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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헤지펀드의 황제’ 하면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를 떠올린다. 소로스의 이름 앞에는 ‘20세기의 마이더스’, ‘현대의 연금술사’, 유대 금융마피아의 대부’등과 같은 화려한 별칭이 따라 다닌다. 그는 한 강연에서 어떤 사람으로 불리기를 원하냐는 질문을 받고 스스로 투기가Speculator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단순한 투기가가 아닌 “금융적, 박애주의적, 철학적 투기꾼 (Financial. philanthropic, philosophical speculator)으로 불러달라”고 제안한 적도 있다. 이 얼마나 안 어울리는 단어들의 조합인가? 철학, 금융, 투기, 박애. 그러나 이 모든 요소들이 그의 내면에는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조지 소로스가 4백만 달러의 헤지펀드 운용을 시작한 1969년 당시 그의 펀드는 존스의 모델을 따르는 수많은 작은 헤지 펀드 중의 하나였다. 그 후 그는 국제적인 투자를 하면서 글로벌 마크로Global-Macro라고 불리는 헤지펀드의 새로운 영역을 성공적으로 개척함으로써 오늘날 헤지펀드의 대명사가 되었다. 소로스가 글로벌투자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극적인 삶에서 찾을 수 있다.
성장과정
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육군장교로 군대생활을 하다가 전범으로 체포돼 러시아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볼셰비키 혁명의 와중에 탈출했던 파란 만장한 삶은 산 사람이었다. 그는 야심만만하고 대담하면서 치밀하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고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자신의 아들을 헝가리 관리의 양자로 입적해 수용소행을 피할 수 있었다. 조지 소로스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밝혔다. 특히, 역경 속에서 ‘생존’하는 방법에 대해서.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1947년 소로스는 영국으로 떠났고, 이곳에서 외롭고 궁핍한 생활을 하며 LSE 입학 준비를 했다. 영어점수가 모자라 재수를 한 끝에 1949년LSE(London School of Economics)에 입학해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케인즈, 비트겐슈타인, 하이예크등의 이론에 접할 수 있었다. 철학자 칼 포퍼 교수의 이론에 매료 되었다. 당시 그는 철학자로 인생을 살기를 원했다. 그의 사상이나 행적은 칼 포퍼의 철학과 많은 연관을 갖고 있다.
칼 포퍼(1902-1994) 교수의 영향
그가 세운 퀀텀펀드에서 ‘퀀텀’ 은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하이젠베르크 Heisenberg, Werner Karl, 1901~1976의 “불확정성 원리” Uncertainty Principle of Quantum Mechanics 에서 따온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
고전역학에 의하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전자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항상 동시 측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물리량의 측정값이 불확정하다는 것은 측정기술이 불충분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입장에서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은 동시에 확정된 값을 가질 수 없고, 쌍방의 불확정성에 의해 서로 제약되어, 입자의 위치를 정하려고 하면 운동량이 확정되지 않고, 운동량을 정확히 측정하려 하면 위치가 불확정해진다. 이러한 견해는 1927년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한 불확정성원리에 의해 정식화되었다. 이 원리의 기본 골격은 입자성을 특징짓는 위치의 확정성과 파동성을 특징짓는 파장의 확정성은 서로 제약을 받고 입자성과 파동성이 서로 공존한다는 것이다.
칼 포퍼 교수는 그의 명저 ‘객관적 지식’Objective Knowledge에서 그의 독창적인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원리’을 설명하면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인용했다. 절대적인 진리, 즉, 객관적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과학적인 명제는 그것이 틀렸다는 증거가 발견될 때 까지만 진실 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과학적인 명제는 반증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근대의 세계는 아이작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화학의 주기율표, 열역학법칙, 아보가드로 수 등 자연의 원리가 결정론적이고 연속적인 절대 진리 속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보인다는 개념이 충만하던 고전물리학이 절대진리라고 믿던 시기였다. 그런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해 고전물리학의 절대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자 구미의 지성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연을 이해하는 파라다임 Paridigm의 변화를 느끼면서 칼 포퍼는 “기존에 절대적이라고 믿게 했던 과학적 방법론이 왜 틀렸을까?” 라는 문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독창적인 과학적 방법론, 인식론, 진리론을 만들어 냈다.
불확정성 원리를 통속적으로 해석하자면,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빛을 쏘이면 빛 입자가 전자에 충격을 주어 위치가 바뀌므로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으며, 전자는 확률적으로 어느 정도의 공간에 분포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관찰의 대상이 관찰의 수단에 의해 변화되는 경우 절대적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조지 소로스가 주식 시장을 설명할 때 오류의 가능성Falsifiability, 진리의 불명확성Uncertainty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상대성, 상호 영향을 주는 반사성 Reflexivity 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준 것이다.
또한 칼 포퍼 교수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보인 그의 저서
“역사주의의 빈곤Poverty of Historicism”,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모두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미래를 예단하는 거대 담론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궁극적인 진리를 알고 있는 듯이 주장한다는 점에서 논리적인 오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접근은 결국 인간사회를 고통과 퇴보로 이끌어갔다."고 주장하며 "인류사회는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때에만 진보하며, 궁극적인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열린 생각과 행동을 보장하는 사회만이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해서 조지 소로스는 ’열린사회’ Open Society 운동을 열렬히 전개하고 있다.
반사성 이론Theory of Reflexivity 으로 발전한 그의 투자철학은 이러한 칼 포퍼의 철학에 기초해 정립됐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시장이 균형을 이룬다는 기존의 정설을 거부한 소로스의 투자 철학인 "수요와 공급이 주어졌다는 가정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시장참여자들의 생각과 시장의 움직임은 상호 영향을 미치는 재귀적인 관계를 갖는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의 기대에 의해서도 좌우된다."는 생각 역시 포퍼 교수의 이 같은 철학에서 비롯됐다.
*반사성 이론
Theory of Reflexivity경제 현상을 기본적 가치Fundamentals에 의해 가격변수가 결정되어 나가는 균형달성과정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근대경제학의 일반 균형이론과는 달리, 기본적인 가치와 가격간에 상호작용을 주고 받는 동적인 관게가 끊임없이 지속되면서 가격의 불안정성이 증폭되기도하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이론.
사회 초년시절
LSE를 졸업한 소로스는 소규모 팬시용품 제조업체에 견습생으로 일 하다가 1953년 런던의 한 증권사에 취직해 일반 사무와 국제차익거래Arbitrage 부서에서 트레이더 보조 역할을 했다. 맡았다. 그러나 여기서 빛을 보지 못하고 흥미도 느끼지 못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간 F.M.메이어 증권사에 입사했고 그가 맡은 일 역시 국제차액거래 트레이더였다. 1959년 독일출신 아날리제 위츠샤크와 결혼 했고 보다 큰 증권사인 웨트하임 & 컴퍼니에 입사했다. 이 회사에서는 런던과 뉴욕에서 거래되는 유럽계 증권의 가격차이를 이용해 그 차익을 챙기는 것이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외국증권 분석가 Analyst로서도 상당한 실력을 인정 받았고 50만 달러 정도의 큰 재산을 형성했다. 그러나 몇 차례의 투자에서 큰 손실을 겪어 재산을 날렸으며 케네디 대통령이 국제수지를 맞추기 위해 외국주식투자에 15%의 특별세를 부과한 이자균등세Interest Equalization tax가 도입하자 이 거래는 중단되었고 1962년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직장과 사업에서 어려움이 계속되자 1962년부터3년간 철학공부에 몰두했다.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으며 “의식의 짐” The Burden of Consciousness라고 하는 철학 논문을 썼다. 칼 포퍼 교수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논문으로 포퍼 교수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나 조지 소로스는 이 때 일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중에 읽어보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헛바퀴를 돌았다는 걸 알고 다시 투자로 돌아섰지요.”
1963년 아놀드 & S. 블라히뢰더Arnhold and S. Bleichroeder에 애널리스트로 다시 들어갔고 주식 포트폴리오 투자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회사에서 그는 1969년 더블 이글(Double Eagle)이라는 이름으로 4백만 달러의 헤지펀드를 시작했다. 헤지펀드의 창시자인 A.W. 존스와의 거래에서 힌트를 얻은 그는 해외에 펀드를 설립하면서 자신의 돈과 가족의 돈도 투자했다 이때부터 그는 반사이론에 따른 과열과 폭락의 시나리오를 적용하는 투자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 것이 나중에 퀀텀펀드로 발전했다.
퀀텀펀드의 성공
소로스는그의 나이 43세인1973년, 더블 이글 펀드를 근간으로 1천3백만 달러의 소로스 펀드Soros Fund Management를 짐 로저스Jim Rogers와 함께 설립했다. 헤지펀드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설립 초기 직원이라고는 트레이더 역할을 맡은 소로스와 애널리스트 역할을 맡은 짐 로저스, 그 외에 비서 두 명이 전부였다.
주로 주식을 투자를 했으나 단기 매매도 했고 레버리지도 썼다. 1971년부터 일본 주식에 투자했을 정도로 글로벌 투자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소로스는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정교한 투기를 하기 시작한 첫 전문투자자다. 국제적인 외환시장과 주식시장, 채권시장, 상품시장을 모두 넘나들며 활동한 첫 번째 투자자인 셈이다. 특히 1970년대 초 고정환율제가 붕괴된 뒤 외환시장을 매개로 한 글로벌 투자의 단초를 이끌어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기회라고 생각되면 과감히 차입금까지 쏟아 붓는 투자방식으로 레버리지 효과를 극대화했다. 주식에서는 기관투자가들이 선호하던 인기주식들을 과감하게 공매도 하기도 했으며 이를 통해 1973-74년의 주가 폭락기도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1979년에는 퀀텀 펀드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때 운용규모가 1억 달러로 늘어났고 소로스 자신의 지분이 2천5백만 달러가 되었다. 그러나 직원 수는 10명이 넘지 않았다.
하지만 소로스에게 펀드의 급성장은 새로운 부담이 됐다. 우선 펀드의 대형화에 반대하는 로저스가 1979년 퀀텀펀드를 떠났고, 소로스는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해야 했다. 또 같은 해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주가조작 혐의로 고발 당했다. 소로스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도 1980년대 초이다.
1983년에는 53세의 나이로 28세의 수잔 웨버와 결혼했다.
1981년에는 23%의 투자손실을 기록, 펀드 출범 후 최악의 투자수익률과 함께 많은 투자자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퀀텀펀드는 그러나 다음해에 57%의 투자수익률을 올리며 부활했고, 펀드규모는 1985년에는 10억 달러의 자산으로 늘어났다.
1985년 플라자 협정 이후 발생한 극적인 환율 변동시에 대규모 환투기에 성공함으로써 1985년 수익율을 무려 121%로 올려 놓았다. 1985년 9월 22일 월요일에 세계선진공업 5개국이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모임을 갖고 미국 달러 가치가 지나치게 상승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러한 논의에 앞서 환율이 크게 변동될 것이라는 점을 간파한 조지 소로스는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 통화를 대량으로 매수하여 큰 이익을 냈던 것이다. 이 과정은 그의 저서 ‘금융의 연금술’The Alchemy of Finance에 잘 설명되어 있다.
1987년 10월의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 직전 소로스는 일본 주식시장의 붕괴를 예측하고 일본 주식을 대규모 공매도했다. 그러나 뉴욕 증시가 먼저 폭락했고, 그는 10월 16일(금요일) 급락 후 10억 달러를 추가로 투자해 S&P500 지수선물을 대규모로 매입했다. 하지만 10월 19일 블랙 먼데이 에 뉴욕 시장은 22.6%가 폭락했고, 그는 결국 보유 주식과 선물을 대규모로 처분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주식과 선물을 처분하고 나자 시장은 다시 반등했다. 이러한 거래로 펀드가 파산 위기에까지 몰렸고 1987년 10월의 대 폭락장에서 소로스는 8억40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이는 당시 펀드 전체 자산의 28%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1987년 투자수익률은 14%를 기록했다.
*블랙 먼데이
1987년 10월 19일 미국의 뉴욕 증권시장에서 비롯된 주가폭락 현상은 다우존슨 공업지수(DJLA)가 508포인트(22.6%)나 하락하면서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증권, 금융시장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 암흑의 월요일 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주식파동은 수일내에 일본, 영국, 싱가포르, 홍콩의 시장에서 큰 폭의 주가폭락을 가져와 전세계적으로 1조 7,000억 달러에 달하는 증권투자 손실을 초래하였다.
많은 금융, 증권관계자들은 주가폭락의 원인을 누적되어온 미국의 재정적자 및 국제지수적자, 1982년 이래 지속된 고주가현상, 금리상승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기업합병규제법규의 개정움직임등 구조적이고 기술적인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았다. 한편 당시 레이건 대통령의 특명으로 조직된 브래디 특별조사위원회는 주가하락의 배경에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 이외에도 "프로그램 트레이딩"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자동주식거래 장치에 연계된 주가지수 선물거래가 있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소로스가 사실상 펀드운용의 일선에서 물러난 1989년까지 20년간 퀀텀펀드의 년 평균수익률은 34%에 달했고, 한해 100%가 넘는 투자수익률을 2번이나 기록했을 정도다. 퀀텀펀드의 이 같은 놀라운 투자수익률을 바탕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헤지펀드로 성장해 나갔다.
1988년 드레퓌스의 펀드매니저였던 스탠리 드러켄밀러Stanley Drukenmiller가 합류했다. 스탠리는 소로스의 저서 금융의 연금술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며 토론을 해보자고 스스로 찾아왔고 이를 계기로 소로스 팀에 합류 했다. 드룩켄밀러가 거시투자를 책임지게 되었고 소로스는 동구의 붕괴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중국, 러시아, 동유럽에 자주 방문하게 되면서 실질적인 펀드운용에서는 물러났다.
퀀텀펀드와 쿼타펀드, 퀘이사펀드 등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를 일군 소로스는 1989년 동구권의 개방과 미국 등 31개국에서의 자선사업을 위해 설립한 '개방사회기금(The Open Society Fund)'의 관리를 위해 사실상 일선 펀드운용에서 물러났다. 물론 퀀텀펀드 등의 지주회사라고 할 수 있는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의 회장을 맡고 있었지만 퀀텀펀드는 1988년 스카웃한 드레이퓨스 출신의 스탠리 드러켄밀러에게, 쿼타펀드는1992년 스카웃한 로스차일드 출신의 닉 로디티에게 맡겼다.
열린사회 재단활동의 시작
1980년대 초부터 국제적인 ‘열린사회’를 위한 소로스 재단 설립사업을 적극적으로 시작했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등 동구국가들과 남아프리카 등지를 방문하며 반체제 민주화 인사들을 도왔다. 1984년에 헝가리재단을 세웠고 1986년 중국재단을 세웠고 198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재단을 세웠다. 1992년에는 18개 국가에 소로스 재단이 설립되어 있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동유럽에 민주적 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치지도자들을 만나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강한 정치성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고 많은 곤란을 겪었다. 중국재단은 독립성을 유지하기 어려워 1989년 문을 닫았다. 중국재단의 주요인물들은 천안문 사태 이후 10년 동안이나 연금당했다.
출처 : 헤지펀드 투자클럽
첫댓글 투자를 하다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의해 실제 존재하는 세상을 왜곡해서 바라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가는 얼마나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가와 연결되기 때문에 투자 수익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칼포퍼나 소로스의 영향이 컸었던 같고 투자에 있어서 늘상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자세로 투자에 임했던 것이 지금까지의 투자의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칼 포퍼와 조지 소로스의 철학은 가치투자자에게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