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말씀(2023.9.24) 말씀/ 마태 13:15-16
보는 눈을 주소서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팻 슈나이더라는 사람이 쓴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이란 시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쁜 꽃, 맑은 하늘, 드넓은 바다,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 이라든지 낭만적인 억새라든지 그런 것을 보며 시심을 떠올리는데 이 팻 슈나이더라는 시인은 우리가 잊고 지내는 평범한 사물들을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인내심 그런 것들의 지원이 없다면 우리가 과연 삶을 유지할 수 있는가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면 /찻잔이 차를 담고 있는 일 /의자가 든든하고 견고하게 서 있는 일 /바닥이 신발 바닥을 혹은 발가락들을 받아들이는 일 ...옷들이 공손하게 옷장 안에서 기다리는 일 /비누가 접시 위에서 조용히 말라 가는 일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매일 식고 다니는 구두와 등상화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돈 주고 샀으니 당연해 여겼던 신발이 다시 생각해보니 그동안 얼마나 인내를 하면서 나를 지원해주고 섬겨왔는가? 여름 내내 냄새나는 발을 감싸주고 참아주었는지, 이번에 돌로미티 여행에서는 나를 위해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이태리 여행을 하며 등상화를 하나 샀는데 얼마나 잘 신었는지 모릅니다. 험한 산 마다하지 않고 내 발을 보호해주고 지지해줘서 여행 내내 온 몸이 편했습니다. 그동안 잘 신고 감사는 안 했는데 팻슈나이더의 시를 읽고 다시 보니 정말 맞는 말입니다. 몇일 전에는 자동차 보험을 갱신했습니다. 보험설계사 자매가 자동차 값을 이야기해 줬는데 작년 보다 5만원이 적은 75만원입니다. 8년 전에 순천 가서 380만원에 샀는데 그동안 가성비로 얼마나 잘 썼는지 모릅니다. 산으로 가자면 산으로 가고, 바다로 가자고 하면 바다로 가고, 시장에 가자 하면 시장으로 한 번도 거부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동행해준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는가! 물론 이런 사물들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돈 주고 샀는데 다 쓰고 나면 폐차하고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일상의 사물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일상의 범위를 벗어난 것은 더 알아차리기 힘들다. 개미와 풀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신의 존재도 알 수 없다” 시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평범한 것들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지지해 주는 것들과. 평범한 사물들의 미덕은 얼마나 융숭한가! 입어 줄 때까지 옷걸이에 걸려 있기를 마다하지 않는 바지, 더러운 발도 묵묵히 받아들이는 양말, 어떤 입술에도 아부하는 숟가락의 매끄러움, 밤새 앉아 울어도 품어 주는 의자, 진짜 얼굴을 감추는 행위를 묵인하는 거울의 너그러움……. 그것은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삶을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거나, 어떤 것에서도 발견하지 못하거나. 일상의 모든 일에서 기적을 보거나 어떤 것에서도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 사람들은 특별한 것을 기대하며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세계 속에 시인의 눈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기적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내가 하루를 살아 숨 쉬며 산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오늘 내가 건강한 두 다리로 오솔길을 산책할 수 있다는 것, 내 눈이 아직 책을 읽을 수 있고, 내 입의 혀가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업이 망하고, 가진 것들을 다 잃어버렸다고 해도 오늘 살아있는 내 자신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기적임을 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나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비극의 메데아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자 예언자가 나타나서는 “메데아, 무엇이 남아있느냐?” 묻습니다. 그 때 메데아가 대답합니다. “무엇이 남았냐구요 제가 남아있습니다.” 메데아는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위대란 존재인가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는 다 사라져버린 세상을 보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자신을 보면서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이태리 돌로미티 생경한 곳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바로 남아 있다는 것, 내가 바로 세상의 희망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대륙을 발견한 것보다 더 큰 발견 아니겠습니까! 메디아의 한 마디가 정말 압권입니다. “제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을 보고 어떤 사람 저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보고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할까요? 그것은 바로 보는 눈 듣는 귀의 문제입니다. 시인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그런 것을 보고 깊은 통찰과 깨달음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 하나를 인해서 기뻐하고, 작은 것을 하나로 인해서 감사하고 행복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령 믿음이 좋다고 해도 시인이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대게 우리는 감사 제목을 찾을 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감사. 나에게 큰 사업을 일으켜주심 감사. 질병에서 치료해주심을 감사. 자녀가 잘 됨을 감사. 좋은 집으로 이사함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시인들은 아침 이슬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면서 감사하고, 길을 가다가 작은 들꽃을 보며 사랑할 이유를 찾습니다. 얼굴에 스치는 가을바람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따스한 사랑에 감사를 합니다. 세상에 겉으로 보이는 것들도 다가 아닙니다. 정말 좋은 것들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며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한다면, 정말 변화되고 발전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눈이 떠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 15,16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보는 눈, 듣는 귀 복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눈이 있다고 똑같이 보고, 귀가 있다고 똑같이 듣고, 마음이 있다고 똑같이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산에 가도 어떤 사람에겐 산삼이 보이고 어떤 사람은 더덕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려면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갈아야 엎어야 합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둔한'사람은 어떤 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훈련 되지 않은 눈은 좋은 것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번에 로마에 가서 바티칸 박물관을 다녀왔습니다. 그 안에 시스팅 성당이 있는데 그곳에 미켈란 젤로가 4년 5개월 동안 등과 고개가 굽는 고통을 속에서 그린 천장 벽화가 있습니다. ‘천지 창조’와 ‘최후의 심판’입니다. 세계에 삼대 박물관이 있습니다. 영국의 대영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로 박물관 그리고 이태리의 바티칸인데 그 중에 백미가 바티칸 박물간의 시스티나 예배당이라고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때문 입니다. 대단한 작품이지요. 우리도 가서 보았지만 너무나 대작이라서 보통 눈으로 제대로 감상을 못했을 것입니다. 독일의 괴테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보지 못한 자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미켈란젤로가 어느 친구의 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특정인의 약점을 들춰내며 조롱하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동참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미켈란젤로가 작품구상을 하고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물었습니다. “왜 자네는 침묵만 지키고 있나” 질문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곁에 있던 물감을 집어든 다음, 접시 위에 흰색을 칠하고 가운데에 까만 점 하나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야 물론 까만 점이지” 미켈란잴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얀 부분을 보고 있다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항상 부정적인 것만 보게 되는 법이지” 그렇습니다.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은 항상 부정적인 것만 봅니다. 좋은 것을 보려면 겸손히 배우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선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당시에 거의 모든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장로들 종교지도자들은 꽉 막혀서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무식했지만 겸손히 배우고자 하였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너희는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는 눈이 있지만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달라고 듣게 해달라고,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눈과 귀는 영적으로 열릴뿐 아니라 선과 악, 긍정과 부정에 대해서도 구별하는 능력 그 중에 선을 택하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 7:14-16를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예수께서는 선과 악을 아직 구별할 줄 모르는 아기로 태어나셔서, 선택할 수 있는 적당한 나이가 되어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아신 것처럼 우리도 때가 되면 선과 악을 구별하여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보십시오. 똥 오줌 가리지 못하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죄 판단하고 미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이 안 떠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선과 악, 부정과 긍정의 두 가지 관점의 보는 성향이 있습니다. 죄와 악과 단점을 예리하게 바라보는 것과 장점 좋은 것을 보는 성향입니다. 한 사람은 정죄한고 판단하기 잘하고, 다른 사람은 상대방을 불쌍히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집니다. 어떤 관점도 틀린 것은 없습니다. 다만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결과 악을 보는 사람은 판단하고 죽이게 되고, 선을 보는 사람은 치료하고 살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우리는 형사 라베르와 장발장이 아주 잘 대조되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형사 라베르도 잘못이 없습니다. 직업상 죄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하고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가치관이고 신념입니다. 범죄인을 잡아서 철저히 법의 판단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도 합니다. 한번 죄수는 영원한 죄수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자신을 살려준 레미제라블의 사랑 앞에 가치관이 흔들리며 고민하다가 결국 자살을 합니다. 레미제라블은 자신도 처신하기 어려운 형퍈에 있지만 딸로 인해서 창기 노릇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팡틴을 불쌍히 여기며 도와줍니다. 그리고 의지할 데 없는 그의 딸을 맡아서 키워줍니다. 그는 사랑으로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고 해피 엔딩을 맞습니다. 라베르와 레미제라블의 차이점... 한 사람은 죄와 악을 보았고, 한 사람은 선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끈질기게 죄와 약점을 붙잡고 늘어지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흉악한 죄 속ㅇ서도 그 안에 선한 본성을 보고 희망을 갖는 사람이 되겠느가? 내 안에 단점과 어리석음 무지를 보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되겠는가, 아니면 나는 비록 몹쓸 죄인이라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녀이며 나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바라보며 긍정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겠는가? 저도 과거 참 부정적이고 어두웠던 사람입니다. 스스로는 운명적 생각,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 세상에 대해서는 늘 비판적인 생각을 하였습니다. 세상은 추하고 더럽고 희망이 없어. 얼굴 한번 펴지 못하고 평생 어둡게 살 자였습니다. 이걸 고치는데 아주 오래 걸렸습니다. 그것은 사랑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뻐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다는 것을 들으면서 도대체 왜? 죄악투성이 허물투성인 인생들 그대로 심판하셔도 정당할 텐데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셨는가? 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시고 죄인을 부르러오셨는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하나님 관점과 내 관점의 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보시고 나는 나쁜 것을 보고, 하나님은 속을 보시고 나는 겉을 보고, 내가 비록 죄인이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로서 나를 보시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사랑으로 부정과 운명과 좌와 어둠의 사슬들이 풀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 세리 레위, 사마리아 여인, 창기들이 달라지고 변화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어둡게 보았던 운명적 모든 환경을 넘어서 감사함으로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행복한 삶을 찾아 살며 사랑하며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멋진 시도 썼습니다. 여러분 형사 라베르의 관점(성경에서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안됩니다. 결국 나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습니다.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용서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나부터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피료합니다. 나는 내가 좋다. 나도 하며 잘 할 있다. 내 안에도 좋은 것이 많다. 그렇게 인정하고 사랑함녀서 장점, 강점을 키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미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 사랑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기도하고 계속 좋은 것을 보는 노력을 하면 반드시 바뀌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만이 부정으로 긍정으로 바꾸는 변화의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의 사람이 되고 눈이 바뀌면 세상은 반드시 달라집니다. 세상에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왜 전에는 이렇게 살지 못했을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 눈만큼 세상을 보고, 내 귀만큼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앟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으로 들여다 보아야한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보는 눈, 듣는 귀를 가지고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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