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 황석영 / 창비
실화를 기본으로 하여, 전쟁 통에 한 마을에서 동고동락하던 이웃이 서로 죽고 죽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그 비극의 원인을 손님으로 불리는 마마(천연두)를 빗대어 기독교와 공산주의로 설정한 듯 보이며, 굿 한판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듯하다.
이상 사회는 존재하는가?
소설 속의 기독교나 공산주의는 모두 설익은 것이며, 설익은 것에는 응당 독을 포함하고 있다.
남의 것이 좋아 보인다는 말처럼, 멋지고 힘세게 보이는 남의 것을 어설프게 흉내 냄으로써 비극이 발생한다. 그 남의 것이 손님처럼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이상의 세계를 주장하지만, 그 과정은 길고 험난하다는 사실은 가르치지 않는다. 신의 뜻으로, 혁명으로 가능하다고 사탕발림한다. 세대에 세대를 거치면서 조금씩 조금씩 가능한 것인데.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만을 좇던 이들은 자신의 이상을 타인에게 강제하게 되고, 각자의 이상은 서로에게 마마가 되어 죽음을 부르게 된다. 어떤 이가 주장하는 신성하고 선하고 이상적인 생각도 타인에게 강요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선한 것도 신성한 것도 이상적인 것도 아닌, 악하고 추하고 저급한 것이 되어 사람을 힘들게 하고 급기야 해치게 된다. 그 시작은 물질로 시작한다. 결국 삶은 현실이며 현실은 물리학의 법칙처럼 늘 편함을 갈망한다.
신앙은 신(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다. 그것은 신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지, 남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강제하지 않는다. 많이 사용하는 말, 선한 영향력이란 있을 수 없다. 정치형태도 비슷하지 않을까? 민주주의도 종착역이 어딘지 아직 모를 뿐만 아니라 지금도 험난한 길에 서 있지 않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향에서 만난 외삼촌 안석만은 아직도 기독교인이며 당원이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은 무슨 뜻이 있거나 가까운 데서 잘해얀다구 했디. 늘 보던 식구들과 동니사람들하구 잘해야 한다구. 길구 제 힘 으루 일해서 먹구살디 않으문 덫을 놓아 먹구살게 되는데 기거이 젤 큰 죄라구 말이다. 173
지상의 일은 역시 물질에 근거하여 땀 흘려 근로하고 그것을 베풀고 남과 나누어 누리는 일이며, 그것이 정의로워야 하늘에 떳떳한 신앙을 되돌릴 수 있는 법이다. 176
그래야 하는데, 소설에서도 다수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지금 나의 삶도 그다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오늘도 누군가의 발 앞에 덫을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해는 되었는가?
작가는 한판 굿을 통해 화해의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것으로 보인다. 소설 속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적어도 가해자의 편에서는 그렇듯 보인다. 주인공인 요섭은 가해자의 가족이지만 가해자는 아니다. 그는 기독교 목사이면서 굿판의 무당 역할을 소화한다. 죽은 자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작가는 목사에게 무당의 역을 부여하면서 새로운 개신교 목사관을 제시하는 것일까?
"죽으면 다 끝나는 거 아닌가." 47
실정법은 죽은 자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 대를 이어 묻지 않는다. 그럼 죽으면 끝나는가?
죽으믄 자잘못이 다 사라지디만 짚어넌 보구 가야디. 194
죽었지만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을 어떻게 짚어보아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