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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도 가끔 트롯트를 CD로 듣곤 한다.
물론 연식이 좀 오래된 내 차를 타고 지방을 간다든지 또 자동차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누릴 때일 것이다.
내 주위의 친구들은 ‘요즘 어떤 시대인데 아이돌그룹은 아니더라도 무슨 뽕짝이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난 그저 작은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고 대꾸하지 않는다.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울 어머니께서는 살아생전에 한 남자에게 너무 주눅 들어 사셨기에 아버지 아니 그 남자로부터 해방의 간절함을 넘어 그 한을 가슴에서 지우려고 애쓰셨지만 제대로 방귀도 못 뀌시고 천화를 이루셨다. 그 남자는 내 아버지다. 나는 아버지를 어렸을 때부터 매우 싫어했다.
싫다는 표현보다 좀 더 심한 표현을 하고 싶지만 그래도 내 아버지이고 이미 이승을 떠난 분이라 내숭을 떨기는 하지만 어린 내 아들들이 가족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 그 참석자들에게 자랑삼아 툭툭 던지는 말을 들어보면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아빠는요~ 있자나요? 세상에서 우리 할아버지를 제일로 싫어해요.” 처음 보는 누구라도 밑도 끝도 없이 던지는 내 아들들의 인사였다.
아마 아들이 유치원을 입학하기 전의 일이었고 연년생인 두 놈이 다르지 않았다. 물론 성인이 된 지금은 아니다. 내 아들에게는 할머니고 할아버지인 두 분이 지금은 아들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서 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내 아내를 만나고 아이들이 태어난 후에도 멀지 않은 동네에서 사시는 부모님을 찾아다녔다. 아버지의 못된 이기심 아니 꼴통다운 고집이 어머니로 향하는 것을 막아보려는 속셈이었다. 또 건장한 아들이 당신의 아내 편임을 과시하려는 욕심도 있었다. 주로 휴일의 저녁을 기해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육고기를 무척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식성을 살펴 메뉴는 고기가 일상이었다. 내 큰 놈이 할아버지를 닮아 고기 마니아인 것을 빌어 발가락이 닮은 것이라 여기고 씁쓸함을 숨기고 있었지만, 동네 마켓의 정육 코너를 그냥 지나치는 일은 없었다. 아들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안부 방문보다 고기를 맘대로 먹을 수 있다는 반가움이 먼저일 수도 있었다. 나의 톡 튀지 않는 일정한 패턴의 삶으로 내 감정이 아내와 아들들에게 각인된 것이었다.
내 주변의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를 가장 싫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나에게 “왜 그렇게 아버지를 미워하세요?”라고 묻는다기보다는 우스개를 떨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난 그들에게 생뚱맞은 소리를 듣고 좀 당황하기도 했지만, 애들 앞에서 물도 조심히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애비야! 이번 주말은 많이 바쁘니? 바쁘지 않으면 이 가을철에 누런 들판을 가면 좋을 텐데..”
아버지께서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한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늙어가는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가끔 조심스럽게 보내는 어머니의 살가운 눈빛이었다.
그렇게 내 어머니는 당신의 남편에 의해 자유를 위한 노래를 하시려고 노오란 들판의 벼를 그리워하셨고, 그 들판을 거닐면서 흥얼거리고 싶으셨던 것 같았다.
어머니의 삶이 구속된 삶 때문이었는지 어머니께서 흥얼거리는 소리는 아들인 나도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었고, 내 삶 속에서 익숙해진 어느 운율과 리듬을 대입하더라도 그 흥얼거림은 그냥 할머니의 독백일 뿐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아온 아들로서 나는 뭔가 어눌하게 사셨던 내 어머니의 삶에 개입하고 싶었다. 어머니의 흥얼거림을 돕고 싶은 마음으로 오디오에 따른 흘러간 가요를 어머니의 생활 속으로 밀어 넣었고, 그 일로 인해 어머니와의 인연을 조금 더 깊게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동기가 어머니 삶의 일부로 자리매김이 되었고, 뽕짝의 CD가 내 삶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기도 했다.
친척 집의 행사가 있거나 어머니를 모시고 둘이서 지방으로 여행을 갈 때, 또 가끔 어머니와 가족들이 서울 근교로 외식이나 짧은 여행을 갈 때, 그 CD는 늘 어머니와 함께 움직였고, 난 뒷좌석에서 그 노래를 들으시며 어눌한 손뼉을 치시거나 어깨를 움찔거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당신만의 방법으로 자유를 즐기신다고 여겼다. 내 아내는 이해심이 많아 소음일지도 모르는 소란에 불편함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유치원생을 넘긴 아들들은 “아빠! 무슨 이런 노래가 있어요?”라며 나를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여겼다.
언젠가 어머니와 둘만의 여행에서는 “어머니! 그러다 화장실 가는 거 잊고 오줌 지리시는 거 아녀요?” 하며 걱정스럽게 농담을 던지기도 했고, 실제로 그 흥으로 고속도로 휴게소를 그냥 지나쳐 적잖게 긴장한 때도 있었다. 아들 앞에서 오줌을 지리는 실수를 용인할 어머니의 자존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어머니와 정서적인 인연의 끈을 찾게 된 내 이야기이다. 내가 어린 시절이었으니까 오래전의 일이었다. 어머니도 지금의 내 생각보다는 젊으셨을 때라는 확신과 함께.
집안의 무슨 행사였을 거라는 기억뿐이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동네 어른들의 술자리이었다.
그때도 다름없이 술 한배가 돌면 다음이 노래로 이어졌고 아버지를 시작으로 어머니 차례가 왔는데 어머니께서 한동안 머뭇거리시더니 멋쩍게 ‘석탄 백탄 타는데~’ 라는 노래로 입을 떼셨고 노래는 끝까지 다 부르시지도 못하셨다. 가사를 잊으셨는지 아니면 부르신 부분의 가사만 아시고 나머지 가사는 모르신 건지 어머니의 음치 가까운 재능까지 더해져 함께한 모두에게 웃음을 토하게 했고 아무튼 그 상황은 그렇게 흘렀다.
그 술자리가 끝났지만, 옆에서 함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난 여린 맘에 노래 한 곡 제대로 아는 게 없는 어머니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자기 아내를 그렇게 바보로 만든 아버지가 참 못난 사람이라는 생각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나의 미움이 싹트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남들은 이미자, 김세레나, 나훈아 등 많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요즘 말하는 18번 하나 정도는 가슴 속에 넣어두고 있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내 어머니의 삶은 그것마저도 사치였던 것이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 난 어머니 입에서 엉거주춤 흘러나온 ‘석탄 백탄~’으로 시작하는 노래가 ‘사발가’라는 걸 알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 ‘사발가‘라는 노래가 내 마음에 응어리로 남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동기로 집착이라는 놈이 내 맘에 침착될 수도 있었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내가 사발가를 마음에 담은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도 대학 생활의 대열에 들어섰으니까 1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을 때였다.
명절 때인지, 어머니 생신 때인지 아무튼 또 다른 상황의 술자리가 무르익었고, 여지없이 노래를 안주로 대용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사발가 사건 때와 달리 나도 맴버의 일원이었다. 맴버는 성남 이모, 김제 이모, 어머니 그리고 나를 비롯한 손주들. 이모들의 극성으로 자리를 가까운 노래방으로 옮기려 했지만 실행하지는 못했다.
노래 순번은 성남 이모, 김제 이모, 그리고 나, 어머니...
성남 이모와 김제 이모께서는 자주 음주노래방을 드나드는 트롯트 덕후(마니아)인 듯했고,
어머니랑 나는 자주 있거나 익숙한 자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흔쾌히 즐기는 자리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성남 이모를 시작으로 김제 이모께서 노래를 부르실 때쯤, 아들인 내 차례에 대한 선곡을 고민하고 있는데, 자주 있는 자리가 아닌지라 난 선뜻 부를 노래가 떠오르질 않았다.
김제 이모의 노래가 끝날 때쯤, 신이 도왔는지 술김이었는지 반짝이듯 내 머리를 스친 노래가 오래전 내 가슴의 응어리가 된 어머니의 사발가였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쳐든 나의 객기였고 집착이었다.
난 얼른 맥주잔을 들어 살짝 목을 축이고는
“석탄 백탄 타는 데~ 연기만 펄펄 나고요~”
“이내 가슴 타는 데~ 연기도 김도 안 난다~”
“에혜요 어허야~’”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부른 사발가를 맛깔나게 불렀는지는 내가 판단할 몫이 아니었지만, 나도 어머니의 사발가처럼 다 알지 못하는 가사로 완창을 하진 못했고, 다음이 나에 이은 어머니 차례였다.
난 어머니 쪽을 흘깃 보고는 옛 기억 때문인지 살짝 걱정 반, 기대 반이었는데, 노래는 언감생심 갑자기 어머니의 헛웃음이 터졌고 벌어지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진 듯이 어머니께서 나를 허탈하게 바라보셨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때 어머니의 얼굴은 내 아들이 아니 왜 이런 노래를...하는 표정이셨고,
어머니께서도 당신의 유일한 노래가 유행에 한참 지난 노래일 뿐만 아니라 나를 비롯한 손주들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당신조차 꺼내놓기도 좀 쪽팔렸을 노래를 젊디젊은 당신의 아들이 부르고 있으니 참...
그래도 어머니의 생각에는 아들의 노래가 요즘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세련된 노래이길 바라셨을 것이다, 아들이 부른 노래가 당신이 술자리에서 어쩔 수 없어서 꺼내야 하는, 유일하게 알고 있는 노래였고 당신 맘에만 간직한 노래였으니 놀라기도, 한편으로는 어이없기도 하셨을 것이다. 아마 숨겨온 당신의 삶을 아들에게 들킨 거 같은 생각을 하셨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중의 생각이었지만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가슴에 깊이 간직한 그 노래가 어미로 인해 아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노래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기에 좀 당황하기도 하셨을 것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단 하나의 노래를 아들에게 빼앗겼으니 어머니께서 어떤 노래를 부르셨는지 아니면 그냥 그것으로 마무리가 됐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난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아주 따뜻한 눈빛을 받았고, 어미와 새끼라는 자궁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 이후로 사발가를 다시는 부르지 않으셨다. 좀 세련되고 요즘 유행하는 뽕짝으로 레파토리를 바꾸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 천화를 이루시기 얼마 전.
어머니랑 한집에서 살게 되었고, 어머니께서는 사는 곳이 아파트인지 어딘지 생각하지 않고 이미자, 주현미, 조미미 등 뽕짝 가수들의 목을 아프게 하셨다. 층간소음을 걱정할 정도였지만 우리 가족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항상 어머니께서는 친척의 행사가 생겨 지방을 가실 량이면 그들의 노래와 노오란 벼를 이미지화시켜 당신만의 자유를 탐미하며 당신의 미련한 세월을 돌아보지 않으셨을까를 나는 생각해보았다.
나도 어머니 덕에 그 노래들이 정서적으로 가까워졌고, 흘러간 가요의 가사에 따른 애틋한 삶의 의미를 맘에 담게 되었다.
요즘도 가끔 퇴근길 자동차 안에는 그 CD가 요동을 치곤 한다. 하늘나라의 어머니께서 나를 보고 계신 거 같지도 않은데, 아니, 아니 내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하늘나라에서 아들을 내려다보고 계신 지도 모르겠지만.
난 지금껏 살면서 사람을 간절하게 그리워한 적이 없었지만, 동장군이 설쳐대는 요즘도 추위 걱정은 붙들어 매고 그 노래를 듣고 있다.
어머니가 그리운 건가? 눈물도 찔끔. 나도 어머니의 감성이 DNA로 전달된 별수 없는 어머니의 자식인가 보다.
어머니가 생각날 때면, 가끔 사발가를 듣는다. 사발가는 김옥엽 명창의 목소리다.
김옥엽 명창은 권번 소속이다. 기생이란 뜻이고 좋은 표현은 해어화라고 한다. 말을 알아듣는 꽃.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기생이었고, 소설가 김동인과 열애를 하기도 했다.
하룻밤 화대가 쌀 300가마니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내 어머니의 삶과 너무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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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운 글 머물다가 갑니다
잘보고갑니다
효성이 참으로 지극하십니다
오랜만에 이 방에 들렀더니 구수하고 감명깊은 옛이야기 한 자락을 접합니다
감사합니다, 추천 꾸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