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아가씨
동해나 울산은 잣나무 그늘
경치도 좋지만 인심도 좋고요
큰애기 마음은 열 두폭 치마
실백자 얹어서 전복쌈일세
에헤야 에헤 울산의 아가씨 좋기도 하지
울산의 아가씨 거동좀 보소
임 오실 문전에 쌍초롱 달고요
삽살개 재놓고 문밖에 서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린다네
에헤야 에헤 울산의 큰애기 유정도 하지
울산의 큰애기 심정을 보소
가신 님 기다려 애타는 마음
이마에 손얹고 넋없이 서서
언제나 오시나 그리운 님아
에헤야 울산의 큰애기 초조한 모습.
울산아가씨 노래는 그 아름다움 만큼이나
노래가 겪은 우여곡절도 깊다.
1937년, 이 노래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불렀던 이는 가수 황금심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 노래를 부르게 됐을까.
10여년전에 병중에 있던 황금심은
필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밝혔다.
당시 노래의 작곡자 이면상 선생은
울산출신 고복수 선생과 친구사이였다고 한다.
어느날 고복수 선생이 친구가 작곡 중인 노래가
제 고향을 노래한 ‘울산아가씨’라는 걸 알고는
“이 노래 금심이 주면 되겠네!”라며 넌지시 제의를 했고,
고복수와 황금심이 연인사이라는 걸 잘 알고 있던
이면상 선생은 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이후 ‘울산아가씨’가 히트하면서
연인사이는 더 가까워졌고
마침내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울산아가씨’노래 속에는 당대 최고가수였던
고복수와 황금심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까지 담겨있다.
혹독한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으면서
울산아가씨는 잊혀진 노래가 됐다.
그런데 1962년, 당시 KBS교향악단 지휘자이기도 했던
작곡가 김희조 선생 앞으로 한개의 테이프가 전해졌다.
울산에서 어느 여학생이
반주도 없이 불렀다는 전통민요라고 했다.
노래의 제목은 ‘울산아가씨’.
김희조 선생은 그 노래를 악보로 옮겼다.
10여년전에 필자가 김희조 선생집을 방문했을 때,
그 빛바랜 악보를 보여주시면서
“노래의 선율이 아주 신선했어”라고 말했다.
김희조 선생이 편곡한 ‘울산아가씨’는
연주곡으로 또 합창곡으로 방송을 타면서
전국민들에게 다시 알려지게 됐고
당시 리틀엔젤스의 해외공연에서는 물론,
국가의 주요행사때마다 빠지지 않는 노래가 됐다.
그러다 ‘경상도민요’의 이름표를 달고
급기야 교과서에까지 오르게 된다.
당대 최고 작곡가라는 박시춘 선생의 노래는
지금도 유행가에 머무르지만
‘울산아가씨’는 김희조 선생의 편곡을 통해
민족의 노래, 민요가 된 것이다.
1960년대 중반에 국내에 민간방송국이 생기면서
방송윤리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모든 음악에 대해서 엄격한 심의가 이뤄졌다.
특히 반공을 국시로 하던 군사정권 아래에서
월북음악가의 노래는 이유불문하고 모두 금지곡이 됐다.
해방전에 그의 고향 함흥으로 돌아간
이면상 선생은 이후 북한에서
‘피바다’ ‘금강산처녀’ 등을 작곡하며 김일성음대학장 역임,
공훈음악가 칭호를 받는 등 워낙 그 명성이 높던 때라
그의 노래는 당연히 남한에서 금지곡이 됐다.
남인수가 불러 히트했던 이면상의 대표곡
‘진주라 천리길’도 이때 금지곡이 되면서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그렇다면 ‘울산아가씨’는 어찌됐을까.
60년대 방송윤리위원이었던
황문평 선생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당시 밤낮으로 왜색가요가 횡행하던 때에
이렇게 좋은 우리 민요는 살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자기를 포함해 몇몇 위원들이 입을 다물었어요.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민요가
‘울산아가씨’와 ‘노들강변’ 딱 두 곡 이었어요.”
당시 위원 중에 클래식을 전공한 분들이 많아서
다행히 눈치를 못챘다고 했다.
‘울산아가씨’ 노래가 사라질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노래의 한많은 사연을 들려줬던 황금심, 김희조, 황문평 등
세분의 음악인은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다만 ‘울산아가씨’ 노래를 아끼고 사랑했던
그들의 애틋한 마음만은 여전히 필자의 맘속에 남아있다.
최근 런던필하모닉이 편곡하고 조수미가 부른
‘울산아가씨’를 다시 들었다.
마치 돌이 수면을 튕겨가듯 노래는 가볍고 경쾌하게
김희조 선생의 말처럼 그지없이 신선한 느낌이었다.
노래가 간직한 인생의 희비(喜悲)와
역사의 질곡에 아랑곳없이 말이다.
글 쓴이
이영훈 울산MBC 홍보심의부장
2012. 7.28. 박하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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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하향님 ...울산으로 이사 가셨나요?
좋은 시와 노래 ...잘 듣고 ...잘 쉬어 갑니다 ...감사 합니다 ...ㅎ호
울산으로 이시한 것은 아니고요은 울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8월 한
울산이 고향입니다.
아~하, 박하향님이 울산 큰애기이셨군요. 저는 제약회사 근무시에 경북지역 책임자를 대동하고 두 번 정도 울산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견문이 짧아 울산 아가씨는 처음 듣는군요. 견문 짧음을 허물하지 마시기를 ~~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웃음이 나오지요
제가 바로 그 유명한 울산큰애기입니다.
"견문 짧음을 허물하지 마시기를"
너무 겸손하셔서 그런가 봅니다.
제약회사에 근무를 하시었군요.
선망의 대상 이었던 그 제약회사를 밀이지요.
울산 아가씨 , 여학교에서는 한번은 다 부른곡이죠.
특히 합창대회 단골 연습곡이었던 걸로 기억 되는데
향님 덕분으로 옛날 그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나네요.^^
1년 전쯤에 태화강을 보고 왔는데 정말 깨끗하고 아름다운 강으로
거듭나고 있어서 울산이 자랑 할만 했어요.
대나무 숲길도 인상적이었죠.^^
울산이 얼마 전까지는
공해의 도시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제는 깔끄미님 말씀처럼
거듭 태어나서 많이좋아졌습니다.
십리 대밭길도 그렇고,
울산 대공원도 그렇고, 수변 공원도 그렇고 …….
친환경 생태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답니다.
그런사연이
울산 태화강변 십리 대밭길 정말 멎저요 ...................
울산에 연고가 있으시군요.
태화강을 끼고 펼쳐지는 대밭길이 십리나 되니
그 웅잠함도 그렇고, 아름다움도 그렇고
시민들의 포근한 휴식처이지요.
울산아가씨는 박하향님 입니다
응해야~~~인심좋은 박하향님
깊은사연이 있는걸 알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그런 사연이 잇엇군요,,,,,,
울산아기씨 노래의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군요
박하향언니 죄송합니다 자주 들리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앞으로 노력 하겠습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유의 하시고
오늘도 웃음 가득한 날 되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