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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자랑하라
240317낮 (갈6:14)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아멘
미국 장로교 잡지 <Presbyterian Survey>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어느 분의 간증담입니다.
꿈에 천국을 가서 이리 저리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나라 사람들이 천국에 와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정말 신비로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옆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신앙생활 하다가 천국에 오셨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1860년 동안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찍 온 셈이지요. 나는 바울 시대에 로마에 살았습니다. 나는 예수를 잘 믿고 있었습니다. 네로가 나를 잡아 기둥에 매두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굶어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지나도 죽지 않으니까 내 위에 장작을 쌓더니 불을 질러 나를 죽였습니다.”
“그 때 얼마나 무서웠었습니까?”
“아니요. 도리어 기뻤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내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나도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때 한없이 기뻤었습니다.”
천국을 구경하던 그는 자기 신앙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또 한 사람을 만나서 물었습니다.
“귀하는 어디서 신앙생활 하다가 천국에 오셨습니까?”
“나는 하늘나라 이곳에 온지 수백 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 남해 에로망가 섬에서 왔습니다. 식인종 민족입니다. 죤 윌리암 선교사가 그 섬에 와서 예수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왜 그렇게 확실하게 믿어지는지 놀랄 정도였습니다. 나는 그 후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로 서약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종족들이 선교사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도 잡아서 나무에 묶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기진맥진할 때까지 팼습니다. 그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와서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뽀갰습니다. 그리고 나를 요리하여 먹었습니다”
“저런 끔찍한 일이 있나?”
“아니요. 당신이 보기에는 끔찍하여도 나는 기뻤습니다. 윌리암 선교사는 나에게 예수님은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으셨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때 믿음을 끝까지 당당하게 지킨 것을 나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윌리암 선교사와 같은 분을 위하여 얼마나 헌신하였습니까? 우리를 천국으로 부르신 예수님을 위하여 어떻게 헌신하고 살고 계십니까?”
그는 이런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물어 본 이는 슬픈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는 침대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몇 시간동안 울면서 회개하면서 자기 생활을 점검하여 보았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하여 헌금 드리는 데는 인색하였고 좋은 옷을 사는 데는 아낌없이 돈을 쓰지 않았는가?
나는 놀러 다니는 데는 많은 시간을 사용하면서 예배드리는 데 시간을 얼마나 바쳤는가?
나는 육적 건강을 위해서는 좋은 것이라면 다 사먹으면서 영적 건강을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였고 성경보고, 영적인 책을 사보았는가?”
그는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다가 꿈에서 깨어나 자기 영적 생활을 다시 조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교인들은 세 가지만 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기, 돈... 이 세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 한국 교인들이라고 외국인들이 평하고 있습니다. 네델란드 신학자가 한국에 와서 한국 성도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우선 세계에서 가장 예배를 많이 드리고 있는데 놀랐습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며 기도드리는 것이 모두 자기만족을 위하여 드리고 있음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한국교인들이 하나님 믿으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자기 자랑과 돈 자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분명히 오늘 우리들처럼 신앙생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자랑하고, 돈 자랑하며 신앙생활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무엇을 자랑하며 살았을까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며,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며,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은혜의 최고봉을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크리스챤이며, 훌륭한 설교가이며, 커다란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생활의 끝 날이 가까 왔을 때, 그의 전 생애를 되돌아보며 외친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갈6:14)
오늘 본문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이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훌륭한 조상도 자랑할 수 있었고, 그의 많은 지식과 학벌, 그의 수고, 혹은 각처에 오르내리며 많은 사람을 구원한 것과 많은 교회를 세운 것 등을 참으로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는 위대한 문필가로서 신약성서의 절반을 기록했는데, 이것도 큰 자랑거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세상 모든 것 중에 어느 하나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세상 것으로 자랑삼지 말고, 오직 주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합시다. 왜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까?
1.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큰 죄를 짓지 않고 잘 살아 왔습니다. 이 중에 살인하거나 절도해서 교도소에 다녀온 분 계십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보다도 죄 안 짓고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남에게 그렇게 큰 해코지도 안하고 살았습니다.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별로 큰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주님이 나의 죗값으로 죽으셨다는 것이 크게 눈물겹도록 고맙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치욕스럽고 극한 형벌인 십자가 형벌로 대신 죽으시겠습니까? 내 죄가 가벼우면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 말씀을 한 번 봅시다.
요일3:15절입니다.
<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마5:28절입니다.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2절입니다.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율법으로는 죄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복음으로는 우리 모두는 살인한자요, 간음한자요, 지옥 불에 들어갈 자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죄가 없습니까? 그래도 우리가 의롭습니까?
이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간음했고, 수백 수천 번 지옥 불에 던져졌어도 시원찮은 존재입니까?
그러니 이런 우리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대할 때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가를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도 깨닫게 됩니다.
요3:16절입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했는데, 은과 금을 주신 것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다이아몬드를 주신 것이 아니라, 많은 육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의 독생자를 내어 주셨으니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롬5:8절입니다.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실히 보여 주셨다는 것 입니다.
화상으로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진 처녀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하여 누구도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은 건강했고 마음도 예뻤습니다. 어느 날 이 자매가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을 만났습니다. 어느 처녀도 시각장애인과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흉한 처녀는 시각장애인이 너무나 불쌍해서 잘 돌봐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사랑하게 되어 둘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인 남편에게 눈을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수술하게 되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내일이면 수술을 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우울했습니다. 그것을 남편이 느꼈습니다. “여보! 내가 눈을 뜨게 된다는 데 당신은 왜 그렇게 우울해. 당신이 기뻐하는 모습을 느끼지 못 하겠어” 아내가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워요. 내 얼굴은 화상으로 흉측해요. 당신이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덜 할 것만 같아요. 우리의 사랑이 식어질 것만 같아요.” 이 말을 듣고 남편은 수술 받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시각장애인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여 평생 수술을 받지 않고 시각장애인으로 살았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남편입니다. 전에는 남편의 장애가 단지 장애였지만 이제는 남편의 장애는 아내를 향한 사랑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무엇 때문에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첫째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속죄와 구원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눅23:33-34절입니다.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어느 사본에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를 한번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되풀이 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갈보리산에 도착했을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했고,
못 박기 위해 십자가 형틀에 눕힐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하셨고,
굵은 못이 살과 뼈를 뚫고 들어갈 때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하셨고, 십자가 형틀에 못 박은 후 일으켜 세울 때에 손 발 못자국마다 찢어지며 피가 쏟아질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하셨고,
십자가 형틀에서 조롱하며 옆구리를 창으로 쑤시는 무리들을 내려다 보시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하셨고
그 옷을 놓고 제비 뽑을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고전1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과 용서의 도요,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4.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면에서 승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질병에서, 죄에서, 영적전쟁에서, 고난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주후 4세기 로마는 황제들의 권력 싸움에 휘말렸습니다. 두 사람이 권력다툼을 하였는데 막센티우스(Maxentius)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입니다. 막센티우스는 폭군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신앙이 좋은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을 받아 믿음이 좋은 장군이었습니다. 마지막 전투를 밀비아누스 다리에서 하였는데 숫적으로 막센티우스 군대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전쟁을 하기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가 꿈을 꾸었는데,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너는 이 십자가로 승리하리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다음날 병사들에게 십자가를 달고 싸우게 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황제가 되어 주후 324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였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국가가 기독교 국가가 되어 한순간에 로마의 절반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골 2:15에 보면 <15)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마귀와 마귀의 세력을 이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3:8에서 말했습니다.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합니다. 이 승리는 꼭 마귀와의 싸움에서의 승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승리는 믿음의 싸움의 승리이며, 사명의 길을 가기 위한 싸움의 승리이며 환경을 이겨내는 승리입니다.
극동 방송국의 사장으로 수고 하셨던 김장환 목사님께서 미국에서 미국인과 결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모님을 모시고 한국으로 오셨습니다. 미국이 선진국이라 미국인과 결혼하면 시민권도 나오니까 보통은 미국에서 사는데 김장환 목사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서 한국으로 왔습니다. 가장 문제가 사모님이었습니다. 6.25 직후에 한국이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사모님이 미국에서 최고의 좋은 환경 속에서 살다가 한국에 오셨으니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서울도 아니고 수원에 개척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장로교는 알아도 침례교가 뭔지도 모르던 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거기다가 시부모 모시고 시동생도 데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어른들과 사는 것도 힘들고 음식문화에 적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온돌문화도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어려운 것이 화장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화장실에 문이 없었습니다. 문은 고사하고 지붕도 없어서 하늘을 보면서 볼일을 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방방에 자기 화장실이 있어서 편리하게 살던 사람이 이런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사모님은 철저하게 밥을 적게 먹고 밤12시 지나서 딱 한 번만 화장실에 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보다가 시아버지나 시동생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사모님이 잘 참아냈습니다. 어떻게 해서 참았을까요? 남편보고 못 참고 사람보고는 못 참는데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참았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니까 참아지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환경도 이겨내게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인간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 53:3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병과 질고도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생전에도 누구든지 예수님의 손이 닿은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여러 분의 모든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계시록 12:11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희를 이기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는 곳에는 승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영적전쟁에서, 극심한 고난에서도 승리하게 합니다. 여러분! 견딜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오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큰 고난을 당한다 한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만 하겠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 능력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힘이 생깁니다.
바울은 어느 곳에서나, 누구에게나, 각 집에서나 꺼림 없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자랑합시다. 입만 열면 내자랑, 자식자랑, 돈 자랑, 힘자랑, 옛날자랑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합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치면서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갈6:17). 흔적이란 말의 헬라어 <스티그마/στιγμα>는 주인이 자기 소유임을 밝히려고 말이나 소의 엉덩이에 불로 달군 쇠로 찍어 표시하는 아픔의 흔적을 말합니다.
성도가 제일 자랑해야 할 것은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옛날에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면 40-50년이 지나 잘 알아보지 못할 때 어떻게 서로를 확인했습니까? 옛날 일을 떠올리며 “혹시 어깨에 덴 흔적이 있느냐? 발등에 낫으로 찍힌 흔적이 있느냐?”라고 물어서 찾았습니다. 후일에 예수님 앞에 설 때 예수님은 무엇보다 십자가를 진 흔적을 보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십자가의 흔적이 많을수록 주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합시다. 내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을 자랑합시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