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해군수 조우량(興海郡守 趙友良)
경상도 흥해군은 동쪽으로 영일현(迎日縣)의 경계까지가 21리이고, 남쪽으로 경주부(慶州府) 안강현(安康縣)의 경계까지가 31리이며, 서쪽으로 같은 부 신광현(神光縣)의 경계까지가 9리이고, 북쪽으로 청하현(淸河縣)의 경계까지가 13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퇴화군(退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의창군(義昌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이 경주(慶州)에 소속시켰고,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이 국사(國師) 천희(千熙)의 고향이라 해서 승격시켜 군(郡)으로 삼았고, 본조에서도 이에 따랐다.
관원 군수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퇴화(退火)미질부성(彌秩夫城)의창(義昌)곡강(曲江)오산(鰲山).
성씨 본군 : 배(裵)최(崔)이(李)장(張)정(鄭) : 장기(長?)이다. 이(李) : 덕안(德安)이다. 주(朱) : 웅신(熊神)이다.
형승 땅이 다해서 막혀 있다 : 권근(權近)의 <읍성기(邑城記)>에 있다.
산천
도음산(禱陰山) : 고을 서쪽 5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망창산(望昌山)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고령산(孤靈山)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별산(鱉山)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오산(烏山) : 고을 북쪽 16리에 있다.
별내현(別乃峴)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바다 : 고을 동쪽 16리에 있다. 포이진(包伊津) : 고을 북쪽 20리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곡강(曲江) : 고을 동쪽 7리에 있는데, 근원은 경주 신광현(神光縣) 마북산(馬北山)에서 나왔으며, 북으로 흘러 고을 북쪽을 지나고, 동으로 흘러 고령산(孤靈山) 아래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두모적포(豆毛赤浦) : 고을 동쪽 15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만호영(萬戶營)에 있었고, 지금은 칠포(漆浦)로 옮겼다. 장생지(長生池) : 고을 북쪽 8리에 있다. 돈각지(頓角池) : 고을 북쪽 9리에 있다. 서림지(西林池) : 고을 서남쪽 3리에 있다.
신증 방어진(?魚津)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왜우음진(倭?音津)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토산 전복대구어(大口魚)청어홍합광어방어사어(?魚)고등어김해삼미역세모(細毛)우모(牛毛)죽전(竹箭) : 성황산(城隍山)과 망창산(望昌山) 강 기슭에서 난다.
신증 송어홍어송이은구어(銀口魚).
성곽 읍성 : 석축이며, 둘레가 1천 4백 93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3개가 있다.○ 권근(權近)의 기문에, "고개를 넘어 동남쪽으로 가면 바다 위 수백 리에 이르는데, 군(郡)이 있으니 흥해(興海)이다. 땅이 제일 끝까지 가다가 막혔는데 물고기와 소금과 땅이 기름져서 이로움이 있다. 그 옛날에 여기 사는 백성들이 편안하였었는데, 중간에 왜적의 난을 입고 나서부터 점점 메마르고 황폐해 갔다. 경신년 여름에 이르러 더욱 화를 몹시 받아 고을이 함락되고 불타서 백성들이 학살과 약탈을 당하여 거의 없어지고, 그 중에 겨우 벗어난 자는 흩어져 사방으로 달아났었다. 마을은 빈 터만 남았고 무성한 나무들만 길을 가리니 이 고을 원이 된 사람도 먼 마을에 가서 살고 머리를 움츠려 감히 고을 속에 들어오지 못한지 수년이 되었다.
정묘년에 이르러 국가에서 군 남쪽에 병선(兵船)을 두어 바다와 포구를 통하게 하여 적들이 오는 것을 막은 연후에 떠돌던 백성 중에 고향을 생각하던 자들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성지(城池)의 견고함이 없었기 때문에 모여서 살지 못하고 왕왕 산골짜기 속에 굴을 파고 살면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가 때때로 나와서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았으며, 왜적이 이르면 능히 서로 구하지 못하고 도망해 숨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령이나 고관들이 먼 마을에 살면서 감히 오지 못하기는 전과 같았다.
무진년(1388년) 겨울에 김제(金堤) 조우량(趙友良) 후(候)가 원이 되어 홀로 와서 마음을 다하여 다스리더니, 이듬해가 되자 정사도 닦여지고 백성들도 화평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에게 묻기를, '우리 고을에는 성이 없어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하기로 내 성을 만들어 쌓고자 하는데 너희는 이것을 꺼리는가?'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진실로 우리들이 원하는 바인데 누가 감히 꺼리겠습니가.' 했다. 이에 이것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인부를 보내달라 청했으나 이것만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이에 군의 어리고 늙은 백성 겨우 수십 명을 합해서 8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친히 채찍을 잡고 감독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부지런한 자는 위로하고 게으른 자는 경계해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도 않고 엄하게도 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모두 즐거이 일을 하였다. 통양만호(通洋萬戶) 백공 인관(白公仁琯)이 군사 50명을 보내어 도와서 시월에 이르러서 일을 마쳤다. 이리하여 백성들이 모두 모여서 집을 지으니, 떠돌던 자들이 날로 더욱 모여들었다.
그 해 겨울에 벼슬이 갈리자 백성들이 사랑하고 사모해서 마치 젖 먹는 자식이 그 어미를 잃은 것 같이 여겼다. 이리하여 그(조우량)의 정사의 자취는 빛나는 것이 몇 가지 있는 바, 이것을 조정에 말해서 다시 오도록 하기를 청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또 그 일을 기록하여 성루(城樓)에 걸어두어 그의 선정을 사모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붙이려 했으나 이것도 부탁할 곳이 없었다. 경오년 봄에 내가( 양촌-권근) 이곳으로 귀양왔었는데, 이 때 만호 백공(白公)이 원이 되어 조후(趙侯)가 다 하지 못한 것을 더욱 이루어 못을 파서 밖으로 형세를 험하게 하고, 문에 자물쇠를 채워 그 안을 견고하게 한 뒤에 그 성이 더욱 완전히 굳어졌다.
군의 늙은이 전 지태천군사(前知泰川郡事) 안성언(安成彦)군과 전랑장(前郞將) 장표(張標)군과 이회(李?)군 등 몇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여기서 나고 여기서 자라고, 이제 또 여기서 늙었는데, 우리 원이 되는 분이 혹 1년에 한번 바뀌기도 하고 혹 한해 걸러서 한 번 바뀌기도 해서 지금까지 무려 수 십 명이 갈려 갔으나, 청렴하고 공변 되고 명민하고 위엄과 은혜가 함께 나타나서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감히 속이지 못하는 이는 조후(趙侯)에게 비교할 만한 이를 일찍이 보지 못했을 뿐아니라, 더욱이 우리 군의 쇠잔하고 피폐하기가 이때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으며, 일이 많이 쌓이고 문서의 번거로움이 또 지난해 전답을 측량하던 때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후는 피폐해진 뒤에 일을 이어 받았고, 일이 많이 생긴 때를 당해서 동자 하나와 말 한 필로 여기 왔건만, 자기 몸에 쓰는 것을 몹시 절약하여 아침과 저녁으로 쌀 창고를 조사해서 비용을 주고, 없는 사람을 구제해서 여러 가지로 힘을 써서 관청에 쓰는 것을 넉넉하게 하고, 일찍이 종이 한 장도 백성들에게 받지 않았습니다. 그 땅을 측량할 적에 두둑 수의 많고 적은 것과 토질의 좋고 나쁜 것과 또는 곡식이 수확될 것 등을 한 번 눈에 거치면 잊지 않았기 때문에, 장부를 하는데는 빠르고 정밀하고 자세하기가 여러 고을 중에 제일이었습니다. 또 적을 막는데 용맹이 있어서 그들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곧 말에 올라 먼저 달려가기 때문에, 왜적이 두 번이나 왔어도 침노하지 못했습니다. 이 역사를 하는 데는 백 명이 못되는 무리를 가지고서 한 사람도 매질하지 않고서 한 절후를 거치지 않고서도 풀숲을 변하여 성지(城池)로 만들고, 빈터에 민가를 세워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살기를 예전과 같이 하고 베개를 높이하여 근심을 없게 하였으니, 오늘날로부터 후세에 이르기까지 길이 집을 세워 산 사람을 살리고 부족함이 없게 한 것은 모두 우리 조후(趙侯)가 주신 것 아님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고 어린 자식처럼 사모해서 비록 오래 되어도 잊지 못하는 것이니, 원하건대 그대는 글로 써서 뒷사람에게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 조후의 덕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한다.
내 듣고 아름답게 여겨 그 말을 쓰고 나서 인하여 말하기를, '맹자(孟子)도 지리의 이로움이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대개 이 성을 쌓고 이 못을 파는데 죽기로써 일하고 가지 않은 것도 사람에게 있고, 성이 높지 않은 것이 아니며 못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나 맡기고 가는 것도 또한 사람에게 있도다. 이제 성지(城池)도 이미 이루어졌고 조후의 은혜도 이미 깊어졌다. 이 뒤에 이 땅을 다스리는 자가 과연 능히 백성들로 하여금 가지 않게 하겠는가. 혹시 맡겨놓고 가버리게 하는 자는 없겠는가. 이것은 원이 된 자가 백성을 얻고 못 얻는데 있는 것이다. 백성이 화목하지 못하면 이것을 가르쳐 주고 성이 견고하지 못하면 완전하게 해서, 그 전에 이루었던 것을 떨어뜨리지 말고 더욱 그 효험이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로다.' 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사례하기를, '그대의 말이 행해지면 우리 원으로 오는 자가 더욱 힘쓸 것이고, 우리 백성들이 살아 나가는 것을 더욱 가히 보존할 것이니, 청하건대 이것을 모두 써서 기문을 만드시옵소서.' 했다. 조후(조우량)는 정간공(正簡公)의 자손으로서 그 조부의 임금을 도운 덕과 공렬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컬어 마지 않는다. 후야 말로 참으로 그 조부를 닮은 사람이다. 훗날에 보상(輔相)이 된다면 능히 그 조상의 업적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을 믿을 수 있도다." 하였다.
관방 칠포영(漆浦營)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을 두었다.
신증 정덕(正德) 경오년에 비로소 돌 성을 쌓았으며, 둘레가 1천 1백 53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 2개가 있다.
봉수 지을산봉수(知乙山烽燧) : 고을 동쪽 15리에 있으며, 동쪽은 영일현(迎日縣) 동을배곶(冬乙背串)에 응하고, 북쪽은 오산(烏山)에 응하였다. 오산봉수 : 남쪽은 지을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청하현 도리산(淸河縣桃李山)에 응한다.
신증 누정 차군루(此君樓) : 객관 동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