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는 새벽에 군가를 부르며 훈련장으로 가던 시절,
영하 30도를 오르 내리는 기나긴 겨울밤, 최전방 철책선을 6-7시간씩 지키던 초병 시절, 푸르기 더 없는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렇게 밝게 빛나던 별들, 그중에서도 북두칠성의 위치가 초저녁과 새벽 시간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기도 했습니다.
김신조 일당이 내려온 1968년 1월을 지난 지가 불과 2년도 안 지났던 때.
1969년에서 1970년 그해 겨울은 왜 그리도 추었는지. 서울이 영하 15도면 철원은 영하 25도쯤이고, 철책선 근무지는 이 보다도 더 높은 고지대에 있었으니 그 만큼 더 추울 수 밖에. 전방에는 역곡천이 내려다 보이고 우측으로는 백마고지가 보이던 곳,
그곳의 겨울을 어찌 잊으랴. 지금도 몸서리 쳐지는 추위와의 싸움, 오죽하면 동장군이란 말이 나왔을까?.
예비군도 창설하고, 전방에는 휴전선에는 철책선이 쳐지고 마치 온 나라가 벌집 쑤셔놓은 형국이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후방 FEBA지역에는 곳곳에 방어진지가 구축되고 하던 시절 참으로 어수선하던 시절이 55년도 더 전 이야기 입니다.
길고 긴 겨울 밤이 어서 새기를 기다리던 시절, 새벽 동이 트는 것이 그리도 기다릴 수 밖에,
시계도 없이 그냥 마냥 새벽이 오길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그 멀고 먼 옛날 옛적 요즘 같은 시계가 없었던 그 시절에는 어땠을까요.
전기도 없이 호롱불, 석유 등잔불에 의지하던 시절, 석유기름도 아깝다고 불도 켜지 않고 지내던 시절 그 이전 이야기입니다.
밤이 기나긴 동짓날 밤에 들기름 종지에 창호지 심지 박아놓고 불 켜던 시절에는 해저문 저녁에는 저녁을 일찍 먹고(하루 두끼 먹던 시절)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지요.
새벽을 알리는 시계소리는 동네의 숫탉(장닭)의 울음소리가 대신 했습니다.
한쪽에서 닭울음 소리나면 동네 여기저기서 다른 장닭들이 따라 울고, 마치 개가 따라 짓듯이 장닭도 일제히 웁니다.
제사가 있는 날에는 첫닭 울기 전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저승의) 귀신은 밤에만 다니시니 날이 새기 전에 제사를 끝마쳐야 했습니다.
돌아가신 날 전날에 제사를 지낸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유도 모른채,
무조건 전날 밤에. 그렇게 제사날짜도 기억하고요.
그래서 돌아가신 날과 제사지내는 기일이 하루 차이가 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실제로는 돌아가신 날이 처음 시작하는 시간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참 후에 알게 되었지요.
무지한 민초들에게 이 복잡한 이치를 세세하게 일러 주기가 번거로우니까 무조건 전날 밤으로 인식시켜 놓아버린 것입니다.
통행금지가 실시되던 때라 큰집에 가서 밤 12가 지나서 제사를 지내고 나면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인근의 파출소나 지서에서 통금위반으로 잡혀가던 시절입니다.
제사지내고 간다고 미리 양해를 얻은 터라 무사하지만 .
옛날에 성문을 지키던 일 중에 큰일은 성문 열고 닫는 일이었습니다.
인정과 파루, 밤이 깊어지는 10시경 이면 인정(人定)이라 해서 성문을 닫고 (도성)출입을 엄금합니다.
새벽 4시 , 즉 첫닭이 우는 계명(鷄鳴) 축시(丑時)가 지나서 치는 파루(罷漏)소리에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킵니다.
인정에는 북을 28번 쳐서 알리고, 파루에는 33번 종을 쳐서 통금해제를 알립니다.
지금도 제야에 보신각 종을 33번 쳐서 새해 새날이 되었음을 온 누리에 알리는 것도 이런 풍속의 계승입니다.
종로(鐘路)라는 지명이나 종각이니 종루니 하는 이름도 이런 제도의 결과물입니다.
33이라는 숫자가 기미독립선언서의 서명한 사람의 수나, 과거 (문과)급제자의 수를 33명으로 한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도성의 8개 성문 여닫기가 얼마나 엄중했던지 정조대왕은 화성 능행차 후 환궁시 한양 도성문을 열어주지 않아 곤욕를 치른 이 야기가 전해져 올 정도입니다. 왕도 출입이 자유롭지가 않을 정도였으니...
옛날 중국 진나라 때는 거짓으로 닭울음 소리를 내어 성문(함곡관)을 열게 해서 구사일생으로 도망나왔다는 고사도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맹상군 (열전 15)의 계명구도(鷄鳴狗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엄중했던 통행금지제도가 없어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타종대신 오포(午砲)라는 말이 사이렌으로 대체되어 사용되다가 이제는그마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포란 말은 옛날에 서울 금천교에서 대포를 쏴서 정오 시간을 알렸던 데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사방에서 무장공비가 출몰하고, 치안이 엄중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전방 철책선에서 후방 해안초소까지 어느 곳 하나 물샐 틈 없이 방어해야만 했던 시절이지요.
통행금지 위반으로 고통을 받던 시절, 그것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던 국가방위의 시절이 엊그제만 같습니다.
새벽을 알려주던 장닭은 옛날 시계의 원초형이었습니다.
새시대, 새날을 알리는 전령이었습니다.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이야기가 한 때 회자되기도 했지요.
상징적이긴 하지만,
서양 축구팀 로고에 숫탉을 상징으로 쓰는 것도 같은 일맥상통한다고 할까요.
현대적인 기계식 시계가 발명 되기전까지....
인간은 공간과 시간이라는우주(宇宙) 속에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습니다.
시간을 이길 수 있을까요?
시간은 돈인가요?(Time is money.)
어쩌면 돈보다도 더 중요한 시간은 곧 생명( Time is life:生命))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을 소중히, 열심히 살아야 하는 존재 이유인가요?
(2024.01.07.(일)자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