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30. [許蔿] 義兵將
[許蔿] 선생은 1854 년 4월 1일 , 경북 선산의 대지주인 한학자 집안에서 출생 , 1895년 , 45세 때 을미사변 이 일어나고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며 단발령을 내리자 , 분개한 선생은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날을 기하여 [聖州]에 포진하여 관군과 전면전을 펼쳤으나 ,
협공하는 관군을 막을 수 없어 [이은찬] , [조동호]가 전사하자 충북 진천 으로 陣을 옮길 때 고종황제로부터 의병 해산령이 내려져 자진 해산 하고 말았다.
1899 년 <대한제국>의 永禧殿 참봉, 성균관 박사 등에 임명되었다가 平理院 首班 判事 가 되었다. 1904 년 , 韓日議政書 강제 체결 사건으로 [이상천] , [박규병] 등과 격문을 살포하는 저항운동을 재개하였다.
1907 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 가 강제 해산되자 , 그는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 전국 각지에 흩어진 의병들을
양주에 집결시키고 서울 탈환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연합군 13도 창의군 <총대장>에 [李麟榮]을 임명하고 자신은 軍師長이 되어 서울 에 진입, 의병 2.000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대치 , 격전을 벌렸으나 , 무참히 패 하고 말았다. 그 후 [李完用]이 [허위]에게 사람을 보내 < 경상도 관찰사 > <내무대신>등의 관직으로 회유를 획책했으나 일거에 거절하고 1908년 6월 11일, <일본 헌병대>의 습격으로 경기도 포천시 永平에서 체포 , 1908년 10월, 경성감옥 ( 서울 서대문 형무소 ) 사형수 제1호 가 되었다.
사형집행 시 간수가 유언을 물으니 , " 대의 를 펴지 못했는데 유언 은 무엇에 쓰랴 " 하며 꾸짖고 교수형으로 순국하셨다 한다. 그는 혼자만 의병항쟁을 한 것이 아니라 , 그의 맏형은 항쟁의 필요한 군자금을 댔고 , 세째형 [허겸]은 의병투쟁을 함께 했다.
일본의 국권침탈 음모에 격렬히 저항한 [허위] 집안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고향인 선산에 살기 힘들었고, 견디다 못해 세째형 <허겸>은 허위의 4 남 2녀 를 데리고 1912년 < 서간도>로 망명하였으며 <사촌>들도 뒤를 따랐다. 결국 허위의 조카 [허형식]을 비롯해 많은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나섬으로 자손들은 해외에서 뿔뿔이 흩어지며 혹독한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됐다.
해방 후 <친일파>들의 득세 속에 애국자의 희생정신은 빛을 바랐고 , 훈장과 최저 생계비 조로 지급되는 몇 푼의 현실에, 이들 후손들은 목이 메일 것이다.
수많은 재산을 가졌던 그의 집안은 나라를 찾고자 의병활동으로 모두 탕진하고 자손 들은 타국과 국내에서 유랑인이 되어 유리걸식을 하는 浮浪人이 됐으니..... 무엇으로 이들께 보상을 해야 하나?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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