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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혜정광경/ 성목현덕정/
문순선헌숙/ 예인의명신/
희강고원충/ 선숙혜목정/
공우창공
1대 태조(太祖
왕건,
고려의 시조.
북진정책,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포섭함(왕권 안정)
궁예의 휘하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였고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고려를 세운 후,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았으며
신라와 후백제를 합병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2대 혜종(惠宗
1대 태조 왕건의 맏아들.
이복동생들과 왕위 다툼에 시달림.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921년 박술희(朴述熙) 등의 도움으로 태자로 책봉된 뒤, 2대왕이 되었다.
이어 이복동생 요가 왕위에 올랐는데,
혜종의 유언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사료에는 스스로 군신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와 있어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살해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젊어서부터 기질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지혜와 용맹이 뛰어났다고 한다.
3대 정종(定宗
1대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혜종의 이복동생.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으나 실패함.
재위기간은 4년.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며,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혜종이 집권하던 시기에 왕위를 엿보았으며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술희를 제거하고
혜종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왕식렴(王式廉) 등의 도움을 받아
외척으로 세도를 부리던 왕규(王規)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호족들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호족들이 호응하지 않는 등 여전히 왕권이 확립되지는 않았다.
불교를 장려할 목적으로
946년 양곡 7만 석을 내어
여러 사원(寺院)에 불명경보(佛名經寶)·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는 등 불교 중흥에 힘썼고,
947년에는 서경성(西京城:평양성)을 쌓고
도참설(圖讖說)에 따라 그곳으로 천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경천도 계획에 개경의 호족들이 반발하였으며
역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도 컸다.
947년 후진에 유학하다 거란에 붙잡혀 그곳에서 벼슬하던 최광윤이 고려에 사신으로 와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것이라는 보고를 듣고 광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948년 9월, 동여진에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쳐 직접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자기 닥친 천둥 소리에 놀라 경기를 일으키고 병석에 누워 있다가 이듬해 3월 서거하였다.
4대 광종(光宗
1대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정종의 동생.
왕권 강화를 위해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과거 제도를 실시함.
태조의 3남으로 이름은 왕소이다.
3대 왕 정종의 친아우이며 태조의 세 번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이다.
신명순성왕후는 충주를 대표하는 호족 유긍달의 딸로
태조의 부인들 가운데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왕후이다.
충주를 외가로 한 광종은 형인 정종보다 정치적 세력이 더 막강하였다.
그 배경에는 황주를 기반으로 한 대목왕후 황보씨의 탄탄한 후광이 있었다.
광종은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인 대목왕후 황보씨는 신정왕태후와 태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광종은 이복누이와 결혼하였지만,
이로 인해 막강한 호족세력을 얻었다.
또 다른 부인인 경화궁부인 임씨는 2대 왕 혜종의 맏딸로 광종에게는 조카가 된다.
광종은 동생 및 조카와 결혼한, 말하자면 왕실 족내혼을 한 첫 번째 왕자였다.
5대 경종(景宗
4대 광종의 맏아들.
976년 전시과 제정,
6년간 재위함.
광종의 장남.
어머니는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
비(妃)는 신라 경순왕의 딸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金氏),
문원대왕의 딸 헌의왕후(獻懿王后) 유씨(劉氏),
대종(戴宗) 욱(旭)의 딸 헌애왕후(獻哀王后)와 헌정왕후(獻貞王后) 두 자매,
원장태자의 딸 대명궁부인(大明宮夫人) 유씨(柳氏)이다. 95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즉위하자 경종은 사면령을 내리고
광종 대에 억울하게 죽은 자의 자손에 복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살육전이 일어나고 집정(執政)을 맡은 왕선(王詵)은
태조의 아들인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경종은 왕선을 귀양보내고 복수법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순질(筍質)과 신질(申質)을 각각 좌우집정(左右執政)으로 삼고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했다.
집정제를 좌·우집정제로 바꾼 것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됨을 막기 위해서였다.
내사령은 왕명을 출납하던 관직으로 좌·우집정을 내사령으로 겸하게 한 것은
왕명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집정을 왕이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976년에는 전시과 (田柴科)를 제정하였다.
이는 고려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977년에는 과거를 재개하였다.
980년에는 정계에 복귀한 최지몽이 왕승(王承)의 모반을 예견하여 제거하였다.
이는 고려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977년에는 과거를 재개하였다.
980년에는 정계에 복귀한 최지몽이 왕승(王承)의 모반을 예견하여 제거하였다.
뒤에 정치를 등한시하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 소인(小人)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군자(君子)를 멀리하였다. 태평(太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6대 성종(成宗
1대 태조 왕건의 손자.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최승로의 시무28조 수용),
중앙집권적 국가운영체계의 기틀을 세움.
혜종·정종·광종·경종대의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어 국가체제 정비가 요구되는 시기였다.
고려는 불교를 신봉한 사회였지만,
여전히 정치적 지배 이념에 있어서는 공백 상태나 다름없었다.
고려는 성종대에 들어와 비로소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여
합리적인 국가 운영 체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유교 사회를 표방하여 그 기틀을 확립한성종은,
왕인(王仁, ?~?), 조선의 성종(成宗, 1457~1494)과도 비교되곤 하는데,
수성기에 접어든 고려사회를 합리적인 유교사회구조로 개편하고자 했던 왕으로서
그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
왕인은
백제의 근초고왕 때 학자로서
일본의 초청으로 『논어』(論語) 10권. 『천자문』(千字文)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유풍(儒風)을 천명하였으며,
그 해박한 경서(經書)의 지식으로 하여 신임을 받고 태자(太子)의 스승이 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문화를 깨우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자손은 대대로 그곳에 살면서, 학문에 관한 일을 맡고 일본 조정에 봉사하여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일본의 역사책 『고사기』(古事記)에는 그의 이름을 와니키시라 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와니(王仁)라고 나와 있다.
우리 나라 역사에는 그의 이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라남도 영암에 그의 석상 및 유적지가 있다.
7대 목종(穆宗
5대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함.
어머니는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990년(성종 9) 개령군(開寧君)에 봉해졌는데,
997년에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모후(母后)를 천추태후(千秋太后)로 존칭했다.
관리의 봉급제도인 전시과 (田柴科)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金致陽)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김치양과 함께 음모,
후계자인 왕의 당숙(堂叔)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승려로 만들어 죽이려고 하였다.
이를 간파한 목종은 서경 (西京)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康兆)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하였으나,
강조에 의해 폐위되어 충주(忠州)로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숙청하고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는데,
그가 즉 제8대 왕 현종(顯宗)이다.8대 현종(顯宗
1대 태조 왕건의 손자.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6천여권)을 제작함.
관련사건: 강감찬의 귀주대첩.
태조의 여덟째 아들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
어머니는 경종의 비(妃)인 헌정왕후(獻貞王后:孝肅太后).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戴宗:追尊王)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처음에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12세 때 천추태후(千秋太后:경종비 헌애왕후)의 강요로 숭경사(崇敬寺)에 들어갔다.
1006년(목종 9)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겨졌으며,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해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 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聖宗)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강조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게 하였으나 참패하고,
다음해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남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왕이 친조(親朝)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고, 또 6성(城)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1018년 거란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하였으나,
상원수(上元帥) 강감찬(姜邯贊)의 뛰어난 전술로
구주(龜州)에서 섬멸하여 물리쳤다(龜州大捷).
다음해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사치와 호화로운 의식·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飢民)의 구제에 만전을 기하였다.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여 폐지된 연등회(燃燈會)·팔관회 (八關會)를 부활시키고,
선유(先儒)를 존숭하는 뜻에서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을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한국 최초로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또한,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지방 관제를 합리적으로 조절하기 위하여 12주의 절도사(節度使)를 폐하고,
5도호부(都護府) 75도(道)에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가,
다시 이를 폐하여 4도호부·8목(牧)·56지주(知州)·56군사(郡事)·18진장(鎭將)·20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사심관(事審官)의 선출을 엄격히 하였다.
9대 덕종(德宗
국자감시를 실시함.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함.
현종(顯宗)의 장남으로 모후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1022년(현종 13) 태자로 책봉되고, 1031년에 즉위하였다.
그후 거란(契丹)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이 압록강에 가설한 부교(浮橋) 및 보성(保城)을 파괴할 것과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하였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삭주(朔州) ·영인진(寧仁鎭) ·파천(派川)에 축성하였다.
이듬해 8월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압록강구로부터 영원(永遠)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까지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성하게 하자
동여진인(東汝眞人)과 거란인들의 투항이 속출하였다.
처음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실시하고,
왕가도를 감수국사 (監修國史)로, 황주량을 수국사(修國史)로 삼아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10대 정종(靖宗
1044년 천리장성을 완성함.
노비종모법과 장자상속법을 제정함.
현종(顯宗)의 둘째 아들. 덕종(德宗)의 동생.
어머니는 원성왕후(元成王后) 김씨(金氏).
비(妃)는 용신왕후(容信王后) 한씨(韓氏), 용의왕후(容懿王后) 한씨,
용목왕후(容穆王后) 이씨(李氏).
1022년(현종 13) 내사령 (內史令)에 올라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으며,
1027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1034년(덕종 3) 덕종이 죽자 즉위하여 명주성(溟州城)을 수축,
이듬해 북계(北界) 송령(松嶺) 동쪽에 장성을 수축하고,
또 창주(昌州:平北 昌城)에도 성을 쌓았다.
1036년 각 도의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고
여러 위(衛)의 군인 중 경전이 부족한 자에게는 공전
1037년 거란(契丹)의 침입을 받고 다음해부터 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044년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완성시켰다.
또 예성강(禮成江)의 병선(兵船) 180척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州鎭)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국방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듬해 비서성(祕書省)으로 하여금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1046년 장자상속과 적서(嫡庶)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다.11대 문종(文宗
8대 현종의 셋째 아들.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한 왕.
어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 김(金).
낙랑군(樂浪君)의 봉군을 받고 정종 때에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즉위하자 최충(崔冲)에게 명하여
법률 개정에 착수하여
양반(兩班)의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ㆍ연재면역법(捐災免役法)ㆍ삼원신수법 (三員訊囚法)ㆍ
국자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孝校法) 등을 제정하고
1069년에는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하여
전세(田稅)의 율(率)을 정하였으며
계속하여 녹봉제(綠捧制)ㆍ선상기인법(選上基人法) 등을 제정하여
내치의 중요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다시 불교를 독신(篤信)하여
흥왕사(興王寺)를 비롯한 모든 사찰을 건립하고
왕자 후(煦)를 출가(出家)시켜서
대각국사(大覺國師 : 의천(義天))로 성공시키고,
한편으로 유학도 장려하여
최충의 9재(齋)를 비롯하여 12도(徒)의 사학(私學)이 일어나는 등 문운의 융성 시대를 일으켰다.
외교와 국방 정책에서는
동여진(東女眞)이 자주 북변(北邊)을 침입하였으나
이를 토평하는 한편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으며,
특히 송나라와 국교를 열어 친선 관계를 맺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서도에 능하였으며
양주(揚州) 삼천사(三川寺)의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는 왕의 친필이다.
12대 순종(順宗
문종(文宗)의 장자.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 소생.
1054년(문종 8) 왕태자에 책립되었고,
1083년 문종이 죽자 즉위하였으나 그해에 죽었다.
13대 선종(宣宗
11대 문종의 둘째 아들.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임.
총명하고 효성스러웠으며 도량이 넓었다.
경서와 사서를 두루 연구하였고 문장에 뛰어났다.
1056년(문종 10) 국원후(國原侯)에 봉해진 데 이어 상서령(尙書令)에 제수되었다.
1083년 친형인 순종이 즉위한 후
수태사 겸 중서령 국원공에 올랐으나, 순종이 2달 만에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084년(선종 1) 승과를 설치하였으며,
1085년 이복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1086년에는 요나라에서 압록강 부근에 각장(榷場:국가에서 관리하는 시장)을 설치하고
교역을 하려 하자, 고주사 한형(韓瑩)을 보내어 폐지하기를 청하였다.
1086년 송나라에서 불교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돌아온 둘째동생 의천(義天)을
태후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에서 맞이하였다.
1088년 2월 요나라에서 재차 각장을 설치하려 하므로
중추원부사 이안(李顔)을 귀주(龜州)에 보내어 비밀히 대비하게 하였고,
9월에는 태복소경 김선석(金先錫)을 요나라에 보내어 각장을 혁파해 줄 것을 청하였다.
1089년 회경전(會慶殿)에 13층 금탑(金塔)을 세웠으며,
의천이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위하여 추진한 천태종 본산 국청사(國淸寺)의 건설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시켰다.
1091년 서북면병마사 겸 중군병마사 유홍(柳洪)이 제작한 병거(兵車)를 귀주에 배치하였고,
국자감의 벽에 유교 72현의 초상을 그려 붙였다.
1093년 소감 박원작(朴元綽)이 제작한 천균노(千鈞弩)를 시험하였고,
병부상서 황종각(黃宗慤)과 공부시랑 유신(柳伸)을 송나라에 사은사로 보냈다.
이어 백관의 하례의식을 송나라의 조하식(朝賀式)에 맞추어 고쳤으며,
정포도감(征袍都監)에서 군복 3천벌~4천벌을 지어 동북(東北) 양계(兩界)에 나눠 보내어
병영창고에 보관해 두도록 하였다.
1094년 2월 어사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병(閱兵)을 하였고,
4월에 병이 들어 5월 연영전(延英殿)에서 죽었다.
재위기간 중 특별한 사건이 없어 평온하였으나,
사탑(寺塔)을 짓는 토목공사를 일으켰으므로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였다.
14대 헌종 (獻宗
13대 선종의 맏아들.
즉위 1년만에 왕위를 숙부(숙종)에게 물려줌.
어머니는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李氏).
어려서부터 서화(書畫)에 능하고 총명했으며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 신병으로
숙부 계림공(鷄林公) 희(熙 ; 숙종 (肅宗))에게 양위(讓位)한 뒤 후궁에 있었다.
15대 숙종 (肅宗
주전관을 두고 주화인 은병을 만들어 통용하게 함.
11대 문종(文宗)의 3남. 순종의 아우.
비는 유홍(柳洪)의 딸 명의태후(明懿太后). 문종 때 계림공(鷄林公)에 봉해졌고,
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위를 찬탈하여 1095년 즉위하였다.
1096년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鑄貨)인 은병(銀甁)을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2년에는 해동통보 (海東通寶)를 주조하여 통용하게 했다.
남경(南京)을 양주(楊州)에 세우려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어
궁궐을 조영하게 하였다.
또한 불교를 신봉하여 많은 불회(佛會)를 열었으며,
평양에 기자(箕子)의 무덤을 만들고 묘사(廟祠)를 세웠다.
1104년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우야슈[烏雅束]가 침입했을 때,
임간(林幹)을 보내어 방어하게 했으나 이를 막아 내지 못하자,
다시 윤관 (尹瓘)을 보내어 화약을 체결하였다.
이로부터 정주장성(定州長城) 밖에 있는 여진부락은 완옌부의 치하에 들어갔다.
이후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비확장에 착수하려던 즈음,
서경(西京)으로 행차 도중 병을 얻어 죽었다.
15대 숙종의 맏아들.
명의왕후(明懿王后)의 소생.
1100년 왕태자에 책봉되고, 1105년에 즉위하였다.
1108년(예종 3) 윤관 (尹瓘)에게 여진(女眞)을 경략하게 하여 함흥평야에 9성을 쌓았다.
1119년 이후 새로 일어난 금(金)나라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고 국학(國學)에 양현고 (養賢庫:학생후생재단)를 설치하는 등
학문을 진흥시켰다.
17대 인종(仁宗
16대 예종의 맏아들.
김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함.
관련사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어머니는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이다.
비(妃)는 이자겸(李資謙)의 3녀·4녀인 폐비 이씨,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딸 공예왕후(恭睿王后),
병부상서 김선(金璿)의 딸 선평왕후(宣平王后)이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자비로웠다.
또, 학문을 좋아하고 스승과 벗에 대한 예가 밝았다.
1115년(예종 10) 태자로 책봉, 이자겸 등에 의해 1122년 4월에 15세로 왕위에 올랐다.
1123년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학식(學式)을 만들게 했는데,
국자학(國子學)은 3품 이상,
태학(太學)은 5품 이상,
사문학(四門學)은 7품 이상의 자손을 입학하게 하였다.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최사전(崔思全)과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난을 진압하고,
이자겸을 잡아 영광으로 유배시켰다.
1127년 척준경을 유배하고,
중외(中外)에 조서(詔書)를 발표해
각 지방의 주현에 향학을 세워 지방자제들의 교육을 진작시켰다.
1128년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등이 주장한
서경길지설(西京吉地說)에 공감해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대화궐(大華闕)을 짓고 수시로 서경을 순행하였다.
1129년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해 정치하는 여가에
여러 학사들과 학문을 탐구하고 서적을 강독하게 하였다.
1131년서경의 대화궁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해 여러 부처와 명산의 신(神)을 제사하게 하였는데, 이에 서경천도론이 크게 일어났다.
1133년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함으로써 무예로 선비를 뽑는 일은 없어졌다.
1135년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이 서경천도론·금국정벌론·칭제건원론 등을 내세웠으나,
김부식(金富軾) 등에 의해 좌절되면서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김부식을 서경정토원수(西京征討元帥)로 삼아 난을 평정하게 하였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1135∼1145년간에 김부식 등에게 명해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모방한 기전체(紀傳體)로
5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다.
18대 의종(毅宗
17대 인종의 맏아들.
정중부, 이의방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폐위됨.
1134년(인종 12)에 태자(太子)가 되었으며, 1146년인종이 승하하자 즉위하였다.
1170년에 서경에 거둥(擧動: 임금의 나들이)하여 신령(新令)을 반포하였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정하는 것은 다시 왕화(王化)를 부흥하고자 함이며,
이에 옛 성인들이 권계(勸戒)한 유훈(遺訓)을 받들어
현재의 민폐를 구제할 수 있는 일을 채택해 반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교·음양설·선풍(仙風)을 중요시하였을 뿐
유교적 정치이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것은 의종이 실제 정치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을 의식적으로 외면하였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유교지식인이었던 문신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1170년보현원(普賢院)에 거둥했을 때에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으로써
왕위에서 물러나 거제현(巨濟縣)으로 옮겨갔다.
이와 동시에 아우인 익양공 왕호(翼陽公 王晧)가 즉위하니, 곧 명종이다.
그 뒤 1173년(명종 3)에 김보당(金甫當)의 거병으로
계림(鷄林: 현재 경상북도 경주)에서 복위되기를 기다렸으나 거병이 실패하자
이의민(李義旼) 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
17대 인종의 셋째 아들.
정권을 장악한 무신 최충헌에 의해 폐위됨.
고려 17대 인종(仁宗, 재위 1122~ 1146)과 공예왕후 임씨(恭睿王后 任氏, 1109~1183)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8대 의종(毅宗, 재위 1146~1170)의 동생이다.
강릉공(江陵公) 김온(金溫)의 딸인
의정왕후[義靜王后, 강종 즉위 이후에 광정태후(光靖太后)로 추존] 김씨(金氏)와의 사이에서
22대 강종(康宗)으로 즉위하는 태자 숙(璹, 1152~1213)과
연희궁주(延禧宮主), 수안궁주(壽安宮主) 등의 자녀를 두었다.
후궁(後宮)들과의 사이에서도 선사(善思), 홍기(洪機), 홍추(洪樞), 홍규(洪規), 홍균(洪鈞),
홍각(洪覺), 홍이(洪貽) 등의 소군(小君)을 낳았으며,
이들은 모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1148년(의종 2) 익양후(翼陽侯)로 책봉되었으며,
1170년 무신정변을 일으키고 의종(毅宗)을 거제도로 유폐시킨
정중부(鄭仲夫, 1106~1179), 이의방(李義方, ?∼1174), 이고(李高, ?~1171) 등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명종은 정중부를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삼았고,
무신들을 공신(功臣)으로 대우하였다.
무신들은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국정을 장악하였고, 모든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명종이 집권한 뒤에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 내부의 갈등이 치열해졌는데,
1171년 이의방(李義方)과 채원(蔡元)은 이고(李高)를 제거하였고,
뒤이어 채원(蔡元)도 이의방(李義方)에게 살해되었다.
무신들의 횡포와 전횡이 심하자
1173년과 1174년 김보당(金甫當), 조위총(趙位寵)이
각각 동계(東界)와 서경(西京)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사회 혼란이 계속되면서 각지에서 농민 반란도 자주 일어났다.
1174년 이의방(李義方)은 정중부(鄭仲夫)와 그의 아들인 정균(鄭筠)에 의해 살해되었고,
1179년(명종 9)에는 경대승(慶大升, 1154~1183)이
정중부(鄭仲夫) 일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경대승(慶大升)은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고루 등용하며,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1183년 5년만에 병사(病死)하였다.
경대승이 죽은 뒤, 경주로 달아나 있던 이의민(李義旼, ?~1196)이
개경으로 올라와 실권을 장악하였다.
1196년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이
이의민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명종에게 봉사10조(封事十條)의 국정개혁안을 제출하였다.
1197년(명종 27) 최충헌(崔忠獻)은 명종을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평량공(平凉公)을 20대 신종(神宗, 재위 1197~1204)으로 즉위시켰다.
명종은 창락궁(昌樂宮)에 유폐되었으며, 태자 숙(璹)도 강화도로 쫓겨났다.
20대 신종(神宗
17대 인종의 다섯째 아들.
최충헌이 실권을 잡았으며,
만적의 난 등 민란이 잇달아 일어남.
즉위년에 만적(萬積)의 난을 비롯하여,
이듬해 강원도 명주(溟州)의 난,
진주(晉州)·금주(金州: 김해)·합천(陜川)·경주(慶州)·광주(廣州) 등지에서 잇달아 민란이 일어났다. 국권은 실제로 최충헌이 전단하여 왕은 실권이 없었으며,
1204년 병이 심하여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21대 희종(熙宗
20대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폐위됨.
1200년(신종 3)에 태자로 책봉되고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205년(희종 1)에 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다.
1207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 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 개성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고종 2)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1219년서울에 봉영(奉迎)되었다.
이렇게 서울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최성(崔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였다.
22대 강종(康宗19대 명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광정태후(光靖太后) 김씨(金氏), 비(妃)는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이다.
1171년(명종1) 관례(冠禮)를 올리고, 1173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197년 최충헌에게 쫓기어 부왕과 함께 강화도로 갔다.
1210년(희종 6) 소환되어 이듬해 수사공상주국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에 봉해졌으며,
희종(熙宗)을 폐한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23대 고종 22대
강종의 맏아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함.
23대 고종의 맏아들.
친몽정책과 개경환도를 추진하다가 임연에게 폐위(1269),
4개월 만에 복위함.
개경환도(1270) 후, 이에 반기를 든 삼별초의 항쟁 일어남.
24대 원종의 맏아들.
고려왕이면서, 원나라의 사위로 살아간 왕.
25대 충렬왕의 아들.
한국사 최초의 혼혈왕.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함.
26대 충선왕의 둘째 아들.
심양왕 고(충선왕의 조카)와의 정권다툼에 시달림
27대 충숙왕의 맏아들.
방탕한 행동으로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복위됨.
28대 충혜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해 12세에 죽음.
어머니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함.
28대 충혜왕의 서자.
12세에 원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되었으나 3년만에 폐위됨.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과 반원정책을 단행하였으나,
권문세족 반발,
공민왕 시해로 개혁 중단됨.
공민왕이 시해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 폐위되어 강화도로 추방됨.
32대 우왕의 아들.
9세에 즉위,
이성계에 의해 폐위됨.
20대 신종의 7대손.
고려의 마지막 왕
- 두산백과, 네이버"역대왕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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