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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엘 재상은 라미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놓고 그것이 막막하게 여겨졌다. '천사'를 언급하는 그의 허무맹랑한 말을 일단은 믿는 척 해주어야 할지, 아니면 그를 그저 미치광이로 여겨야 할지 고심한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그럴듯하게 받아주기가 어려웠다. 그렇기에 재상은 남은 선택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믿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답을 피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 네가 믿든 말든 관심 없다."
재상은 자신이 믿던 말던 관심 없다는 그의 태도에 더욱더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더욱더 골치가 아파왔다. 그렇기에 일단은 좀 더 살피고자 재상은 자신의 주홍빛 눈동자를 맞은 편에 앉아있는 라미엘의 푸른 눈동자에 맞추었다.
사람이 입에 거짓을 담기는 쉽지만 눈에까지 거짓을 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들여다본 것이지만, 무슨 일이냐는 듯 재상을 마주 보는 그의 꽁꽁 얼어붙기라도 한 듯한 푸른 눈동자 속에는 '귀찮다.'라는 것 외에 그 어떠한 것도 담겨 있지를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어...'
하늘에서 내려다보기라도 한 양, 재상과 여왕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들여다보았던 그가 주장하는 '천사'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불가능'
모습을 숨기는 마술이라도 부리며 따라다니기라도 하지 않았던 한은 그의 말을 반박할 만한 다른 것들이 재상에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뭐, 마술이라는 것도 허무맹랑하기는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증거는 있습니까? 예를 들면, 제게 그 '천사'를 소개해 주시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재상은 한쪽 손바닥을 내밀어 물건을 달라는 듯한 손짓을 보이며 말했다. 백문이불어일견, 차라리 직접 보는 쪽이 빠를 것이다. 정말로 사람이 등에 날개가 달리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믿어줄 용의가 있겠지만, 라미엘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깨부쉈다.
"증거는 없다."
"후우..."
당당하게 증거가 없다고 발뺌을 하는 라미엘의 태도에 재상은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더니 인제 와서 증거가 없다니...
이런 부류의 사람을 재상은 드레마에서 재상의 업무를 보던 중에도 많이 보아왔다. 왕궁에 당당히 알현을 청해와서는 말로는 못 하는 것도 없고 할 수 없는 것도 없는 양 실컷 떠들어대다가, 막상 구체적인 것을 물어보거나 직접 시켜보면은 금세 꼬리를 움츠리고 딴소리만을 늘어놓거나 야반도주를 하는 작자들... 라미엘도 이런 부류 중 한 명인가...
'아니야...'
재상은 조금 전의 생각을 철회했다. 눈앞의 푸른 장발에 흰 옷 차림의 라미엘... 그는 그의 모습처럼 푸르게 만치 솔직하고, 하얗게 만치 직설적으로 보였다. 그는 말을 잘 못하고 사교성이 떨어져서 그렇지...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자신하는 재상에게 그는 적어도 헛소리나 늘어놓는 작자는 아닌 것처럼 보였고, 누군가를 속이려 들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속고 말 것 같다는 특이한 인생관을 가진 이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해오는 애매한 말을 믿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라미엘이라는 사람 자체까지 신용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즉, 당신의 말씀을 정리해보자면, 당신이 수족으로 부리는 '천사'가 저희의 모든 동향을 보고 들어 당신께 알려준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들은 내 수족도, 부하도 아니다."
재상의 말꼬리를 잡는 라미엘의 두 눈 속에 무언가 분노 비스무리한 것이 아주 잠깐 드러났으나, 곧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불꽃 마냥 금세 사그라졌다. 이것을 놓치지 않고 눈치챈 재상은 평소의 냉랭한 그와는 다르게 처음으로 격렬한 감정을 일순이나마 드러내는 모습에 적지않게 당황했다.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법한 사람이 아님에도 이렇게까지 격한 감정이 튀어오를 정도면은... 그 '수족' 이라는 단어가 그의 무언가, 그의 심경을 거슬리게 했으리라. 그의 무엇을 건드린 것인지를... 그것까지는 알 수 있다면 이 남자에 대해 더 알 수 있겠건만 전날 밤의 전투로 인한 피로가 누적된 재상에게 그것까지를 짚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은... 당신의 말을 전부 믿기가 어렵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너 자유다."
재상은 솔직하게 꺼낸 말이지만 라미엘은 아까와 비슷한 대답으로 대꾸해왔다. 더 이상은 대답해 주기는 싫은 걸까? 재상의 시선을 무시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그의 태도에 재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일단은 여기까지인가."
너무 물고 늘어지다 보면 그의 불만을 사고, 신용을 잃게 될 수도 있을 것 같기에 재상은 일단 이 정도로 묻는 것을 멈추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묻는 것' 만 멈추는 것이지 그에 대한 '심문'까지는 아직 포기한 게 아니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재상은 눈을 감고 있는 라미엘에게 다른 방향으로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는 정면공략이 아닌 외통수. 계속해서 물어오는 것을 불쾌하게 여긴다면, 이번에는 그가 먼저 말을 꺼내도록 유도하리라.
재상의 말에 라미엘은 여전히 침묵한 채로 눈을 감고 있다가 곧, 눈을 떴다. 눈 속에는 여전히 차가움만이 담겨 있었지만 그가 꺼내온 말만큼은 의외였다.
"전의 말을 철회하고자 한다."
"무슨 말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재상은 그가 갑작스럽게 꺼내온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했지만, 항상 예상 밖의 말을 해오는 그의 말버릇에 재상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그런 재상에게 해온 라미엘의 말은 그의 마음속에서 차곡차곡 묻혀져가던 했던 치부를 끄집어냈다.
"너는 저 아이를 훌륭하게 지켜냈다."
"칭찬이십니까? 아니면 조롱하시는 겁니까?"
"칭찬이다."
아까와 말하는 이와 받는 이가 바뀐 것은 느낌은 그렇다 치고... 재상은 그의 말에 수면 속 아래로 잠기었던 괴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전의 불타는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리프 공작과 함께 어린 여왕을 지키려 했던 자신, 그렇지만... 결국, 지켜내지 못할 위기가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도 자신은 무력했고, 무능했다.
결국은 이 남자에게 도움을 받아 그녀를 지켜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재상은 그녀를 그런 위험한 사지에 몰고 간 자신의 책임, 그곳에서 그녀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한 책임, 그리고... 그녀를 잃을 뻔한 책임으로 재상은 마음속이 갈가리 찢기는 것만치 괴로웠다.
그렇기에 지금껏 그녀에게 웃는 얼굴로 위장하며 그런 책임을 은근슬쩍 넘어가려 한 자신을 이 남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런 말을 해오는 것일까? 라미엘은 점차 어두워져 가는 재상의 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믿지 않는 건가..."
"..."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차라리 아까 말한 '천사'가 있다는 말을 믿는 게 백번 낫다는 얼토당토치도 않은 헛생각마저 드는 재상이었지만, 라미엘은 그에게 결정적인 말을 던졌다.
"증거라면 있다."
"증거 말씀이십니까...?"
라미엘의 말에 물어오는 재상의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에서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외쳐왔다. 그저 위로하고자 해오는 말일 것이라는 생각만이 재상의 머릿속을 움켜쥐려 들었다. 그가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증거라면은 이미 충분히 널려 있다. 수십의 호위를 자처한 사람들과 귀한 분이신 로자리오 성자를 잃었다. 재상 자신과 리프 공작 역시 적지 않는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어린 여왕의 얼굴에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남았다. 그런데... 이를 부정할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과연 있을까?
그렇기에 무의식적으로 뱉어낸 말이지만, 라미엘은 그 말을 듣자마자 먼저 마차 밖으로 뛰쳐 내려갔다. 그리고는 재상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따라오라는 듯한 분위기에 재상은 내키지 않는 마음 반, 그래도 혹시나 하늘과 땅이 뒤집힐 만큼의 희박한 가능성을 기대하는 마음 반을 품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디자엘 재상이 내린 것을 보자, 라미엘은 자신의 옷차림을 추슬렀다. 앉아있느라 엉켰던 푸른 머리칼을 풀고, 코트의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어깨에 걸친 판초의 뒤집한 부분을 바로잡았다. 그리고나서야 재상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짤막하게 말했다.
“증거를 보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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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을 외치고는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눈앞의 어린 소녀아이의 모습에 카린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뒤늦게 깨닫고서 어깨를 강하게 쥐던 두 손을 놔주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눈물을 그칠 생각이 없는지 오만상을 있는 데로 찌푸리며 크게 울기 시작했다.
"저기, 꼬마야..."
"우아앙..."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우는 아이의 모습에 카린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갔고, 머리는 팽글팽글 돌아 어디로 눈을 둬야 할지 알 수 없는 카린에게있어 살면서 지금껏 자신의 탓으로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본 적조차 없었다. 당연히, 달래 본 적도 없었던 그녀이기에 손을 댈 수도 없고, 안댈 수도 없고... 가시로 몸을 돌돌 말은 고슴도치를 만져보고자 하는 모양새처럼 카린은 손만을 댈 듯, 말 듯만을 반복하며 [인연]에게 손을 대는 것을 주저했다.
"애를 울리면 어쩌자는 거냐?"
카린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에 시선을 올렸다. '혹시나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기대하며 고개를 든 것이지만, 자신을 언제나와 같이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는 라미엘의 얼굴은 '네가 알아서 수습해라’ 라는 듯한 말을 금방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 그게..."
카린은 차마 말로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도움을 바라는 눈빛에 자신의 탓이라는 죄책감이 담긴 눈빛을 더해 그에게 호소해보았다.
"으앙... 라르님."
한창 혼자서 울기만 하던 [인연]은 자신의 뒤편에 라미엘이 오자, 아빠에게 매달리는 아이 마냥 몸을 돌려 그 흰 옷에 매달려안겼다. 그녀의 키가 작은 탓에 그의 허리가 아닌 다리에 매달린 꼴이지만... 어찌됐든 그 아이는 눈물범벅, 콧물범벅인 얼굴을 라미엘의 깨끗한 흰 옷자락에 마구 비비며 더욱더 크게 울어댔다.
'라르님이라는게 라미엘이었어?"
카린은 '라르님', '라르님’ 할 때에 어감이 어디서 들어보기도 했던 것 같던 게 라미엘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게... 뒤통수에 망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뭐... 믿을 수 있는 사람... 이란 건가...'
'아이가 믿고 따라다닐 사람이면,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라는 기분을 담은 카린의 시선은 [인연]을 달래는 라미엘의 푸른 눈동자에 자신도 모르게 고정되어갔다.
"울지마라... [인연]"
라미엘은 손을 들어 [인연]의 갈색 단발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마다, 그 아이의 헤어밴드는 점점 이마 쪽으로 쓸려 내려왔지만, 효과는 있었는지 인연의 울음소리는 점차 사그러들어갔다.
'내가 매달렸을 때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전의 이베이드의 수도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에, 카린 자신도 울면서 저 남자의 품에 매달렸었다. 그때는 그저 정신없이 울었던 것뿐인데, 왠지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저렇게 매달려 우는 모습을 보자니, 그때의 자신이 저 아이랑 동급으로 아이 취급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점차 창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아이를 울리신 겁니까?"
라미엘의 문 뒤편으로 디자엘 재상이 빙긋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우는 아이에게만 정신이 팔려 뒤에서 빙긋 웃은 채로 쭈욱 지켜보던 재상을 눈치채지 못한 카린에게 걸어온 그의 말 속에는 질문 반, 장난 반이 담겨있었지만... 안 그래도 창피해 죽을 것 같은 카린에게는 얼굴에 직격으로 날라온 주먹이였다.
'난 끝났어...'
백번 장담해... 왕궁에 돌아가면 소문 쫙 퍼진다. 재상이 분명히 그 원흉이다. 카린은 왕궁에 돌아간 뒤에 두고두고 놀림당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 창피했고, 아이를 울린 것 역시 창피했기에 재상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반면, [인연]은 카린에게 울음을 팔고, 웃음을 사기라도 한 양, 한창 울어 재끼던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은 채로 라미엘의 어깨 위에서 목말을 타면서 놀고 있었다. 고사리같이 작은 두 손으로 라미엘의 푸른 장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프리만치 한움큼 움켜쥐고는 그의 어깨 위에 앉아 폴짝폴짝 위험스럽게 뛰노는 것이 카린에게는 그가 자신이 저지른 일의 뒷감당을 치르는 것이 여간 가볍지 않아 보였다.
"아... 저기 저 때문에 죄송해요."
흰 옷자락은 눈물 콧물로 지저분하게 범벅이 되어버리고, 그의 아름다운 푸른 머리카락이 금방이라도 뽑혀버리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억세게 잡아당겨 지는 것이 여간 고생스럽지 않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미안해진 카린은 말로나마나 자신의 미안함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관심 없다."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자와 함께 훗날 갚아주겠다는 것인지 애매한 대답을 한 라미엘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인연]을 목말을 태운 채 복도를 앞서 걸어나갔다.
"원래 저런 분이니, 신경 쓰실 것은 없습니다."
재상은 카린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손을 들어 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러운 위로의 말을 하였다. 그렇지만, 카린의 눈에 재상의 미소는 '좋은 놀림거리가 생겼다.'라는 장난스러운 미소처럼 보였고,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는 것이 아까, [인연]을 쓰다듬어주는 모습과 겹쳐지는 것이 여간 속이 상하는 게 아니었다.
'재상에게 나는 그저 코흘래기 아이 정도인가...'
카린은 속으로 밀려오는 또 다른 생각에 마음속은 이유모르게 무거워졌다. 그렇게 솔직하리만치 어두워져 가는 표정을 지어가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재상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싱긋 웃으며 말을 계속하였다.
"드레마로 돌아가면 나가면, 제가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정말?"
카린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의 무거움 따위는 어느새 잊어버린 채, 카린의 머릿속에는 다소 어둡지만 근사한 촛대로 은은하게 불을 밝히어진, 조용하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기품이 넘치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역시나 근사하게 차려입은 미남 재상과 잔을 부딪치며 가지게 될 시간을 떠올리자, 카린의 얼굴에는 그 기쁨이 여실히 드러났다.
입가에 침이 고이다 못해 흘러내리고, 시선을 재상의 얼굴을 지나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솔직하다 못해 바보스러웠지만, 그런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그 어린 아이랑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만큼 카린은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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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건 어둠뿐인가... 거기에 너무나도 어지럽다. 바보같이... 눈을 감고 있으니 그렇지... 하지만, 감고 있던 눈을 떠보아도 어지러운 건 여전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현실을 직시해야... 우선은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그래 천장이다. 갈색 빛을 띠는 귀한 재질의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이라... 건물을 나무로 짓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렇게 깨끗하고 흠 하나 없는 걸 보자면... 나는 상당히 귀한 손님 대접을 받고 있나 보다.'
'몸이 조금 더운 것 같은 게... 이불 때문인가? 우선 이불을 걷어내자. 팔이 생각만큼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게... 너무나도 힘들다. 한 팔십 먹은 노인네가 된 기분이랄까? 온몸으로 붕대로 감아놓은 걸 보자니 노인이 아니라 송장 같지만... 나, 이러고도 살아있는 걸 보면, 운 하나는 억세게 좋은 걸까? 아냐.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다친 걸 보면 운 하나는 억세게 나쁜 걸 수도...'
'다행히도 아프지는 않다. 통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죽기 직전까지 부상을 입고도 이렇게 견딜만한 걸 보면, 의원의 솜씨가 꽤나 좋은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근성이 좋거나... 하긴 내가 여자의 몸으로도 악 하나로 여지껏 버텨왔는데...'
'그나저나, 지금은 안전한 걸까? 분명히 죽을 것만치 아픈 채로 말을 타고, 살도르 도시 성문의 코앞까지 간 건 기억나는데... 그 이후는 기절한 건지 기억이 없다. 그래도 이렇게 귀한 대접 받고, 치료까지 받은 걸 보면... 그 허약해 빠진 재상 녀석이 어찌어찌 잘 처리한 모양이다. 아니, 그 녀석 말고 하나 더 있잖아... 그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흑기사 녀석...!'
리프 공작은 그 재수 없는 흑기사 녀석이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몸을 번쩍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팔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고생스러웠던 몸뚱아리는 잊었는지, 화살을 쏘아보낸 활시위처럼 반응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그때 그 흑기사에게 입었던 굴욕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죽다 살아난 환자의 몸으로 이렇게 무리했으니, 그 후폭풍도 역시나 가볍지는 않았다.
"꾸웩..."
돼지 멱 따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며, 공작은 앞으로 자연스레 구부러지는 몸으로 옆구리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억누르고자 애썼다. 그렇지만, 무리한 몸은 그녀에게 휴가를 달라고 시위라도 하는 양, 계속해서 항의해오는 게 여간 견디기 힘들지 않은지라... 어쩔 수 없이, 백기를 들고 휴가 요청을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죽겠네... 죽겠어..."
리프 공작은 침대에 도로 누우며 중얼거렸다. 사람이 잠을 잘 때 눕는 이유가 그 자세가 제일 편해서랬나? 이렇게 누워 있으니 옆구리의 고통이 점차 약해지는 게 그 말에는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음? 그나저나 재상 녀석... 너무 무신경한데?"
물론, 자신보다 여왕이 우선일 것은 알겠지만, 이렇게 중환자를 간병인 하나 없이 내버려 둔 그의 조치에 차츰차츰 불만이 밀려오는 그녀였다.
"하다못해 먹을거리라도 좀 놓고 방치하던가..."
공작은 죽다 살아난 몸뚱이인 주제에 밥을 내놓으라고 이차로 항의해오는 뱃속에 중얼거렸다. 그렇기에 뭔가 먹을만한 거리라도 찾아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리던 공작의 눈에, 빈 의자와 옆의 작은 테이블 위로 누군가가 먹다 남은 듯한 과자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처먹다 남긴거야? 배고파 죽겠는데..."
'이렇게 고생했는데 따뜻한 수프와 부드러운 빵을 원하는게 과연 사치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개고생을 한 자신에게 떨어진 보상이라는 게 겨우 과자부스러기(그것도 먹다 남은 거) 라니... 댓가없는 충성을 해오며 살아온 그녀이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너무나 아쉬웠다.
"이거라도 먹어야 살지... 언제부터 내가 음식 가리고 살았다고..."
배가 고파 흙마저 퍼먹어본 적이 있었던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자,공작은 중얼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에서는 중단된 휴가에 항의하며 다시 시위를 벌여왔지만, 이번에는 그 항의를 깡그리 무시하며 그녀는 침대에서 나와 두 발로 서보고자 하였다.
'더럽게 어지럽네...'
이렇게까지 어지러운 게 무리해서 인지, 배고파서인지, 아니면 아파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그녀의 인생관 제1조 제1항의 항목을 읊푸리며 손을 뻗어 과자 부스러기 중 그나마 큼직한 것을 하나 집어들었다.
"공작까지 달았는데도 하늘의 천사님들께서는 어지간히도 내가 미우신 모양이네..."
공작은 과자 한 쪽 귀퉁이이게 큼직하게 남은 이빨 자국을 보며 중얼거렸다. 흔적으로 짐작컨데... 이 과자를 먹다 남긴 이는 대충 성인 남성 정도로 추측되었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하필이면 가장 먼저 집은 게 이따위라니... '내가 재수 하나는 더럽게 없어요.' 라고 한심스레 중얼거린 그녀는 짜증을 식욕으로 해결하고자 그 과자의 귀퉁이를 입에 넣고서 크게 깨물었다. 그 순간, 이를 기다렸다는듯이 문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진짜로 싫은 모양이군, 천사님들께서는..."
공작은 작은 목소리로 하늘의 누군가에게 항의하듯 중얼거렸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하필이면 막 허기를 때우려는 참에 인기척이라니... 이렇게 자신에 대한 치료가 잘 되어 있는 것을 보자면 여기는 안전한 곳이겠지만, 그렇다고 항상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었다.
'우선 무기로 쓸만한 것이라도...'
공작은 입 안의 과자를 급히 씹어 삼키고는 좌우로 시선을 돌려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찾으려 했다. 허나, 보이는 거라곤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침대뿐이었고, 입고 있는 거라고는 환자용 흰 옷 한 벌 뿐인 자신에게 무장한 적을 상대로 저항할 방법은 보이질 않았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초조함을 부채질하는 것이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져 오는 게, 시간도 촉박해지자 공작은 일단 의식을 잃은 척이라도 하고자 침대에 최대한 조용히 누웠다. 손에는 먹다 남은 과자를 무기 대신 쥐고서 말이다.
'들어온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눈을 가늘게 떠서는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일 적이라면은 무기도, 갑옷도 없고 몸조차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자신에게 남은 기회는 기습뿐... 공작은 열린 문틈으로 조용히 들어오는 자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저자는!'
공작은 흰 옷자락이 보이자 그것만을 보고도 누구인지를 금세 깨달았다. 최대한 눈을 감은 척하고 있는지라 시야가 어두워 명확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만큼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눈에 보이는 자가 누구인지 그녀는 결코 잊었을 리도 없었다.
'잘 만났다. 개자식...'
전의 불 속에서 자신들을 구해주었다는 기억은, 전의 비 내리는 밤에 당했던 굴욕적인 기억에 밀려 가려져 버리고 공작의 마음속에는 복수심만이 자리 잡아갔다.
'기회는 단 한 번...'
왠지 자신의 현 처지가... 전의 비 내리는 밤의 자신과 비슷한 게 데자뷰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이자까지 쳐서 갚아주면 되리라... 더군다나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갑옷을 입지 않았으니 자신 쪽에도 승산이 있다, 라는 생각을 하며 공작은 손에 감추어 쥐고 있던 과자가 으스러지도록 세게 움켜쥐었다.
그자의 평범한 발걸음 소리가 공작의 귀에는 전야의 종소리보다 더욱 느리게 느껴졌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자의 흰 옷이 점차 가까워져 오는 게 몇 발짝 안 남아 보였다... 앞으로 세 걸음만...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지금!
"이 나쁜자식아!"
공작은 적당한 거리까지 그자가 다가오자 주먹을 강하게 쥐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번쩍 일으켜 그자를 덮쳤다. 아니 덮치려다가 그녀는 뭔가에 몸이 걸리기라도 한 양, 급히 멈추었다. 바로 코앞에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공작의 귀에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꺄악!"
'꺄악?'
그 차가운 눈빛을 가진 남자가 이렇게 계집애 같은 비명을 지르자 왠지 허무감이 드는 게, 공작의 몸에서는 힘이 쑤욱 빠져나갔다. 아니, 그 전에 계집애 목소리...?
공작은 조금도 놀란 표정이 없는 그 남자의 차가운 얼굴 위에 목말을 탄 것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 쪽으로 시선이 올라갔다. 노란 구두에 노란 원피스... 거기에 놀란 듯이 작은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갈색 단발머리의 소녀...? 공작은 속에서 올라오는 솔직한 감정을 소리로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이딴 조합은!"
ps. - 위의 내용은 픽션이며 전체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등 모든것은 현실의 정치,종교,지역,인물, 기타 등 모든 것과 절대 연관이 없으며 숨겨진 뜻 같은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