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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오후 예배 때 좀 꽤 큰 농촌 교회에서 헌신 예배를 드렸어요. 한 70세 이상이 거의 대부분인 듯 보였어요.
그런데 성도들은 많아요. 아마 저희 교회가 좀 적게 올 때의 숫자와 비슷할 정도로 이제 정말 많은 성도들이 오전 예배도 드리지만 시골의 특징이 오후 예배도 거의 그대로 다 이렇게 앉아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아멘 소리가 얼마나 큰지 너무 이렇게 놀랬어요. 왜냐하면 많이 다닌 건 아니지만 외부 집회를 가끔 이렇게 다녀보면 대부분의 교회들이 아멘 소리가 좀 작아요. 그래서 제가 막 열심히 독려하고 하면 조금 커졌다가 다시 강사가 돌아가면 원점으로 돌아가고 뭐 이렇게 되는 게 일상인데 이 교회는 처음부터 너무 이렇게 아멘 소리가 큰 거예요.
그런데 제가 우리 교회와도 한번 시켜봐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옆 사람과 인사할 때 오늘은 어떻게 하시냐면 한 분이 할렐루야 하면 한 분이 아멘 하시는 거예요 아셨죠?
누가 할렐루야 할지 암묵적으로 정하시고 우리 한번 인사하겠습니다. 할렐루야 표정 안 좋은 건 아시죠? 예 한 번 더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하시고 한 번 더 아멘 하시고 시작.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의 크기가 반드시 확신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교회의 할렐루야 소리도 또 아멘 소리도 컸으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은 확신에 대한 주제로 잠깐 말씀을 나누고 또 기도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을 확신할 때와 그 사람을 불신할 때 우리의 행동과 태도가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 대해서 확신이 있을 때 나의 말과 행동에 차이가 있고 확신이 없을 때 나의 행동과 말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거죠.
가족도 마찬가지예요. 가족도 내가 가족에 대해서 확신하고 신뢰할 때 나의 행동과 말과 그리고 가족에 대해서 내가 확신하지 못했을 때에 나의 행동과 말에는 큰 차이가 납니다.
일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일에 대해서 내가 확신이 있을 때와 확신이 없을 때 나의 행동과 태도와 말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또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서도 확신이 있을 때 우리의 행동과 말과 태도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섬기는 교회에 대해서 확신이 있을 때 나의 행동과 말과 확신이 없을 때의 나의 행동과 말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거는 목회자와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목회자가 성도를 확신하느냐 성도가 목회자에 대해서 확신하느냐는 그 말과 행동의 큰 차이를 만듭니다.
성도들끼리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한 교회 사역을 함께 예배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확신이 있을 때와 서로에 대해서 확신이 없을 때에 우리의 행동과 말과 태도와 결단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 본문인 28절과 29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여자가 물덩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온 것은 물을 기르기 위해서였어요. 그러니까 목적이 분명한 거죠.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물덩이를 버려두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소개했어요.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확신이 들기 시작한 거죠. 이 사람은 메시아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자기가 해야 된다고 여겼던 그 급한 일들을 버려두고 동네로 돌아가서 자기 동네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다 메시아라고 전했던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메시아라는 것을 구조라는 것을 너무 명확하게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이분이 그리스도다 이분이 메시아다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확신이 들자마자 급하게 자기가 원래 하려고 했던 우물 물을 기르는 일들을 뒤로 하고 자기의 동네에 돌아가서 자기가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화를 통해서 확신이 들었던 거죠. 저는 사마리아 여인을 보면서 기도 중에 또 예배 중에 사역 중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는가를 물어보게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과 사역 중에 그리스도와 연관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어요?
일상도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고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다 연관이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일을 가든 하든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근데 그 그리스도와 동반의 경험을 통해서 내가 정말 그리스도가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 그리스도가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가 나에게 나를 이끄신다는 이런 확신이 있었느냐는 질문을 정말 여러 번 저에게 하게 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창조주이심을, 보예사이심을 구세주이심을 알고 고백하는 일들이 나의 삶에 나의 예배에 아니면 나의 사역에 얼마나 자주 빈번하게 있었는가를 묻게 됐습니다.
요즘은 AI가 핫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자기 설교 여러 편을 이제 AI에게 넣었어요. 입력을 하고 난 이후에 설교 분석을 AI한테 의뢰한 거죠. 그랬더니 이 AI가 그 목사님의 설교를 딱 분석하고 난 이후에 하나를 집어내더래요. 당신의 설교에는 기독론이 빠졌습니다. 여러분 기계도 그 목사님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적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여러분 요즘은 AI가 어쩌면 여러분과 저보다 더 나을 수 있어요. 이런 거죠. AI는 내 신앙의 문제를 다 아는데 정작 나는 모를 수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제 설교도 한 10편 정도를 올리고 AI에게 분석을 요구하면 내가 모르는 것을 AI가 분석해서 저한테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를 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큰 축복이고 어떻게 보면 좀 죽세이기도 하고 교회의 모든 부탁에 모라고 모태를 남발하는 모태 신앙이 저예요. 그러니까 저희 오남매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고 교회를 봉사하고 어떻든 좀 부족한 형제들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았어요.
여러분 제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요 제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얼마나 많이 들었길 저는 또 신학교도 일찍 갔잖아요. 20살에 갔어요. 또 20살에 사역도 시작했어요. 그럼 제가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리고 저는 고등학교 때도 수요일 날 학교를 학교 야간 자습을 안 하고 교회를 갔어요. 굳이 자랑은 아니지만 새벽 기도도 가기도 하고 고3 때도 성과제도 하고 제가 고3이라고 해서 빼먹은 건 별로 없어요.
전국 성경 고사대회도 갔어요. 등수도 들기도 하고요. 제가 얼마나 많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내가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겠습니까?
그러면서 오늘 본문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질문이 던져지더라고요. 나는 그때마다 예배할 때마다 공부를 할 때마다 제자 훈련 시간마다 나는 과연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했는가 내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확신했는가 내가 정말 하나님을 확신했을까라는 질문이 저에게 던져졌어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사마리아 여인이 조금 부러운 거예요. 왜냐하면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예배에 대한 문제도 해결했고요. 그리스도에 대한 문제도 해결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걸 통해서 우리와 예수님의 만남이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이 우리와 성령과의 만남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지금 여러분과 저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그리스도의 교제가 확신을 갖게 하는 교제여야 한다는 거죠.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확신의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께 늘 섬기는 그 섬김이 확신의 섬김이어야 된다는 것, 그러니까 확신 없이 예배를 끝내지 말고 확신 없이 봉사를 끝내지 말고 확신 없이 기도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아보니 저는 수없이 많은 시간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 만남이 확신 없이 끝났던 것으로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만약에 내가 만약에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모든 예배를 확신으로 들었다면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요?
수없이 기도 많이 했던 그 기도의 시간에 내가 확신으로 기도를 끝냈다면 내 기도는 어떤 열매를 맺었을까?
수없이 많은 훈련의 시간 동안 매시간 때마다 내가 확신으로 그 훈련을 마쳤다면 과연 내 삶의 영적 열매는 어땠을까라는 질문이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확신 없는 삶의 문제점이 과연 뭘까요? 사마리아 여인이 그 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확신은 이제 복음 전파로 이어졌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들자마자 자기 동네로 돌아갔고 자기가 만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전했던 거죠. 그랬더니 확신 가운데 전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39절입니다. 같이 한번 읽습니다. 39절 시작
여자의 말이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복음 전파로 이어졌고, 그 복음 전파를 통해서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는 모든 것이 약해져요. 여러분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목회자는 어떻든 많은 평가 기관을 통해서 피드백을 끊임없이 목회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요. 그러니까 모든 교회들이 다 약해졌다는 거예요. 전도도 약해지고 예배도 약해지고 봉사도 약해지고 다 약해졌다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바로 확신 없이 우리가 예배하고 확신 없이 봉사하고 확신 없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겁니다. 확신 없는 기도가 끝나면 확신 없이 기도가 끝나면 구체적인 행동이 나오지 않아요. 확신 없이 예배를 끝내면 예배 후에 구체적인 삶의 결단이 일어나지 않아요. 확신 없이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아요.
근데 확신 없이 우리는 끝내고 있고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가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적어지고 있다는 반증이고, 예수님에 대한 만남을 통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적어지고 있기 때문에 전도의 자리에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전도할 결심도 못하고요. 전도의 말도 하지 못하게 되고요. 전도에 필요한 시간과 물질도 헌신하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고 그 만남이 확신 가운데 끝나야 전도에 필요한 구체적인 행동과 결단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전도가 줄어들어요. 이것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확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인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위험에도 전도할 것이고요. 전도하는 일이 내게 손해를 가져와도 전도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는 많은데 성도는 많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적기 때문에 전도의 종력이 점점 더 약해지고 있어요.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는 계속 어쨌든 VIP들이 오시고 또 등록도 하는 일들이 올해 계속 이렇게 기어져요. 정말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성도들이 1대 1로 전도해서 온 분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기도를 통해서도 우리는 확신을 경험해야 됩니다. 여러분 확신 없는 기도는 지루한 기도가 되고요. 재미없는 기도가 돼요. 그래서 기도를 안 하게 돼요. 왜 성도들이 기도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기도를 시작했다가 왜 멈추냐 확신 없이 기도를 끝내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오늘부터 기도에 대한 다짐을 하고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면 이렇게 생각해 나는 모든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어떻든 확신으로 기도를 끝내자 이 다짐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피곤하고 힘들게 기도의 자리에 왔지만 지금 내 영혼이 죽을 것 같지만 내 육체가 너무 공고하지만 그래도 확신으로 기도를 끝내자 그 마음으로 기도의 자리에서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하고 확신으로 끝낼 때 기도를 통한 열매들이 우리의 삶에 맺어지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은 확신을 가지고 기도의 자리에 일어설 때 하나님께 받게 되는 거예요.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하실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진 건 훨씬 몇백 배 몇 천 배 중요한 일인 거예요.
기도를 하는 것, 기도를 간절하게 하는 것, 기도를 크게 하는 것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이 기도를 응답하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한번 따라가겠습니다.
확신이 없으면 응답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하는 거예요 이게 최고 좋은 방법이에요. 그럼 좀 더 짧은 시간에 확신이 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더 간절하게 더 큰 소리로 더 부르짖어 기도하는 거죠. 제 경험상 여러분의 경험은 다를 수는 있지만 그냥 평범하게 기도해서 확신의 자리까지 이르는 기도의 시간은 꽤 걸리더라고요. 그냥 제가 앉아서 첫 번째 기도 제목부터 해서 막 계속 기도를 해요. 이렇게 해서 기도가 제 마음에 확신이 드는 순간까지 기도하는 건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이 절차를 좀 무시하고 요즘 이제 며칠 그래 봤어요. 정말 필요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바로 그냥 본격적으로 막 기도하기 시작해 그랬더니 확신이 훨씬 더 빨리 드는 거예요.
물론 내 마음에 확신이 들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맞지 않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겠죠. 근데 어떻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확신이 있어야 응답이 있으니까 확신이 드는 데까지 기도를 가지고 가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 목장 교회 기도가 확신의 기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도 확신 가운데 해야 돼요. 오늘 제가 얼마나 편하고 행복했는지 몰라요. 여러분 사장님도 힘든 거 모르시죠? 정말 이런 말하면 안 되는데 정말 죽을 맛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을 찬양하는 건 너무 좋은 일인데 연습 20분 실제 20분, 또 여기 올라와서 설교한 35분, 설교 마치고 결단의 찬양해서 한 5분 10분 그러면 제가 1시간 넘는 긴 시간을 쉬지 않고 기도하거나 찬양하거나 말씀을 전해야 되는 거죠.
이게 정말 많은 에너지가 들어요. 하나님이 다행히 아셨는지 몇 달 전부터 저를 운동을 좀 빡시게 시켜서 그나마 체력이 좀 이렇게 보강이 돼서 아주 힘든 건 아니지만 어떻든 오늘은 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찬양도 마찬가지예요. 확신 가운데 찬양해야 돼요. 그래야 찬양을 마쳤을 때 내 삶의 결단과 헌신이 일어나요. 우리가 찬양의 가사를 통해 은혜 받는 것도 중요해요.
요즘은 멜로디를 통해도 많이 은혜를 받잖아요. 근데 정말 중요한 건 찬양 가운데 내가 확신 중에 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확신이 들 때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 찬양을 받으실 것에 대해서 확신이 들 때까지 소리를 높여 찬양하고 소리 높은 곳 안 되면 손을 들어 찬양을 하고 온 모든 걸 쏟아부어서 찬양을 하고 찬양이 확신의 자리에까지 가야 됩니다. 양 중에 대화하신 하나님을 확신해야 하고요.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 우리 가운데 행하실 것을 확신해야 돼요.
우리가 찬양을 오래 한다고 해서 확신을 갖게 되는 건 아닙니다. 찬양할 때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어요. 그래야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고 찬양은 점점 더 힘 있게 나의 삶에 역사하게 되는 겁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통해서도 확신을 경험해야 돼요. 여러분 결단의 찬양이 그런 역할을 해요. 설교를 정말 잘하는 건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막 울고 막 작정하고 확신하는 일은 제 생에도 그렇게 많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좀 슬픈 얘기긴 하지만 물론 피드백을 보면 은혜 받았어요 하는 분도 있고 또 가끔 이렇게 하프마다 눈이 눈물이 난 건 잘 모르지만 눈물을 흘리고 나오는 분도 있고 그런 걸 보면 아주 은혜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막 막 속에 작정이 일어나고 막 이런 일들은 크게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결단의 찬양을 하는 거예요. 결단의 찬양 말씀을 생각하면서 내 안에 오늘 들은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 말씀이 성도들의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결단을 찬양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단의 찬양이 더 간절하고 더 목말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예배가 확신이 없이 끝납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렸어요?
예배 때마다 확신으로 끝나셨습니까? 아니면 아무런 마음 없이 예배를 그냥 통과 의례처럼 여기고 예배를 마치셨습니까?
예배의 모든 구성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 돼요. 오늘 드린 예물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되고, 오늘 드리는 기도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확신도 있어야 되고 하나님이 이 말씀 가운데 역사하셔서 말씀이 내 삶에 뿌리내리게 하셔서 이 말씀이 나의 삶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확신도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이런 성도들이 세상에 돌아가 담대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힘의 근원이 나인 건 불행한 인생입니다. 내 안에 나올 게 뭐가 있다고요?
내 삶의 근원이 그냥 나인 거는 불행한 거예요. 왜 우리 삶에 나올 게 뭐가 있다고요?
여러분의 내면에 나올 게 뭐가 있어요? 분노, 짜증, 화냄, 원망, 미움 다툼 이런 게 나오잖아요. 여러분을 가만 버려두면 아무 데나 방치하면 여러분 내부에서 좋은 게 나오나요?
안 나오잖아요. 어떻게 그걸로 하나님을 예배해요?
어떻게 그걸 하나님을 높여요?
그런 걸 세상으로 돌아가면 세상의 변역자로 우리가 살 수 없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예배 중에 예배 중에 우리의 예배가 확신으로 끝나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도 말씀을 들으셨으니까 이 이후로 이전까지는 이제 이 내용이 이런 걸 몰랐잖아요. 이루어 선포되는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이 마음에 정말 확신을 가지고 한번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속으로 암면도 하시고 소리 내 암면도 하시고 결단의 찬양 이때 정말 하나님 이 말씀이 내 삶에 그대로 이루어져서 하나님 내가 확신의 사람으로 세상에 살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처럼 결단하고 헌신한 일들이 내 삶에서 일어나 이러면 여러분 세상에서 여러분 힘 있게 살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내 삶의 근원은 내가 아니에요. 내게서 나올 수 있는 건 없어요.
여러분이 경험을 통해 내면에 축적한 것은 그 못된 것들이에요. 좋은 것들이 아니에요. 심지어 부모가 여러분의 내면에 심어준 것도 좋은 게 아니고 세상에 경험하면서 살았던 여러분의 선배들, 여러분의 스승들이 심어준 것도 좋은 게 아니에요. 세상의 지식들, 수많은 독서를 통해 얻은 그 지식도 그게 여러분이 축적돼 있다면 그게 좋은 게 아니에요. 그거 꺼내서 살아보세요. 며칠 못 살아요.
세상의 박해와 고난은 내 속의 것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해결하는 거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으로 해결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에 대한 믿음으로 해결하는 거예요. 이 결단의 역사들이 우리 예배에 날마다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사역을 통해서도 확신을 경험해야 됩니다. 소급을 통해서 확신을 경험해야 되고 양육을 통해서도 확신을 경험해야 됩니다. 주일의 안식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 그리도 확신을 경험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확신 없이 어떤 신앙적인 행위든 내 삶이든 끝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성도와 성도의 만남을 통해서도 서로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만남을 끝내야 성도들이 만남을 행복해하는 거예요.
성도들의 만남이 즐겁지 않은 것은 확신으로 끝내지 않아서인 거예요. 확신이 없이 끝내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확신이 없으면 결단이 없게 되고요. 결단을 하지 않으면 헌신을 하지 않게 되고, 헌신이 없으면 열매가 없게 됩니다. 기도 후, 예배 후, 사역 후 불신이 일어나는 것을 의심하게 되는 것을, 염려나 걱정이 만들어지는 것을 주의해야 돼요. 예배를 드렸어요. 막 걱정과 염려가 이건 주의해야 될 일이에요. 내가 교회를 열심히 섬겼는데 의심하고 염려하는 건 주의해야 될 일이에요. 주방에서 열심히 봉사한 것들이 염려와 근심으로 끝나는 것을 주의하고 조심해야 돼요. 나만 여기서 괜히 일했어. 나 수고한 거 아무도 몰라요.
여러분 이렇게 일을 끝내면 행복하지 않아요. 사역이 행복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갚으신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이 이 재료를 쓰셔서 주의 나라를 이루신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사역의 헌장 현장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리라 염려는 성도에게 있어서 회충과 같습니다. 영적인 열매를 갉아먹는 해충입니다. 영적인 열매들이 맺기 전에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 염려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확신이 없어지면 의심이 들기 시작하고 가정이 깨어져요. 영적인 분쟁도 확신이 없는 자리에 일어나는 거예요.
모든 트러블들은 학신인이 없는 자리를 나요. 목사를 확신하지 못하면 목사와 싸우게 되고요.
성도를 확신하지 못하면 성도와 싸우게 돼요. 그래서 우리는 확신 없이 뭔가를 끝내지 않도록 애를 쓰고 노력해야 됩니다. 이 땅을 사는 성도들이 성도들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영생에 대한 확신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에요. 교회에 대한 사역에 대한 사명과 소명에 대한 확신도 줄어들어요. 그래서 구체적인 결단과 헌신이 성도들의 삶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거예요.
교회는 확신에서 나오는 결단과 헌신,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교회가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행동에 의해서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지, 작정에 의해서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작정하고 다짐하면 그게 영향력이라고 생각 여러분 작정하고 다짐한다고 영향력이 되지 않아요. 행동하고 일하고 수거해야 그게 영향력이 돼요.
어떤 분이 우리 교회와 다른 교회의 차이점을 이렇게 비교하더라고요. 이 다른 교회는 누가 봐도 정말 좋은 교회를 의미해요.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나빠서 이렇게 비교하신 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비교의 대상 아닌 교회가 제가 봐도 그냥 탑이에요. 탑 탑. 그러니까 어느 교회 우리 주변에 있는 어느 교회랑 비교해도 탑이에요. 그러니까 그 교회와 우리 교회의 차이점 좀 많긴 하겠죠.
근데 가장 구체적인 차이가 뭐냐 이렇게 딱 하나를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목사님 우리 교회에는 저요 하는 사람이 적어요.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저요 하는 사람이 적어요.
그럼 어떤 사람이 저요라고 할까요?
확신이 있어야 되는 거죠. 하나님이 이 일에 나를 쓰시고 싶어 한다. 확신이 있어야 져요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의 재능을 이 일에 하나님이 나의 물질을 이 일에 하나님이 나의 시간과 나의 수고를 이 일에 쓰시고 싶어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우리가 줘요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의 비교 대상이었던 그 교회는 아마 경제적 여건도 좀 낫겠죠. 그렇지만 근본에 들어가면 확신이 있는 거죠. 그래서 줘요라고 하는 신앙이 많아요. 저기요가 아니고요. 줘요 저기요는 따지는 거고 저 요는 제가 하겠습니다. 이런 거잖아요. 줘요. 여러분 표정을 보니까 저요의 표정이 아니에요. 목사님이 또 저요를 시키면 어떡하지 이런 표정인데 그래도 시키겠습니다.
오른손을 들고 따라 합니다. 줘요. 한번 해보세요. 여러분 한번 하겠습니다. 시작 줘요. 예. 앞으로 우리 교회가 이 조요가 좀 자연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일하면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거야. 하나님이 이 재능은 이 일을 위해서 준비하신 거야.
이 일을 마 끝난 후에 주께서 나의 삶에 귀한 열매들을 주실 거야.
여러분 이 확신이 있어야 초요가 되는 거예요. 특별히 여러분 기도할 때 우리 교회 안에 모든 순서들이 확신으로 끝나도록 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교회가 확신의 예배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의 기도가 확신의 기도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우리의 헌신이 확신의 헌신이 되게 해 주십시오. 우물쭈물하고 주저주저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든 예배 때마다 성도들이 확신하고 담대하게 줘요라고 외치는 그런 재단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혹 여러분 요즘 여러분의 확신이 흔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묻는 건 흔들리는 게 보이는 거여서 묻는 거고요.
보통 목회자가 설교하는 건 짐작이나 느낌이나 생각이 있어서 보통은 설교하게 되죠. 뭔가가 폼이 없이 목사가 자기 주관대로 설교한 일은 드무니까 어떤 종류의 인폼이 제게 있었겠죠 사무엘아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고 누렸던 확신이 이 재단에도 날마다 충만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