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어김없이 네 시에 일어났다. 옆으로 누워 손을 턱에 괴고
오른 쪽으로 돌아누웠다가, 왼 쪽으로 돌아눕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일어나
세수를 했다. 오렌지주스를 한잔 마시고 앉았는데도 정신이 몽롱하다.
어릴 때 읽었던 '늑대와 소년'과 비슷한 기러기의 우화가 내용이 좋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기러기는, 평생 제 짝 이외에는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해서 목각을 만들어 전안(奠雁: 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 집에 가서 상 위에 놓고 절함.)이라고 하여 혼례에 예물로사용했다고 한다. 즉 부부간에 신뢰의 상징인 셈이다. 또 기러기는 해를 따라서 남북을 오가는 철새이다. 무리를 지어 한가롭게 날다가 물가에서 잠을 자는데 보초 기러기로 하여금 사방을 지키게 하고 대장 기러기들이 잠을 잔다. 기러기를 잡으려면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항아리 속에 촛불을 넣고 불빛이 새지 않도록 감추어서 살금살금 다가가서 촛불을 조금만 들어 올린다. 보초 기러기가 놀라 울고 대장 기러기들도 잠이 깬다. 그 때 촛불을
다시 감춘다. 잠시 후 기러기들이 다시 잠이 들면 또 불을 들어 보초 기러기가 울도록 한다. 이렇게 서너 번하는 동안에 기러기들이 깨어나 보면 아무 일이 없으니 대장 기러기가 도리어 보초 기러기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쪼아 버린다. 그러면 다시 촛불을 들더라도 보초 기러기가 쪼일까 두려워 울지 못한다. 이때 덮쳐서 모조리 잡아 버린다."
보초 기러기는 충직했고, 사람들은 교활했으며 대장 기러기의 미혹은 그 짝을 찾을 수 없다. 기러기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에도 이와 다르지 않은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이 글의 저자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대장 기러기의 안이함과 멍청함이다.
보초 기러기가 누차 경고했지만 임시변통으로 대처했으며, 적의 꾀에 속아서 충직한 보초를 불신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둘째, 기러기가 간교한 적의 꾀에 놀아나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충직 만큼은 인간에게도 귀감이 될 만하다는 것이다. 고래로 충신은 간신의 농간에 의해 주군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충신의 진정은 죽임을 당한 뒤에야 밝혀진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흔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늑대와 소년'에 등장하는 소년은 재미삼아 거짓말을 했고, '보초 기러기'는 사실대로 경보를 울렸다는 점이다. 정직과 거짓이라는 정반대의 원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양떼는 늑대에게 잡아먹혔고, 기러기도 사람들에게 잡혔으니 차이가 없다. 정반대의 의도가 동일한 결과를 불러 온 셈이다. 늑대 소년은 그렇다고 치부를 하더라도 진퇴양난에 처한 이 가련한 갈매기를 누가 탓하겠는가? 신뢰는 사회적 자산이다. 그것이 깨졌을 경우 그 사회의 구성원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클 뿐 아니라 대신 할 만한 마땅한 대체재도 없다. 이 두 개의 우화는 신뢰가 깨지는 것은 순간적이며, 또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것과 같은 중대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사회적 신뢰로 작동한 것이고, 기러기에 대한 오랜 신뢰도 한 번의 기만으로 한순간에 깨질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