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es/
고위 재계인사들이 타고 있는 여객선을 호위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G.O.S의 제독 슈나이드 베이커는 기함 파에렛츠의 브릿지에서 한가한 임무의 따분함에 질려서 부관과 체스를 두고 있는 중이었다.
올해 53세의 나이로 30년을 우주에서 보내어온 백전의 노장은 그의 경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얼굴에는 전투에서 얻은 상처들이 많았다. 인간형 범용병기 레일드 파일럿으로서 해적들과 싸우던 젊은 시절의 혈기를 나타내는 증표였다. 때문에 본인은 그 상처들을 그리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임무는 상당히 순조로웠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순조로움과 평화로움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백전의 노장은 군국주의자나 목적으로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취미따윈 없었던 것이다.
"체크메이트."
부관의 좋은 목소리가 상념에 잠겨있던 제독을 끌어냈다. 어느샌가 나이트를 먹어치운 나이트가 압박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탈출구는 없었다. 이미 룩이 조심스럽게 파고 들어와 퇴로를 끊어놓고 있었다.
탈출구는 없었다. 제독은 혀를 차면서 자신이 너무 쉽게 승리를 내어주었음을 후회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집중력이 흩어졌던 것일까.
하지만 전투중에는 결코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지휘관의 잘못된 명령이 수많은 장병들을 일시에 죽음으로 몰아넣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도 퇴로가 없음을 확인한 제독은 쓴웃음을 지으며 킹을 넘어뜨렸다. 승산이 전혀 보이지 않을때는 객기부리지 않고 항복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그렇다고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것은 바보나 겁쟁이나 하는 짓이다.
"또 져버렸군. 한눈을 팔았어."
"패자는 말이 많은 법이죠."
부관이자 부함장인 카를로스 필로드의 재치있는 말에 제독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올해로 31세를 맞이하는 갈색의 머리카락을 짧게 친 핸섬한 남자였다. 그렇다고 보기 드문 미남은 아니었지만 어디가서 못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사무직을 지원해 함대의 운영이나 관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젊은이였다.
지금은 무료함에 못이긴 자신의 상관과 함께 체스를 두면서 이렇게 승자의 여유를 뽐내고 있었지만 이제 겨우 실전 투입이 가능할 정도의 최신예 전함 다섯척을 무리 없이 운영할 정도로 그는 뛰어났다. 물론 자신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제독은 자신의 말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싸울 준비를 갖췄지만 카를로스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아니, 또 하시게요?"
"물론이지. 노장은 끈질긴 법이거든."
"심심하신 거겠죠. 전함은 전투가 없을 때는 무척이나 무료한 법이거든요."
"그 말이 맞아. 전투가 없는 전함처럼 심심한 곳도 없지."
카를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 인상과는 달리-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얼굴을 보며 쫄아 있었다-제독은 인자하고 말이 통했다. 세대간의 차이를 극복할 줄 안다고 해야할까. 성격만으로 보자면 동네의 연장자로 하늘아래서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30년간 전투를 겪어온 그는 노련하고 수완있는 함장으로서 지금 다섯척의 최신예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체스를 시작하는 두사람에게 오퍼레이터의 톤이 높은 목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미확인 전함, 접근중!"
이렇게 되면 체스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제독과 카를로스는 급히 브릿지 한켠에 마련해둔 휴식처에서 일어나 자신들이 가야할 곳으로 이동했다.
브릿지의 분위기는 팽팽하게 긴장이 되어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끊어질 것 같았다. 오퍼레이터들의 손놀림이 빨라지고 지휘석의 상황판에는 세 개정도의 보고서가 윈도우로 떠올랐다.
"식별은 가능한가?"
"죄송합니다. 식별 가능 위치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런가. 수고해주게."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완전히 멀어질 무렵, 제독은 지휘관석의 안락한 의자에 기대며 나직히 말했다.
"전 함대, 제2급 전투경보 발령. 모든 전투원은 위치로 이동하고 주포를 비롯한 모든 무기는 발사 위치에."
"전 함대, 제2급 전투경보 발령……."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끊어지고 그 자리를 급한 경보와 경악이 섞인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채웠다.
"다량의 에너지파, 급속 접근중! 회피, 불가능합니다!"
"실드 전개!"
광학 무기 굴절막을 비롯한 각종 보호막이 전함의 주변을 둘러싸고 우주 먼 저편에서 날아온 불청객은 거세게 실드를 때렸다. 일부는 산란되거나 중화되기는 했지만 다량의 에너지가 실드의 방어를 거침없이 뚫으며 전함의 고강도 복합장갑에 달려들었다.
어느 정도의 고출력 레이져인지 실드는 레이져의 강력한 에너지 파장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환영할 수 없는 방문을 허락하고 말았다. 선체 두세군데에 구멍이 나고 그곳에 배치되어있던 승무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주공간으로 날아가거나 슈트를 입고있지 않던 이들은 내부 압력에 몸이 터져 나가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기함 파에렛츠에는 우측 보조엔진이 있는 부분에 다량의 레이져가 쏟아져 들었다. 우측 보조엔진 블록에는 화염과 함께 승무원들의 비명이 지옥의 단말마처럼 길게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졌다.
거센 폭음과 함께 함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브릿지의 승무원들은 비명을 토해내며 평정을 유지하며 흔들림이 멎기를 바랬다.
적의 공격으로 인한 전함의 흔들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평정을 유지한 제독은 브릿지의 상황이 나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피해 보고하라."
"우측 보조엔진 블럭에 적 레이져 관통했습니다. 우측 보조엔진의 출력이 30%로 감소. 승무원 2명이 사망, 5명이 중상, 14명이 경상입니다."
"…아군의 다른 전함은?"
"적의 포격으로 인해 통신장비 및 탐사장비들이 패닉상태. 회복까지는 40초 정도 걸릴 예정입니다."
'…슬슬 퇴역하는 게 낫겠어.'란 중얼거림을 제독은 이마에 손을 짚고 얼굴은 잔뜩 찌푸리며 두세번 정도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그때 오퍼레이터의 보고가 들어왔다.
"통신기기 회복했습니다. 다른 전함의 피해 상황을 지휘석의 상황판으로 돌리겠습니다. "
제독과 그의 부관이자 부함장인 카를로스의 눈앞에는 전함들의 피해상황이 보고서 형식으로 떠올랐다. 기함을 제외한 다른 4척의 전함의 상태는 양호하여 전투속행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적 전함의 식별코드는 판별되었나?"
"예. 그런데 이것은……."
"왜 그러나?"
이어서 브릿지는 오퍼레이터의 경악에 찬 외침으로 공포에 물들게 되었다.
"전장 1.76킬로미터. 세인트 로드입니다! 플래쉬 나이츠입니다!"
"뭐, 뭣이?!"
브릿지의 대형 스크린에는 G.O.S의 모든 군인들이 잊을 수 없는 한척의 거대한 전함이 그 위엄을 드러내 보였다. 푸른색 일색으로 도장되어있는 선체에는 한때 우주를 종횡하며 공포의 상징으로 기억되던 붉은 드래곤dragon이 흉폭한 앞 이빨을 드러내며 언제라도 불을 뿜어낼 것처럼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단일 전함으로서는 최강을 자부하던 세인트 로드의 상징이며 동시에 일부 사람들이 '유례 없는 깡패집단'이라고 서술하기도 했던 전(前) 스케일러의 친위대 플래쉬 나이츠의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5년전, G.O.S의 창설과 함께 토벌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질문이 자리 잡았지만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플래쉬 나이츠에 대한 두려움으로 머릿속을 적시며 식은땀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