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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 : 250m 1943년 이후, 252m
전폭 : 수선하 25m ,최대 33m 1943년 이후, 수선하 29m, 최대 35m
비행갑판 : 245m(1943년 이후 247m) x 26m
격납고 : 166m x 19m x 5.3m
흘수선 : 8.5m
기준배수량 : 19,800톤, 1943년 이후 21,000톤
만재배수량 : 25,500톤, 1943년 이후 32,060톤
최대출력 : 120,000hp
최대속력 : 32.5kt
항속력 : 15kt로 10,400해리
장갑 : 측면 4인치, 격납고 갑판 1.5인치
무장[4] :
개전 당시 - 5인치 38구경 양용포 8문, 1.1인치 75구경 4연장 기관포 4기[5], 12.7mm 기관총 24문
1942년 초기 - 5인치 38구경 양용포 8문, 1.1인치 75구경 4연장 기관포 4기, 20mm 기관포 30문
1942년 후기 - 5인치 38구경 양용포 8문, 1.1인치 75구경 4연장 기관포 1기, 40mm 4연장 기관포 4기[6], 20mm 기관포 44문
1943년 - 5인치 38구경 양용포 8문, 40mm 기관포 40문, 20mm 기관포 50문
1945년 - 5인치 38구경 양용포 8문, 40mm 기관포 54문, 20mm 기관포 32문[7]
함재기 수 : 80기, 이착함 상태 유지 이론상 최대 90기, 예비기 포함 최대 96기. [8]
승무원 : 2,919명
동형함 : 요크타운, 호넷
역사를 만든 배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전과를 올린 항공모함
사실상 본 문서가 존재하고 있는 이유이자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의 가치를 한없이 드높여 준 항공모함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미국 해군이 보유했던 항모 7척(렉싱턴, 새러토가, 요크타운, 호넷, 와스프, 엔터프라이즈, 레인저) 중 새러토가, 레인저와 함께 종전까지 살아남은 세 항공모함 중 하나로, 회색 유령(Grey Ghost) [9] ,질주하는 유령(Galloping Ghost), 빅 E, 럭키 E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 자국 미국해군과 적국 일본해군에 나름대로 수훈함이 많지만 엔터프라이즈는 자신의 생존은 물론이거니와 연이은 격전에 참가하면서 혈투를 벌여서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데 일조했으며, 끝끝내 살아남았다.[10]
진취[11] ,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일을 이룩함'이라는 함명에 전혀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함생을 살았던 위대한 배이다.
1934년 7월 16일 뉴포트 뉴스 조선소에서 기공되고, 1936년 10월 3일 진수, 1938년 5월 12일에 취역했다. 요크타운과 함께 렉싱턴과 새러토가가 있는 태평양 함대에 배속되어 진주만을 모항으로 했으며, 항공기 수송과 훈련에 전념하게 된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요크타운은 대서양으로 이동하였고, 엔터프라이즈는 렉싱턴, 새러토가와 함께 태평양에 남아 있었다.
1941년 12월 2일, 웨이크 섬에 비행기를 배달하고 돌아오던 엔터프라이즈호는 원래대로라면 12월 6일에 입항했어야 하는데, 오다가 폭풍을 만나 일정이 하루 늦어진다. 그리고 일본은 그 다음날인 12월 7일에 진주만 공습을 감행했고, 진주만은 피바다가 되었다. 일본군의 공습소식을 들은 엔터프라이즈는 서쪽에서 진주만으로 접근중이었고, 남쪽에서 일본 함대를 찾아 공격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일본 함대는 북서쪽에 있어서 허탕을 친다. 12월 10일 엔터프라이즈는 일본의 해대 6형 잠수함인 I-70을 격침시켰고 이는 태평양 전쟁이 개전된 이후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처음 격침시킨 적함이었다.
[초기형의 엔터프라이즈호는 회색의 함체에 나무색 그대로의 갑판색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는 하늫에서 너무나 발견하기 쉬운 칼러였다]
[1942년 이후 측면의 검정과 회색 3 칼러로 도장되어졌으며 갑판은 바다색과 비슷한 푸른색으로 칠해졌다]
2월 1일,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함대는 일본군이 점령한 길버트 제도를 기습하여 적함 3척을 격침한다. 2월 24일에는 웨이크 섬을 공격하고, 3월 4일 마커스 섬을 때린다. 이때 명중은 아니지만 적의 공격에 지근탄을 받았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 8일, 엔터프라이즈는 항모 호넷과 함께 비밀임무를 위해 출동한다. 그러나 4월 18일에 일본군이 그들을 발견했고, 여기서 엔터프라이즈의 전투기가 항공엄호를 담당하는 가운데 호넷이 배에 탑재한 B-25 미첼 폭격기편대를 발진시킨다. 이들이 바로 둘리틀 특공대였고, 일본은 대낮에 수도 도쿄를 폭격당하면서도 한 대의 폭격기도 못 잡는[12] 치욕을 당한다. 대놓고 수도 도쿄가 공격당하는걸 (사실상) 방조했다는 수치스런 사태와 덴노의 옥체가 상할뻔하게 만든 죄값만으로도 머리아프건만 그토록 이기고 싶었던 육군에게 신나게 조롱당하는 굴욕까지 떠맡은 일본해군과 야마모토 제독은 당연히 엄청나게 분노하였고 둘리틀 특공대의 보복이자 미드웨이를 묵사발내서 그 전공으로 죄값을 만회하기위해 연합함대를 출격시킨다.
5월 25일에 진주만에서 출격한 엔터프라이즈는 미 해군의 주력으로서 나구모 제독의 항모전단과 격돌하였고, 마침내 미드웨이 해전에서 진주만의 참패를 설욕한다.이 역시 설욕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자매함인 요크타운, 호넷과 함께 일본군 항모 전단 제1항공함대를 탈탈 털어먹었다. 특히 요크타운은 일본군 잠수함의 어뢰에 격침될 때까지 일본함대를 두 번이나 속여먹는다. 게다가 요크타운은 산호해 해전에 투입되어 중파당해 전선에서 응급수리와 진주만에서 3일 정도 수리 기간을 받아 완벽하게 수리 되지 않아서 미드웨이에 파견된 시점에도 함선에 기술자들이 남아 수리를 진행중인 상태였다. 즉 제대로 수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투입된 것이다! 실제로 미드웨이로 요크타운을 보내면서 동력과 엘리베이터는 멀쩡하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항공모함을 단 한 척도 놀릴 여유가 없다며 수리중인 상태로 전선으로 보내라고 직접 명령한 것이다. 전투 초반 미드웨이 비행장에서 출발한 항공기들이 요격 되고 이후 돌입한 항모 비행대 뇌격기들이 일본 항모들 위에서 요격 당하고 일본 요격기들이 더버스테이터 뇌격기들을 공격하는 그 시각, 아라시를 따라온 엔터프라이즈의 돈틀리스들이 일본 항모를 발견한다. 일본 요격기들은 그걸 보지 못했고 당연히 급강하 개시. 결국 나구모 제독과 연합함대는 정규 항모 4척을 모두 잃는 굴욕적인 대패와 함께 침몰했고, 반대로 미국은 이것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발판을 마련한다. 그렇지만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은 이 전투에서 자매함 요크타운을 잃게 되었다.
요크타운은 전투가 끝난 직후까진 대파된 상태로나마 간신히 살아있었지만 전투가 마무리된후 진주만에서의 수리를 위해 예인하던 도중 근처를 배회하던 伊-168의 뇌격에 의해 예인중이던 구축함 해먼이 격침당하고 요크타운도 어뢰에 명중당해 회복불가 상태가 되며 함생을 마쳤다.
비록 자매함을 잃긴 했지만 연합함대의 정규 항모 4척을 격침시키는 대승리를 거둔 엔터프라이즈는 7월 15일에 진주만에서 출격, 새러토가와 와스프와 합류한 후 8월 7일에 시작된 미 해병대의 과달카날 점령을 지원한다. 그러나 8월 8일, 기동부대 지휘관인 프랭크 플레처 제독은 기동부대의 피해를 우려하여 함대를 철수시켰고, 과달카날 상륙함대를 지휘하던 리치몬드 K. 터너 제독은 "주력함대가 비열한 핑계를 치면서 도망쳤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항공모함들은 이미 떠난 후였다. 그리고 그날 밤, 일본군의 미카와 군이치 제독이 이끄는 제8함대는 상륙함대를 엄호하던 순양함들을 개발살 내버리고 과달카날의 초반 제해권을 강탈했다. 이게 바로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라는 사보섬 해전으로, 철수 명령을 내린 플레처 제독은 당연히 비난을 받았다.[13] 터너 제독이 "주력함대의 탈출"이라며 분개한 내용의 출처는 #.
이 참사 이후, 고립 상태에 빠진 미 해병대는 헨더슨 비행장을 완성하고 공중과 해상에서 지원 병력과 물자를 보급받아 전력을 보강하여 이후 테나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일본군의 공격을 버티어냈고 8월 중순이 지나 일본군은 추가적인 병력과 함대를 파견하였고 이 움직임을 파악한 미군은 제61임무부대와 제17임무부대를 파견, 제61임무부대에 소속된 엔터프라이즈는 병력수송함대를 동반하고 남하하는 일본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새러토가와 함께 8월 24일 동부 솔로몬 해전(2차 솔로몬 해전)에 참가했다. 당시 항공모함이 소속된 임무부대는 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 와스프로 구성된 제61임무부대와 하와이를 지키고 있던 호넷 중심의 제17임무부대로 동부 솔로몬 해전 당시 와스프 중심의 제18임무부대가 해상급유를 받기 위해 전열에서 이탈하여 해전에 참가하지 않았고 호넷 중심의 제17임무부대는 솔로몬 제도로 이동했지만, 합류가 늦어 해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는 적 정찰기에 발견 되어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고 3발의 명중탄을 제대로 맞아 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는 전사 74명, 부상 95명이란 함생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게다가 명중탄에 조타 기능 상실로 제자리에서 뱅뱅 돌고 있던 엔터프라이즈를 끝내기 위해 적의 추가 공습 시도가 이어져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중 두 번째로 저승길을 건널 뻔 했으나 스콜 덕분에 적이 엔터프라이즈를 찾지 못하는 행운이 있었고 조타가 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서 끝끝내 다시 복구하고 자력으로 진주만에 귀환, 9월 10일 수리에 들어가 10월 16일에 수리를 마치고 8월말 초계 중 적잠수함 뇌격으로 동력 계통이 대파당한 새러토가와 9월 중순에 격침당한 와스프를 뒤로 하고 혼자 남아 전선을 지키고 있었던 호넷과 합류하게 된다.
[개전당시 1.1인치 75구경 4연장 기관포 4기 를 방공용으로 장착하였으나 이 기관포의 별명은 마피아들이 즐겨쓰던 톰슨 기관단총에서 따와 '시카고 피아노'였다. 기관포 사수들이 붙여준 별명. 2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미해군 함선에 많이 장비되었던 대공기관포. 하지만 태평양 전쟁 초기 실전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잦은 잼 현상을 비롯 낮은 신뢰성으로 병사들에게 원성이 높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5인치 포와 12.7mm 기관총이나 20mm 기관포 사이의 갭을 제대로 커버하기엔 너무 작은 화기라서 사거리가 부족했고, 반대로 초 근접한 적기를 상대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너무 묵직한 물건인데다, 포의 발사속도도 높지 않아 (분당 150발 x 4) 효과적이지 않은, 매우 어정쩡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선함 대부분에서 빠르게 도태되었고, 유명한 보포스 40mm (56구경) 기관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나 10월 26일의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는 또다시 자매함 호넷을 잃게 되었고 그 자신도 2발의 명중탄을 맞아 전선을 이탈한다. 이 당시 미 해군의 상태는 진주만 공습 이후 가장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개전 직후 가지고 있던 정규 항공모함 7척 중 어뢰를 맞아 수리를 위해 전선에서 이탈한 새러토가와 대서양에서 활동 중인 레인저를 제외하면 미 해군에는 항공모함이 하나도 안 남았다. 이때 일본군은 엔터프라이즈를 붙잡아서 침몰시키려고 했으나, 빈사 상태에 빠진 호넷을 전장에 남겨 둔채 이미 전선에서 이탈하였고 일본군으로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기 전 25일 아군 정찰비행정에서 보내온 정보를 바탕으로 적함대를 찾기 위해 돈틀리스 12대로 구성된 정찰대와 29대로 구성 된 공격대를 적함대가 목격된 지점에 보냈으나 이미 다른곳으로 이동한 상태라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귀환해야했고 이때 야간착함 상황에 직면하게 되어 엔터프라이즈는 1대가 비행갑판에 불시착, 6대가 부근 바다에 불시착하여 전투가 시작 되기도 전에 7대의 함재기를 손실했다.
그리고 26일 전투 당일, 엔터프라이즈는 다시 돈틀리스 16대로 구성 된 정찰대를 보내어 그 중 2대가 적함대를 찾아 내는 것에 성공하였고 곧장 즈이호에 급강하 폭격을 시도하여 비행갑판에 손상을 입혔다. 하지만 적함재기는 이미 전기 출격하여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노리고 오는 중이었다.
적함대를 발견한 미함대 측도 공격대를 보내기 시작하여 제1, 3차 공격대는 호넷 편대 제2차 공격대는 엔터프라이즈 편대로 구성 되어 있었다. 호넷의 편대와 함께 일본군 함대를 찾다가 일본의 공격대와 마주친다. 처음엔 서로 무시하고 지나가는 듯 했으나 '히다카 모리야스' 소좌가 이끄는 즈이호의 전투기대가 갑자기 반전해 엔터프라이즈의 공격대를 덮쳤다. 이때 다시 한번 7기의 함재기를 손실했는데 그중 하필 지휘관기가 2기나 끼어있었다.[14][15]
이렇게 엔터프라이즈가 제대로 된 전투 전부터 함재기 손실을 입긴 했지만 일본군의 첫 공격은 엔터프라이즈가 스콜에 가려져 있는 상황이었기에 호넷에 집중되었다. 호넷은 일본군에게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모습이 15km 떨어진 엔터프라이즈에서도 "아 호넷이 위기구나..."라고 할 정도로 잘 보였으나, 그정도로 호넷에만 공격이 집중된 후에야 일본기 하나가 엔터프라이즈를 발견했고, 그 소식에 놀란 나구모는 바로 엔터프라이즈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당시 엔터프라이즈 주변을 맴돌며 CAP(Combat Air Patrol, 전투 공중초계)중이던 전투기가 있었지만 항공관제관의 실수로 인해 번번이 적기를 놓치게 되었고 태평양 전쟁 역사상 최악의 방공망 vs 전투기의 싸움이 시작되는데, 폭탄 두발을 얻어맞았지만 엔터프라이즈는 살아남기 위한 격렬한 회피 운동을 하여 지근탄 두발과 어뢰 아홉 발을 회피하고, 전함 사우스다코타를 비롯한 호위 함정의 지원과 아군 화망에 격추 되는 것을 각오하고 진입하여 적기를 격추한 아군 전투기의 활약 그리고 스콜로 인한 유기적이지 못한 적함재기 공격에 엔터프라이즈는 구사일생 할 수 있었다.
적의 공습에서 버틴 엔터프라이즈는 이후 빈사 상태에 빠진 호넷과 자신의 함재기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우선 비행갑판에 있던 돈틀리스 13대를 에스피리투산토로 보낸 뒤 상공에는 57대에 이르는 함재기가 착함을 시작하여 47대가 넘어가기 시작하자 함내에 있던 38대를 포함 적정 대수인 85대를 넘어가게 되어 함재기를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경고가 나왔지만 착함유도 장교는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착함을 행하였다. 승무원들은 전방 엘리베이터가 피탄당해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함재기 수용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사투를 벌였고 마지막으로 10대의 어벤저가 착함을 마쳐 총 95대의 함재기를 보유하게 된 엔터프라이즈는 엘레베이터의 파손과 더불어 함재기가 출격할 수 있는 활주로 부족 등으로 적의 공격에 대단히 취약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현 상태로는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킨케이드 제독은 전선 이탈을 명하게 된다. 참고로 일본군은 빈사상태에 빠진 호넷을 어떻게든 노획해보려고 했으나 손상이 너무 심해서 결국 뇌격으로 처분한다.
전사 44명, 부상 75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방 엘리베이터가 작동 불능에 명중, 지근탄에 선체 일부가 파손 된 엔터프라이즈는 어쩔 수 없이 수리를 위해 돌아가야하는 상황에 처한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요크타운이 격침당하고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호넷 역시 격침당하며 이제 3척이었던 요크타운급 항공모함들 중 엔터프라이즈 홀로 남게 되었다. 이때 엔터프라이즈의 한 정비사는 함교 벽에 흰색 페인트로 Enterprise VS Japan 이라고 글씨를 휘갈겨서 당시의 심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은 건 엔터프라이즈 뿐이었죠."
"우린 최후의 항모니까 일본군의 좋은 목표물이었죠. 달리 누가 있나요?"
ㅡ'배틀 360'에 나온 승무원들의 증언
엔터프라이즈가 없어지자 일본군은 기고만장했고, 과달카날은 함락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주만으로 돌아가지 않고 뉴칼레도니아 누메아에 도착한 엔터프라이즈는 10월 30일 윌리엄 홀시 제독의 명에 엔터프라이즈 승무원과 수리함 베스탈을 비롯한 미해군 공병대까지 달라 붙어서 응급수리에 들어갔다.
"...And then there was one patched-up carrier."
"...그렇지만 응급수리된 1척의 항공모함이 남아있었다."
ㅡ 해군소장 토마스 C. 킨케이드(Rear Admiral Thomas C. Kinkaid)
이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아
과달카날의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엔터프라이즈는 11월11일에 수리작업을 하고 있는 베스탈 승무원을 태운 채 사용 가능한 최후의 미태평양 함대 항모부대가 되어 버린 전함 워싱턴 및 사우스다코타와 다수의 순양함, 구축함으로 구성 된 제16임무부대(Task Force 16)[16]에 복귀하여 출항 11월 13일, 과달카날 해전(3차 솔로몬 해전)에 참가한다. 이 TF 16은 진정한 의미로 최후의 임무부대였는데, 엔터프라이즈뿐 아니라 전함 워싱턴, 사우스다코타 역시 과달카날에서 기용 가능한 마지막 전함들이었다. 엔터프라이즈가 죽은 줄 알았던 일본군은 혼비백산했고, 엔터프라이즈는 헨더슨 비행대와 연계작전으로 일본의 수송선을 몽땅 박살내버리고 만다. 결국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엔터프라이즈는 새러토가가 복귀할 때까지 1942년말 태평양에서 실질적으로 활동 가능한 유일한 미해군 정규항모로 전선에 남아 있었다.
1943년 1월 다시 전선에 복귀한 새러토가와 함께 과달카날 해역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던 엔터프라이즈는 일본군의 항공기의 공격에 대파되어 인양 중인 중순양함 시카고를 지키기 위해 전투기를 파견하였고 렌넬 섬 해전이라 불리는, 다시 함선을 공격하기 위해 온 G4M '베티' 편대와의 전투가 일어났다. 이때 적의 폭격기를 격추하고 시카고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결국 시카고를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CV-6 엔터프라이즈 초기형에는 12.7mm 기관총 24문 이 장착되었으나
1942년 초기 - 5인치 38구경 양용포 8문, 1.1인치 75구경 4연장 기관포 4기, 20mm 기관포 30문
1942년 후기 - 5인치 38구경 양용포 8문, 1.1인치 75구경 4연장 기관포 1기, 40mm 4연장 기관포 4기[6], 20mm 기관포 44문
1943년 - 5인치 38구경 양용포 8문, 40mm 기관포 40문, 20mm 기관포 50문
1945년 - 5인치 38구경 양용포 8문, 40mm 기관포 54문, 20mm 기관포 32문 등으로 증가된다. 사진은 20밀리 기관포의 모습]
1943년 2월 대혈투가 끝나고 과달카날을 미군이 완전히 확보한 걸 본 엔터프라이즈는 에스피리투산토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진주만으로 귀환하여 신규 비행대 훈련에 힘쓰던 중, 1943년 5월 27일에 미 합중국 대통령이 니미츠 제독에게 감사장을 수여한다. 이것은 미군 항공모함 중에서는 사상 최초다.The Presidential Unit Citation
이후 엔터프라이즈는 대대적인 수리를 받았으며 그동안 전력화가 완료된 미기동함대의 새로운 중핵이 될 에식스급 항공모함과 함께 11월에 출격, 길버트 제도와 마샬 제도에서 활약한 후 12월 9일에 진주만으로 귀환한다.
[적의 공격을 받아 소화중인 CV-6 엔터프라이즈호의 모습 측면의 5인치 대공포의 모습을 잘 볼수 있다,]
1월에는 마셜 제도 상륙작전을 지원하고, 2월에는 트럭 섬을 공습하는 등 상륙작전 지원과 양동공격 임무를 맡았다. 이후에도 비스마르크 제도, 케롤라인 제도, 팔라우 제도, 뉴기니아 섬 등 태평양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륙작전을 지원했으며, 필리핀 해 해전에서 칠면조 사냥에도 참가한다.
그러나 필리핀 해 해전 종료 직후, 해전때보다도 큰 위기가 닥쳐왔는데 돌아오는 과정에서 시간이 너무 늦어 파일럿들이 밤바다를 비행해서 돌아와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파일럿들을 잃은 항모도 꽤 되었고 워낙 절망적인 상황이라 당시 파일럿 중 한명은 늙어서 그 일에 대해 인터뷰를 할 때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함대를 지휘하던 마크 미처 제독은 함대의 목숨을 걸고 전 함은 빛을 밝혀라라는 도박을 감행한다. 야간에 함재기도 없는 항공모함, 즉 호위 없는 함대가 떡하니 불을 밝힌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가장 잘 알면서도 파일럿들을 위해 함대의 목숨을 걸고 야간등화를 켜라고 명한것. 이런 마크 미처 제독의 목숨을 건 도박은 멋지게 성공하여 이날도 엔터프라이즈에서 돌아오지 못한 파일럿은 제10항모비행단 지휘관인 윌리엄 R. '킬러' 케인 중령 단 한명뿐이었고, 이 파일럿도 22일에 아이스크림 25갤런(대략 85kg)과 맞바꿔 구조된다. 아이스크림이 언급된 이유는 마크 미처 제독은 구조를 장려하기 위해 '파일럿 구조해오는 배에는 아이스크림을 더 배급하겠음!'이라고 선언했었기 때문이다. 해당 파일럿이 구조되었을 당시, 파일럿을 구조한 구축함이 보낸 통신이 '이 파일럿은 아이스크림 몇 갤런인가?' 였다. 게다가 '이 파일럿은 비행대 리더이므로 아이스크림을 좀 더 많이 줘야 한다.'라며 협상(?)까지 시도했다. 물론 이는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기 위한 농담이고, 항공모함 입장에서는 매우 저렴한 금액이었다.
7월에 휴식을 위해 진주만으로 돌아갔다.
8월 24일에 재출격한 엔터프라이즈는 케롤라인 제도, 오가사와라 열도,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을 공격하고 레이테 만 해전에도 참가했다.
12월 24일에는 야간전투기 훈련도 시작했다.
1월에 출격한 엔터프라이즈는 Carrier Division Seven소속이 되어 정규항모 새러토가와 경항모 인디펜던스와 더불어 야간 작전 항모가 되어 5월14일 전열에서 이탈전 까지 야간 및 주간 작전에 종사하게 되었다. 일본과 인도네시아를 잇는 교통로를 자르고, 이오지마 전투에 참가한 아군을 지원한다. 이 무렵 일본군의 공격으로 약간의 손상을 입었고, 아군의 오발로 피격을 당하기도 했다.
4월 5일에 엔터프라이즈는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한 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격한다. 작전을 수행하던 엔터프라이즈는 5월 14일에 26기의 일본항공기의 내습을 받지만, 6기를 대공포화로 격추시키고 19기는 상공초계기에 의해 격추되었다.
하지만 도미야스 슌스케(富安俊助) 중위의 1기가 대공포의 포화를 피해 구름 속에 몸을 감춘 후 시시각각으로 구름사이 얼굴을 비친 엔터프라이즈의 위치를 확인하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오전 6시 56분, 이 1대의 기체는 엔터프라이즈를 향해 단기로 자살돌격을 감행했다. 어지간하면 개죽음으로 끝날 돌격이지만 이 사람은 집중포화를 받는 와중에[ 함 바로 위에서 180도 좌측으로 선회하여 배면비행의 상태로 급강하해 전방 함재기 엘리베이터 후방에 돌입했다. 덤으로 돌입순간에 폭탄을 기체와 분리해서 폭탄이 격납고에 직격하도록 하는 등 피해면적을 확산시키는 재주까지 부렸다. 그러니까 혼자 카미카제 공격을 하면서 엘리베이터와 격납고를 동시에 타격하는 신기에 가까운 재주를 부린 것. 이 때 엔터프라이즈의 방공화기는 40mm 보포스 54문에 20mm 오리콘 32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엔터프라이즈의 방공 능력은 이제 막 취역해서 경험이 부족한 새내기도 아니고, 위에 언급된 격전들을 통해 단련된 베테랑 승조원들로 구성되었다.이들이 쏘아대는 화력이 항공기 한대에 집중되었으니 이 사람은 거의 탄막슈팅 수준으로 쏟아지는 대공포탄을 피하가며 취약점을 타격하는데 성공하기까지 한 것.
이는 카미카제 같은 짓을 안 하고도 적의 대형 군함을 지속적, 성공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에이스 파일럿이 직접 자살공격을 한 셈이었으며 미군 말대로 일본군 전체가 3년에 걸쳐 손대지 못한 항모에 혼자서 치명타를 먹인거니 대단한 위업이기는 하다. 그리고 저런 일류 조종사를 일회성 자살공격으로 소모해 버리는 일제의 막장성을 보여주는 사례기도 하다. 이렇게 상당한 공적을 올릴 정도로 탁월한 비행술을 보유한 에이스 파일럿은, 후방 비행학교 등에서 후배 파일럿 양성에 힘쓰도록 하거나 자신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항공 작전을 지휘하는 지휘관 임무를 맡기는게 정상적인 군대의 모습이다. 후방으로 빼지 않아도 이런 사람들은 멀쩡한 임무에 출격시켰으면 알아서 폭격 때리고 전투기도 잡고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요격기 타고 폭격기 줄줄히 떨어뜨릴 에이스 파일럿을 카미카제같은 미친 짓에 투입해 싹 죽여버리니 도쿄 대공습을 안 당할리가 있나.
이 공격으로 엔터프라이즈는 400피트(약 122m) 상공까지 연기가 피어오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전방의 엘리베이터는 120m 상공까지 솟아올랐다가 떨어져서 불탔으며 전사 12명, 부상 72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함 자체도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동부 솔로몬 해전의 전사 74명, 부상 95명, 산타크루즈 해전의 전사 44명, 부상 75명 다음으로 입은 큰 피해였다. 이 피해에 엔터프라이즈 승무원들은 약 30분만에 화재를 진압하고 비행갑판을 정리, 침수된 구역에서 물을 빼는 등 재빨리 조치를 취하였고 그 모습에 마크 앤드류 미처 제독은 효과적이고 뛰어난 데미지컨트롤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비행갑판의 파손 및 구조손상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필요가 있어서 제대로 된 수리를 위해 본국으로 귀환하여 수리에 들어갔고 종전하던 시점에는 해군공창 부두에 정박하고 있었다
PT2에 계속
첫댓글 어릴때는 이 배를 나중에 핵추진으로 개조해서 오늘날 엔터프라이즈인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