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자
(마 23:1-12)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요즘 우리나라에 대통령 위에 상왕이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대통령도 자신의 입으로 무슨 말을 못하겠다고도 합니다. 대통령 부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통령 부인은 어떤 공적 지위도 없습니다. 공무원들에게 지시할 권한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공적 기관은 대통령 부인이 어디 간다고 하면 교통 통제를 하고, 지시하면 지시사항을 떠받들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여당에서조차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하겠습니까? 스스로 대통령과 같은 지위와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제넘은 행동은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아직도 왕게임을 하듯 놀이를 하면서 국가 시스템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도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권력은 국민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섬기는 힘입니다. 자기편에 있는 사람만 살피고, 국민들에게는 자괴감만 안겨준다면 그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에 좋은 정책이라고 할지라도 국민에게 고통을 준다면 자기 생각을 바꾸고, 올바른 정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남북이 최고의 긴장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북한은 모든 연결도로, 통신, 회담 창구를 막아버렸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전쟁 불사’를 외치는데 전쟁이 나면 우리 국민이 희생됩니다. 어설픈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지도자 때문에 지금 국민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무엇이 옳고 좋은 것인지를 판단하고, 지도자를 선출해야 됩니다.
지도자는 정치지도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공동체에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권력이라고 서로 지도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좋은 지도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교회에도 분명히 지도자는 있습니다. 가르치는 교사가 있고, 모임의 회장이 있습니다. 이들도 지도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지도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1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지도자는 섬기는 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섬기는 자가 아니라,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면 낮아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옛말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였습니다. 속이 꽉 찬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아마 초대교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였을 것입니다. 새로운 복음,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기 때문에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할 것입니다. 열두 사도가 있지만 완성된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할 수도 있고,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관계에서 복음을 가르칠 때 갈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 공동체는 교인들이 유대인 개종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의 갈등이 남아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율법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전통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교인 중에는 개종 전에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전통을 내세우며 교회에서 지도자 노릇을 하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도들 중에도 베드로, 야고보, 바울 등 여럿이 바리새파였고, 율법학자로서 교육을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지도자의 자질도 함께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5-7장 산상설교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는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자기 생각으로 율법을 해석하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사람의 뜻으로 해석하여 하늘의 가치를 땅의 가치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 계명을 지켜 안식일에는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살리는 것을 무엇보다도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인데,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율법보다 생명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교회 혹은 유대 지도자인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자기 생각을 가르치며 높은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는 공적인 지위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잘 알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을 인정해주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르치고, 판단할 권한이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권한 밖의 일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가르치고 판단하는 권한이 아니라 백성을 돕는 의무를 가졌을 뿐입니다.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 율법학자에 대해 23장에서 호되게 비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비판했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이 잘못이라고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바리새인, 율법학자의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을 예수님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복음을 믿는 자는 그들보다 나은 신앙,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5:20)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 자기가 행한 신앙 행위를 말하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 율법학자는 무조건 반대하고, 배척해야 된다고 일반화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잘못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만 하고,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비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1장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지도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도자, 가르치는 자라고 하며 백성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고통에 빠뜨리면서 높은 자리에 앉아 군림하려 하고, 대접받으려고 하는 행위에 대해 예수님은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도와주어야 하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판단하려고 하니까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핑계 삼아 협박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이런 지도자는 ‘본받지 말라(3절)’고 하십니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고 스스로 지도자로 생각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10절) 끝까지 섬기는 자, 다른 이들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섬김의 지도자가 현실에서는 존경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고, 그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을 과시하며 존경하기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겸손한 지혜자의 말보다 힘 있는 권력자의 말을 믿는 것입니다. 힘은 돕는 힘이 아니라 억압하고, 처벌하는 힘으로 생각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는 섬김의 지도자가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의 힘을 가진 지도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 힘을 드러내는 것이 ‘격노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 혹은 그리스도인 지도자는 섬김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섬김의 지도자, 희생의 지도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대접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대접받으려고 합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는 자기가 주님의 자리에 앉아 판단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신적 권위를 내세워 섬김을 강요하고, 존경을 강요하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가르침도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맡긴 지도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떤 자리에서든지 지도자가 되려면 주님을 닮은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대접받고, 섬김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아니라, 섬기고, 자기를 희생하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 평화, 사랑입니다. 모든 이의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폭력과 차별을 거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과 평화를 주시려고 주님은 오셨습니다. 하늘의 가치는 자기희생이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희생하여 세상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사랑은 섬김과 희생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평화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