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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3月 ☞소통과 합력의 달☜
※보고서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록하여 각 카페에 입력해 놓으면, 6월 말 복사해갑니다.
창3:1-17절) 최초의 범죄
우리는 살아가면서 끔찍한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한번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또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병에 걸려서 심한 고통을 겪거나 죽어갈 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우리들에게 일어나야 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인간들은 참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러시아와 우크라에서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나무 밑에 시체(屍體)가 쌓이고, 시냇물이 피가 되어 흘러갈 때, 우리는 *왜 우리들에게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안에 쫓기거나. 사람들에게 시달리거나. 무서운 질병으로 죽어갈 때, 또는 전쟁이 얼어날 때, *우리 인간에게 왜 이런 고통이 일어나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문제의 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해답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질 때,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할 모든 끔찍한 고통에 버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절대로 행복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Ⅰ.최초의 유혹
오늘 말씀은 최초에 있었던 한 유혹(誘惑)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마귀(魔鬼)를 그려 보라고 하면, 거의 틀림없이 *머리에 뿔이 달리고 눈은 매섭고 온 몸에는 털이 덮여 있는 징그러운 모습의 괴물(怪物)*을 그립니다. 우리는 마귀(魔鬼)라고 하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한 모습을 상상합니다.
즉 마귀(魔鬼)를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소년으로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魔鬼)는 *털 나고 뿔 달린 흉측한 모습으로 인간을 유혹하러 온 것이 아니라, 가장 멋지고. 우아한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에게 모든 동물들을 돌보아 주는 일과 밭을 경작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돌보아 주어야 할 짐승들이 많았습니다.
아담과 하와 부부가 해내기에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짐승 중에 아주 똑똑하고, 슬기로운 짐승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곧 뱀이었습니다.
3:1절)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간교하다*는 말은 반드시 나쁜 뜻으로만 쓰이는 단어가 아닙니다.
성경 다른 곳을 찾아보면 *간교(奸巧)하다*는 말이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간교하다*는 것은 아주 지혜롭고 슬기로우며, 남의 마음을 아주 잘 알아준다는 뜻입니다. 사실 두 사람의 힘으로 에덴동산의 모든 동물들을 다 돌아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타락(墮落)하기 전(前)이라 하더라도 미련한 짐승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미련했을 것입니다. 몇 번씩 말을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짐승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사람의 마음에 아주 쏙 들게 행동하는 한 짐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뱀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뱀이 어떻게 여자의 마음에 들게 행동했을지. 알지 못합니다.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지켜보고, 도와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에덴동산의 뱀이 현재 우리가 보는 것처럼 징그럽고. 기분 나쁜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마귀(魔鬼)는 이 뱀을 통하여 여자를 유혹(誘惑)했고, 끝없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여기에 나오는 뱀이 그냥 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뱀이 말을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동물(動物)이 말하는 것을 딱 두 번 보게 됩니다. 한 번은 여자를 유혹하기 위하여 뱀이 말을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 번은 당나귀가 입을 열어서 모압 왕에게 매수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咀呪)하러 가는 미련한 선지자 발람을 책망한 경우입니다.
짐승이 말을 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특별한 일입니다. 사실 짐승들도 얼마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짐승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고 하신다면, 이 짐승 저 짐승 할 것 없이 떠들어 댈 것입니다.
돼지는 불평합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뚱뚱하게 만드셨나요?* 소(牛)는 소대로 불평입니다. *왜 우리는 죽도록 일만 하게 하시지요?* 토끼는 말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약하게 만드셨나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짐승들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하는 뱀은 이미 보통 뱀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짐승이 자연법칙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며, 어떤 능력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껍데기는 짐승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마귀(魔鬼)였습니다. 마귀(魔鬼)가 어떻게 뱀 안에 들어가서 사람을 유혹(誘惑)할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성경은 더 이상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단지 마귀(魔鬼)가 여자의 가장 슬기롭고 믿음직스러운 친구인 뱀 안에 들어가서 인간을 유혹했고, 인간은 그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축복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리고, 끝없는 나락(奈落)으로 떨어졌다는 것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뱀이 말을 하게 된 것은 분명히 마귀(魔鬼)의 힘이었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비정상적인 일을 여자는 경계(儆戒)했어야만 합니다. 마귀(魔鬼)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있었고, 이미 그 운명이 결정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마귀(魔鬼)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을 가지고 있으며, 영원한 영광이 약속되어 있는 인간에게 시기심(猜忌心)과 질투심(嫉妬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마귀(魔鬼)가 뱀 안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허락(許諾)이 없었다면, 뱀은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옳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장 무서운 사탄(詐誕)에게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許諾)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이 참으로 귀한 것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무서운 시험(試驗)에 넘기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이 무서운 시험(試驗)을 이기고, 영생(永生)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평안(平安)하게 과일이나 따먹다가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서운 시험(試驗)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 시험(試驗)이 아니라, 친한 친구인 뱀 속에 마귀(魔鬼)가 들어가서 마음속에 있는 약(弱)한 부분을 공격(攻擊)하는 시험(試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이 이길 수 없는 이 무서운 사탄(詐誕)의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영생(永生)에 들어올 수 없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절대로 아무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다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즉 한평생 병도 걸리지 않고, 어려운 일도 없이 편안하게만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광에 들어가기 전, 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전에 반드시 무서운 사탄의 시험을 통과하게 하시고, 반드시 우리 믿음을 달아 보심으로써 우리가 가진 믿음이 참 믿음인지? 엉터리 믿음인지를 시험해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다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며, 정말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인지. 아니면,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것이 낫고, 교회에 안다니는 것보다 다니는 것이 좀 덜 심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인지를 반드시 시험해 보십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정말 아내가 좋아서 사랑하는지, 아니면 여자가 없는 것보다는 하나쯤 있는 게 낫다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사는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즉 정말 나를 사랑하는지 확인해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永生)을 공짜로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 생각은 아예 버리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사탄의 시험에 우리를 넘기셔서 그 가운데서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알고 믿는지. 모르고 믿는지, 정말 하나님이 믿을 만하기 때문에 믿는지. 어렸을 때부터 믿어 왔고.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에 믿는지. 반드시 시험해보십니다.
이 세상에서 절대로 편안하게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편안하게. 걱정 없이, 남. 노는 것 다 놀면서, 남 하자는 것 다하면서 영생(永生)을 얻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擇)한 백성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닥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왔을 때, 마치 이상한 일이 온 것처럼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닥치는 거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대화는 아주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치 뱀이 정말 몰라서 여자에게 와서 신앙 상담 하는 것처럼, 종교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목소리도 아주 부드럽고, 감미롭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독(毒)이 들어 있었습니다. 무서운 절벽,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뜨리는 유혹이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Ⅱ.뱀은 무엇으로 여자를 시험했나?
마귀(魔鬼)가 여자를 시험한 내용은 단 하나, 곧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뱀은 여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3:1절)...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더냐.”바로 이것이 시험(試驗)이었습니다. 이것이 핵심(核心)이었습니다.
마귀(魔鬼)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과일을 먹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전제(前提)로 삼아 옆에서부터 접근했습니다.
마귀(魔鬼)는 여자를 타락시킬 때, 곰이나 멧돼지 같은 무서운 짐승 속에 들어가서 여자를 절벽으로 끌고 가 *당장 하나님을 부인해! 안 그러면 물어 죽일 테야!*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이런 식으로 무식하게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멧돼지한테 물린다고 해서 멸망(滅亡)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귀(魔鬼)는 그런 엉터리가 아닙니다. 마귀(魔鬼)는 굉장히 뛰어난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외적(外的)인 어려움이나 고난이 아니라, 중심(中心)자세입니다.
마귀(魔鬼)는 그 중심 자세에 있는 불신과, *뭔가 하나님이 요즘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불평을 잡아내는 것입니다. 마귀(魔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바늘구멍만 한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조그만 틈만 생기면, 우리를 요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는 말 속에는 *나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어떤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알고 있어.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감히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해? 너희가 이 동산에서 다른 짐승들을 돌보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는데 말이야. 내가 늘 따라다녀서 잘 알지. 미련한 짐승도 한두 마리가 아니고 또 큰 짐승은 얼마나 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수고를 알아주기는커녕 그 정도 열매도 먹지 못하게 하다니, 너무 지나치잖아?* 하는 도전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마귀(魔鬼)는 인간의 문제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 때, 너무 뛰어나게 만드신게 문제였습니다. 만약 우리를 돌대가리나 백치(白癡)로 만들었더라면, 시험(試驗)이 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들 때, 완전한 걸작 품, 창조의 극치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굉장히 뛰어납니다. 사람들은 *컴퓨터, 컴퓨터* 하지만, 컴퓨터는 연산(演算)작업만 뛰어난 것이지, 사실 가치 판단은 사람이 합니다. 컴퓨터는 사람을 못 따라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컴퓨터로 점(占)치고 *나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사람의 지혜는 무한합니다.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들어 있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런 지혜나 능력을 무한히 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한(制限)해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씀에 표현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여 스스로 신(神)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뛰어나게 만들었지만 너희는 어디까지나 흙이며, 내가 매순간 주는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詐誕)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의 그런 무한한 능력을 묶어 두고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문제는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느냐? 못 먹느냐? 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동안 뭐든지 다 하고 싶어 합니다. 즉 배우고 싶은 것도 다 배우고, 하고 싶은 공부도 다 하고 싶어 합니다,
요즘은 박사(博士)학위로도 부족해서 *포스트닥*을 합니다. 이것은 박사학위 받고 나서 더 공부하는 것인데, 이 포스트닥을 좋은 데서 해야 합니다. 닥터만 가지고는 안 되거든요. 박사 학위도 하나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공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하다가 죽습니다. 어른들이 중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한 평생 쓰는 뇌세포는 5%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썩고 있다*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 속에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걸압니다.
그래서 이것을 최대한 쓰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걸림돌이 됩니다. 나는 무한히 나 자신을 추구하고 싶은데, 알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하나님은 어떤 것은 하라고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시하게 만들었다면, 사탄(詐誕)의 시험은 시험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을 완전히 백치(白癡)나 짐승처럼 만들었다면, 시험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너무 지혜롭게 만드시고, 무한한 신적(神的)인 가능성까지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과 언약(言約)을 맺으셨습니다. 인간이 그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쳐 복종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자신의 능력을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만 사용하며, 그것을 남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흙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교만(驕慢)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영원한 죽음의 삶이 주어질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謙遜)하라는 것입니다.
겸손하기만 하면 어떤 시험도 그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사탄(詐誕)이 아니라, 사탄(詐誕)보다 더 강한 자가 온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 시험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즉 *나는 하나님 앞에서 흙이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온전히 하나님 은혜로 산다.*고 하는데, 누가 넘어뜨리겠습니까?
그러나 자기의 머리를 믿고, 자기의 가능성(可能性)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믿는다면, 끝없는 절벽에 떨어지는 결과를 맞이할 뿐입니다.
뱀의 말에 여자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3:2-3절)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여자의 대답의 핵심(核心)이 무엇입니까?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정확하게 그대로 붙들고 있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욕심에 따라, 자기 기대에 따라, 자기 생각에 따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추가(追加)하고, 어떤 부분은 빼버립니다. 여자의 말 속에는 이미 무언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투(語套)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부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는 여자가 없는 내용을 추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여자는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그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자기 부부 사이의 약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저걸 먹지 말라. 고 하셨는데, 혹시 우리가 그 열매를 만지다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따 먹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아예 만지지도 맙시다.*하고 부부 사이에 내규(內規)로 정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지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부당하게 대하고 있고, 우리를 무시하고 있으며,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불평이 분명히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심판(審判)의 조항(條項)을 대단히 약화(弱化)시키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2:17절)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심판(審判)의 부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히브리말로는 *죽고 죽으리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그 말씀을 약화(弱化)시키고 있습니다.
그 말에는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어? 그냥 위협적인 조항이지* 설마 *창조의 꽃인 나 같이 뛰어난 여자를 하나님이 죽이실 수 있겠어?*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獻身)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희석(稀釋)하고, 약화(弱化)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자의 상상력에 의하여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Ⅲ.이 말씀이 기록된 이유
여러분, 사실 우리에게는 하나님 말씀의 작은 한 부분이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拒逆)하면서 살아가기를 밥 먹듯이 하고 있기 때문에 *죽으리라*나 *죽을까? 하노라*나 그게 그것인 것 같습니다.
멸망(滅亡)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의 한 부분이나, 어떤 이미지가 약화(弱化)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멸망(滅亡)중에 있기 때문에 이렇든, 저렇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죽을 몸인데, 맞아죽든, 굶어죽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 일점일획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도에 맞게 해석되어야 하고, 적용되어야 합니다. 즉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확대 해석하고, 내가 싫어하는 말씀은 은폐(隱蔽)해 버리면, 곧바로 그것이 죽음이고 멸망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구원(救援)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救援)을 체험(體驗)한 자들입니다. 모세는 *이제 너희의 사활을 결정하는 것은 너희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정확하게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 여자가 했던 것처럼 *자기 맘에 드는 부분은 확대해서 강조하고 자기 생각에 재미없는 부분은 숨겨 버리면 멸망이 온다. 너희들은 구원받았지만 망한다.*는 것을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의도(意圖)하는 그대로 사는 것이 곧 생명(生命)입니다.
오늘날 이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림으로써 이미 멸망(滅亡)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토록 불행(不倖)하고, 어려움을 겪으며,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우리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獻身)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獻身)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罪)가 들어왔고, 그 죄(罪)의 결과로 우리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救援)받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意圖)를 정확하게 알아서 그것을 그대로 실천(實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하와의 사고방식이 만연(蔓延)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설교를 듣는 것은 하나님 보좌(寶座)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즉 설교 시간에 하나님을 대면(對面)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설교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을 *지나친 집착*이라고 표현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종교적(宗敎的)인 감정, 곧 내가 은혜(恩惠)받고, 위로(危路)받고, 기쁨을 누리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풍조(風潮)가 만연(蔓延)되어있습니다.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긴 믿지만, 정확하게 믿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에서는 열심을 내고, 자기가 싫어하는 부분은 팽개쳐 버립니다. 이것이 곧 하와의 사고방식입니다. 신앙(信仰)을 종교적(宗敎的)인 감정(感情)으로 생각합니다. 즉 강조점이 옮겨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위로받고, 어떻게 하면, 내가 좀 기분 좋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신앙 생활하는 목적(目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 사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신다*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즉 *죽는다.*고 하신 것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거겠지, 하지만 설마 죽이시려고?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해버립니다.
여러분, 성경에 전적으로 헌신(獻身)되어 있지 않은 사람, 즉 말씀에 완전히 목숨 걸지 않은 사람은 시험(試驗)을 이기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이 생기고, 가정에 고난이 닥칩니다. 이 세상에서는 폭력(暴力)과 싸움이 그치지 않는데, 그 폭력(暴力)과 싸움이 그리스도인을 덮치기도 합니다.
이 끔찍한 일들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 또 무엇입니까? 세상은 지금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救援)입니다. 이 세상은 구원(救援)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무언가 얻어 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고통이 닥치는 것은 그도 한번 이 고통을 당해 보라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길을 가다가 폭행(暴行)을 한번 당해보고, 그 끔찍한 일을 경험해 보아야 *정말 이 세상은 죄에 빠져 있구나.* *이 세상은 정말 소망이 없구나!*합니다. 한번 당해 봐야 압니다. 당해 보지 않으면,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이 세상은 죄에 전염되어 있고. 더럽지만 나는 괜찮고...*라고 하는데, 괜찮은 게 어디 있습니까?
한번 당하고 나면 *이 세상 전체가 썩어 있고* 이 세상이 *정말 하나님 은혜를 필요로 하며, 이 은혜가 교회로부터 흘러나가야 하는데, 내가 이 은혜를 막고 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구원(救援)받은 자들도 자기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통해서 자기의 위치(位置)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 세상이 월남처럼 멸망하게 되었는데, 나에게 마지막 비행기 표가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련한 사람은 비행기 티켓을 믿고 *마지막 춤을 사이공에서!* 하면서 이 술집 저 술집 돌아다니겠지요.
그러다가 그 비행기 표가 가짜면, 어쩌겠습니까? 그 비행기가 취소되면, 어쩌겠습니까? 이 마지막 티켓은 몇 번씩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내가 타고 갈 수 있는 표인지, 혹시 비행기에 무슨 사정이 생긴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싸구려 장사꾼들에게 속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운명(運命)이 결정되는 일입니다. 아무리 여러 번 확인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냥 교회 한번 와서 대충 예배드리고, 그것도 엉뚱한 생각을 하면, 졸음이 오고, 졸다가 예배드리고 나면 끝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되겠지* 합니다. 어떻게 안 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우리가 심판대에 섰는데, 예수님이 *넌 아니야. 뒤로가!* 하시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저는 티켓을 가지고 있는데요*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티켓 좋아 하네 그건 가짜야* 하시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救援)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딱 한번 온 이 구원(救援)을 사생결단하고 붙들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보면, 말 많고, 변명 많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가짜 티켓입니다. 진짜 티켓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구원(救援)받은 자의 표시가 무엇입니까?*
*진짜 내가 구원받는 겁니까? 이 불타는 세상에서 제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겁니까?*
그럼 *영생을 얻은 사람의 표시가 뭡니까?* *나에게 그럼 흔적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완전히 싸구려 장사꾼들에게 속아서 순 엉터리로 교회 생활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을 말씀 하나 붙들고 망하는 겁니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염려하지 마라* 하시면 염려 안 하는 거예요. 즉 오늘 양식이 없어도, 옷이 다 떨어지고. 러닝셔츠만 입고 있어도. 염려 안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로 옷이 없으면 어떡하죠?* 진짜 굶으면 어떡하죠? 그것이 곧 시험(試驗)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구원(救援)받은 백성의 특징은 어린아이와 같다는 겁니다. 즉 말씀 안에서 어린아이입니다.
세상에 있을 때는 세련(洗練)된 사람이었어요. 아는 것도 많고, 재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들어오면,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뭘 알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릅니다. 한 가지 배우면, 그것 하나 가지고 놉니다. 그게 어린아이들이 하는 짓입니다.
진리(眞理)안에서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오늘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오늘 새로 출발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잘 믿어온 것과 잘 봉사해 온 것을 다 물리치고,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진짜 위험합니다.
저는 목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 태어납니다.
*예수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제 할 일을 가르쳐 주세요. 오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세상에 있을 때는 똑똑했는데, 예수 안에 들어오니까 완전히 멍청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똑똑했던 것을 교회까지 가져와서 똑똑하고, 세상에서 수완 좋았던 것을 교회에 와서도 수완 좋고, 밖에서 어른이었다고 교회에 와서도 어른 행세하면 안 됩니다.
어른이라도 교회 안에서는 완전히 아기 노릇을 해야 됩니다. *응애 응애* 하면서 주는 밥 먹고, 가르쳐 주는 것 배우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가 되지 않는다면, 날마다 어린 양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위험한 것입니다. 나는 진리(眞理)를 구경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답답한 것이 무언가하면, 교회에서 세련(洗練)되게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의 제비족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의 구경꾼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밖에 있으면서 구원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엉터리 티켓을 가지고는 비행장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제가 행위구원을 강조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지혜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다 쓰고 그 무한한 가능성을 다 발휘하면 영생(永生)이 없습니다. 말씀 안에서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말씀을 붙들고 망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말씀을 붙들고, 굶어 죽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손가락질 당하고 죽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 구원의 능력은 절대로 나의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Ⅳ.마귀의 공격
마귀(魔鬼)는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마귀가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곧 이것입니다.
사탄(詐誕)은 이 사람이 얼마나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가를 보지 않습니다. 말씀에 헌신되어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느슨하게 붙들고 있느냐? 파고들 틈이 있느냐? 를 확인합니다.
3:4-5절)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마귀(魔鬼)가 강하게 불어넣어 준 것이 무엇입니까? 거짓 확신입니다. 거짓 확신은 아무 확신이 없는 것보다 몇 배 더 위험합니다. 즉 거짓 믿음을 가진 자는 불신자보다 더 위험합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긴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가장 위험한 데 있으면서도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것을 믿고 있는 사람, 신앙이 아닌 것을 신앙으로 붙들고 있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더 위험합니다.
마귀(魔鬼)가 불어넣어 준 거짓 확신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귀(魔鬼)는 *반드시 죽으리라*를 *결코 죽지 않는다.* 로 바꿔 놓았습니다. 즉 *하나님이 너희같이 멋있는 피조물을 어떻게 감히 죽이겠냐? 따 먹는 것이 잘못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이기까지 하겠어? 하나님은 너희를 못 죽여 그냥 위협하는 거지* 이것은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사탄(詐誕)이 말한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사탄(詐誕)은 *사람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시력(視力)이 좋아진다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을 키워 보면, 어느 순간에 아이들의 눈이 뜨이는 것을 압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약아진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한번 아프고 난 후 갑자기 약아지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지요. 아프기 전에는 울면, 엄마가 안아 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찝찝해도 누워서 참았는데, 한번 아파 보니까 울기만 하면, 엄마가 안아 준다는 새로운 사실에 눈이 뜨입니다. 그래서 안 아파도 울고, 슬픈 척 합니다.
또 어떤 부인(婦人)은 남편이 *하늘*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하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남편 몰래 딴 짓을 해도 얼마든지 잘 살수 있다는 사실에 눈이 뜨였습니다. 이렇게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무조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번 불순종해도 죽지는 않더라는 새로운 사실에 이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독립(獨立)해도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곧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마귀(魔鬼)가 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이번 일은 하나님이 너무 지나치셔. 나를 너무 심하게 다루시잖아* 하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그 틈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틈만 생기면, 그 다음에 요리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예수님은 40일을 굶으셨지만, 하나님 말씀에 헌신(獻身)하고,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며,
*나는 굶어 죽어도 너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시니까 마귀가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입니다. 시73:28절)여호와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여러분, 하나님께 가장 악(惡)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나* 사이에 원망과 불평의 틈이 벌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집니다.
그때 마귀(魔鬼)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귀(魔鬼)는 우리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 있고, 얼마든지 인간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 원망과 불평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흙과 티끌에 불과한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높여서 *하나님이 어떻게 감히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때부터 마귀(魔鬼)의 공격은 본격화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면 이깁니다.
즉 *그래 나는 흙이야. 티끌이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것이고. 다 하나님의 것이야.* 이렇게 하는 사람은 마귀(魔鬼)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교만(驕慢)입니다. 이 모든 비참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바로 우리의 교만(驕慢)입니다. 교만(驕慢)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였고, 교만(驕慢) 때문에 우리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마귀(魔鬼)의 노예가 되어 멸망(滅亡)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는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이 곧 마귀의 노예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마귀(魔鬼)로 하여금 우리를 마음껏 괴롭히고 낮추며, 고통을 주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고통 중에서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智惠)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은 다시 올라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어중간하게 맞으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받아도 어중간하게 받으면, 겸손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낭패와 실망을 다 당한 후에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십니다.
찬송가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십니다. 조건 없이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救援)하신 것은 그냥 편하게 믿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생결단(死生決斷)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문(門)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믿었든지, 직책이 무엇이든지, 집사든, 장로든, 간에 그는 아직 이 구원 안에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 구원 안에 들어온 자에게는 말씀이 전부입니다. 말씀만 붙들면 다른 것을 다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뮙니까.? 욕심(慾心)때문입니다. 교만(驕慢)때문입니다.
여자가 자기 마음을 지키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3:6절)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아담과 하와는 드디어 무서운 죄(동반 자살)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어려움이 온다고 해서 다 시험(試驗)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을 대하는 태도(態度)입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나에게는 정말 어려움이 필요해. 이런 어려움이 오지 않으면. 나는 깨닫지 못해. 나에게는 정말 어려움이 와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와도 시험(試驗)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어려움을 이깁니다.
그러나 어려움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나는 어려움이 필요 없는 사람이야. 이 정도면 신앙생활을 꽤 잘하는 거지* 그런데 하나님은 *왜 어려움을 주실까? 왜 하나님은 나를 괴롭히면서 좋아하실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부당하게 대하셔* 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려움이 정말 시험(試驗)이 됩니다.
여자가 좋지 않은 마음으로 그 열매를 보았을 때, 그것은 이미 보통 나무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그냥 나무 열매에 불과 했지만, 욕심(慾心)을 가지고 보니까 그 열매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능력이 있는 것 같고, 더 지혜를 줄 것 같고, 더 축복을 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짜 시험(試驗)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 여자가 먼저 범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더 신실(信實)했다고 볼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아마 여자의 상상력(想像力)과 능력이 더 뛰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무엇인가 그럴 만했기 때문에 먼저 넘어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拒逆)한 결과 곧바로 몸과 마음에 변화가 왔습니다.
즉 마음에는 두려움이 찾아오고, 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옷이 벗겨짐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수치(羞恥)를 보게 되었습니다. 즉 두려움과 불안과 수치심이 몰려오면서 그들은 끝없는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뛰어나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謙遜)하지 못합니다.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더 감사해야 되고, 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텐데, 뛰어나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종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문제입니다.
사탄(詐誕)은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인간의 교만(驕慢)을 충동(衝動)질해서 인간을 멸망(滅亡)의 자리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가정 무서운 것은 가난이나. 질병이나. 무지가 아닙니다. 사람 간의 능력 차이는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교만(驕慢)입니다. 교만(驕慢)과 겸손(謙遜)의 차이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의 차이입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옥상으로 데려가서 떨어뜨려서 완전히 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티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그 사람만이 영생(永生)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계신 분이 있습니까?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젊음을 믿고, 자기의 능력을 무한대로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은 무서운 시험(試驗)에 빠질 것입니다. 그는 영생(永生)을 놓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떠난 그 모든 고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苦難)을 통해서 겸손(謙遜)을 배우십시오. 겸손(謙遜)하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할 축복(祝福)이 없습니다. 교만(驕慢)하기 때문에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들겨 맞더라도 겸손(謙遜)하기만 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모든 축복(祝福)을 다 누릴 수 있습니다. 아-멘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율법서(모세 오경)
셀보고서 정직과 투명케 하는 습관▣예배 3월 27일(주일)결과는 6월30일 복사하여 결정됩니다.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연구원 설립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연구원 설립비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농협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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