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7
ㅡ 삼국통일의 시대 9
(선덕여왕시절 대외정세와 업적)
삼국시대 고대사에 속하는 왕 이지만 '선덕여왕'처럼 우리나라 역사상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진 왕은 드물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 여왕이기도 하지만, 선덕여왕 시기가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한 기반을 닦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 였기 때문이다.
삼국통일 주역이 된 '김유신' '김춘추'가 선덕여왕 시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힘을 잡아 가는 시기였다.
또한 '삼국사기' 기록은 신라중심 으로 쓰여진 사서라고 오해를 받을 정도로 삼국통일 시기 인물 들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특히 삼국통일 영웅으로 받드는 '김유신' 삼국사기 기록 분량은 모든 인물들에 비해 가장 많다. 그러다 보니 '김유신' 이야기만 해도 '선덕여왕' 시절이 자주 나올 수 밖에 없다.
또 현재에도 선덕여왕을 주인공 으로 하는 드라마가 나온 것은 물론이고, 김유신이나 김춘추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에서도 선덕여왕 비중이 적지 않으니 선덕여왕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선덕여왕은 지금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대로 삼국시대 통일시대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성의 정치적 리더십을 잘 보여준 사례 이다.
선덕여왕 재위시 대외정세는 복잡다난 했다. 그 시기 삼국과 중국 당나라 상황을 살펴 보자.
1.고구려
고구려는 '선덕여왕' 재위 대부분 동안 '영류왕'(618년~642년)이 통치하고 있었다. 영류왕은 당과는 외교를 강화하며 평화적 관계를 추구했다. 그러나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선덕여왕 후반에는 고구려 내부적으로 '영류왕'과 '연개소문'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연개소문에 의해 영류왕이 살해되고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 (642년~668년)이 즉위하게 된다.
이후 신라 선덕여왕은 백제 강한 공격에 어려움에 처하자 김춘수를 보내 고구려 연개소문에 도움을 청하나 거절당한다. 이에 신라는 당태종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당과 동맹까지 맺게 된다.
신라가 이처럼 당과 직접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은 진흥왕시절 찾이한 한강유역이 큰 역할을 했다. 신라는 한강을 통해 당과 직접 교류를 할 수 있는 통로 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그 이전에는 신라가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도 백제를 통해 (백제와 사이가 괜찮을 때) 백제사신을 따라서나 다닐 정도로 중국과 직접적 교류가 지리적으로 힘들었다.
2. 백제
백제 '무왕'(재위 600년~641년) 은 '선덕여왕' 초기에 백제를 통치하며 신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 이때 백제는 신라 최고 전성기였던 '진흥왕'시절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에게 배반 당해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성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위해 신라를 줄기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선덕여왕 시절 신라와 백제는 그 어느 때보다 상시로 전쟁하면서 엄중한 긴장관계에 있었다.
선덕여왕 후반에 들어서서는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재위 641년~660년)이 641년 무왕 뒤를 이어 즉위한다. 의자왕은 초기에 강한국력을 바탕으로 신라 를 공략했다. 특히 백제 의자왕은 642년 고구려 연개소문과 연합한 뒤 신라를 공격하며, '대야성'(현 경남합천)을 비롯한 여러 성을 점령했다. 대야성은 신라수도 서라벌을 방어 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당시 신라는 절대절명 위기에 처한다. 신라는 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자 신라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에 도움을 청하나 거절 당하고, 당에 도움을 요청하여 동맹까지 맺는다. 김춘추 외교 덕택에 선덕여왕 시기 대는 아니였지만 바로 얼마 후 신라는 신라-당 연합군을 구성하여 백제를 공격 하고, 백제를 멸망 시킨다. 이런 계기를 선덕여왕 시대 만들었던 것이다.
3. 당
선덕여왕 시기 중국은 당 태종
(재위 626년~649년)이 통치 하고 있었다. 당 태종은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는 데 협력했다.
당 태종의 고구려 침략은 645년(선덕여왕 재위 말기)에 발생한 고구려-당 전쟁 중 하나였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신라는 당에 직접적인 군사지원 을 하지 않았다. 당시 당태종은 신라같은 조그마한 나라 도움 없이도 고구려를 쳐 부술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기에 신라에게 부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는 후방 신라 공격을 염두에 두고 그 동안 원수같았던 백제와 손을 잡고 연합하여 신라 를 견제하게 했다.
백제는 당나라 고구려침략을 견제 하거나, 적극적으로 도운 기록은 없으나, 고구려와 동맹을 통하여
당태종 고구려침략 당시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는데 주력했다.
이처럼 백제는 고구려를 도와 신라를 견제하고 당에게는 간접적으로 대항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 협력으로 신라를 공격하며 대야성을 점령하는등 국력을 확장하는 데 집중했으나, 이후 신라-당 연합군 반격을 받게 된다.
신라도 당의 고구려침략에 백제 공격을 막아내니라 정신없어 직접적 군사적 움직임은 없었지만 당의 고구려침략이 신라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의 군사적 행동을 내심 지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당태종 고구려침략은 삼국 간 전쟁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는 당태종 침략을 성공적 으로 막아내긴 했지만, 얼마안가 <당, 신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 하여 백제를 멸망시키자, 고구려 백제와 동맹관계도 사라져 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든다. 백제 멸망시 고구려는 당시 동맹관계인 백제를 도우러 군사를 보내지 않았을까? '왜'도 백제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는데도 말이다.
당시 고구려에게는 계속되는 당침략, 연개소문 쿠데타로 내부적 문제등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 백제멸망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은 신라와 백제 모두 각각 전략적 목적을 추구하던 시점에 발생했으며,
이 사건이 삼국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신라는 이후 김춘추(태종 무열왕 시기)에 본격적으로 당과 연합 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는 전략을 구상하는 계기가 된다.
이처럼 선덕여왕 시기는 삼국 간 전쟁이 빈번한 시기였고, 동시에 당과 외교가 신라 중요한 전략 요소로 작용한 시기이기도 했다.
선덕여왕은 이토록 대외적으로 엄혹한 시기였지만 신라 내부적 으로는 불교를 장려하며 신라 문화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선덕여왕 문화적 업적을 살펴 보자.
1.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선덕여왕은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자장의 건의로 이 탑을 세웠습다. 아마 지금 남아있다면 우리나라 기념비적 건축물로 남아 있겠지만 아쉽게도 고려 몽골침략 때 불 타버렸다.
2. 분황사(芬皇寺) 창건: 선덕여왕 시대에 건립된 대표적인 불교 사찰로, 신라 불교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3. 천문 과학기술과 첨성대 건축
선덕여왕은 천문 관측을 통해 농업과 국가 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첨성대를 세웠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중 하나로, 그녀의 과학적 관심을 보여준다.
또한 선덕여왕은 신하들과 협력과 지혜로운 판단으로 정국을 나름 안정시켰다. 반란과 외세 침입 속에서도 그녀는 신라의 국력을 유지하며 국방을 강화했다.
선덕여왕은 뛰어난 예지력을 가진 인물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어, 우리 학창시절 교과서에도 나왔던 거 같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올린다.
선덕여왕과 <모란 꽃에 관한 일화>는 한국 역사와 설화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로, 선덕여왕 지혜 와 통찰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로 꼽힌다.
[어느 날 중국 당나라에서 선덕여왕에게 선물로 모란 꽃 그림과 모란씨앗을 보냈다. 그림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란 꽃이 그려져 있었고, 씨앗도 함께 보내졌다. 하지만 꽃 그림에는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었다.
그 그림을 본 선덕여왕은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하들이 놀라서 이유를 묻자, 선덕여왕은 이렇게 답했다.
“그림에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소. 꽃에 향기가 있었다면 벌과 나비가 몰려들었을 텐데, 그림에 그려지지 않았으니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후에 씨앗을 심어 모란이 피자, 실제로 그 꽃에는 향기가 없었고, 선덕여왕 말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 일화는 선덕여왕 지혜와 관찰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림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보이지 않는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은 그녀가 훌륭한 통치자 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일화로 해석된다. 또한 이 이야기는 그녀 뛰어난 판단력을 강조하며, 신라 역사에서 여성 지도자 위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례로 여겨 진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설화로 전해지지만, 선덕여왕 통치와 리더십에 대한 민중 존경심이 반영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647년, 신라 내부에서는 <비담과 염종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여성 통치에 대한 반발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리고 선덕여왕 통치가 지금까지 정리한 것처럼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선덕여왕은 이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채 병사하였고, 이후 그녀 조카인 '진덕여왕'이 뒤를 이었다.
선덕여왕은 대외적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라를 안정적으로 이끌고, 문화와 종교의 발전을 도모한 훌륭한 지도자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어서 선던여왕 시대 부정적인 면과 화랑제도가 계속 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