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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의사이자 선교사였던 로제타 셔우드 홀. 1890년 조선에 올 무렵의 사진이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5세였다. |
얼마 전 주한 미국 대사관과 여성가족부가 주최한 미 부통령 부인 질 바이든(Jill Biden) 박사의 환영 리셉션에 참석한 일이 있다. 이날 바이든 박사는 연설에서 “미국 여성들과 한국 여성들의 우정의 역사는 60년”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박사가 연설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올 때 필자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씀 중에 미국과 한국 여성 우정의 역사가 60년이라고 하셨는데 사실은 130년입니다. 우리나라의 여성교육은 미국의 감리교 여성 선교사들이 시작했습니다. 그녀들이 학교를 세워 여성 교육을 시작했고 병원을 세워 여성들을 치료했습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이라는 분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125년 전에 와서 병원을 세웠고 여성들을 위한 의학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洋醫)는 이분이 키운 여성이었습니다.”
로제타 홀의 업적
곧이어 필자가 최근 출간한 로제타 홀 여사의 평전을 건네자 그녀는 “이런 분이 정말 있었느냐”며 놀라워했다. 미국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도 첫 양의가 여성이었고, 그녀를 키운 이가 로제타 셔우드 홀이라는 의사(醫師) 선교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게다가 그녀가 이화대학 부속병원과 고려대 의과대학의 최초 설립자였으며 한국어 점자(點字)를 최초로 개발했고 특수교육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가 로제타 셔우드 홀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10년 전쯤 박에스더에 대한 자료를 찾으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여성 전문인들의 이야기를 어린이 책으로 출판하고 있을 때였다. 초등학생 딸 둘을 키우면서 여느 엄마와 다름없이 내 딸들이 당당한 전문인으로 자라나길 원하면서 아이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려는 의도였다.
필자가 찾았던 최초의 여성 전문인 박에스더, 최은희, 이태영의 어린 시절에는 미국 감리교 여성 선교사들과의 만남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박에스더는 로제타 셔우드 홀의 도움으로 미국의 의과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박에스더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였다. 최은희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고 있던 중에 감리교 선교사이자 여학교 교장이었던 거튜르드 스네블리의 도움으로 해주의정여학교에 진학했다. 그녀는 후에 《조선일보》에 입사해 최초의 여기자가 됐다.
이태영은 첫돌을 맞을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열두 살 위의 큰오빠를 아버지처럼 믿고 자랐다. 이태영의 큰오빠 이태윤은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영변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여성 선교사 룰루 밀러와 에설 에스티의 비서로 일했다. 이태영은 여성 선교사들의 독립적인 삶을 동경하며 성장, 우리나라 여성 변호사 1호가 됐다.
감리교 여성 선교사들 중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하는 이는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플레처 스크랜턴이다. 이분에 대해서는 꽤 많이 연구됐고 책도 나와 있다. 다음으로 꼭 기억해야 할 분이 로제타 셔우드 홀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25살 처녀 의사 로제타 셔우드가 조선 땅을 밟은 것은 1890년 10월이었다. 메리 스크랜턴이 남자 의사들에게 몸을 보일 수 없었던 조선 여성들을 위해 세운 보구여관(保救女館)의 두 번째 의사로 파견된 것이었다.
로제타가 쓴 125년 전 두루마리 편지 발견
1890년 로제타가 미국 고향집에 보낸 두루마리 편지. |
2012년 가을, 필자는 미국 필라델피아 근처 퀘이커 영성센터 ‘펜들 힐’에 머물 기회를 얻었다. 펜들 힐은 함석헌 선생이 머문 이후로 관심 있는 한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필자가 관심을 가져 온 여성인물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한 분이었던 수전 앤서니가 퀘이커 신자(信者)였기 때문에 나는 퀘이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로제타 셔우드 홀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로제타 또한 퀘이커와 인연이 있었다. 그녀가 다녔던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은 1850년 퀘이커들이 세운 세계 최초의 여자의과대학이었다. 1765년 펜실베이니아대학(U Penn)이 의대를 설립한 후 100여 년 동안 미국 내 의대에서는 여성들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남녀노소 누구나 하나님의 빛을 나누어 가졌기에 평등하다고 믿는 개신교의 한 분파인 퀘이커들은 노예해방운동과 여성참정권운동을 처음 시작한 그룹이기도 하다.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의 설립을 적극 지원한 이들 중에는 루크레시아 모트가 있다. 그녀는 남성들과 동등하게 여성들의 정치참여를 천명하고 참정권운동을 처음 시작한 세네카 폴즈회의의 개최자이기도 했다.
로제타가 다녔던 의대의 문서보관소는 펜들 힐과 지척(咫尺)에 있었다. 또 그녀를 조선에 파견했던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문서보관소는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수소문해 찾은 로제타의 손녀 필리스 홀 킹 또한 두 시간 거리인 버지니아 매클린에 살고 있었다. 1934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필리스는 로제타 여사가 쓴 어린 시절의 일기부터 선교 초기의 일기 4권, 두 아이를 위한 육아일기 2권 그리고 여러 사진과 편지 등을 보관하고 있었다.
펜으로 잉크를 찍어 가며 정성스럽게 기록한 그녀의 일기를 보는 순간, 가슴이 벅차 올랐다. 조선까지 거의 두 달이 걸린 여정과 조선에서의 첫 3개월을 기록한 길이 31m, 너비 15.2cm의 ‘지는 해를 향하여(Toward the Setting Sun)’라는 제목의 두루마리 편지를 보며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이 절로 흘렀다. 조선으로 오는 도중 젊은 로제타가 쓴 글과 그림, 사진 등을 보며 그 자체로 한 권의 기행문이자 로제타의 성품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9세기 필기체로 적은 그녀의 일기는 해독하기 쉽지 않았다. 노안(老眼)으로 필자는 안구통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어렵게 글을 읽어 갈수록 그 기쁨은 더욱 컸다. 한국인 최초로 로제타의 일기를 읽는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이었다.
로제타의 손녀 필리스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일기를 빌려 달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몇 번을 방문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일기를 빌려줄 수 있느냐고 여쭤보았다. 필리스와 그녀의 남편 에드워드 킹은 기꺼이 빌려주겠다고 했다.
노예해방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로제타의 아버지
로제타는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았던 흑인 조슈아 윌슨을 ‘조(Joe)’라 부르며 그를 잘 따랐다. 로제타의 아버지 로즈벨트 셔우드는 흑인 노예해방에도 적극 관여했다. |
한마디로 그녀는 거룩했다. 그녀는 신앙이 한 인간을 얼마만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그 신앙의 바탕에는 신실한 부모가 있었다. 로제타는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인 1865년 9월 19일, 뉴욕주(州) 리버티에서 부유한 농장주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즈벨트 셔우드는 누구나 인정하는 언행일치의 표본이었다.
로제타의 아버지 로즈벨트는 1882년, 음주(飮酒)절제운동 차원으로 교회가 지방선거에 참여하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후 리버티에서 살롱을 추방하는 데 앞장섰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 열렬히 참여했을 정도로 노예해방운동에도 적극 관여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18세기 말부터 남북전쟁으로 노예가 완전히 해방되기 직전까지 운영되던 비밀지하조직이었다. 퀘이커들이 시작한 이 조직은 양심적인 감리교도와 장로교도가 합세하면서 19세기 초에 이르러 전국 조직으로 발전했다. 로즈벨트는 자신의 농장을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거점으로 제공했다.
로제타가 태어나기 15년 전인 1850년부터 리버티의 농장에는 ‘조’라고 불리는, 조슈아 윌슨이라는 노예 출신 흑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통해 탈출, 캐나다로 가는 도중 리버티 농장에 들렀다가 로즈벨트와 마음이 맞아 함께 살았던 것이다.
로제타의 일기를 보면 그녀는 조와 특별히 친밀했다. 로제타가 조선에 있는 동안 문맹(文盲)이었던 조는 매번 ‘리버티 리지스터’라는 지역신문을 편지 대신 보냈다. 로제타는 자신의 방에 조의 사진을 걸어 두었다. 일기 속에 아버지보다 더 자주 ‘조’를 등장시킬 정도로 그의 안부를 걱정했다. 로제타는 이렇게 약자(弱者)에 대한 진정한 보살핌과 사랑을 보면서 자라났고, 이는 조선의 긍척(兢惕)한 여성들에 대한 섬김으로 이어졌다.
로제타 여사의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 그는 1894년 청일전쟁 직후 평양으로 돌아갔다가 그 지역에 퍼진 발진티푸스에 걸려 그해 11월 사망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
어머니 피비 길더슬리브 또한 여느 19세기 여성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스무 살 딸이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적극 찬성했다. 한양에 와서 근무하던 로제타가 1년 후 자신을 뒤따라 들어온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는 선교회와의 계약을 완수하라며 결혼을 반대했을 정도였다. 19세기의 일반적인 어머니였다면 딸이 이방인의 나라로 선교하러 가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을 것이며, 번듯한 의사 남편을 만나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적극 찬성했을 것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딸의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지지하고 지원했으며, 사사로운 것보다 대의(大義)를 앞세울 것을 가르쳤다.
로제타는 열여섯 살 생일의 일기에서 “내가 오래 살게 되어 오십이나 육십의 심술궂은 노처녀가 되어도 이 기록으로 꽃다운 열여섯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며 몇 년 동안 쓰지 않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일기는 정확하게 열여섯 생일에 시작해 열일곱 생일에 끝이 날 정도로 어려서부터 뭔가를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하면 실행하고야 마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이였다.
열여섯 생일에 이미 결정했듯이 그녀는 전형적인 신(新)여성이 되고자 했다. 19세기 말 미국 여성들은 결혼하면 어머니로서, 전업주부로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학 교육을 받고 전문직을 가진 이들은 결혼을 안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당시 미국 사회는 이들을 ‘신여성(New Woman)’이라 불렀다.
열아홉 살 처녀 교사 로제타는 어느 주일에 인도에서 일하던 여성 선교사의 강연을 들었다. 그녀는 심한 여성차별로 여성들이 남자 의사들의 진료를 받을 수 없는 인도의 현실을 말하며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로제타는 즉각 의료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남편 윌리엄과의 만남
로제타 가족과 박에스더 부부가 1895년 9월 뉴욕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박에스더는 로제타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의대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는 여성이었다. |
로제타가 진학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은 해외 의료선교사들의 메카였다. 그녀가 입학할 당시 해외선교가 봇물을 이루던 시기였다. 해외선교가 정점이었던 1915년에는 각 교파 여성해외선교회의 회원은 300만명이 넘었다. 당시 미국 인구는 1억50만명이었다. 교인들의 후원으로 급여를 받고 생활했던 여성 해외 선교사들은 외국에서 학교를 짓고, 해당 지역 여성들을 가르쳤으며, 아픈 육신을 치유하기 위해 병원도 지었다.
로제타가 펜실베이니아 여자의대에 입학하기 전해에, 인도인 첫 여의사와 시리아인 첫 여의사가 졸업했다. 로제타가 의대를 졸업할 때는 일본인 첫 여의사와 아메리칸 인디언 첫 여의사도 함께 졸업했다. 로제타는 20대 초반 이곳에서 분출하는 여성들의 에너지를 호흡하고 체화했다. 크리스천 여성 해외 의료선교사라는 말은 이 시절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조합이었다.
1889년 3월 대학을 졸업한 후 로제타는 뉴욕에서 인턴을 거쳐 빈민가의 무료진료소에서 봉사했다. 이 무렵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 지원서를 접수했다. 나중에 남편이 된 윌리엄 제임스 홀도 이때 만났다. 윌리엄은 로제타가 5년간의 계약을 맺고 조선으로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현실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로제타는 어려서부터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함께 사는 것을 꿈꾼 적이 있을 만큼 모험적인 삶을 동경했다. 메리 라이언의 연설문을 읽고 가슴이 뛰기도 했다. 미국 최초로 여성을 위한 대학인 마운트 홀요크 여자신학교를 세운 메리 라이언은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해외선교를 적극 권장했다.
“인류를 위해 봉사하길 원한다면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라.”
1892년의 일기에서 로제타는 이 말이 자신을 해외선교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썼다. 이 말에 따라 하고 싶은 일을 접기도 했고 하기 싫은 일을 하기도 했으며, 자신은 현재 자기만의 틈새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제타의 눈에 비친 조선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
1890년 조선에 온 로제타가 처음 의료선교 활동을 했던 보구여관(保救女館). |
로제타가 조선에서 일했던 보구여관(保救女館)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이다. ‘보호하고 구하는 여성들의 집’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가 이름을 하사했던 곳이다. 이 병원은 1887년 메타 하워드라는 여의사가 파견되면서 문을 열었다. 2년 후 그녀가 병으로 귀국한 후 로제타가 후임이 된 것이다. 이곳은 현재 서울 정동의 이화여고 부지로 미국 북감리교의 해외여성선교회의 한양 지부(支部)의 본거지였다. 병원과 이웃해서 기숙학교인 이화학당과 선교사들의 주거공간도 붙어 있었다.
로제타는 1890년 10월 14일 이곳에 도착해 바로 다음날부터 진료에 들어갔다. 일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로제타는 간호사도 약제사도 없이 환자의 맥박을 재고, 체온을 재고, 진찰을 하고, 약을 조제하고, 수술을 하는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끝없이 몰려오는 환자들이 호소하는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치과, 정신과 등의 온갖 질병과 씨름해야 했다. 로제타가 행한 수술은 자궁수술을 비롯해 종양 제거, 백내장 수술, 언청이 수술, 종기 수술 등이었다. 로제타는 첫 10개월 동안 2359건의 진료를 했다. 왕진이 82건, 입원환자는 35명이었다. 처방전 발행건수는 6000여 건이었다.
로제타는 언어 문제로 인해 이화학당의 교사 로드와일러를 통역으로 썼다. 열흘 후, 로드와일러가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점동(박에스더·최초의 한국인 의사)에게 통역을 하라고 했다. 이화학당의 소녀들 중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아이였다.
로제타는 점동과 ‘오와가’라는 일본 소녀를 훈련시키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나에게만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좀 더 폭넓은 삶을 살고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려 함이며, 그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할 거라 믿는다.”
오와가는 아버지의 한양 근무로 3년째 이화학당에 다니던 점동의 단짝이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점동과 함께 병원에서 일하겠다고 자원했는데 낮에 로제타가 왕진을 갈 때 통역으로 유용했다. 조선 소녀인 점동을 낮에 데리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점동은 밤에 왕진을 갈 때만 통역으로 데리고 다녔다.
로제타가 본 조선 여성들의 현실은 ‘공포스러울 만큼’ 비참했다. 당시 여성들에게는 이름도 거의 없었다. 가난과 가부장제에 찌든 여성들, 열여섯이 되기 전에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소녀들에게 로제타는 강한 연민을 느꼈다. 로제타는 이런 현실에서 에스더(점동)가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조선의 관습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아야만 인간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조선 여성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이었다.
로제타는 2년 동안 세심하게 에스더의 신랑감을 모색했고, 에스더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심성이 좋은 박유산을 신랑감으로 택해 결혼을 주선했다.
남편, 1894년 淸日전쟁 직후 평양에 퍼진 발진티푸스 걸려 사망
로제타가 조선에 온 이듬해에 약혼자 윌리엄 제임스 홀이 조선으로 부임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원래 약혼자 윌리엄은 중국 선교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윌리엄은 자신이 중국으로 갈 때 로제타를 데려가려 했다. 이런 사실을 마침 안식년으로 뉴욕에 가 있던 메리 스크랜턴이 알게 됐다. 그녀는 로제타를 뺏기지 않기 위해 선교회에 로비해서 윌리엄을 중국이 아닌 조선으로 파견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1892년 6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윌리엄은 감리교의 평양선교 책임자로 임명됐다. 이때부터 불과 2년남짓 지속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윌리엄은 평양에서, 로제타는 서울에서 조선 일을 돌봤다.
이 무렵 1893년 3월에 로제타는 동대문 옆에 볼드윈 진료소를 개설했다. 한양에 온 직후부터 로제타는 낮에 돌아다니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밤에도 진료소를 열었고, 성(城) 밖에도 진료소를 개설하고 싶어했다. 동대문 진료소는 성 밖의 가난한 여성들이 찾아오기에 용이했다. 이 병원은 후에 동대문 부인병원, 해방 후에는 이대부속병원이 됐다.
1894년 5월 8일, 로제타는 남편이 있는 평양으로 갔다. 이때 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갔다. 당시 개항장을 제외하고는 외국인의 거주나 자산을 보유하는 것이 금지됐다. 처음으로 평양에 나타난 서양 여성과 그녀의 아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평양에 도착한 다음 날, 이들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이 1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평양감사는 이들의 이주(移住)를 위협적으로 받아들였다. 외국인들을 직접 감금하는 일은 민감한 일이었기에 한국인 조력자들을 대신 수감하고 박해했다. 로제타를 도운 한국인 몇몇이 구속됐다. 3박4일 동안의 피 말리는 시간 끝에 이들은 모두 석방됐다.
로제타는 이때 구속되었던 이들 중의 한 사람인 오석형에게 시각장애인 딸이 있음을 알게 됐다. 조선에 와서 장애인들의 현실에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던 차였다. 로제타는 어린 시절 점자(點字)를 배운 기억을 되살려 한글 점자를 개발하고자 했다. 이때 전문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안타깝게도 청일(淸日)전쟁의 전운이 몰려왔고 한 달여 만에 이들은 모두 서울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894년 10월 1일, 남편 윌리엄은 부랴부랴 평양으로 돌아갔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 직후의 평양은 전염병이 돌고 부상자들이 넘쳐났다. 불행히도 이들을 치료하던 도중 윌리엄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11월 19일 서울로 돌아온 후 일주일도 못 버티고 11월 24일 아내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둘 사이에는 돌을 갓 지난 아들 셔우드가 있었고, 둘째가 그녀의 몸 속에 자라고 있었다. 로제타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고향으로 돌아가 둘째를 출산하기로 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며 떠나는 그녀의 귀향길에 에스더 부부가 동행했다.
로제타는 1895년 1월 14일에 고향집에 도착했고, 나흘 후 딸 이디스를 낳았다. 이디스는 건강하고 총명했다. 아버지가 없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오는 데는 많은 고민이 따랐다.
어린 딸 잃은 후 어린이병동 건립하고 醫師 양성 위해 분투
로제타의 ‘내 아이들(my girls)’. 왼쪽부터 진명여고 설립의 주역 여메례, 선교사역 동반자 노수잔, 최초의 양의(洋醫) 박에스더. |
로제타는 뉴욕에 있는 사이 남편 사망으로 위로금을 받았다. 그녀는 이 돈을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병원을 짓는데 쓰고자 마음 먹었다. 한글 점자를 개발하기 위한 체계적인 공부도 했다.
2년 뒤인 1897년 11월, 로제타는 아이들을 데리고 제물포항에 내렸다. 그 무렵 박에스더는 미국에서 의대에 다니고 있었다. 이듬해 5월 1일, 로제타는 부푼 꿈과 두 아이를 안고 다시 평양에 들어갔다. 그런데 짐도 풀기 전에 세 사람 모두 이질에 걸렸다. 로제타와 아들은 회복했으나 딸 이디스는 어린 나이에 엄마의 품을 떠나야 했다.
로제타는 아픔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곧바로 진료소를 열었다. 개원 직전 평양감사의 부인을 치료해 준 덕에 감사는 광혜여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기홀병원과 광혜여원은 후에 통합돼 평양연합기독병원이 됐다. 로제타는 이 병원에 이디스를 기념하는 어린이병동을 추가로 건립했고 이곳에서 맹아들을 위한 교육도 시작했다. 1897년 겨울 동안 서울에 머물며 초급 한글 교리서 등을 점자 교재로 만들어 평양에 다시 돌아왔다. 로제타는 오지(奧地)를 돌며 의료선교 여행도 다녔다.
로제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아무리 일에 매달려도 딸을 잃은 아픔이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딸 이디스가 떠나고 2년 후 친정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결국 로제타는 신경쇠약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행의 동반객 중에는 감리교 첫 정식 간호사 선교사 마거릿 에드먼즈가 있었다. 이들은 여행 도중 한국어를 함께 공부하고 간호사 양성학교 건립도 계획했다.
1903년 말에 마거릿 에드먼즈는 보구여관 간호학교를 개교했다. 첫 학생이었던 이그레이스는 여종 출신으로 다리에 생긴 괴사병으로 주인한테 버림받고 보구여관에 왔던 소녀였다. 그녀는 우리나라 첫 정식 간호사가 됐고 후에 광혜여원에서 로제타로부터 산과(産科) 훈련을 받아 의생면허를 취득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개업의가 됐다. 의생제도는 부족한 의사를 충족하기 위해 총독부가 만든 제도였다.
필자(가운데)는 로제타 여사의 손녀 필리스(오른쪽)를 여러 차례 방문한 후 마침내 로제타 여사의 소중한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필리스는 현재 건강이 악화돼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고, 남편 에드워드 킹은 지난 3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
1890년 로제타는 미국을 떠나 조선으로 오는 도중 이 나라 소녀들에게 의학교육을 시키겠다는 계획을 자신의 일기장에 적었다. 그녀는 점동과 오와가를 시작으로 이듬해 겨울부터 이화학당의 소녀 다섯 명을 데리고 생리학 수업을 시작했고, 곧 약리학 수업을 추가했다. 로제타는 이들을 ‘내 아이들(my girls)’이라 불렀다. 최초 양의사 박에스더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최초 간호사 이그레이스, 진명여고 설립에 크게 기여한 여메례, 선교사역 동반자 노수잔 등이 로제타의 ‘아이들’이었다.
1903년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장학금을 마련하고 영특한 소녀들을 뽑아 중국, 일본에 유학을 보내 의사로 양성했지만 그 수는 미미했다. 로제타는 좀 더 많은 수의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1912년 광혜여원 안에 실습을 병행하며 의학강습반을 열었다. 그리고 이들을 의전(醫專)에 입학시키려 애를 썼으나 선교사들이 세운 세브란스의전에서조차 여학생 입학을 거부했다.
로제타는 이 일에 크게 실망하고 격분했다. 남자들의 이기심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총독부에서 운영하는 경성의전에 사정해 간신히 청강생으로 1년에 몇 명씩을 입학시킬 수 있었다. 1918년에 이들 중에서 세 명이 처음으로 조선에서 교육받고 의사 자격증을 얻었다. 하지만 경성의전은 1926년부터 여학생의 청강을 다시 불허했다.
로제타는 여자의전을 만들기로 하고 한국인 의사들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1928년 60여 명의 조선인 유지들과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을 발기했다. 이 학교가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됐다.
아들의 헌신
말년의 로제타 여사. 1942년 결혼 50주년 기념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그녀는 1951년 8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는 한국에서 로제타가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설립한 평양외국인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 아내와 함께 귀국했다. 셔우드는 태어날 때부터 친(親)이모보다 에스더와 더 가까웠다. 그녀가 겨우 서른넷의 나이에 결핵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본 셔우드는 결핵 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요양병원인 해주구세병원을 세웠고,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셔우드 부부는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해주에서 의료선교를 펼쳤다.
로제타는 조선 말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여성들의 생명을 구했고 조선인이 조선인들을 치료하는 날을 꿈꾸며 더 많은 의료인을 양성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1933년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조선의 선교활동을 홍보하고 조선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전파했다. 로제타는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조선옷과 한옥에 대해 매우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온돌식 주거문화에 대해서도 매우 위생적이고 편리하다고 했다. 흰옷을 즐겨 입어 소독효과가 있어 결핵 발생률을 낮출 수 있었으며 삶아 빠는 세탁방식도 서양인이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로제타는 처음 조선으로 오는 동안 《불교》라는 책을 읽고 부처님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적었다. 몇 달 후에 서대문 밖 승려에게 왕진을 갔을 만큼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열여섯 살 부활절에 감리교회, 장로교회의 예배와 가톨릭의 미사까지 참여했을 만큼 에큐메니컬(Ecumenical·종파를 초월해 연합하자는 기독교 운동) 신앙인이기도 하였다.
서대문 감옥에 갇혀 죽어 가던 여죄수까지 석방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그녀를 입원시킨 뒤에는 자신의 식탁에 초대하려 했을 만큼 ‘진정한’ 사랑을 실천한 이였다. 언어문제로 고민하며 한국어 습득을 위한 공부시간과 진료시간 중 어느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여러 개의 인간의 언어를 말하는 것보다 사랑이 우선”이라는 고린도전서의 구절에 위안을 얻으며 치료를 더 우선하기도 했다. 그의 치료는 말이 필요 없었고 어느 선교사의 말보다 더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었다. 그녀는 복음을 전해 받지 않았어도 양심에 따라 바르게 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열린 신앙관을 갖고 있었다.
로제타의 삶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
로제타는 ‘평양의 오마니’로 불렸다. 조선 여성을 해방시켰다 해서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에 비유되기도 했다. 그녀가 빛을 들고 이 땅에 와서 어둠에 갇혀 있던 여성들에게 뿌린 사랑의 씨앗이 싹터 무성하게 자라났다.
로제타는 처음 조선으로 오기 위해 고향집을 떠나던 1890년 8월 21일의 자신의 일기장 첫 문장으로 필립비서 2장 5절을 인용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녀는 예수의 마음으로 살려는 높은 이상을 설정했고 지난(至難)한 노력으로 이를 실천했다.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일은 병들어 신음하는 이들을 아픔에서 구하는 일이었다. 또 어둠 속에 있는 여성들을 교육시켜 하나님 안에서 주체성을 회복하고 세상에 유용하게 쓰임 받는 존재가 되도록 돕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그녀를 잊고 살았다. 아니 모른 채 살아왔다. 인도의 마더 테레사보다 50년을 앞서 조선에 그녀가 있었다. ‘마더 로제타’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은 그녀의 숭고한 삶과 이타적인 사랑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ㅡ박정희 작가
첫댓글 ‘로제타 셔우드 홀’ 25세에 처녀의사로 1890년에 조선에 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洋醫)는 이분이 키운 여성이었습니다.
조선의 열악한 환경과 역경 속에서도 의사선교사로써 이 땅에 덕을 베풀었다.
1951년에 8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숭고한 삶과 이타적인 사랑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잘 감상하고 갑니다.
헌신적인 노력에 우리 모두가 감사할이죠.
너무 모르고 지나온 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정말 노벨 평화상 받을 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