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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삼(第三)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종류, 즉 알로 낳는 것, 태로 낳는 것, 습기로 생하는 것, 화하여 생하는 것, 빛이 있는 것, 빛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내가 다 완전한 열반에 들게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금강경 제3분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은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모든 중생을 다 완전한 열반에 들게 제도하라. 둘째,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셋째, 만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무슨 뜻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즉문즉설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남편의 술 문제로 힘들어하는 질문자가 저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날마다 술을 마시는 남편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남편 때문에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남편이 술을 좋아해서 365일 중에 하루도 술을 안 마시는 날이 없고, 늘 늦게 들어옵니다. 때로는 집에 안 들어오기도 하고요. 들어오면 술주정하며 못살게 굽니다. 절에 가서 기도하면 좋아진다고 해서 불공을 드렸는데 남편한테 변화가 없어요. 친구가 절보다 교회가 더 영험하다고 해서 교회에 가서 기도도 드렸어요. 남편한테 술 귀신이 들었으니 굿을 하면 좋다는 말을 듣고 굿까지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그분에게 남편이 퇴근하면 매일 술상을 차려주라고 했습니다. 옆에 앉아서 술도 한 잔씩 따라주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되겠으면, 매일 300배씩 절을 하면서 ‘부처님, 우리 남편에게는 술이 보약입니다’ 하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내 남편에게만큼은 술이 보약인 겁니다. 보약이란 건 하루도 거르지 말고 먹어야 하잖아요. 저녁마다 술상을 차려주고, 남편이 밖에서 술을 먹고 들어온 날은 해장국을 끓여줘야죠. 자기가 보약을 알아서 챙겨 먹고 들어왔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남편 스스로 챙겨 먹으면 칭찬해 주고, 안 챙겨 먹으면 챙겨주어야 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질문자가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다가 다시 설명을 해주니 일단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열 명하고 이런 대화를 하면, 그중에 몇 명이나 스님이 하라는 대로 할까요? 두세 명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질문자 본인이 힘들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봐 놓고는 제 대답을 별로 귀담아듣지 않아요. 즉문즉설이 끝나고 강연장을 나가면서 스님이 이상한 거 시킨다고 못마땅해하기도 합니다. 보통은 한두 번 해보다가 금방 때려치웁니다. ‘내가 저런 인간한테 뭐 때문에 술상까지 차려 바쳐야 하나?’ 하면서요. 그런저런 위기를 극복하고 스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한 사람은 100일쯤 지나서 저를 다시 찾아옵니다. 100일이 넘어가면 효과가 딱 나타나거든요. 스님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영험이 있다고 좋아서 오는 거예요.
‘스님, 남편이 요즘 집에 일찍 들어오고, 술도 적게 먹고, 사람이 바뀐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요즘 기도를 300배가 아니라 500배씩 합니다. 물론 술상도 잘 차려주고요.’
그 말을 듣고 제가 말했어요.
‘기도를 제대로 안 하고 있네요.’
그랬더니 질문자가 입을 삐죽 내밀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아닌데요. 저는 기도를 아주 열심히 하는데요. 300배 하다가 이제는 500배 한다니까요.’
스님한테 고맙다고 말하려고 왔다가 기도를 제대로 안 한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겁니다. 그러다 100일쯤 더 지나면 또 찾아옵니다.
‘스님, 영험이고 뭐고 다 없어졌습니다. 이 인간이 또 매일 술 먹고 늦게 들어와요. 기도하는 보람이 없어요. 이제 그만할래요.’
‘제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습니까? 질문자는 기도를 제대로 안 한다고 했죠?
‘스님, 저는 열심히 기도했어요.’
‘질문자는 절을 한 것이지, 기도를 한 게 아닙니다.’
이 대화 속에 금강경 제3분의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질문자는 남편이 자기 뜻대로 바뀌기를 바라며 기도를 한 거예요. 이것이 보통 불교 신자들이 기도하는 목적이고, 복을 구하는 방법이고,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면 기도가 영험이 있다고 하고, 안 되면 영험이 없다고 합니다. 그동안 본인의 힘만으로는 남편을 바꿀 수 없고, 이곳저곳 가 봐도 안 되니까 저한테까지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스님이 정반대로 방법을 바꿔보게 한 겁니다. 남편은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하는 사람이니까 반대로 생각해 보라고 한 거예요. 즉 ‘하지 말라’ 하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그동안 자기 방식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스님 말대로 해보니 딱 효과가 나타났어요.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남편이 조금 변했고,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던 겁니다.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정작 스님은 기도를 제대로 안 했다고 말한 겁니다.
스님이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질문자가 중생심에서 비롯된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상황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원하는 대로 되면 좋고, 안 되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된다 해도 좋기만 하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 것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죠. 그리고 원하는 만큼 다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따릅니다.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은 윤회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에 매달리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내가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까?’ 하는 말은 나를 구제해 달라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관점을 바꿔서 ‘도움받으려 하지 않고 도와주며 살아라’,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하며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구제해 달라는 사람에게 오히려 ‘먼저 내가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라’ 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것처럼 남편이 술을 먹지 않도록 하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에게 스님은 오히려 ‘남편에게는 술이 보약입니다’ 하고 생각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술을 먹지 말라 한다고 남편이 그 말을 듣습니까? 반대로 술을 먹으라 한다고 해서 평소보다 술을 더 먹을까요? 여기서 문제는 질문자가 자꾸 ‘내가 술을 먹지 말라고 하면 남편이 술을 안 먹을 거고, 내가 술을 먹으라고 하면 남편이 술을 더 먹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사람은 다 자기 식대로 살지, 남의 말은 잘 안 듣습니다. 아내가 먹으라고 하든, 먹지 말라고 하든, 남편은 자기 마실 만큼 술을 마십니다. 일시적으로 잠깐은 아내 말을 듣는 것 같을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금방 자기 하던 대로 돌아갑니다.
내가 남편에게 술을 먹지 말라고 했을 때 그가 술을 안 먹으면 내가 기분이 좋을 것이고, 그가 술을 먹으면 내가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런데 반대로 술을 먹으라고 해보면 어떨까요? 내가 술을 먹으라고 했는데 남편이 술을 먹으면 내 말을 잘 듣는 것이 되니까 좋고, 술을 안 먹으면 남편이 술을 안 먹어서 좋은 거예요. 상대가 내 요구를 들어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생각을 바꿔서 해결되는 방법도 있어요. 술을 먹는 사람한테 술을 먹지 말라고 하니까 갈등이 생기지, 반대로 술을 먹으라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져요. (웃음)
그러니 굳이 절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 생각만 딱 바꾸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한 생각을 못 바꾸니까 술이 보약이라는 기도문을 준 거예요. 술이 독이지 어떻게 약이겠습니까. 그래서 앞에 ‘우리 남편에게는’ 하고 전제가 붙습니다. ‘우리 남편에게는 술이 보약입니다’ 이렇게 기도문을 준 거예요. 우리 남편에게는 왜 술이 약일까요? 남편은 뭔가 답답한 일이 있는 겁니다. 답답함을 계속 참으면 숨이 막혀 죽습니다. 남편은 살고 싶어서 술을 먹는 거예요. 답답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해봤자 싸움밖에 안 되니까 술을 먹고 숨통을 틔워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술은 독이지만 약이라고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남편에게는 진짜로 술이 약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약을 약인 줄 아는 것이 진실을 아는 것입니다.
남편에게는 술이 약이니 잘 먹어야 되겠죠? 이전 같으면 왜 술 먹고 들어오느냐고 싸울 텐데, 이제는 약을 알아서 먹고 오니 고마운 일이 됩니다. ‘어서 와요. 오늘도 힘들었죠? 한잔하고 왔네요’ 하면서 혹시 술을 안 먹고 온 날은 집에서 술상을 차려주세요. 그러면 남편이 술을 먹어도 아무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남편이 술을 먹든 안 먹든 내 생각을 바꾸면 벌써 내 문제는 해결된 거예요. 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남편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 중에 제일 큰 게 부인에게서 받는 스트레스입니다. 그런데 부인이 주는 스트레스가 없어지니 남편의 스트레스가 줄어듭니다. 스트레스가 줄어드니 술도 적게 먹게 되는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밖에서 술 먹는 것보다 집에 가서 술을 먹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부인이 잔소리하니까 밖으로 나돌았지만, 부인이 술도 주고 잔소리도 안 하고 칭찬도 해주는데 굳이 밖에서 돈 써가며 술을 먹을 이유가 없죠. 그러니까 부인이 보기에도 남편이 변한 겁니다. ‘드디어 기도에 영험이 나타난 건가? 스님 말씀대로 해보니 진짜 용하다’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스님한테 찾아와서 남편이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감사 인사를 한 겁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기도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바뀐 것을 좋아하면 그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처음에 남편에게 술을 먹지 말라고 할 때는 남편이 술을 먹어서 괴로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 술을 안 먹으니 기분이 좋아진 겁니다. 이것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돌고 도는 것일 뿐입니다. 고락이 윤회하는 것은 중생계입니다. 질문자가 300배를 하다가 기분이 좋아서 500배를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리 운동을 한 것이지 수행을 한 게 아니에요.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니 괴로움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질문자가 500배를 한 이유가 뭘까요? 남편이 술 마시는 게 줄어드니까 기분이 좋았겠죠. 그래서 남편이 좀 더 빨리, 좀 더 많이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절을 늘렸는데, 남편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변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전혀 안 변한다는 전제에서 조금 바뀌었을 때는 엄청나게 기분이 좋았죠. 남편이 조금 변한다 싶으니 더 욕심을 내서 절을 500배씩 했는데 남편이 안 바뀌니까 다시 스트레스를 받게 된 거예요. 내가 괴로우니 다시 남편한테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당신 요새 술 좀 안 먹더니 또 먹는다’ 하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죠. 이것이 바로 고락(苦樂)이 윤회하는 모습입니다.
첫째, 도움받으려 하지 말고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라
여기에서 핵심은 마음을 항복받기 위해서 오히려 마음을 거꾸로 내라는 것입니다. 정토회에서 하는 천일결사 수행법 중에서 ‘수행자의 자세’를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이해받으려 하지 않고 이해하며 살겠습니다. 도움받으려 하지 않고 도와주며 살겠습니다…’
마음을 항복받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이렇게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바꾼다고만 해서 모든 괴로움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계가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게 되면 ‘내가 도움을 줬다’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기도해서 남편이 바뀌었다든지, 내가 도와줘서 저 사람이 살았다든지, 이런 마음이 생기면 어떤가요? 내가 도움을 준 사람이 인사를 안 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내가 너를 돕는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노고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생기는 겁니다.
둘째, 도움을 주고 나서 바라는 마음을 갖지 마라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면 어리석은 중생이고, 베푸는 마음을 가지면 현명한 중생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바꿔서 베푸는 것만으로는 괴로움에서 절반 정도만 벗어났다고 볼 수 있어요. 남한테 베푼 것이 없이도 상대에게 바라는 게 중생인데, 자기가 뭔가 베풀었다면 당연히 상대에게 바라는 게 생기겠지요. 그래서 두 번째 단계가 도움을 주고 나서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때 내가 베푼 행위에 대한 흔적이 없습니다. 흔적이 없다는 것은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아서 아무런 찌꺼기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아갈 때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 제3분의 내용이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가져야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을 완전히 항복받는 길입니다. 첫 번째 단계인 마음을 바꾸는 것에 머물면 안 되고, 바라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단계도 못 넘고 있죠. 설령 첫 번째 단계를 넘어서 불교 신자가 되거나 출가해서 공동체에 들어오기까지 하지만, 대부분 두 번째 단계를 못 넘게 됩니다. 즉 중생의 뿌리가 안 뽑힌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나는 베풀지 않으면서 받기만 바란다면 합리적이지가 않습니다. 모두가 얻겠다고만 하고 주겠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어요? ‘주는 것이 잘 받는 방법이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현명한 사람이에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하는 속담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 방법도 잘 살펴보면 내가 더 잘 받기 위해서 주는 마음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둘의 차이는 하나는 안 주면서 받기만 하겠다는 속셈이고, 다른 하나는 적어도 주는 만큼은 받겠다는 셈법입니다. 하나는 안 주고받겠다는 것이고, 하나는 주고 나서 받겠다는 것이니까, 준다는 측면에서는 천지 차이라고 볼 수 있지만, 둘 다 받겠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어요. 내가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베풀면 보상을 받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그만큼 미움도 비례해서 커집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베푼 만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이자까지 쳐서 받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셋째, 너와 나를 구분 지으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이 마음의 뿌리가 바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입니다. 네 가지를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면 그 뜻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한문으로 번역된 대로만 그 뜻을 해석하면 비교적 이해가 쉽습니다. 첫째, 아상(我相)은 나와 세상을 구분해서 ‘이것이 나다’ 하는 생각입니다. 둘째, 인상(人相)은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생각입니다. 사람도 동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넓은 범위에서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것이고, 가장 좁은 범위로는 가족과 가족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라는 말은 우리 가족과 남의 가족을 구분 짓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를 구분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중심으로 ‘우리 가족’부터 시작해서 ‘우리 인류’까지 점점 확장해서 구분하는 것이 인상입니다. 셋째, 중생상(壽者相)은 중생과 중생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생각입니다. 중생이란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과 천상의 신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중생이다’ 하는 것도 일종의 울타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수자상(壽者相)입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생명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그것이 식물이든 세균이든 수명이 있어서 생로병사 합니다. 생명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것이 수자상입니다. 더 확대하면 존재와 비존재, 즉 ‘있다’와 ‘없다’를 구분 짓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 지으면 아상,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을 구분 지으면 인상, 중생과 중생 아닌 것을 구분 지으면 중생상,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 지으면 수자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분 짓는 마음이 있으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는 연기법에서 보면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단독자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경계를 긋는 것이지 사실 모든 존재는 어떠한 경계도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제 모습입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쉬운 길
자연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새가 열매를 좀 쪼아 먹었다고 해서 열매가 ‘새야, 너는 내 덕분에 살지?’ 이런 생각을 할까요? 새가 열매를 먹고 그 씨를 여기저기 뿌렸다고 해서 ‘나무야, 내가 너를 엄청나게 번식시켰지?’ 이런 생각을 안 하잖아요. 또한 소가 풀을 뜯어 먹고 똥을 누면 그게 거름이 되어서 또 다른 풀이 자랍니다. 자연은 이렇게 서로 돕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과정의 어떤 지점을 딱 잘라서 보면, 하나는 주고 다른 하나는 받은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짧게 보면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다만 순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은 연기되어서 순환하는 것이고, 다만 이동하고 변화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지기 때문에 실상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또 이해한다고 해도 막상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는 쉽습니다. ‘자연스럽다’ 하는 말이 쉽다는 뜻이잖아요. 담배를 피우는 게 자연스러워요? 안 피우는 게 자연스러워요?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즉,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제일 쉽습니다. 담배를 피우려면 여러 가지로 힘이 들잖아요. 돈도 있어야 되고, 담배 사러 가야 되고, 불도 붙여서 피워야 하고, 이렇게 일이 복잡합니다. 그런데 담배에 중독이 된 사람은 어떨까요? 오히려 담배를 안 피우는 게 더 어렵습니다. 마치 우리가 담배에 중독되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지는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쉬운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