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 전부터 대학원생들과 올해 세미나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8월 11일 오전 10시 학교를 출발해, 중앙고속도로를 거쳐
서안동에서 풍산 하회마을을 거쳐
34번-31번 국도를 타고 청송 주왕산 자락에서 이틀간 세미나 겸 휴가를 보냈다.)
2006년 8월 13일(일) 오전과 오후 사이
마침 나도 고향을 들리고 싶었고
학생들도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하여
서울 오는 길목에 고향을 들러
영창학교 총동창회에 가기로 했다.
우리 일행 9명은 흰색 승용차 세대에 나눠타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돌아오는 길은
안동에서 예천을 거쳐 산양쪽에서
영순면 사무소 쪽으로 해서 고향으로 접어들었다.
퇴강(강골)-디시-응골에서 동무지를 향한다.
고향을 지나치며
그냥 와서는 안된다는 것 때문에
늘 아버지 산소에 가서 고하고
큰 집에 들러 안부를 묻고는
누가 알아보면 차에서 내리어 인사를 건네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한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나만의 버릇일까?
무엇인가 빚지고 있다는 께름칙함이 늘 뒤따른다.
고향과는 이렇게 점점 멀어지는가?
노후를 이곳에서 보낸다는
생각이 아직은 들지 않는 것은 나만 그런가?
동무지에서 하율을 거쳐 영창학교에 갔다.
영창학교는 1948년 개교를 해서
1989년인가 폐교를 한 셈이다.
그간 1,900여명의 졸업생을 냈단다.
지금은 3-6학년까지 두 개 학년씩
복식학급으로 영순학교의 분교로 운영되고 있을 뿐이다.
한층 더 초라해진 학교 모습에
줄어드는 농촌의 크기만큼이나
학교는 작아보였다.
운동장에는 모래를 깔았지만
질척이는 곳이 여전했고
10명도 안 될 전교생이 밟아도 밟아도
잡초는 머리를 들고 일어났기에
운동장에는 듬성듬성 잡초 무데기가 한창이다.
8월의 더위는 대단한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부적대는 운동장에는 제법 많은 자동차들이 차고 있었다.
학교를 들어가는 길목이 개울을 넘기로 되어 있어,
큰 차들은 조심스레 들어가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 것같다는
스릴이 있었다.
막상 도착해 보니까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미안한 김에
찬조금으로 접수를 하고
수박, 떡, 포도 등을 접시에 차려주는 것을 조금 먹고
동창회 명부를 받았다.
바로 옆에 두고 사람을 알아볼 수 없어서
이력이는 방송을 부탁해서 인사를 나누었다.
대흠이와 이력이를 만났다.
대흠이는 트럭을 몰고 어디를 다녀온다고 하여
다음에 만날 기약을 하였다.
이력이는 옛모습이 역력하였다.
그의 얼굴은 그의 이력이었다.
산양쪽에서 방앗간을 운영한다고 하는데
지난해 불이 나서 큰 손해를 보았다고
씁쓸해 하며, 인생 다 그런거지 하는 투였다.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
서00 형, 홍경석이 아재, 홍영탁이 아재, 홍문흠/무름이 할배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참석한 동문들은 대부분 50대 이상이고
60대 이상의 경로잔치 분위기다.
졸업 기수 30회 전후로 한
갓 중년들이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시의회 의원들이
인사를 다니고 있었다.
학교를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옛날의 추억을 묻혀서
퍼즐을 맞추어봤는데
다 꿰어지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리라.
그래서 언젠가는
다같이 모여서 맞추어봐야 한다.
분위기도 그렇거니와
조용히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물탕거리를 지나 좌회전해서 금포, 백포로 향하려다
길을 잘 못 들어
그냥 사벌, 매호, 태봉을 거쳐
영강 저쪽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으면서
점촌 쪽으로 향했다.
점심을 먹으러
함창쪽 영강변에 있는
태봉 숲에 들렀다.
예상키로는 그곳이 북적대고
맛난 음식도 팔려니 했지만
몇몇 이들만 피서를 와서
챙겨온 점심을 먹고 있었다.
태봉에서 응골, 옛 욱골, 서당골을 바라보았다.
나즈막한 산자락에
응골은 푸른 기와집의 세 채가 보일락말락한
산골이었다.
영강은 여전하지만
강의 도도함은 찾을 길 없었다.
상류에 댐이 생긴 이후
물은 줄어들고
키낮은 갈대들만 어지러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강에서 삼삼오오 고기를 쫓는 아이들이
한참만에 건져올린 것은 피라미 수마리와
다슬기(올갱이), 조개였다.
전에 조개는 잡히지 않던 곳이었다.
나절은 지어가고
학생들에게 내 고향에 와서
배고프게 하기는 싫었다.
영신 숲? 문경새재? 수안보?
어디로 옮길까 하다가
다들 지쳐가는 듯하여
일단 중부내륙고속국도를 올라타서
문경휴게소에서 점심을 시켜먹을 수밖에 없었다.
더 멋진 고향을
더 맛나는 고향을
더 인심나는 고향을
보고 싶어하고
겪고 싶어하지만
고향은 내가
멀리 있는 거리만큼이나
내가 오래 잊고 있는 만큼이나
낯선 곳이 되어 가고 있었다.
경북 문경군 영순면 율곡1리 738번지
643-15였던가?
우편번호는 잊었네, 그려.
편지를 받을 이도
편지를 쓸 일도 없었으니...
첫댓글 어릴 적의 고향이 아니란 느낌이지. 왜! 너도 아주 마니 변했으니까.더군다나 반겨 주는 이도 없고 좀 어색하고 서운하고 뭐랄까 점 점 멀어지는 느낌만 받고 갔겠네. 버선발은 아니어도 따뜻이 대접을 하나 마련해야 하는데 참 세상 사는 일이 씁쓸하다.
우리 언젠가는 한 번 쯤 만나서 도란 도란 옛이야기 나누면서 그 동안의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다.그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기
선희야! 사랑과 야망에 나오는 선희같이 착하게 말하는구나. 너를 만나는 것은 설레는 일이지. 그렇다고 이번에 못 만났다고 서운하지는 않았어. 나도 일행이 많다보니 선뜻 움직여지지 않았지. 감사..
주왕산 자락에서는 누가가 가장많은 세미 나던가? 학생들? 아님 자네? 두달동안 준비한 셈을 이틀동안에 다네면 10명중에 하나는 곡소리 났겠네? ㅋㅋㅋㅋ 응골동네 골알들어서면서 옛우리집은 잘있던가? 그래도 함 쳐다보기라도 할것이지 걍 악세레다 밟고 지났는가? 하기야 이젠 나도 응골동네 갈일이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없어 졌네?? 서운 섭섭하구만 .......... 우편번호는 맞았는데 율곡1리가 빠졌네 저래만 편지 안들어가여 하기야 하쿤네여가 이름을 다알아서 영순면만 쓰면 배달이 되긴 하지??????변경된 우편번호는 기억이 없어도 육사삼에 일오는 않잊혀 지네? 어릴적 총기가 정말 무서운가봐? 암튼 동창회 참석하느라고 고생핸네ㅎ
옛 골안 길을 지나왔지만 이미 주인이 바뀌어 버리면 더 이상 우리 집이 아니제. 어매, 아배 계실 적에 고향이고 우리 집이지. 그래도 고향만한 포근한 곳은 없어. 643-15가 맞다니! 자네 총기야 어디 가는감. 감사하이.
이니, 수나기, 시누기, 윤수이, 이나, 써니, 추니리.....마카 다 어디갔어? 살아가는 이야기도 해주고 그러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