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시마 요시코 (川島芳子)
1907년 5월 24일 생 - 1948년 3월 25일 사망 ?
가와시마 요시코는 청나라 황족집안인 숙친왕(肅親王)의 14번째 공주로 1907년에 베이징의 숙친왕부에서 태어났다. 생모는 숙친왕의 4번째 아내로 숙친왕 가문은 청태종 홍타시의 첫째 아들인 무숙친왕 (武肅親王) 호게(豪格)를 조상으로 해 숙친왕이라는 이름을 대대로 세습받는 명문이었다. 이름이 일본식인 이유는 일본에 양녀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본명은 아이신주러우 켄즈(愛新覺羅 顯子)로 별명은 금벽휘(金璧輝)는 숙친왕의 7번째 아들인 금벽동(金壁東)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또 노래집엔 가즈코(和子)라는 필명을 사용했으며 그 외 여러 가명을 사용했다. 1911년 10월에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1912년에 선통제 푸이가 퇴위하고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총통에 앉아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이 성립되었다. 선통제의 퇴위에 크게 반발한 숙친왕은 황제퇴위 직후 당시 그의 고문으로 와 있던 일본인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의 도움으로 가족과 함께 베이징을 탈출해 뤼순(旅順)으로 건너가 일본에 망명을 신청했다. 숙친왕은 일본의 원조를 얻어 청조부흥운동을 구상해 1912년과 1916년에 두 차례의 거병을 계획했지만 일본의 방침전환으로 인한 중지명령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한편 숙친왕의 고문이던 가와시마 나니와는 신슈 마츠모토 번사의 아들로 외국어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해 1900년에 의화단 사건시 육군통역관으로 종군했다.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경찰기구의 창설과 치안유지로 명성을 얻은 그는 일본군이 철수한 후 청조에 고용되어 중국최초의 근대적 경찰양성학교인 베이징 경찰학당의 총감독으로 취임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경찰행정을 담당하던 숙친왕과 친교가 맺어졌던 것이었다. 일본조계인 뤼순에서 숙친왕 일가는 관동 도독부의 배려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이 버리고 간 관사를 제공했다. 숙친왕이 거병을 위해 가와시마를 지목하고 자주 접촉하자 자연히 딸 켄즈도 가와시마의 신분을 보완하기 위해 청 황족의 친척이란 신분을 가와시마에게 주어 양녀로 들어갔다. 이 때 이름이 가와시마 요시코로 고쳐졌다.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간 요시코는 도쿄 도요시마 사범학교 부속 소학교를 졸업 후 아토미(跡見)여학교에 진학했다. 가와시마 집안의 이사로 나가노 현의 마츠모토 시로 전학한 요시코는 마츠모토 고등여학교에 다녔는데 당시 말을 타고 통학하여 지역주민들에게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22년에 부친인 숙친왕이 사망하자 장례를 위해 장기휴학한 요시코는 복학하지 않고 학교를 중퇴했다. 17세때 연인이였던 야마이에(山家)소위와 사랑했지만 양부였던 나니와가 이들을 인정하지 않자 그녀는 요란한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부터 요시코는 머리를 자르고 남장을 했는데 머리를 자른 직후 여자를 버리기로 작정한 결의문서를 작성했다. 이 사실은 신문에도 게재되어 요시코의 남장은 큰 화제가 되었는데 그녀를 따라 단발머리를 하는 여성들이 줄을 잇는 등 사회문제로 비화될 정도였다.
일본군복 차림의 가와시마 요시코. 1927년 뤼순에서 요시코는 몽고족의 장군인 파푸챠프의 아들 캉주르쟙과 결혼했지만 성격차이와 양부의 반대로 2년만에 이혼했다. 그 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주재무관이던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소좌와 교제한 요시코는 이 때부터 특무공작에 관여하여 상해사변시 첩보활동에 주력했다. 상하이에서의 활약으로 그녀는 동양의 <마타 하리>라고 불렸다. 1931년 9월에 관동군에 의한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11월에 청조 마지막 황제였던 아이신주러우 푸이를 이용하기 위해 관동군은 그를 텐진에서 만주로 탈출시켰다. 요시코는 이 때 황후 완룽을 텐진에서 뤼순으로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1932년에 푸이가 집정으로 만주국이 성립되자 가와시마 요시코는 신칭(新京, 현 장춘)에서 만주국의 장관자리를 받았지만 실제론 취임하지 않았다. 이 때 가와시마 요시코를 모델로 하여 소설가 무라마쓰 쇼후(村松梢風)는 <남장의 여인>이란 책을 출판하여 요시코는 <일본군에 협력하는 청조의 왕녀>라는 것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33년에 관동군의 지원을 얻어 만주 안국군(安國軍)이 창설되자 요시코는 사령관에 임명되어 열하작전에 종군했다. 안국군이 어느정도의 부대인가, 실제 활동은 무엇인가 하는 것은 현재도 불명인데 그녀의 취임뉴스는 일본과 만주국의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요시코는 <동양의 잔 다르크>, <만주의 잔 다르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또 요시코는 라디오 방송에 자주 출연해 여유있을 때마다 즉흥적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레코드 사로부터 요청을 받는 등 매우 인기를 끌었다. 요시코가 노래한 <십오야의 아가씨 - 十五夜の娘>, <몽고의 노래 - 蒙古の唄>등은 레코드로 발매되었다. 그 속엔 몽고어로 부른 노래도 있는데 이것은 요시코가 잠시 몽고출신의 남편과 결혼해 초원에서 살던 적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요시코의 레코드는 1933년 일본에서 <캬라반의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다. 1933년에는 소살 <남장의 여인>이 게재된 부인공론 잡지에서 독점수기 형식으로 <나는 조국을 사랑한다>를 연재해 1940년에는 자전록인 <동란의 그늘에서>를 출판했다. 또 요시코는 영화계의 스타였던 리샹란(李香蘭)과 친하게 지냈으며 우익인사인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와도 교제해 텐진에서 중화요리점인 동흥루(東興樓)를 운영하기도 했다. 세간에서 화려하게 주목받던 요시코는 실제론 깊은 고독감을 안고 있었다. 요시코는 만주국이 청조의 부흥이 아닌 일본의 괴뢰정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관동군의 위문고연 취소와 중일전쟁의 비판발언으로 인해 군부로부터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감시당했다. 또 관동군에 의한 암살계획도 있었다고 그녀는 훗날 증언했다. 1939년 신병치료를 위해 후쿠오카에 체재한 그녀는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 단가(短歌)를 자주 썼다. 이 글들은 50년 후 가집인 <진실의 가와시마 요시코>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요양을 마친 요시코는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갔는데 그곳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일본의 패배로 전쟁은 막을 내리자 베이징에 있던 요시코는 10월에 국민당 군대에 체포되어 전범자인 한간(漢奸 - 중국어로 국적, 매국노란 뜻)으로 기소되었다. 그녀는 1947년 사형언도를 받고는 1948년 3월 25일, 베이핑(北平) 제1 감옥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요시코는 일본국적을 가지고 있어 한간이란 죄목은 적용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일본에서도 일본인으로 취급받지 못했기에 한간죄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중화민국 법에선 혈통주의를 우선시해 부친이 중국인이라면 자녀가 다른 국적이라도 중국인으로 취급되어 법을 적용했다. 그러나 동시에 한간재판이 지행된 리샹란(李香蘭)은 원래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라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바로 석방되었다. 가와시마 요시코의 유골은 화장되어 일본인 승려였던 후루카와(古川)에 의해 양부였던 가와시마 나니와에게 전달되었다. 1949년 나니와가 사망하자 요시코의 유골은 나니와와 함께 마츠모토 시의 쇼린지(正鱗寺)에 있는 가와시마 집안의 묘에 묻혔다. 그녀의 사망 후 옷 안 주머니에선 유작 시가 나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고, 눈물을 흘려도 말할 수 없고, 법이 있어도 바르지 않고, 용서받고 싶어도 누가 해주랴" 이 구절은 총실집행 후 발견된 메모에 적혀있던 것으로 앞 구절은 고독한 그녀의 심정을 나타낸다고 여겨진다. 1998년에 그녀의 사후 50주년을 기념하여 요시코가 어릴적 시절을 보낸 나가노 현 마츠모토 시에서는 일본 사법박물관 내에 그녀의 유품과 글을 전시하는 <가와시마 요시코 기념관>을 개설하였다. 그녀가 사망한 매년 3월 25일경 주말에는 기념관에서 가와시마를 추모하는 모임이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일본사법박물관은 2002년에 마츠모토 시로 이관되어 야외박물관 <마츠모토 시 역사의 고장>으로 개칭되어 2007년 4월에 리뉴얼해 오픈했다. 가와시마 요시코의 기념실은 역사의 고장 내에 전시동이 있다.
* 가와시마 요시코의 생존설에 대해. 가와시마 요시코는 총살되지 않고 잠적해 숨었다는 여러가지 생존설이 있었는데 이것은 현재도 논란이 되고있다. 최근 생존설이 다시 보도되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에 생존논란은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당시 생존설이 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한간의 처형은 일반적으로 공개적으로 행하는데 요시코의 경우 비공개로 진행된 점. 2. 사형집행 후 공개된 시신은 총탄이 얼굴에 관통하여 심하게 훼손되어 본인인지 확인할 수 없었던 점. 3. 처형 몇일 전에 면담한 기자의 말에 의하면 요시코는 단발이었는데 처형 후 시신은 장발이었던 점. 당시 처형직후 중국의 신문이 보도한 것에 따르면 감옥에는 요시코와 같은 나이의 중병환자로 목숨이 얼마 남지않은 여성범죄자가 있어 여성의 모친이 간수에게 딸을 보살펴 달라며 금 10개를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실제론 4개만 주었다는 유족의 증언이 매스컴을 통해 고발되었는데 국민당 정부는 이 보도를 부정했으며 사실확인은 곧바로 발생한 국공내전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생존설을 중시한 GHQ에선 각지에 조사반을 파견해 관계자들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지만 결론을 얻지 못하고 국공내전 때문에 조사가 중단되었다. GHQ의 조사보고서는 미국 국립공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있다. 한편 일본의 매스컴에선 과학자들을 동원하여 처형직후의 사진을 감정케했는데 골격과 형상이 요시코와 다르다고 판명했다. 이에 일본에선 그녀의 DNA와 지문을 식별하기위해 그녀의 유품에 남겨진 지문과 쇼린지에 있는 유골을 조사했는데 지문은 다른 사람의 것도 많이 묻혀있어 검출에 실패했으며 유골은 식별불가로 사실규명에 실패했다. 최근, 2008년 11월 16일에 중국 신문화보(新文化報)에선 가와시마가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서 지난 1978년까지 생존했다는 여성의 증언과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전했다. 신문화보에 따르면 일본인 고아 출신으로 창춘에서 활동하는 여류화가 장위(張鈺)가 가와시마의 행적을 증언했다.
장위의 어머니를 입양했던 중국인 외할아버지 돤샹(段翔)이 86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장위에게 <네가 어렸을 적에 돌봐주던 팡(方) 할머니가 사실은 가와시마 요시코다>라고 말하며 가와시마가 생전에 그린 그림 등 유품을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장위 친척들은 돤샹과 가와시마가 내연관계였던 것으로 알고있었다.
가와시마는 처형장에서 바꿔치기 된 뒤에 돤샹과 다른 동료의 도움으로 1949년 창춘의 신리청에 정착했다고 한다. 장위는 <팡 할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가운데 가와시마가 작사한 ‘몽고의 노래’ 등이 포함돼 있다>고 회고했다. 국민당 경찰로 일했던 돤샹의 사망 후 발견된 팡 할머니의 유품 가운데에는 관동군 관련 정보 외에 은제 비녀와 프랑스산 망원경 등 당시 일반인이 구하기 어려웠을 물건들이 포함돼 있다. 청말 어전시위였던 돤샹의 외삼촌은 요시코의 친부인 숙친왕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이는 가와시마와 돤샹의 인연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2009년 3월 4일 일본의 텔레비젼 신슈에서 보도한 것에 의하면 요시코가 생존했다고 증언한 장위가 2009년 3월에 중국의 민간조사단과 함께 나가노 현 마츠모토 시의 기념관을 방문해 요시코의 생전 사진을 보고는 <어릴적 얼굴 사진의 요시코의 눈과 코가 팡 할머니와 매우 닮았는데 확실하게 그녀가 맞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라고 말해 요시코의 생존설은 확실한 증거가 없어 그녀의 말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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