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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8일
말씀: 엡1:15-19
제목: 하나님을 아는 삶(순교)
이삭목사의 영상입니다. 애니메이션으로 되어 있는데 먼저 보겠습니다. (영상)
이삭목사의 간증은 유튜브에서 많이 나와 있으니까 찾아서 보시면 참 많은 은혜가 될 것입니다. 이 분이 간증한 내용 속에서도 너무나 비참하고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간증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금요심야예배 때 본 내용인데요, 1972에 평양에서 곡성까지 고속도로를 만들어 가는 중에 땅이 꺼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땅 꺼진 대로 들어가 보니까 뜻밖의 19명의 어른들과 목사님 한 분과 어린아이 둘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끌어내서 13살짜리 아이를 재판을 거쳐서 의자에 올려놓고 목을 매어서 죽이려는데 아이가 ‘엄마.....엄마’ 하고 우니까 집행관이 ‘애 엄마 불러 줘’‘네’그래서 엄마를 나오라고 했습니다. 엄마가 나왔습니다. 아이가 죽어가는 상황인데도, 엄마가 나와서 아들에게 하는 말이 ‘애야, 너 지금 예수님 만나려 가는 길이야 왜 오두방정 떨고 울고 난리를 쳐’ 그랬더니 아들이 ‘죄송해요 어머니’ 그 말을 하고 있는 동안 그 말을 듣고 있던 집행관이 화가 나서 그 아이가 서 있는 의자를 발로 찼습니다. 그러니까 목에 걸러 있던 밧줄을 잡고 매달려 있는데, 엄마가 한 말 ‘애야, 이 아저씨 미워하지 마라’ ‘네 어머니’그러고 죽어갑니다. 두 번째 형이 그렇게 끌러 나와 죽었고 그 당시 김태용목사님은 땅에 다가 발가벗겨서 누워놓고 아스팔트 깔데 사용하는 스팀롤러라는 쇄 바퀴로 깔아뭉개서 죽였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이 불렀던 찬송가가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이란 찬송을 부르고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북한 뉴스에서 더 이상 북조선에는 예수쟁이가 없다라고 공언을 했습니다. 그런데요, 그 이후에 북조선에서 가정교회가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왜 순교를 원하시는가? 저는 지금 하나님이 세상을 설명하고 계시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성자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 분이 십자가에서 희생적 사랑을 통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그 넓고, 깊고, 높고, 긴 사랑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 복음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순교하신 그 순교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 땅을 이 사람을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들을 제물로 바쳐 살려 낸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을 또 제물로 바쳐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총체적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왜 죽어야하는지, 왜 순교를 허락하셨는지에 대해 말씀을 함께 나누어보겠습니다.
기독교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에 복음이 들어갈 때는 십자가의 순교적 피를 흘렀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방법을 써야만 하는가? 즉, 왜 굳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데, 죽음을 동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복음이 들어가자마자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환상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직접 하나님이 하늘에서 음성을 통해 말씀하시면 얼마든지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올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오실 때도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고 예수님이 왕처럼 강림한다든지, 예수님이 오실 때 기적으로 오시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든지, 예를 들면 큰 알에서 깨어난다든지, 하늘에서 내려 오신다든지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굳이 죽음의 방법으로 오셔야만하고 복음의 문을 열 때마다 이런 순교적 피를 흘러야하는가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대인들만이 소유하는 하나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 열방을 구원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한 하나님이 새로운 언약과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를 그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고 있느냐하는 문제와 왜 복음의 문을 열 때 순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밖에 없느냐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뜻이면 사실 설명이 필요 없는 문제입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계획이라면 이 일을 우리는 묵묵히 감당해야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두로지방의 제자들이 반대했고 빌립집사 딸들이 반대했고, 아가보가 가면 결박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것도 성령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도 마찬가지로 결박당하고 죽을 수 있음을 알고 간 것입니다. 왜요? 이유도 모르고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는 길에 죽음이 있다하더라고 가는 길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십자가 삶입니다.
두 번째, 물론 첫 번째 문제를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문제이지만,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이 누구냐 하면, 먼저는 예수그리스도요, 그 다음이 우리입니다. 이 ‘밀’이 우리에게 적용될 때, 그 ‘밀’은 정도에 따라 용량에 따라 크게 사용되기도 하고 적게 사용되기도 합니다마는 우리는 반드시 죽음의 과정을 통과할 때 여러 가지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는 다는 의미는 먼저 소극적인 의미와 적극적인 의미로 볼 때, 첫째, 소극적인 면은 자기를 낮추고 자아를 죽이고 고집과 아집과 가치관과 자의식을 죽이는 것을 말하며, 그리고 정욕을 깨트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게 평생 자신을 쳐서 죽이는 일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에베소교회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엡4부터 나오는 통일성을 이루는데, 그러니까 자아를 죽이는 것, 자기를 죽이는 것이 연합과 각 지체로 말미암아 통일성을 이루는데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교회를 통해 지체를 통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죽은 일이 있을 때, 나를 통해 이웃이 사는 생명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흐르는 축복이 가정에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죽음을 인해 후손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은혜를 체험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로는 십자를 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피 묻은 길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피 흘림의 역사입니다. 아벨의 피 흘림으로부터 예수님의 피 흘리심, 제자들의 피 흘림 등. 선교역사 속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그 얼마나 많은 피 흘림이 있었습니까?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피 흘림이 있었고 그 순교자들의 피 위에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받고 피 흘리고 있습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전남 신안군 증도면에 있는 증동리교회가 있는데, 여기에는 문준경 전도사님의 고귀한 순교 신앙이 묻어 있는 교회입니다. 문준경선교사의 순교가 결국 신안군에 한 때, 90%가 넘는 이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순교를 통해 타나난 생명의 열매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최초개신교 순교자는 토마스목사입니다. 한국에 왔다가 중국으로 갔다, 다시 한국으로 올 때 한문성경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토마스목사님은 제널럴 셔먼호를 타고 왔는데 이 배는 무역선임에도 불구하고 중무장한 배였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은 이 배가 상륙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것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했는데, 위협을 느낀 제너럴 셔먼 호에서도 소총과 대포로 응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고, 서해의 썰물 때가 되자 강물이 급격히 줄어 제널러 셔먼 호는 강바닥에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선원들은 몰살하게 되고, 토마스선교사도 몇 권의 성경책을 품에 앉고 물에 뛰어 들어 육지로 나오는데, 박춘권의 칼에 의해서 순교를 당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목사는 품고 온 성경을 강변 여기저기에 흩어졌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도 한 권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고 성경책은 그대로 모래사장에 흩어졌고, 순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박춘권은 자기 칼을 맞고 죽어가는 서양 사람이 건네주는 책을 받지 않았지만, 상황이 끝나고 돌아 갈 때, 하나를 주워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갖고 간 성경을 정독한 그는 후에 예수를 영접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어, 안주(安州)교회 지도자(領袖)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토마스 목사가 순교 당할 그 때 군중 속에 열 두 살 난 소년, 최치량이 있었습니다. 그는 토마스 목사가 흩뿌린 성경 세 권을 주워 갖고 있다가 한 권을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에게 주었습니다. 박영식은 그 성경을 한 장씩 뜯어 벽지로 발라 썼습니다. 후에 박영식의 집터에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토마스 목사를 죽인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가 박영식의 집에 들렸 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진실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널즈(W. Reynolds)의 조사(助事)가 되어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개신교 목사로서 조선 땅에 최초로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어갔는데, 이때가 1866년 9월 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숨져 갔지만,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가 순교한 대동강 물을 마신 평양 성민 다수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평양은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때까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면, 순교의 피가 생명이 되어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나라가 그 나라에 복음이 들어갈 때는 반드시 순교의 피가 흘렀다고 몇 번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왜 이렇게 강조하느냐하면 이 순교야말로 교회를 세우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중요하고 엄청난 것인지 알 필요가 있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 터위에는 복음을 위해 희생한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곳입니다. 한 사람을 희생해서라도 세워고야 말 복된 곳이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피로 말미암아 세워졌고, 또한 순교자의 피로 말미암아 세워진 고귀한 은혜입니다.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이 삶을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다시 살리는 길이며 이 길을 건넌 자가 그 나라에서 복된 존재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나라 그 나라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렇게 순교를 하나님 이 원하시는가?, 입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성에서 보면 한 낫 점에 불과합니다. 쉬었다가 가는 나그네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 보면 이 땅은 그 나라의 삶을 위해 결정지어지는 중요한 삶이기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 그 분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계획을 실천한다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핍박을 당합니다. 로마에서 핍박은 비참하고 참담한,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잔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천국이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곳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는 죽음을 기쁘게 맞이할 만큼 복된 곳임을 분명히 순교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들었든 말씀입니다. 신30:15-16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가나안 땅에서 삶의 선택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동일합니다. 생명과 복, 그리고 사망과 화중에 어느 것을 택할 것이냐, 우리는 생명을 택하는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요, 영원한 복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명제 앞에 죽음마저도 생명과 복을 택하는 길이라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성령님이 얼마나 담대하게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고 이끄시고 간섭하셨는가? 그런데요 이 맛은 이 길을 건넌 자만이 유일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 길을 건지 않으면 도저히 맛볼 수없는 신비함이요, 이론적으로만 앎이 가능한 것이지 실질적으로 누릴 수없는 복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담대함은 인간의 생각과 이성과 가치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길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담대함과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소망 가운데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삶을 설교하면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려는 계획들에 대해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선택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죄악 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이 실패로 돌아갔느냐,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 이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고 계신다는 말씀을 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시는 교회의 신비에 대해 말씀을 드렸고요, 그런데 이 교회마저도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놓치고 살아가면, 교회에 들어온 것으로 끝이 되어버립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죽으면 천국가고 살아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내 유익과 내 소망과 내 계획과 내 목표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섬기고 예배드리는 자로 전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출석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소망을 잃어버리고 이 땅의 것으로 연연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엡1:9부터입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하려 하심이라’성령님이 와계신 것은 ‘보증’입니다. 보증은 계약금을 지불한 상태를 의미하지요. 그러니까 중도금 잔금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원래 소유해야 될 것, 즉 그 기업, 영광스러운 기업을 다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연결시켜야하느냐 하면, 15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해서, 16절부터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기를 구하노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목적지에 가는 그 과정에 있다는 말입니다.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다 와있다는 말이 아니지요. 우리가 구원받고 그 뿐이면 안 됩니다. 여러분 왜 하나 됨이 깨어집니까? 수요예배 때도 계속 강조하고 있지만, 교회는 통일성을 깨는 일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이 통일성이 깨어지는 이유가 바로 한 소망을 함께 품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의 약속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하는 문제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을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알면, 순교가 무엇이며, 왜 이것이 대단한가를 알게 됩니다. 교회는 우리가 한 소망을 갖고 있으며 거기를 향해 가는데, 그것을 위하여 ‘서로 도움을 주여야하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며 우리는 모두가 모두에 대하여 인내하며 기다리며 나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통해 한 소망을 가지고 가는 여정에서 핍박도, 환란도, 시련도 아픔도 동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교자들, 고통당하며 고난 속에 삶을 사는 자들을 왜 내버려 두시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잠깐 왔다가 가는 훈련의 장소임을 설명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지체들이 연합된 몸으로 기능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지체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 훈련에서 가장 먼저 실천되어야할 것은 ‘자신의 죽음’입니다. 자신이 날마다 말씀 안에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삶속에서 복음을 위해여 삶을 살아가며 언제든지 그 나라를 소망하며 부르시는 그 날 우리가 가는 것인데, 어떻게 가느냐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일이지만 날마다 자신을 죽이며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 우리가 언약궤인데 우리가 있는 곳이 지성소의 거룩함을 이루는 것, 그리고 한 가정의 복음을 위해 나를 죽이는 것, 한 나라의 복음을 위해 나를 죽이며 그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를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시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