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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문화원에서는 지난 2018년 5월 3일 강원도 원주 박경리 문학공원으로 답사를 갔다. 비가갠 다음날이라 미세먼지도없는 아주 쾌청한 날씨다. 온 산천이 연록색으로 물들어 시원한 여행이었다. 강동구민회관 앞에 회원 150여명이 4대의 버스에
분승하고 오전 8시 20분 경에 출발했다. 9시 50분경 한국문학의 산실인 박경리 문학공원에 도착했다. 4호차 반장님이 깃발을 들고
회원 길안내를 했다. 전회원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오 해설사께서 이 문학공원에 대해 해설을 했다. 우선 박경리 선생님의 생애에 대해 말씀을 했다. 박경리 선생님은 1926년 12월 2일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읍(현 통영시)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한국전쟁중에 적군에게 부역을 했다고 좌익으로 몰려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렇게 남편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사위인 김지하 시인이 좌익으로 몰려 형무소 신세가 되고, 귀여운 8살 된 손주가 죽는 비통한 일을 당했다. 선생은 고충을 잊기도하고 사위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이 원주로 이사하여 터를 잡은 것이다. 1955년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계산〉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이 현대문학에 발표되면서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한다. 그는 이곳에서 5부 20권 불량의 토지 장편소설을 26년동안 집필하여 완성하였다. 2007년 7월말 폐암이 발견됐으나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병세가 악화되어,2008년 4월 4일 노졸중 까지 나타나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 후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 2008년 5월 5일 오후 2시 45분 경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경리의 사망 직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하였다. 해설을 마치고 박경리선생님의 옛집으로 향했다. 대문 앞에서 해설하는
오 해설사 열심히 경청하는
회원들 이 길에
납작한 돌도 선생님 께서 손수 깔았다고 한다. 입구에 있는
시 한편, 박경리 선생님은 소설가일 뿐만아니라 시인이기도 했다. 해설사의
해설은 계속되었다. 단구동집 텃밭에서 일하고난 후 바위에 즐겨앉아 고양이와 정든 호미와 책을 옆에 놓고 휴식하던 모습을 현재 집앞 뜰에 동상 으로
나타냈다. 넓은 치마폭에
앉아 본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안긴것 같다. 단란했던 시절의
가족사진 토지 소설의 지형 옛날 활자본 인쇄는 항상 지형을 떠서 그 위에 납물을 붓고 연판을 만들어 인쇄 판에
조랍하여 인쇄를 하게 된다. 이 지형만 있으면 항시 책을 재판할 수 있다. 귀여운 내
손주 단조로운
주방 박경리 선생님이 이 방에서 토지 소설을 집필하던 책상과 소 도구 유물 들 지금 원고를
쓰시다가 잠깐 밖에 나가 쉬시는 듯하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사진(돌아가신 후 영정사진으로 사용했단다.) 전통문화
수강생 들 박희 박사의
모습 일행과
함께 박경리선생님의 삶과 문학을 연구하는 공간 '토지'
이외의 박경리 선생님의 작품을 전시한 공간 영상물
시청 5층에서
내려다 본 박경리선생님의 옛집(초여름) 텃밭에서
고추농사를 짓고 수확한 고추 박경리
선생님이 최초로 출간한 책 '계산' 박경리선생님의
마지막 유고시집 유물
전시관 '토지'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등이 지나간 1897년 한가위 부터, 광복의 기쁜을 맛본 1945년 8월 15일 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시대적 배경으로하고 경남 하동 평사리라는 전형적인 한국농촌의 모습을 비롯하여 지리산, 서울, 간도, 러시아, 일본, 부산 ,전주 등을 걸치는 광활한
내외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자료 출처: 팜프렛) 전시관 뜰에 곱게 핀 하늘 매발톱 박경리 문학공원 관람을 마치고 다음 구룡사로 이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