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스 지역의 '소국' 아르메니아의 탈(脫)러시아-친(親)서방 노선에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다. 분쟁 영토인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앙숙인 아제르바이잔에게 빼앗긴 뒤, 아르메니아는 그동안 안보와 경제적인 측면에서 '큰 형님'으로 믿고 의지해왔던 러시아를 버리고, 유럽으로 곧장 향하고 있다.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아예 노골적이다. 지난 2018년 친서방 민주화 시위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그답다. 그의 친서방 노선은 궁극적으로 어떤 진로로 나아갈까? 러시아와 무력충돌한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조지아), 아니면 몰도바?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사진출처:페이스북
아르메니아는 이들 국가와는 달리, 소련 붕괴뒤 러시아가 주도한 경제동맹체인 유라시아 경제연합(EAEU, 러시아 등 5개국)과 군사협력체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러시아 등 6개국)에 모두 가입한 국가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파시냔 총리는 19일 수도 예레반에서 인그리다 시모니테 리투아니아 (소련의 발트 연안 3개국중 하나/편집자) 총리와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의 중재로,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놓고 영토 분쟁 중인 이웃나라 아제르바이잔과 관계 정상화를 위한 로드맵을 작성했다고 재확인했다. 그는 앞서 브뤼셀에서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만나 양국 관계 정상화와 이를 위한 로드맵 작성에 합의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양국의 평화협상 중재자가 미셸 EU 상임의장이라는 점이다.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두 나라가 EU의 중재로 평화협상을 갖고, 관계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건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지형을 크게 바꿔놨다. 아제르바이잔이 지난 달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현지의 친아르메니아 고위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는 과정을 러시아는 지켜만 봤다. 또 10만명이 넘는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탈출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양국간의 2020년 전쟁 이후, 현지에 2천여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한 러시아도 '제 코가 석자'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나고르노 카라바흐 탈출 이후 현지에 버려진 각종 집기들/텔레그램 영상 캡처
파시냔 총리에게는 국가 안보를 러시아에게만 의지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남은 길은 EU와의 연대였다. 파시냔 총리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지난 17일 유럽의회 연설을 통해 EU와의 관계 진선을 희망했다. 또 "2023년 말까지 아제르바이잔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관계를 정상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평화 조약은 국가의 주권및 영토 보전에 대한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 '잔게주르 회랑'(Зангезурский коридор)을 개방하겠다는 것이다.
'메그리 철도' 혹은 '슈니크 회랑'(Сюникский коридор)으로도 불리는 이 곳은 아제르바이잔의 역외 영토인 '나히치반 자치공화국'과 육로로 연결되는 통로다. 아르메니아의 슈니크 지역을 약 40km를 통과해야 한다. 아제르바이잔은 여차하면 이 곳을 무력으로 장악할 태세다. 파시냔 총리가 관계정상화의 조건으로 잔게주르 회랑의 개방을 내세운 이유다.
아르메니아 영토에 의해 양분된 아제르바이잔. 왼쪽이 아제르바이잔의 나이치반 자치공화국이고, 아래쪽 '잔게주르 회랑'을 통해 본토와 연결된다. 붉은 색 부분은 아제르바이잔이 9월 무력으로 장악한 나고르노 카라바흐/사진출처:stylishbag.ru
파시냔 총리는 EU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연대를 희망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회 연설에서 "아르메니아는 EU가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선까지 가까워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구체적으로는 경찰 개혁과 독립적인 사법제도, 재난 구조 서비스, 교육 및 공공 행정 분야에서 지속적인 협력을 기대했다. 또 이같은 협력의 이면에는 경제및 기술 발전과 카프카스 지역의 안보 협력(EU의 아르메니아 안전보장/편집자)도 들어있다고 했다.
서방 측은 파시냔 총리의 노선 전환과 '러브 콜'을 적극 반기고 있다. 미국은 지난 9월 11~20일 아르메니아와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한 뒤, 조 바이든 대통령이 곧바로 지속적인 안보 협력을 약속하는 친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 친서는 예레반을 방문한 사만다 파워 미 국제개발협력처(USAID) 대표와 유리 김 미 국무부 차관을 통해 파시냔 총리에게 전달됐다.
유럽도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았다. 지난 5일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열린 3차 유럽정치공동체(EPC) 정상회의(EU의 비공식 정상회의 격)에 파시냔 총리와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을 초대했다. 알리예프 대통령은 초청을 거절했지만, 파시냔 총리는 기꺼이 참석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샤를 미셸 의장 등과 만났다.
EU는 이에 앞서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분쟁 해결을 위해 2022년 10월과 2023년 2월 두 차례 민간 대표단을 아르메니아에 보냈다. 파시냔 총리는 이를 아르메니아 안보 문제에 EU가 개입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자평했다.
동시에 파시냔 총리는 러시아와 '손절하는 듯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는 지난 9월 21일 아르메니아에 주둔중인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아제르바이잔군의 '나고르노 카라바흐' 침공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며 러시아측에 섭섭함을 표시했다.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 2018년 총리 당선 직후 러시아로 가 푸틴 대통령과 만나는 장면/사진출처:크렘린.ru
이달 들어서는 '군사협력체인 CSTO 협정과 러시아와의 파트너십만으로는 국가의 안보를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국제형사재판소(ICC) 가입안(ICC 결정을 준수하겠다는 로마 규정 비준안)을 의회로 보냈다. ICC의 체포 영장이 발부된 푸틴 대통령을 여차하면 체포하겠다는 뜻이다. 이 가입안은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지난 3일 통과됐다.
그리고 유럽의회 연설에서는 "아제르바이잔과의 분쟁 중에 동맹국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며 "동맹국은 공개적으로 권력 교체를 요구했다"고 러시아를 직격했다.
파시냔 총리의 잇따른 거친 언행에 러시아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다.
온라인 매체 rbc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당국은 파시냔 총리의 유럽의회 연설을 무책임하고 도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국영 타스 통신이 18일 보도했다. 한 고위인사는 타스통신 측에 "우리는 아르메니아를 '제 3의 우크라이나'(몰도바를 '제 2의 우크라이나'로 본다면)로 바꾸려는 시도를 보고 있다"면서 "파시냔 총리는 젤렌스키(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길을 큰 보폭으로 따라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러시아 외무부는 지난 9월 여러 가지 비우호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아르메니아를 계속 동맹국으로 보고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아르메니아 정부 수장(총리)이 의도적으로 러시아로부터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아르메니아의 ICC 가입에 대해 "양국 관계상 옳은 것인지 처음부터 의심했다”며 “우리는 (푸틴) 대통령이 어떠한 이유로 아르메니아 여행을 자제해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톤은 낮지만, 경고를 담은 것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 양국 관계의 끝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