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6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내 의의 하나님이여! 》
시 4:1~8
〈 선 善 good 〉
요즘 ‘가성비’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들어보셨지요?
‘가·성·비’는 ‘가격 대비 성능의 비율’을 줄인 말입니다.
“가성비가 좋다.” 혹은 “가성비가 떨어진다”라고 쓰입니다.
같은 값을 주더라도 성능이나 효용성이 더 높은 것을 구매하자는 뜻입니다.
가성비에 해당하는 우리 말이 이미 있었습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이지요!
이 말을 굳이 ‘동가홍상 同價紅裳’이라는 사자성어로 축약하기도 했습니다.
가성비, 동가홍상,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동가홍상’ 하면 ‘꼰대’가 됩니다.
‘가성비’라고 하면 그래도 조금은 있어 보입니다. 모양이 빠지지 않습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동가홍상”에서 “가성비”까지 이르렀습니다. 왜 이렇지요?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항상 ‘더 좋은 것’을 찾아 나섭니다.
‘더 큰 것’ ‘더 싼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원 플러스 원’ ‘투 플러스 원’도 나왔습니다.
‘원 플러스 원’ ‘투 플러스 원’만 알아도 ‘꼰대’ 소리는 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① 더 좋은 것 ② 더 큰 것 ③ 더 싼 것 ④ 가성비 좋은 것 ⑤ 동가홍상
사람들이 이것을 찾아나섭니다.
이렇게 “좋고, 크고, 싸고, 진실되며, 선하고, 아름다운 것” 한 글자로 하면 어떻게 될까요?
“선 善 good”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좋고, 크고, 싸고, 진실되며, 선하고, 아름다운 것”
그것을 찾는 이유는 그것이 “선한 것” 곧 “선”이라서 그렇습니다.
“나쁘고, 작고, 비싸고, 허황되며, 악하고, 추한 것”은 “선”이 아닙니다. “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선”을 찾아나섭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깨우치는 것도 따지고보면 “선”을 분별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선”을 제대로 분별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렇게 질문하면 대번에 고개를 가로로 젓게 됩니다.
아무리 지혜롭게 처신한다 해도, 돌아보면 후회스럽습니다. “선”을 분별하지 못했어요!
☞ 인생 황혼녁에 들어서서 돌아보면 “~껄, ~껄, ~껄”한다고 하지않습니까?
〈 의 義 justice 〉
☞ 더 사랑할 껄, 더 용서할 껄, 더 안아줄 껄, 더 베풀 껄, 지갑을 더 많이 열 껄…
평생에 살면서, 충분히 사랑한 사람, 충분히 용서하면 산 사람, 충분히 베푼 사람…
과연 있을까요? ~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 분명해졌습니다.
① 사람은 평생 선을 찾아 헤맨다.
② 그러나 선을 찾아낸 사람은 없다.
③ 그럼에도 사람은 선을 찾아 나선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동의가 되십니까? 동의하신다면 “아멘!”해 보시기 바랍니다.
☞ 사람이 언제부터 선을 찾아나섰습니까?
아담 하와 때부터입니다.
그들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선을 찾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은 선하니 받으라, 이것은 악하니 받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 하와가, “우리가 선과 악을 판단하면서 살자, 어때?” 하와가 제의 했지요?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에게 권했습니다. 아담도 “그래 좋다!” 했습니다.
그때부터 인류는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선과 악을 자신이 결정하면서 살자니 참 복잡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감이 달까, 고욤이 달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세 갈래길 삼거리에 비가 내린다!”
늘 비 맞으면서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옳았어! 내가 그때 그렇게 해야했어!”
“그게 옳았어!” 이 말은 뭡니까? “의 義 good”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하고 갈 것이 있습니다. “선 = 의”라는 것입니다.
선이 곧 의고, 의가 곧 선입니다. 선과 의는 서로 혼용되는 단어입니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선과 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자기네가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시편 4장은 “내 의의 하나님이여~”로 시작합니다.
시인 다윗이 왜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시를 시작하는지 궁금합니다.
☞ 다윗이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했는데,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될까요?
〈 선악 결정권 반납 〉
《 내 의의 하나님이여! 》이 제목은 좀 더 길게 풀어쓰면 이렇게 됩니다.
“나의 의가 되시는, 나의 하나님이여~”입니다.
“나의 의가 되신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의 선악에 대한 결정권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내가 선악을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결정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가져 온 것이 “선악에 대한 결정권”입니다.
그때이래 아담과 하와의 후예인 인류는 각자가 선악을 결정합니다.
시편 4편을 쓴 시인 다윗이 선포합니다. 《 내 의의 하나님이여! 》
이 고백은, 그 결정권, 선악에 대한 결정권한을 하나님께 반납하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제가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에 따르겠습니다. 순종, 복종, 맹종하겠습니다.
이 말입니다. 《 내 의의 하나님이여! 》
☞ 예수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일,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선악에 대한 결정권을 반납하는 일입니다.
‘내가 예수 믿기 이전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내가 결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내가 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면 따 먹으면서 살았습니다.’(창 3:6a)
‘내가 보기에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우면 그것을 따 먹으면서 살았습니다.’(창 3:6b)
그러나 지나고 보면,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온통 후회뿐입니다.
그것은 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의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면서, 그동안 내가 독점했던 “선악 결정권” 반납합니다.
에덴동산,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기 이전으로 되돌려 주옵소서!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 시인 다윗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다윗의 이 한 마디는 바로 이 뜻입니다. 《 내 의의 하나님이여! 》
☞ 우리가 명색이 크리스천입니다. 회개하고 거듭난 자입니다.
☞ 우리가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 교회 敎會 Church 〉
내가 쥐고 있던 “선과 악의 결정권” 그것을 반납했습니다. 주님께 되돌려 드렸습니다.
주님께 결정권을 반납하고 주님의 결정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이 뭐라 하실까요?
“교회 敎會 Church의 지체가 되어라!” 하십니다.
예수 믿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교회 敎會 Church”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이고 저것이 악이다”라고 나름대로 결정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결정해 주는 대로 따릅니다.
“주님의 결정에 순종한다!” 말이 쉽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식과 잠재의식 속에 이미 고착되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악한지, 무엇이 선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여기서 빠져나오는 것, 평생의 숙제입니다.
교회는 ‘선악의 결정권을 반납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서 먼저 반납한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선악 결정권을 반납하고 사는 것인지 교회에서 배워야 합니다.
물론 불신자들의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해야하고, 사교도 갖고, 어울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중심이 달라졌습니다.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이중국적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땅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국적을 동시에 갖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나라에서는 육신이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국적은 영혼이 중심입니다.
세상 나라에 살면서, 천국 국적자의 신분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려면, 교회 공동체의 확실한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최소한 주일과 수요일, 일주일에 두 차례,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교회의 예배를 소홀히 하다보면, 천국 국적은 망각하게 됩니다.
세상에 다시 빠집니다.
세상에 다시 빠진다는 것은, 선악 결정권을 자신이 다시 행사한다는 뜻입니다.
선악 결정권을 자신이 행사하다가, 하나님께 돌려드렸는데, 다시 자기가 합니다.
이는 토사물을 다시 삼키는 것과 같습니다.
☞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선악 결정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 사람은 이야기 속에서 산다 〉
우리가 예수 믿기로 결단하는 일은 “선악 결정권의 반납”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선악 결정권을 반납하고 하나님이 결정해주시는 선악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맨 먼저 “교회의 지체가 되어라”라고 결정해주십니다.
세상에서 돌아서서 교회에 진입했습니다. 교회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왔더니 무엇이 있습니까?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지요?
_ 먼저 예수믿은 성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도와의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_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_ 십자가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십자가 보혈의 이야기에 몰입합니다.
사실, 사람이 한 평생 산다는 것은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태어난 이야기, 내가 자란 이야기가 있어요.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 이야기, 형제자매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때로는 주연이 되고, 때로는 조연이 되고, 어떤 때는 엑스트라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업가에게는 사업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남자로서 간혹 여성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볼 때가 있습니다.
여성들에게는 반찬 이야기가 있습니다. 반찬 만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레시피입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미장원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장점, 백화점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이렇게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조연, 엑스트라가 되어 한평생 삽니다.
“인생은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한평생 살다가 세상을 떠나면 “이야기”가 되어 이 땅에 남게 됩니다.
인생이 이야기인데, 그러면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어떤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가?” 이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는 어떤 이야기 속에 있습니까?
간혹 월드컵 축구 이야기, 한국의 프로야구 이야기, 영화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이렇게 이야기 속에 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내 인생 이야기” 속에 있습니다.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이야기 속에 있느냐?”입니다.
〈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
엊그제, 저의 옛 직장 동료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어 그 친구 전도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기도하고,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영적인 센스에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영적 이야기에 관심이 깊습니다. 이런 분들은 예수 믿게 됩니다.
반면에 꿈쩍도 하지 않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좀처럼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죽어서도 아마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중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일까요?
사람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일까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어찌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십자가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천국의 시민권자가 됩니다.
천국의 이야기를 듣고, 천국을 미리 경험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됩니다.
다윗은 평생을 하나님 이야기 속에서 산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부를 때,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릅니다.
나는 선과 악을 내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결정 해 주시면, 나는 순종합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선과 악, 의와 불의, 좋음과 나쁨 – 내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결정권을 반납했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해 주시면, 우리는 그대로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