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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망령(亡靈)의 유산
“아저씨!”
“이 녀석, 기특하게도 잘 참아 기다리고 있었구나.”
소기는 곤이 무사히 돌아오자 날아갈 듯 기뻐하였고, 그날 밤 들잠 자는 모닥불 옆에서 차오는 낮에 자신이 처했던 사정을 들려주었다.
“저에게 그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젊은 달단인 가족이 있습니다. 생활이 어렵고 가난한 것은 다른 달단인들과 다를 바 없고 그도 사냥으로 근근이 생활을 지탱하지요. 수입의 대부분도 만주인에게 이자를 갚는데 쓰이고 있답니다.”
“네. 딱한 사정이군요.”
“어느 날 오랜만에 찾아갔더니 붙들고 울분을 터뜨리기에 까닭을 물었지요. 가까운 개울가 우리를 만들어 거위와 오리를 기르고 있는데 거위 두 마리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분명 근처를 서성거리던 한 만주인이 훔쳐갔다는 것이지요.”
“밀림에서의 절도는 죽음과 연관되는 것인데요?”
“그렇습니다. 제가 살펴보니 우리 근처에 뾰족한 것에 찔려 흘린 검은 핏자국과 깃털이 흩어져 있었고, 만주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도 분명 발견되었습니다.”
“만주인이 신는 우라화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발자국을 따라가 사는 곳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지요. 그리고 반박 못하게 따져 훔쳐간 거위의 값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만주인이 순순히 승복하였군요.”
“처음에는 거세게 우겼습니다. 제가 따지자 만주인은 거위가 야생이라 생각하고 우리 밖에 나와 있어 임자가 있을 줄 몰랐다며 변명했습니다. 남몰래 우리를 열고 훔쳐간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일단락지어 돌아왔지요. 만약 훔친 자가 다른 소수민족이었다면, 전모가 들어난 즉시 죽음을 면치 못했거나 노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제아무리 작은 벌이 주어졌더라도 몰매를 맞고 빈 몸으로 마을에서 쫓겨났음은 틀림없지요.”
“저도 들어 그런 사정은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맨 처음 쏘아 죽이 자가 바로 거위를 훔친 그 만주인이었습니다. 나머지 놈들은 그자가 내민 몇 푼의 돈에 팔려 사주된 자들일 테고요.”
곤은 밀림에서 정말 귀한 친구를 얻었다고 속으로 흐뭇해하였다.
새아침이 되자 간단한 아침을 만들어 먹고 일찍 길을 나서 삼하라는 지방에 다다랐다. 큰 물길 세 개가 만난다하여 삼하(三河)지방이라 불리는데, 주변으로 백계러시아인들의 집단 부락이 듬성듬성 형성되어 있었다.
소만국경지대와 가까워 양측에서 서로의 움직임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요지이기도 하였다.
“관동군은 이 지방의 불량한 자들을 차출하여 특수한 목적을 부여한 백계러시아인부대를 편성해두고 있습니다. 이자들의 임무는 소련에서 넘어오는 첩자들을 체포하고 소련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지요.”
차오 말대로라면 삼하지방 일대는 스파이들이 들락거리는 특수한 통로인 셈이다. 물론 극비에 속하는 사항이지만, 알게 모르게 알려져 이제는 공공연하게 양측에서 서로 이용하는 정보의 밀로(密路)같은 곳이 되었다.
“야노프스키는 바로 그 아사노라 불리는 부대의 비밀요원입니다.”
“놈은 역시 그런 자였군요. 지금에 알았습니다.”
별 성과 없이 하루가 저물고 말았다.
소기는 곤의 곁에 앉아 불을 지키고 이때 곤은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 차오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차오당신은 꼭 처리해야할 다급한 사정이 있다하였는데 아직도 말씀하지 않고 계시군요.”
차오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침울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자고나면 어딘가에서 숲이 파괴되는 이 밀림의 신음소리를 들으면 저는 평화롭게 살던 옛 시절이 더없이 그리워진답니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쓸쓸해진 얼굴로,
“숲의 고요가 부셔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인들이 권리를 주장하며 밀려들고부터였지요. 뒤를 이어 러시아인들이 나타나자 숲에 사는 소수종족들의 삶은 좁아진 사냥터로 갈수록 피폐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도시사람들까지 몰려들어 여기저기 숲을 파헤쳐 개간으로 파괴하니 흔하던 짐승들은 날이 거듭될수록 먼 곳으로 달아났습니다.”
불빛에 비치는 차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넘실거린다.
“일련의 일들은 숲에서 사는 우리들에겐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일본인들까지 대거 들이닥쳐 큰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니 앞날을 생각하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랍니다.”
“말씀을 듣고 나니 참으로 숙연함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차오 당신은 스스로를 사냥꾼이라 말하여놓고 녹용을 채취할 중요한 시기에 사슴사냥에는 별 의욕이 없어 보입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제 말씀드리지만 저는 지금 일단의 일본군들 행방을 탐색해 다니는 중입니다.”
“일본군들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제 개인의 일이라기보다 이 숲을 지키기 위해서지요.”
“...?”
차오는 곤이 알기 쉽도록 설명해 주었다.
“한 달 전쯤이었습니다. 저는 국경지대 근처에서 사슴을 쫒고 있었지요. 도중 작은 부락을 지나쳤는데 얼마 전 악성전염병이 만연하였답니다. 즉시 그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이웃한 또 다른 부락에 들려본 후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그 마을 역시도 전염병으로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어 점차 죽음의 마을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실로 무서운 괴질이군요.”
“저는 그 전염병이 흑사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질겁한 것은 그 전염병이 불결한 환경에서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퍼뜨려졌다는 것입니다.”
차오는 이야기를 이어가며 몸서리를 쳤다.
“일단의 일본인들이 비밀리에 소만국경지대로 이동하며 소련군의 참전을 지연시킨다는 암계(暗計)아래 그 저주받을 짓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몇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테부루강 유역에서 발생하였는데 그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많은 부락이 불태워졌지요. 끝내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이젠 명백한 증거가 들어난 것입니다.”
“저런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차오의 설명을 들은 곤은 자기도 몰래 격분하였다.
“저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천벌 받을 짓을 저지시키고 말 것입니다. 저들을 방치하면 우수리강일대는 물론이거니와, 동북의 모든 비옥한 산야와 수계가 오염되어 생태계는 큰 재앙을 맞게 됩니다.”
“틀림없는 판단의 말씀입니다. 도울 수 있다면 저도 조력할 것입니다.”
“지금 서둘러 저들의 계획을 망쳐놓지 않으면, 성과를 인식한 관동군사령부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할 것이고 그때는 이미 늦어 걷잡을 수 없게 되지요.”
“아저씨 말씀은 우리밀림에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군요.”
소기도 두 주먹 불끈 쥐며 차오의 이야기에 의분한다.
공분(公憤)을 느낀 두 사람은 우연히 맺은 인연도 인연이거니와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당분간 행동을 같이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방랑이 시작되는데, 함께 밀림의 길동무 말동무로 서로를 의지하여 어디 있을지 모를 저들을 찾아 깊고 깊은 숲을 헤매고 다녔다.
그런 어느 날 밤이다.
“거참, 이상한 일도 다 있네...”
며칠 전 부터 자꾸만 하루꼬 얼굴이 꿈에 나타나는 것이다.
지난밤 꿈에도 하루꼬의 모습이 보이더니 쓸쓸하게 곤을 바라보다 사라졌다.
“설마 하루꼬에게...”
곤의 우려는 적중하였다.
하루꼬는 피비린내 풍기는 끔찍한 전장의 한 귀퉁이에서 꽃잎처럼 여린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 몸부림치다 처절히 죽어간 것이다.
하루꼬가 어떻게 자신의 한(恨)을 눈감아 접었을까?
일본최남단 외딴섬 오끼나와에서 도대체 곤이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여기 거칠고 처량한 이야기를 밝히면,
오끼나와! 전쟁 전에는 여느 섬들과 다름없이 안온(安穩)하던 섬이다. 그런데 섬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난 어느 날, 섬 곳곳에 피비린내를 예고하는 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섬사람들 입장에는 참으로 기막힌 사태다.
크지도 않은 섬에다 무슨 짓을 해대는지 군인들이 너나없이 달라붙어 연일 산비탈에 구멍을 뚫고 있다.
현 시국, 일본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필리핀을 미군에게 내주고 동경하늘엔 B29가 나타나 온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군사밀집시설 및 주요 공업지대를 포함한 모든 국토가 철저히 초토화되고, 오오사까, 나고야 같은 대도시들 역시 미군의 폭격에 예외가 아니었다.
유황도 공략에서 대승을 거둔 미군이 드디어 코앞까지 당도한 것이다.
미국에 의한 오끼나와 공략이 두려운, 그러나 아직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인 어느 이른 봄날이다.
“아! 모처럼 혼자가 되었구나.”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살랑 불어와 하루꼬의 머리에 쌓인 먼지와 겨드랑이 땀을 기분 좋게 씻어준다.
섬이 남쪽에 위치한 탓인지 4월인데도 조금의 몸놀림만으로 땀이 맺혀 나온다. 서늘한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흩날리며 하루꼬는 새파란 풀잎 위에 잠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정말 오랜만에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네.”
해방감을 만끽하는 하루꼬의 눈에 멋들어진 구름덩이가 둥실둥실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생각은 복잡하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불확실성을 회의(懷疑)하고 있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간할 수가 있어야지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 사는 것 같지가 않다.
무엇 때문에 학업마저 팽개치고 가족과 떨어져 원치 않는 이 섬으로 들어왔어야 하는지. 뿐인가! 감금되다시피 모든 행동을 통제받고 있었다.
힘든 노역에다 무지막지한 군인들의 온갖 욕설에 찍소리 없이 순종해야하였다.
하루꼬는 징용되자 히로시마에 있는 야전군사령부에서 얼마간 실무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한 달 전 이곳 오끼나와 현지 의료지원대의 일원으로 급파된 것이다. 섬에서 제일 큰 야전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자신의 의사와는 동떨어진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다 뿌리치고 가족 곁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도 개인의사와 상관없이 전쟁지휘부가 내린 결정에 무조건 복종하고 따라야했다.
하루꼬는 간호업무를 보조해 주는 오끼나와현립 제일여자고등학교 여학생들과 야전군 막사에서 단체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발생하게 될 부상자의 치료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여학생들에게 응급조치와 간단한 의료교육도 가르쳤다.
현립제일고녀 외에도 사범여학교가 하나 더 있는데, 작전지휘부는 이 여학생들을 모두 동원해 히메유리(姬百合)부대라는 애칭을 붙여 부려먹었다.
여리고 부드러운 이들 히메유리의 생명을 악랄한 명분으로 홀쳐매 거리낌 없이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고자는 목적을 숨겨.
처지가 서럽기만 하는 꽃다운 여학생들은 오직 한 사람 천황을 위해 화려하게 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강요받았다.
“아! 먹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네. 씹어 넘길 수만 있다면 무엇이던 다 먹어버리고 싶다.”
본토라 하여도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은 여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루꼬는 막강하다던 조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국민의 목숨을 낙엽 쓸어 모으듯 거두어 죽음도 가리지 말라며 헌신적인 봉사만 강요한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만 가지 심상에 시달려 앉아 있자니 머릿속도 요동치고 속은 속대로 답답해졌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전쟁은 군인에게 맡기기로 그녀다운 결론을 내려버린다.
누워 하늘을 올려보니 솜 같은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내려가고 있다.
“남겨둔 사람들이 보고 싶다. 알고 있는 사람들을 죄다 불러 모아 실컷 떠들고 싶구나. 일본이 이대로 주저앉는다면 조선에 있는 부모님과 언니는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시 만날 수나 있을 것인가...”
눈물이 왈칵 솟구친다. 운다는 것은 하루꼬다운 짓이 아니지만.
울긋불긋 희고 노란 꽃들이 여기 외떨어진 곳에도 고운 얼굴을 내밀고 피어있다. 그러나 정다운 얼굴들은 간 곳 없고 자신만 홀로 갇혀 고통 받는 것 같다.
곤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얄미운 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곰곰이 짚어 따지니 영악한 일면뿐이다.
그럼에도 서글서글한 미소로 털썩 가슴에 들어와 앉기에 하루꼬는 그리움의 눈물을 또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엉엉! 다시 한 번 만나기만 해봐라 이번엔 그냥.”
눈물 비쳐 바라보는 먼 하늘에 야살스러운 곤의 얼굴이 떠다니고 있다.
“앗!”
하루꼬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혼자 사색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몰려드는 두려움을 억제하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웠다. 빨리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오이! 이 삭막한 섬에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다 있었다니, 정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는군. 그것도 사내가 그리워 눈물까지 찔찔 훌쩍이면서 말이야.”
“기가 막히는데. 호박이 넝쿨 채 굴러온다더니 드디어 오늘 하나 건졌군.”
관측병으로 여겨지는 두 명의 일본군이 짐승을 닮은 눈빛으로 잡목더미에서 슬그머니 다가왔다.
온전히 돌려보내어 줄 것 같지가 않다. 한명이 팔을 붙들자 하루꼬는 앙칼지게 대항했다.
“이것 놔요. 지금이 어떤 때라고 못된 짓을 하려들다니, 당신들 정말 죽고 싶어 정신이 나갔군요.”
하루꼬는 자신의 팔을 엮어 채는 마흔 전후 하급 군병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어라! 요것 좀 보게. 제법 매몰찬 데가 있군. 그런다고 무사할 줄로 안다면 큰 오산일 걸.”
“나를 가만 놓아주면 없었던 일로 지나칠 것이지만 계속 치근거리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에요.”
하루꼬는 자기가 빨리 근무지로 돌아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 나설 것이라며 야멸치게 경고하였다. 그러나 철사로 만든 올무처럼 더욱 죄어 오는 두 군병의 손아귀는 풀리지 않는다.
“후후후! 까다롭게 굴 것 없잖아. 머지않아 이 섬은 쥐새끼 한 마리 살아남을 수 없는 죽음의 섬이 되고 말 것이 빤할 텐데 말이야.”
“이봐, 아가씨! 곧 썩어 자빠질 그까짓 몸뚱어리 고이 아껴놓았다 어디 쓸려고 그래. 우리와 같이 진탕 재미라도 보면서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실컷 즐겨야지.”
이 자는 한술 더 떠 벌써 허리띠를 풀어 바지를 정강이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다.
“얌전히 굴어. 곧 이 섬은 구석구석 썩어 자빠진 시체들로 뒤덮이고 말텐데 네년이라고 무사할 줄 안다면 어디가 잘못된 년이지.”
온 세상이 암흑천지로 돌변하여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다.
벼랑 끝에 선 절망감! 허망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누가 있어 자신의 절박함을 알고 달려와 구하여준단 말인가!
이들은 중국대륙에서 본토방어를 위해 파견된 군인들이 분명하였다. 관동군에 대한 악행은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서 주워들어 하루꼬도 대략은 알고 있다. 겁탈한 뒤 죽여 근처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묻어버리고 소속된 부대로 돌아가 태연히 지낼 것이다.
“여학생들 말을 듣지 않고 혼자 멀리까지 나온 것이 실수였구나.”
후회 깊어도 이젠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몸이 눌러져 구속당한 상태로 자신의 바지가 벗겨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오까상! 하루꼬는 이런 꼴로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된답니다. 말썽 많은 저를 긴 세월 돌봐주신 은혜에 보답 드리지 못하고 먼저 가는 딸 하루꼬를 용서해주셔요.”
이번에는 미찌꼬언니에게도 작별하였다.
“미찌꼬언니! 만약 저승이 정말 있다면 하루꼬가 먼저 가 기다리고 있을 테야. 저승이라는 곳도 그리 나쁜 곳만은 아닐 거야. 다시 만나면 모래알처럼 많은 우리 이야기를 밤새워 나누어봐...언니 잘 있어. 안녕!”
하루꼬가 막 혀를 깨물려는 순간이다.
어디에서 귀에 익은 우렁찬 고함소리가 대포탄처럼 들렸다.
“너희 이놈들!”
하루꼬의 몸 위를 덮치고 있던 일본군이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다.
“감히 이곳에서까지 못돼먹은 짓을 하다니. 내가 일본군의 명예를 걸고 네놈들을 동강내 고기밥으로 만들고 말리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루꼬에게 언제나 온화했던 무라가와아저씨다.
저승의 판관처럼 돌연 나타난 무라가와아저씨의 얼굴을 본 하루꼬는 자신이 벌써 죽어 영혼으로 떠도는 환각마저 느꼈다.
벗겨진 바지를 추스를 생각도 않고 무라가와에게 뛰어가 안기며,
“무라가와아저씨!”
“오냐. 그래. 내가 왔으니 이젠 염려할 것 없다.”
“엉엉!”
하루꼬는 감격으로 울음보를 펑펑 터뜨렸다.
무라가와는 어금니를 꽉 다물고 하루꼬가 천천히 자신의 몸을 단정하게 꾸릴 때까지 묵묵히 서 있었다. 날이 잘 벼린 장검을 축 늘어뜨린 채 사정이 급변되어 벌벌 떨고 있는 두 군병을 노려보며.
이 모습은 마치 피에 굶주린 악귀와도 같아 보인다.
두 일본군 병사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두려움에 질려 무라가와의 명령을 받은 것처럼 풀 위에 꿇어앉아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곱게 죽고 싶거든 목을 쭉 빼고 반듯하게 늘어뜨려라.”
“용서해주십시오. 잠시 정신이 나가 본의 아니게 신분을 망각하여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주시면 전장에서 당당히 죽겠습니다.”
무라가와의 분노한 눈은 칼을 거두기에 너무 강한 살기를 띄고 있다.
하루꼬는 무라가와아저씨가 부친과 담소를 나눌 때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사가 한번 뺀 검을 피로써 식히지 아니하고 거둔다면, 그땐 검의 혼이 빠져나가 곧 검의 주인이 죽게 된다는 야만스런 말을.
경위야 어떻든 간에 사람의 목숨이 위태한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라가와아저씨! 저 군인들은 자신들의 말 그대로 잠시 무엇인가에 정신을 빼앗겼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잘 알고 계실 테지만 이 섬 어디에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던가요.”
“하루꼬야,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이놈들을 살려주면 똑 같은 짓을 다시 되풀이할 것이다.”
“무라가와아저씨! 한 사람이라도 아쉬울 이때입니다. 미수에 그친 저들을 살려 보내 방어전에 대비토록 하여야합니다. 당사자인 하루꼬가 용서하였으니 제발 저들을 살려 보내주셔요. 이렇게 빌며 간청 드립니다.”
하루꼬는 무라가와의 고집을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 발밑에 매달려 애원하였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일로 인해 두 사람의 귀중한 목숨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호소했다.
“아저씨! 저 두 사람이 비록 큰 잘못을 저질렀으나 더 큰 죄는 이 세상이니 제발제발 두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더 큰 죄는 세상이다!
철부지 아가씨인 줄만 알았던 하루꼬의 입에서 세상을 탓하는 말이 나오자 그 말이 무라가와를 움직였다. 잠시 생각하더니,
“이놈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아직 붙어있는 머리는 제국에 바쳐라.”
“명심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해주시어 정말 고맙습니다. 결전에 나서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겠습니다.”
목숨 건진 두 병사는 하루꼬에게도 백배 사죄하였다. 그리고 혹 돌변할지 모를 무라가와의 검을 피해 걸음아 날 살려라 산 아래로 도망쳐 내려갔다.
“이런 곳에서 하루꼬를 만나다니 내가 아마 하야시가문의 영감이라도 받은 모양이지.”
무라가와가 아버지처럼 하루꼬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독거린다.
“여기 좀 앉자구나.”
두 사람은 시야가 확 트이고 펼쳐진 바다를 후련히 관망할 수 있는 곳에 나란히 앉았다.
“제 옆에 앉아 계신 분이 정말 무라가와아저씨 맞으세요? 하루꼬는 아직도 꿈을 꾸는 느낌이에요. 불쑥 나타나 저를 놀라게 하시다니 어쩜 그럴 수가요.”
“허! 위기에서 구해주었더니 외려 원망만 돌아오는 걸.”
“호홋! 위기정도가 아니었어요. 막 혀를 깨물려는 다급한 순간이었어요.”
언제 절박한 상황이 있었던가 하며 하루꼬는 생글생글 웃었다.
무라가와도 인간의 목을 치려던 그 살벌한 감정을 벌써 지우고 마음씨 좋은 이웃아저씨 같은 얼굴로 빙그레 웃으며,
“나는 우리 하루꼬가 혀를 깨물 만큼 정조관념이 확실하다고는 생각지는 않는데.”
“그러셨다면 좀 더 두고 보시지 그랬어요.”
“나는 오히려 저들이 가여워 끼어들었을 뿐이야.”
“뜬금없이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씀이셔요?”
“보나마나 자신의 혀는 아파서 깨물지 못할 게 빤할 테고, 그 죽일 놈들의 귀나 코를 물어뜯고 말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였거든.”
“어쩜! 정말 너무하셔요.”
무라가와가 바다처럼 탁 트인 웃음을 한차례 웃는다.
“아하하핫!” 하루꼬, 너의 순결무구(純潔無垢)한 몸짓이 이 섬에 와 격앙된 내 감정을 조금은 가라앉혀 주는구나.”
두 사람 모처럼 산과 바다가 흔들리도록 웃어보았다.
온통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서 구름 간간이 떠다니는 맑은 하늘 아래 지난날의 일을 들추며 얘기꽃도 피웠다.
무라가와대좌가 오끼나와로 전출해 온 것은 불과 이틀 전이다. 그때 정박한 큰 함선에서 많은 병사들이 상륙하였다고 들었는데, 그 군함에 무라가와아저씨가 타고 왔었구나며 하루꼬는 고개를 끄떡였다.
관동군 최고급정보장교가 오끼나와로 전출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지만, 무라가와는 상부의 일관성 없는 작전 및 지령 따위에 마음 두지 않은지 오래다.
하루꼬가 이곳 의료지원대의 일원으로 배치되어 온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루꼬는 모르고 있었지만, 무라가와는 하루꼬를 오끼나와가 아닌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배치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하였다.
하지만 제정신 아닌 전쟁지휘부의 결정을 번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라가와가 오끼나와에 나타난 것에는, 어쩌면 가련한 하루꼬를 이 미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보호해 주고자하는 뜻이 숨겨져 있었는지 모른다.
그 하루꼬를 무라가와가 틈내어 만나러 나섰던 것이다. 어느 여학생으로부터 이 언덕 쪽으로 한번 가보라는 말을 들은 것이 하루꼬에게 다행스런 일이었고.
생각지 않은 곳에서 이상한 모양으로 만난 두 사람은 모처럼 대면을 오래 떨어져 있다 만난 친부녀처럼 반가워하였다.
무라가와가 부산에 있는 하루꼬가족 사정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궁금해할만한 것을 알려 홀로 떨어진 하루꼬의 외로움을 달래 주니, 하루꼬도 적연(適然)한 때 무라가와아저씨를 만나 속에 담았던 말을 실컷 토해냈다.
모두가 잘 지낸다고 말하는 무라가와도 정작 자신의 얼굴에 끼얹혀진 근심은 걷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아무리 하루꼬가 아둔하다하더라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다.
“전투가 시작되면 이 섬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정말 모두 다 죽게 되는 것인가요?”
“결과는 나도 잘 모른단다. 그러나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너만은 살아서 섬을 나가야한다.”
이야기가 깊어지는가 싶더니 분위기는 자꾸만 침울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말을 않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무라가와는 하루꼬를 야전병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오끼나와 제일고녀(第一高女)교정까지 바래다주었다. 병원책임자와 군의관을 만나 하루꼬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당부의 말까지 남겼다.
무라가와는 돌아가기 전에 하루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언제라도 나를 찾아오렴.”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말씀대로 하겠어요.”
무라가와는 자신이 근무하는 위치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자세히 하루꼬에게 가르쳐 주면서,
“하루꼬야!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한다.”
“고마워요. 아저씨도 부디 몸조심하셔요.”
돌아서는 무라가와의 뒷모습이 너무 외롭고 지쳐있는 것에 하루꼬는 적이 놀랐다. 이것이 두 사람으로써의 마지막 만남이자 영원한 이별이다.
아니 꼭 한 번 더 하루꼬가 무라가와의 모습을 본 적은 있었다.
미군이 상륙하여 본격적으로 섬을 공략한지 얼마 아니 되어서인데, 그때 무라가와는 부상병을 수송하는 터럭에 실려 내륙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철철 흘러내린 피로 물들인 얼굴을 하루꼬가 스쳐본 것이다. 먼발치에서 발 구르며 안타까워하였지만 그를 보살펴줄 방도는 없었다.
하루꼬와 무라가와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군의 상륙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후가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태풍에 시달리기는 하여도 살기에 모자란 것 없는 자급자족의 유적(幽寂)한 섬에 군인들이 자꾸 모여들어 별의별 법석을 다 떨었다.
수비책임자 우시지마미쓰루는 1937년 남경만행에서 포로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인간백정이다. 악명이 이곳에도 널리 알려져 주민들은 그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었다. 섬이 미군에게 침략 당하면 주민 모두 자살하라는, 그야말로 재앙을 몰고 다니는 자다.
우시지마가 주민들 대부분을 북부 산악지대로 내몰아, 제일 큰 도시인 나하(那하)와 두 번째 큰 슈리(首里)시 모두 빈 곡간처럼 썰렁해졌다.
일본에 강점예속 당하기 전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문물을 교환하며 고유한 문화를 꽃피우다, 일본의 야욕으로 16세기에 점령되어 1871년 오끼나와현으로 편입 당하여 유구왕국은 지워져버린다. 안타깝게도 항몽전사 고려 삼별초의 흔적까지 비밀로 간직하고서.
올 것이 왔다.
“아! 큰이이다. 세상에 저렇게나 많이 몰려오다니. 바다가 덮여 버렸구나.”
공략군의 형세는 수비군이나 주민들에게 공포 그 자체다.
2차세계대전사 기록에, 독일이 떨어지자 전략여유가 생긴 연합군은 이 공략전에 중대형 항공모함만 40척, 대형전함 및 순양함, 구축함, 각종용도의 크고 작은 각종 함정 1천2백 척을 투입했다.
하늘은 하늘대로 수백 대의 B29가 장막을 씌워 날아다닌다.
“뻐벙! 뻥! 뻐벙 뻥뻥!”
공중폭격과 함단에서 퍼붓는 각종 폭탄이 먼저 작렬하고, 일본군의 총결사방어작전을 비웃듯 상륙전이 개시되자 미육군과 해병 4개 사단이 개미떼처럼 상륙함에서 쏟아져 섬 곳곳에 공략거점을 마련한다.
1945년 4월 1일의 일이다.
여기 죽음으로 맞서는 망령의 부대 가미가제라 불리는 병든 공격기들.
출격에 앞서 목숨 먼저 내놓았기에 생사는 불사한다.
가미가제(神風)! 어디서부터 생겨난 독나방들일까!
일본해군항공부대 창설자인 항공전전문가 오오니시중장의 발상으로 부화된 죽음의 비행특공대는 조종사의 필연적 희생을 강요하는 최후의 몸부림이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물자는 부족하고 숙련된 조종사를 양성시킬 시간마저 없이 쫒기는 처지!
명분에 눌려 제 목숨 내놓을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을 부추겨 목표물에 돌진케 해서 천황과 국가에 죽음의 의무를 책임지우는 일회용조종사!
바다에서는 바다대로 또 다른 비극이 벌어졌다.
세계최대 불침전함이라는 야마토호의 최후다. 미군의 오끼나와상륙 5일지나 외로운 거대전함이 드디어 출항을 개시하는데 저승행 전함에 탑승 인원만도 2500여명이다.
호위전투기도 없고 돌아올 연료도 없이 큰 몸체를 노출시킨 야마토호는 굶주린 늑대우리로 들어간 병든 황소나 다름없었다. 전투시작 두 시간여 만에 대부분의 승무원을 안고 엄청난 몸체를 비틀어 누이며 세계 해전사에 최대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이제 시작되는 땅에서의 비극은 전쟁의 참상 그 이상이다.
82일간의 전투 중 이주쯤 지나 수를 알 수 없는 일본군들이 동굴에 사는 더러운 벌레처럼 서로 뒤엉켜 떼죽음을 맞았다.
숨기던 한계가 드러나자 악착같던 우시지마도 남은 전력을 정비하여 북부산악지대로 퇴각하고, 남아 사수하던 일본군 참호병들은 미군에 의해 차근차근 참살(慘殺)되어갔다.
하루꼬와 유리히메 대원들은 전쟁의 공포도 공포이거니와 쉴 틈 없이 몰려드는 부상자 치료에 숨 한번 제대로 쉴 수 없다.
가망이 있든 없든 걸을 수 없는 부상자는 방치되었고 걸을 수 있는 부상자는 내쫓았다.
“아흐..차라리 빨리 죽여다오!”
부상병들이 토해내는 신음소리가 하루꼬들의 가슴을 마구 찢어낸다.
고약한 악취는 말로 표현키도 역겹다. 수면이 부족한 군의관들은 넋 잃은 사람처럼 보였고 경험 부족한 간호사들은 엄두도 내질 못한다.
팔다리 일부가 없어지고 배가 터져 창자가 밖으로 쏟아져 나온 부상병을 마취제 없이 의복 기우 듯 봉했다. 병동 여기저기 절단된 신체 일부가 뒹굴어 다닌다.
어린 유리히메들이 겁에 질려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어쩌면 좋아. 약도 붕대도 아무 것도 없어. 저 고통스러워하는 젊은 장교의 신음소리를 나는 도저히 더 들을 수 없어. 귀를 막아버릴 거야. 내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아.”
어느 유리히메가 전장의 참상을 보고 메마른 눈으로 몸서리치자 다른 유리히메가 대수롭지 않은 듯,
“뭘 야단이야. 오래지 않아 틀림없이 우리도 저렇게 고통 받으며 죽고 말텐데.”
그때 다른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그 말을 되받는다.
“죽기 전에 군인들한테 먼저 당하게 될 거야. 대륙에서 온 저 군인들이 중국에서 여자들을 수 없이 강간하고 총검으로 형체도 못 알아 볼 정도로 마구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나는 이제 죽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런 무서운 광경을 보고 있느니 고통만 없다면 차라리 당장이라도 빨리 죽고 싶어.”
“내 마음도 같아. 하지만 나는 죽기 전에 어머니를 한번만이라도 더 뵈었으면 좋겠어.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로 힘들게 나를 키워주셨는데...몸이 불편해 아직도 혼자 집에 그대로 남아계셔. 군인들에게 밟혀 돌아가시지나 않으셨는지...흑흑.!”
한 명이 서럽게 울자 여기저기 유리히메들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온다.
“이년들아, 주둥이 닥치고 청승스런 울음일랑 뚝 그치질 못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 군인들이 수없이 많은데 재수 없이 눈물이나 질질 짜내고 다 끝난 것처럼 입을 싸게 놀리다니.”
어디선가 버럭 고함소리가 들린다.
“누구든 거역하면 목을 쳐버리고 말테다.”
언제부터인가 귀신들린 것처럼 기이하게 행동하던 어느 장교의 목소리다.
이런 와중에 슈리의 저지선마저 무너졌단다.
하루꼬들도 퇴각하는 일본군을 따라 산악지대로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피이웅! 슈슈숙! 뻐펑, 뻥!”
고막을 울리는 포성과 탱크소리가 가까운 곳곳에서 들린다. 유리히메들이 아직도 내일의 운명을 논한다면 그 자체부터가 우스꽝스런 일이다.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명령에 따라 최후까지 저항하다 죽는 것뿐이다.
각오가 단단한 유리히메들이라도 텅 빈 창자를 쥐어짜는 기아의 통증과 추위는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가 어느 산 속인지도 모른다. 불을 피워 더운 음식을 맛본지가 까마득하다.
악몽 같은 긴 하루가 지나고 해가 저물고 있다. 살아 붉은 해를 다시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오늘은 온전히 숨을 쉬고 있다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무엇으로도 하루꼬와 저 송이송이 유리히메들의 고통 받는 가슴은 달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끝에 서있는 유리히메들.
가냘픈 꽃잎들의 맑은 넋을 어느 누구 한 사람 돌봐주려 하지 않는다. 모두 자기 한목숨 살아남기에 발버둥이다.
굴마다 신음과 고통으로 죽어나가는 병사들로 가득 찼다. 참상을 눈으로 직접보고 몸으로 겪지 않고서는 지옥보다 더한 아비규환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모르리라. 사람들은 몇 마디 허구의 말만 들을 것이다. 천황과 조국을 위해 모두 당당히 옥쇄(玉碎)하였다고.
죽을 때 죽더라도 굶주리지나 말았으면...누구 할 것 없이 풀뿌리를 뜯어 입에 넣었다. 이런 것을 먹어서 되는지조차 의심할 여지마저 없다.
하루꼬자신는 목으로 무엇을 넘겨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다.
“아! 고통스럽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구나...”
힘 잃은 시선으로 군인들의 눈을 피해 남들처럼 목에 넘길 것을 찾아 기슭의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숲에서 누군가가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흑흑흑!”
남이 듣지 못하도록 소리를 낮추었지만 너무도 애처롭게 자아내는 울음소리다. 숨어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을 가만 살펴보니 하루꼬가 잘 알고 있는 한 여학생이다. 대뜸 보기에도 옷매무새가 영 말이 아니다.
하루꼬는 짐작이 갔지만 그래도 사정을 물어보았다.
“아니! 요꼬씨 아니에요?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하였기에 혼자 이런 곳에서 그토록 슬피 울고 있어요?”
열일곱 요꼬가 하루꼬를 보자 무작정 가슴에 안겨든다. 그리고 숨죽여 울던 울음보를 왈칵왈칵 터트린다.
“아아! 그런 일이 요꼬씨에게 벌어지고 말았군요.”
하루꼬는 자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꼬여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꼬를 안고 있던 하루꼬도 요꼬가 겪었던 그 치욕의 순간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상처 입은 요꼬를 위해 무엇인가 하긴 하여야 하는데...달래줄 방법이 있기는 있었다.
“요꼬씨! 무어라 위로하여야 할지 모르겠군요. 사실을 말하자면 나도 요꼬씨와 같은 경우를 당하였답니다.”
다른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하루꼬상도?”
“그래요.”
하루꼬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 하루꼬상도 저와 같은 일을...하루꼬상은 정말 강하여요.”
하루꼬는 비 맞고 떨고 있는 쫓겨난 강아지같은 요꼬를 자신의 슬픈 가슴으로 꼭 안아주었다. 조금 진정되어 울음을 그친 요꼬여학생은 그녀가 소속된 곳으로 쓸어질듯 말듯 걸어갔다.
하루꼬도 주린 배를 부둥켜 앉고 다시 어두컴컴한 굴속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사지를 지탱할 기운이 없다.
누가 살을 뜯어먹던 말았든 구석진 곳을 찾아 누웠다.
하루꼬는 생각하였다. 자신의 이 허망한 죽음을 그 누구도 모를 것이기에 뒤에라도 외로움에 떨고 있을 자신의 영혼을 찾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외롭게 떠돌 내 자신의 혼백은 이 소름 끼치는 굴에 갇혀 영원히 버림받게 될 것이리라. 시신은 지저분한 상태로 방치되어 썩어갈 것이고 흙에 덮여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겠지. 아! 부모님과 미찌꼬언니도 내가 이렇게 비참하고 처절하게 죽어가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할 거야.”
이런 생각들로 어두운 구석에 죽은 듯 누워 있는데, 한 명씩 두 명씩 유리히메들이 군인들에 의해 불려나가 그것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남아 있는 유리히메들은 모두 겁에 질린 채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저희들끼리 서로를 위로해주며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가족과 격리된 어린 유리히메들이 이 세상을 살았으면 얼마나 살았단 말인가! 모습들이 참으로 가엾기도 하다.
소리 없이 흐느껴 우는 여자아이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유리히메들은 모두 갓 열린 봉오리같은 여자아이들이다. 살아 집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기대는 꿈인 양 허망하게 망가지고 있을 뿐이다.
부패된 시신에서 나는 역한 냄새가 사방에서 코를 찔렀다.
“아! 내가 이 지저분한 굴에 갇혀 몸서리치는 추악한 죽음을 꼭 맞이해야만 천황과 조국을 위하는 것일까?”
하루꼬는 자신의 눈앞에 당면된 이 처절한 현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하루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승으로 떨어지면 염라대왕 앞에 나가 항거할 것이라며 세상을 증오하였다.
이런 모습으로 비참한 전쟁을 지켜보는 하루꼬의 몸은 조금씩 식어갔다.
한 줄기 싸늘한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수많은 주검 속에 섞여 하루꼬는 이렇게 죽어갔다. 최악의 고통과 야만적 굶주림을 겪으며.
좌절과 공포 속에서 구더기처럼 깜깜한 동굴을 기어 다니다 증오와 원망이 가슴에 가득하여 전쟁을 혐오하며 죽어갔다.
한이 남아서일까! 그래서 곤의 꿈에 슬픈 그녀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심심풀이로 풍걸
첫댓글
출근길 동행
거대한 역사 편린
그속에 인생
수고에 너무도 감사드립니다
일송정님 말씀 처럼
풍걸행님 대단합니다
지난 밤 늦게 잤더니 오늘 자동 늦게 기상되네요.
우선 새아침 인사부터 드리고 나서 슬슬 챙겨 입고 어디로 튀어나가야지요.
맑은 하늘입니다. ok일베님께 근사한 나날을. 감사감사.
@풍걸
맑은 하늘은
맘을 설레게 하는
근사한 마법
지금까지의 줄거리를 독자들이 알기 쉽게 올려야할 시점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해요
별것 아닌 심심풀이에 줄거리가 뭐 필요하겠습니까.
애국활동과 일상에 바쁜 동지분들 중 몇 분이나마 혹 흡연실이 필요할까 쉼의 여유를 품어드리고픈 심사에 시작한 것뿐이지요.
항상 관심 가져주시는 일송정님께 감사드립니다.
@풍걸 전문 작가님의 조언에 동감입니다! ㅎ~~
풍걸님은 별것아닌것처럼..
겸손의 발언으로..
내용줄거리 필요성을 굳이 못느끼실진 몰라도 ..저같은 얼레설레 독자들은 앞뒤전후를 기억? 몰라서리용~ ㅋ
아무튼 그바쁘신 와중에도..틈틈이 프로의 기질 발휘하시는 글솜씨외 다양한 재주는 타를 불허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
@민들레강 민들레여사께서 집에 도착하셨나 보내요.
언젠가 기회가 오면 민들레여사님을 특별 출연시킨 심심풀이 한 편을 추억거리로 받들어 올릴 예정입니다용. (어디까지나 예정에 강조를 두고.)
부산집회에서 만나면 교체용 썬글라스도 전해드리지용.
너무 조용한 이 밤에 떠내려가지 마시고 진주강씨 특유의 뚝심으로 남인수선생님(진주강씨)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라도 불러 보삼.
(어리던 옛적 이분이 부산방송국에 공연 오시면 당시 마지막 존재하던 전통동래기생들이 손수건에 시를 수놓고 곱게 차려 마중 나가는 모습이 기억납니다.) 풍걸도 만사 접고 그런 자세로 민들레님의 부산집회나들이에
마중나가리다. 자야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