가 신호를 보냅니다.
신호를 본 로마의 거친 남자들은 갑자기 축제중 눈여겨본 여자들을 하나씩 안고 칼을 뽑아 사비니족 남자들을 쫓아냅니다. 아무런 의심없이 축제에 참가한 비무장의 사비니족 남자들은 자신의 아내와 딸과 자식들을 남겨두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도망가는일 외에는 할수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좌측에 푸른 옷을 입은채 로마군인에게 안겨 발버둥치는 여인은 헤르실리아Hersilia 라는 여인 입니다. 그녀는 유부녀인데 훗날 그녀는 로마 최초의 왕비가 됩니다,,즉 로물루스의 부인이 되었단 말이죠. 로물루스 취향이 독특한가 봅니다. 검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화면 가운데 하늘색 치마를 입은 사비니 여인은 아무 저항 없이 로마병사의 손짓에따라 다정히 걸어 가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우리집이 저쪽인데 집구경해볼래요?' '네, 빨리가요" 라는 대화가 들리시나요? 로물루스가 있는 좌측으로 끌려가는 사비니 여인들이 가족들이 있는 우측으로 손을 벌려 절규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왼쪽의 귀엽고 예쁜 금발의 아가가 헤르실리아의 아이입니다. 낮선 남자에게 끌려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우는 아가의 모습을 통해 비극적인 효과를 높이려는 푸생의 의도가 보입니다. 그 옆의 붉은색옷차림의 여인은 복식으로 볼때 유모로 추정할수가 있습니다. 거친 남자의 품에안겨 끌려가는 주인의 모습읋 보고 놀라워 하며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하는듯 합니다. 아니면 '나는 왜 안데려가니? 늙었다고 차별하는거?'라고 묻고 있는것은 아닐지.. 우측에 다른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놀라 우는 아기의 모습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거대한 이 그림에서 작은 아가 두명의 존재가 많은 상징성과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수 있을 겁니다. 평화와 순수의 상징인 아가와 거친 욕정에 몸부림치는 남자들의 잔혹함. 서양의 역사는 이러한 평화와 탐욕의 대립과 순환의 역사였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앞선 글에서 로물루스가 쌍둥이 형제였었다는 말을 했었는데요. 로마에 터를 잡은 쌍둥이 형제는 강을 중심으로 좌, 우로 나누어 권력을 나누었습니다,,하지만 다른형제인 레무스가 먼저 경계선을 침범하여 분쟁이 발생하며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동생도 죽인 사람이 이웃 동네 여자들을 강탈해 오는 정도의 만행은 어쩌면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쌍둥이형제의 어머니는 왕녀였습니다. 그녀의 숙부는 아버지의 왕권을 무력으로 빼앗은후 그녀를 신전의 무녀로 만들어 버립니다. 신전의 무녀는 평생을 순결을 지키며 독신으로 살아야 하기에 숙부는 자신의 뒷날을 안전하게 하기위한 방법으로 유일한 왕족인 그녀를 신전에 보내버린거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예측할수가 없는법. 그녀가 제사를 지내는며 잠깐 잠이든 사이 군사와 전쟁의신인 마르스가 그녀에게 반해 정을 통하고 가버립니다. 자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녀는 쌍둥이 형제를 출산하는데 그 아이들이 바로 로물루스와 레무스였던 겁니다.
숙부는 갑자기 생겨난 왕자들에게 겁을 먹고 아이들을 바구니에 담아 강에 흘려보내고 그아이들을 암컷 늑대가 젖을먹여 키우게되고 후에 목동들 사이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이러한 로마신화는 여러가지 해석을 낳게 합니다.
첫번째는 로마 건국의 정통성입니다. 비록 로물루스가 양치기 청년이었지만 핏줄은 왕족이었다는.,, 건국초기의 빈약한 부분을 이러한 신화를 통해 정통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이야기일수 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민족이나 국기에도 이와 비슷한 건국신화나 탄생신화가 있는것은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할수 있겠죠.
두번째는 순결한 여인과 군사와 전쟁의 신인 마르스의 후손이라는것을 강조하며 고대 로마인들에게 자신의 순수함을 증명하는 한편 마르스의 후손이라는 용맹성과 자신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세번째는 인류문명의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을 할수밖에 없고 전쟁을 하지만 목적은 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이러한 비논리적 논리는 이미 인류문명의 기원에서 부터 시작되는 인간들의 원죄라고도 할수 있을 겁니다.
딸을 빼앗으려고 칼을 빼어든 로마병사를 향해 힘껏 쥔 맨주먹으로 육탄전을 벌이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숭고한 부성애를 느낄수 있습니다. 과연 저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로마 병사밑에 쓰러진 딸의 절박한 표정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를 향해 칼을 빼어든 남자를 말리며 그래도 한손은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려 합니다. 로마병사들은 모두 손에 칼을 쥐고있고 사비니 남자들은 모두 맨손으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며 폭력의 잔인성에 소름이 돋습니다. 화면 중앙의 백마탄 병사의 품에 안긴 사비니 여인의 가족들을 향한 절규가 들리시나요?
헤르실리아Hersilia의 뒤쪽으로 로물루스의 발이 보입니다. 그녀를 안고 있는 로마병사는 그 와중에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황홀해 하는 모습을 감추질 못합니다. 풀어 헤쳐진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이 그녀의 당황스로움과 놀라움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펼쳐진 손의 모습은 자신의 아이와 가족을 향해 있지만 지금 그녀를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서양 결혼 풍습중 여인을 안고 가는 관습은 바로 이 사비니여인의 강탈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슴니다. 물론 평생의 반려자인 연약한 여인을 보호하고 존중한다는 젠틀멘 성향이 강하긴 하지만 푸생의 그림을 보고있자니 강탈과 포획의 표현이라는 설에 동감이 가기도 합니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8.30~1825.12.29]
[사비니의 여인들]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 1799 마리의 죽음(1793) , 나폴레옹의 대관》의 대표작이 있습니다. 1748년 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에 군림하였던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자입니다. 1774년 당시의 화가 지망생들이 동경하던 로마대상을 획득하고, 1780년까지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미술을 연구하였습니다.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 애국사상의 뛰어난 표현으로서 일약 유명해졌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혁신측에 가담하여 투옥되기도 하지만 혁명후 나폴레옹에게 중용되어, 예술적·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앵그르, 그로, 제라르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고전파 화가들은 모두 그의 밑에서 나왔을 정도입니다. 역사적 주제를 그린 작품은, 18세기 로코코미술의 우아·섬려한 것에 비해, 고대조각이 지니는 조화와 질서를 존중하고 장대한 구도 속에서 세련된 선에 의하여 고대조각 그대로와 같은 형태미를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형식성에 비해 다소 생동감이 결핍되는 현상도 보입니다 나폴레옹 실각 후 추방되어 1816년 브뤼셀로 망명하였고, 불행하게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예술이 정치와 권력에 너무 영합하면 그끝은 항상 좋지 못합니다. 특히 작가의 명성에는 커다란 흠집으로 남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비드는 그의 작품의 훌륭함과 미술사적 가치로인해 여전히 찬양받는 프랑스의 영웅이자 보물로서 지금도 루브르의 많은 커다란 벽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방패를 들고 창을 겨누고 있는 사람은 로물루스입니다. 그가 들고 있는 방패에 ROMA라는 글과 늑대의 젖을 먹고있는 쌍둥이 가 부조로 새겨져 있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좌우대칭 구도로 명확히 보여지는 가운데 화면 가운데 부분을 여인들과 어린아이로 채워 넣었습니다.
다비드는 푸생과 같은 프랑스 작가 이지만 두사람의 활동시기는 무려 150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사람의 그림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그리는데 많은 부분을 푸생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듯합니다.
첫번째는 전체적인 구도입니다. 푸생의 작품은 좌측은 로물루스를 위치시키고 가운데 부분은 여인과 아이들을 배치시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다비드의 작품은 거의 완벽한 좌우 대칭구도로서 보통 회화에서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 구도법이지만 긴장감과 짜임새있는 작품구성에는 효과적입니다. 좌우대칭구도법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푸생과 거의 일치함을 볼수있죠. 푸생의 작품이 한쪽으로 쏠리는 구도법으로(물론 우측의 단도를 든 남자와 부녀를 통해 전체 화면의 발란스를 잡았습니다)인해 다비드의 기념비적으로 보이는 좌우대칭구도법에 비해 약간 산만해 보이기는 하지만 손쉬운 구도법을 사용한 다비드 보다는 푸생의 작품이 160년전 이라는 세월을 앞서있는점에도 불구하고 더 훌륭해 보입니다.
두번째는 여인과 아이들의 등장으로 인한 평화의 상징과 무기든 남자로 표현된 폭력을 통한 인간성의 표현 입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푸생의 작품에는 잔인한 칼부림이 보이는 반면 다비드의 작품에 그러한 흔적은 최소화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창끝은 대부분 하늘을 향해있고 뒷 배경부분에는 오히려 칼날을 손에 쥐고 아이를 들고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투구를 벗어 상대방에게 인사하는듯한 장면도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다는 것은 이미 전의가 없다는것으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이장면은 그들이 이미 싸우려는 의지가 없고 화해의 장을 만들려 나온것이라는것을 예측해 주기도 합니다.
세번째는 이 그림을 다비드는 프랑스혁명(1789-1799)의 마지막 시기에 완성하였습니다(1799) 왕과 귀족의 폭거에 대항한 시민운동인 프랑스 혁명은 그들의 적인 왕과 귀족을 몰아내는데 성공 하기는 하였지만 혁명세력 사이에 많은 알력과 내분이 있었습니다. 혁명에 적극 참가했던 다비드는 이러한 혁명세력간의 내분을 화해시키기위한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 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네번째는 푸생의 그림에서는 두명의 아가가 나오지만 다비드의 그림에는 아이들의 수가 많이 늘어난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는 사비니의 여인들이 그동안 로마인들과 평화롭게 지내며 그들과 동화하며 잘 살아왔다는것을 암시 합니다. 또한 루물루스 방패 옆의 나이등 여인은 푸생의 그림에서도 등장하는 유모임을 알수있습니다. 기특하게도 다비드는 150년전 선배작가의 그림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존중해왔음을 유모를통해 표현했던 겁니다.
위에서 설명한것처럼 로마병사들에게 자신의 딸과 아내를 강탈당한 사비니인들은 돌아가 전열을 재정비 합니다. 그들은 로마에 선전포고를 한후 무려 네차례에 거쳐 전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 왕성한 젊은이들로 채워진 로마의 우세로 기울어지는 가운데 네번째 전투에서 드디어 로마인들의 신부가된 사비니 여성들이 전장에 아이들을 안고 나타납니다. 더이상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자신의 남편이 죽고 다치는것을 볼수 없었던 거죠. 그녀들은 자신의 가족을 향해 로마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보여주고 남편에게는 자신의 오빠와 아버지에게 겨눈 칼과 창을 내리라고 호소 합니다. 가운데 흰옷입은 여인은 로물루스의 부인인 헤르실리아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겨눈 창을 거두라며 로물루스에게 진실어린 눈길로 애원하는 중입니다. 그녀의 뒤에는 숨진 남편을 가슴에 품고 비통해하는 사비니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헤르실리아 앞에는 세명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우측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듯한 표정이고 가운데 아이는 잔뜩 화난 표정입니다. 좌측의 아이는 창든 아빠의 모습에 놀란듯 엄마와 함께 그런 아빠의 모습을 말리는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우측의 젊은 여인은 드러나 유방이 많이 부풀어 오른것으로 보아 이 아이들중 하나의 엄마로 보입니다. 커다란 유방은 모성애를 느끼게 해주기 충분하며 마치 사비니 남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듯 합니다.
'이 아이들을 보세요, 아빠의 손주들이고 오빠의 조카랍니다! 그리고 칼을 겨누고 있는 남자들은 사위이고 매제예요! 제발 그만 두세요, 사랑하는 딸을 과부로 만들고 아이들을 아비 없는 아이들로 만들고 만들고 싶으신 건가요?'
요즘에는 그런일들이 거의 없겠지만 옛날에 선을 봐서 결혼을 하거나 가정 형편 때문에 원하지 않는 시집을 가는 여자들에게 어른들은 이런말들을 했습니다. 가서 정 붙이고 살면 된다고.. 비록 납치 당한 처지였지만 로마남자들은 사비니 여자들에게 꽤나 잘해주었던 모양입니다. 몇년만에 아이들 낳아 잘 기르고 처음에 없던 정도 새록새록 쌓이며 부부간의 사랑과 정이 깊어졌던 겁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사비니왕의 다리를 잡고 애원하는 여인의 호소에 왕의 공격자세는 허물어 집니다.
결국 사비니조족과 로마는 화평을 성립하게 됩니다. 사실상 로마의 군사적 우세로 약간 기운 화평이었지만 오히려 로마는 사비니쪽에게 두 부족을 합치자는 제안을 먼저 합니다. 전투내내 열세였던 사비니족에게는 잃을것이 없던 제안이었기에 두부족은 합치게 되었고 로마는 이사건을 계기로 군사력을 확보하고 세력을 키워나갈수 있었습니다.
합병된 사비니족은 로마인들과 동등한 권리와 자격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정책은 계속 유지되어 그후 로마의 다른민족의 침략과 통합과정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훗날 로마제국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게 되는 이제도는 바로 로마인들의 사비니 여인강탈사건에서 얻은 교훈 덕분이었던 겁니다.
800년후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처음에 '신부강탈'을 계기로 시작된 로마 특유의 동화정책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 합니다.
"패자마저도 자신에게 동화 시킨다"
사비니 여인에 관련되어 수많은 작가들이 작품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회화, 조각, 음악뿐 아니라 현대예술에도 여전히 많이 사용되는 주제입니다. 영화, 사진 퍼포먼스등에는 지금도 유효한 작품 소재이고 앞으로도 많이 사용될것 같습니다.
볼로냐, 베르니니, 루벤스등 거장은 말할것도 없고 피카소도 사비니여인 작품을 제작한바 있습니다.
지오반니 볼로냐(1583)Giovanni Bologna 사비니여인의 약탈 Giambologna's Rape of the Sabines - Florence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 입니다. 쟘볼로냐라고도 명명되는 이 위대한 조각가는 르네상스 후기 16세기 매너리즘조각의 징후를 보여주는 최고의 테크니션 작가입니다. 아래 작품도 청동으로 제작한 그의 사비니 여인의 약탈이란 작품 입니다. Pietro Paolo Raggi (1646 - 1724)바로크 시기의 이태리 작가 입니다.Peter Paul Rubens (1562∼1641), Rape of Sabine Woman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의 작품입니다
Bernini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1627-29
1598.12.7~1680.11.28 베르니니 이태리의 유명한 조각가 이지만 회화도 훌륭합니다. 바로크 조각의 대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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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소모임가입 감사드리구요 많은 참여 부탁 드릴꼐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인상적입니다.
네,,인상적,,그러시군요..,감사합니다,,^^::
와~보스코님 수고 덕분에 좋은글 보고 가여~~공부 많이 되었어여~~좋은글 담아가도 될까요?^^고전도 참 입이 쩍 벌어지게 멋진 그림도 많지만 개인적으로 피카소처럼 약간은 자유분방한 작품이 좋아요^^ 개성있고 독특한 그림요^^ 피카소그림을 보면 정말 대단한 화가였다는 생각밖엔 안들어여^^천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