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람이 제법 쌀쌀한데 뒤뜰 나뭇가지 뒤로 꽉 찬 달이 떠올랐다.
그 훤한 자태가 샘물에 막 헹구어 낸 아이의 민 얼굴같이 맑고 투명하여
싱그러운 기운에 그만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어쩌면 저렇게 해맑고 기품 있어 보이는가!
등나무 의자가 지난 겨울 씌워 두었던 덮개를 이 여름이 다 지나도록 덮어쓰고 있다.
올여름엔 뒤 덱에 나오기가 쉽지 않았었지.
게을렀던 몸사림이 훤한 보름달 아래 민낯으로 드러나
종종거렸던 지난 여름의 생각에 홀로 나와 앉은 늦은 밤이 민망하다.
무얼 그렇게 바쁜 발걸음 이었을까.
여름내 자주 비를 뿌리는 궂은 날씨와 집 수리 건에 치여 여유롭게 시간 내기가 수월찮았다.
소심함과 적잖은 비용이 원인일 테지만,
아무래도 민첩한 순발력과 판단력이 이전 같지 않아 진작 본 공사는 시작도 못 했는데,
이곳 저곳에서 견적 받고 결정하는 일에 그만 진을 빼고 말았다.
이런 지경이니 지켜보던 아내는 더욱 힘이 들었을 것이다.
딸아이는 대수로운 일이냐는 듯했지만,
한 여름내 머리를 싸매야 했던 대수롭고 기운 빠졌던 일.
그래도 결정을 하고 나니 홀가분하다.
비용은 어떻게 마련하면 될 것이고 긴 시간 공들여 애를 썼으니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제대로 된 공사로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여름철의 깨달음은 -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긴 하지만
순발력과 판단력이 이전 같지 않으니 젊은 세대들의 기민하고 영민한 의견에 귀 기울임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현명한 처신이라는 것을 몸소 겪은 것이다.
돋보기를 추어올리며 나름 열심히 했던 일이 고작 무딘 고집스러움이고,
더욱이 염치까지 없어 보여야 하겠는가.
더구나 무더운 여름에는 큰일은 벌이지 않을 일이다.
계산대의 아가씨가 몇 번 실수를 하여 재차 지적했는데도
흘려듣는 태도가 매우 거슬려 그만 버럭 했다.
분명 노기를 띠고 목소리가 높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용한 도매상이니 직원 모두 낯이 익은데,
이 아가씨는 처음 보는 얼굴이니 신입 직원인듯한데
일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건성건성, 열심히 달려들어 해보고자 하는 티가 전혀 없어 보이고
신입 직원이면 긴장이 될 텐데 어째 영 탐탁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또 대단치 않은 일에 그만 습관처럼 염치없는 일을 저질렀다.
나이 삼십 후반쯤이었으니 90년 초쯤의 일이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에서 엔진 한쪽에 불이 붙어
일본 하네다 공항에 가까스로 비상착륙을 했었는데,
불안에 떨고 있을 가족들에게 연락하기 위하여 공중전화 앞에 승객들이 만든 긴 줄.
그 초조한 사람들 사이로 화려한 차림의 여인이 새치기를 했다.
모두 경황이 없어서인지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뒤쪽의 노신사가 지적했다.
여인은 날이 선 반응을 보이며 흥분했었지만,
노신사의 중후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나무람에 새파랗게 질린 채 긴 줄 뒤로 사라졌다.
그 얼마나 염치 있어 보이는 중후한 기품 이었던가.
내 앞으로 살아가며 저 노신사처럼 되어 보리라,
다짐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만 도매상 아가씨의 탐탁지 않은 행동에 염치 없이 무딘 고집으로 또 얼굴을 붉혔다.
얇은 옷가지가 가볍게 여겨지니 그새 계절이 바뀌는가,
습기를 머금은 후끈한 바람보다는 이렇게 조금 쌀쌀한 바람이 한결 윗길이다.
길 건너 맞은편의 집 지붕 위엔 기러기 두 마리가 등그렇게 앉았다.
새끼를 부화하고 건사한다며 한철 내내 사납게 꽥꽥거리더니
이제는 남쪽으로 떠날 채비를 마치고 부부 둘만 남아서 먼 길의 노정을 헤아리는 듯,
저렇게 초연히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내게 주어진 의무와 책무를 마다치 않은,
꽥꽥거리며 부단히 새끼들을 건사했고
이제는 때 되어 섭리대로 떠날 채비를 하는
단아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저 자태를 어찌 미물이라 할 수 있을까.
개인이나 국가나 무릇 염치와 기품이 있어야 할 일이다.
나이 듦이 연륜과 지혜가 쌓이는 것이라는 말은
염치를 헤아리고 무딘 고집을 멀리하여 단아하고 중후한 기품을 내보이는 것이다.
아파트 가격 폭등에 온갖 불법을 동원하는 개인과 손을 놓고 있는듯한 국가.
그 염치와 품격이 중후한 기품은 커녕,
작은 일에 버럭 거리기만 하는 염우염치없는 날 보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염치와 품격과 기품은 체면이라는 사사로움 이전에,
바깥쪽에서 어느 누가 함부로 넘볼 수 없게 하는,
개인과 그리고 한 나라의 자존감일 것이다.
종일 거센 바람이 불어 길거리에는 때 이른 낙엽이 뒹굴었다.
이 가을엔,
세석평전의 갈대 우거진 길을 따라,
기품 있는 자태의 변함이 없다는 지리산으로 가보고 싶다.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는
변덕스럽지만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라는
기품 있어 변함이 없다는 지리산으로.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 그 지리산으로.
(오래전 판돌이라는 닉으로 올렸던 글을 보완하였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 땅에 메이지 않는 새들은 떠날 차비를 하고
오늘은 종일,
비 뿌리고 거센 바람이 불어 길거리엔 때 이른 낙엽이 뒹굴었습니다.
계절의 바뀜은 쌀쌀한 바람과 더불어 언제나 쓸쓸하지요.
이 계절의 막바지에 은퇴를 해야 하는 사실이 못내 아쉽고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첫댓글 그 와중에도 새치기하는 여자...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마음이네요.
ㅎ
여자들이 은근히 잽싸지요
사실 저는 지리산을 한번도 못가보았습니다
지리산 등반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희망은 가지고 있답니다
노신사님 멋지십니다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보니
불쾌한 일 모욕을 느끼는 말에
자신의 품격을 유지 하면서 말한다는 게 힘든 일이지요
어떤 말로 어떤 태도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전달 하느냐가
중요 한 것 같습니다
말은 교양이고 품격이니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렇지요
말이 품격입니다.
근데, 저는 성질나면 욕을 마음껏 합니다
여기사람들은 전혀 못알아 듣지요. ㅎ
노신사 처럼 되기는 틀렸습니다
친구의 카톡에서,
'사는 게 힘든 게 아니고 재미없이 사는 게 힘든 것이다'
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그 멋쟁이 여사는 용모가 좋은 것이 아니라
재미없이 살기 때문에 힘든 것이네요.
반면, 노신사는 젊잖으나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분이 많아야 사회가 바로 서겠지요.
단풍들것네님, 감사합니다.
언젠가 제 손님중 나이 많은 분이 비슷한 말을 하데요
오래 사는것 보다
얼마나 즐거운 인생이냐가 중요하다구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저도 달을 유심히 보렵니다.
저는 달빛 보다 햇빛을 좋아 했거든요.
처음 이민 와서 달빛으로 보이는
날고 있는 비행기를 보며 고국 생각에
남 몰래 울었어요.
새를 자주 이야기 하시는
단풍님은 마음이 답답하신가 봅니다.
새 처럼 훌훌.....
오늘 저도 화가 나는데 꾹 참았아요.
연습장에서 젊은애 둘이 마스크도 안쓰고
떠들어서 말하려다 참았네요.
화가 나서 사무실 직원한테
컴플레인 했어요.
저는 왠만하면 못 본척 하거든요.
괜히 목 아프고 머리가 아픈건
기우겠죠?
화나면 화내야 합니다.
다행입니다
계절타면 보기에 좀 그래요
목 아프고 머리 아프면 검사해야 될것 같은데요
저는 자주 욕을 합니다
진상 부리는 손님들한데
여기 사람들, 어차피 알아 듣지도 못하지요
잘 보셨습니다
답답하지요, 평생을
그냥 훌훌, 오랜 바램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단어들이
주렁주렁 쓰여서
진짜로 행복합니다.
기민 영민함 기품 품위
양보 미덕
ㅎㅎ
칠십을 먹도록 아줌마 할머니가
되어도 아직은 소녀처럼 살고있거든요.
세상 어떤 변화가 있다 하여도
인간 그 기본은 단단하게 채워저서
겸손하게 살아야죠.
아침 성당가는 길에서
찍은 장미꽃입니다.
고운 시간 되세요.
고마워요
저는 아지랭이, 봉숭아, 버들 강아지, 삽작문, 동구밖
이런 토속적인 말이 이제는 좋아요
장미가 화려하네요
제 집의 장미는 오래 되어 그런지
매년 시들시들하고 잘 피질 않아요
몇송이 피었더니 벌써 졌답니다
땅이 넓은 그 곳은 집안일도 많을 것 같습니다. 특히 정원 가꾸기등.
나이가 들수록 년륜에 따라 염치 기품이 더 익어가야 할 텐데
그 반대인 경우도 많은 것 같더군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초조감,급한 마음이
앞서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곱게 늙어감도 쉬운일만은 아니니 매사 더욱
조심조심 살아야 겠지요.곱게 다가오는 가을, 즐거움 많은 계절 되시기를..
ㅎㅎ
나이들면, 제 경우에는 고집만 늘어 가는것 같습니다.
괜찮게 나이 든다는 일이 쉽지 않은것 같아요
한국 가신다니, 보람찬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판돌이 닉네임은 또 뭔가요ㅎ
디스크쟈키를 판돌이라 했는데
설마 음악다방 디제이를?
허기사 음악도 잘 아시고
좋아도 하시는듯요 ㅎ
나이가 벼슬인양
고집 아집 안면몰수
꼰대라 취급받는 세대
답이 없습니다
최백호 가수가
가을엔 떠나지 마라는데
퇴직앞두고 여러 상념에
낙엽 져 설음이 더하겠어요ㅠ
왠 디제이 ?
그기에는 발랑까진 애들이나 들락거렸는데요
젊었었을때 남들이 저 보고 범생이라고 했답니다.
판돌이는 할머니의 사랑이 담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름입니다
삶방글 (33450 - 내 이름, 판돌씨,) 아주 자세히 묘사했어요,
시간내어 꼭 읽어주세요
그렇습니다
아주 힘듭니다,
막상 접는다 결정하니 잠설치고 벌떡 일어나기도 합니다
다행히 아내는 조금 나은듯 해요
미리 올초부터 가계에 못나오게 했지요
@단풍들것네
판돌씨 재밌게 봤어요ㅎㅎ
공들인 손자 판돌씨가
어언 퇴직을 하네
사느라 애썻다~
등 토닥일 할머니가 안계시니
누가 판돌씨를 위로해주나 ㅎ
@강마을 누구기는 강마을님이 위로 해 주어야지요.
옴마 그래도 하잖은 글 읽어셨네요, Thank you !!
사람들의 탐욕이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집 한채 가지고 살면 될 것을
돈은 다 벌어서 뭐하려 그리 탐욕들을 부리고
삶이 힘든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하는지....
세월을 낚듯 고서만 사모으는 제가 때로 우스꽝스럽긴 하지만요 ㅎㅎ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습니다.
고서던 신간이던 책과 가까이 했던 삶은 복 받은 일이지요
제가 가장 부러운 일이
이제는 서서히 아끼던 책을 정리 해야겠다는 연세 드신분들의 글을 읽을 때지요
은퇴는 Retirement. 새로운 출발을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직 두서너달 남았지요
해서 마지막 아주 열씸히 힘써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