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라는 짧은 생을 살다간 고려 17대왕 인종은(1109~1146)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버지 예종의 장인이자 자신의 외할아버지
되는 이자겸의 횡포에 맞서지 못하고 다시 이자겸의 딸들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자겸의 막강한 권력의 힘에 의해
인종의 뜻과 상관없이 이모되는 이자겸의 셋째딸 넷째딸을
차례로 왕비로 맞이하게 하여 다시 이자겸이 장인이 된다
당시 풍습으로는 결혼을 금하는 관계였지만 이자겸은 법도와
풍습은 완전히 무시하고 힘으로 억지 결혼을 강행했다
왕비로 맞이 하는 이날도 태풍이 불고 비바람으로 기와가
날리고 나무가 뿌리채 뽑혔다
이자겸은 왕이 다른 왕비를 맞으면 다른 외척의 세력이
또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륜을 저 버리는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자기에게 붙지 않는 자는 여러 가지로 중상모략하였고
왕의 아우이자 인종의 숙부 대방공 왕보가 왕권을 노리다가
발각돼 경산부로 귀양 보내 죽이고 이를 추대하려는 평장사
한안인을 해도로 보내 죽였다 이에 가담한 최홍재 문공미
이영 정극영 등 50여명을 유배시키고 관작을 팔아 가까운
족속을 요직에 포열시키고 스스로 국공이 되고 예우를
왕태자와 비교하여 그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여 전국에서
축하문을 올리도록 하고 내외 축하객들이 전(箋)이라
칭하였다
이자겸은 물론 아들들 또한 세력이 하늘을 찌르니
뇌물을 공공연히 받아 사방에서 받은 선물로
집안에 섞은 고기가 수만근이고 서민의 토전을 강탈하고
이자겸 부자(父子)의 노비들이 서민의 수레를 강탈하여
물건들을 실어나르니 서민들이 수레를 헐고 소를 팔아버려
도로가 한산하였다
또 군국의 일을 처리할 때 왕을 행차케하여 대책을
마련하여 시일을 무리하게 정하여 일을 못하게 하자
18세로 성인이 된 인종은 이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자겸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왕의 측근들은
왕을 좌우 옆에서 항상 모신 내시지후 김찬과 안보린이다
이들은 인종의 동의를 얻어 1126년에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해 동지추밀원사 지록연,반대 세력인 상장군 최 탁과 오 탁
(최탁은 척준경의 아우 척준신이 자기 밑에 있다가 형의 배경
으로 자기 상관인 병부상서로 승진시킨 것에 불만이 있었음)
대장군 권 수, 장군 고 석등과 공모하여 이자겸을 처치하려
했으나 병권을 쥐고 있던 척준경(拓俊京)의 부하와 이자겸의
아들 현화사 주지인 의장이 승병300여명을 이끌고 이자겸을
도와 궁궐을 불태우고 공모한 자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
산호정에 피신해 있는 인종의 신병을 확보하고 인종을 자신의
사택인 중흥택 서월에 유폐시키는 이자겸의 난을 일으켰다
참지 정사 척준경(이자겸의 아들 이지원의 장인)은 예종때
윤관을 도와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무관출신으로 이자겸과는
사돈지간이다
그러나 그후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집사와 척준경의 집사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서 이지언의 집사가 척준경의 집사에게
너희 상전은 임금이 있는 자리에 대고 활을 쏘고 궁에 불을 질렀
으니 그 죄는 면치 못할것이고 너도 관노로 끌려가야 할
놈이 나를 욕한다면서 큰소리 친 것이 척준경의 귀에 들어
가고 척준경이 이자겸에게 쫓아가서 의관을 벗어 던지고 고향
으로 돌아 간다면서 화를 내고 나와 버리면서 이자겸과
척준경은 서로 등을 지게 되는 사건이 인종에게 전해진다
이에 인종은 추밀원사 김부일을 시켜 안장을 끼운 말을 선물로
보내고 지난일은 잊고 앞으로 충성을 다하고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보라며 척준경을 용서하는 교서를 보낸다
무관 출신으로 척준경은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하면서 단순했다
그리고 이자겸은 왕을 유폐시키고 척준경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한동안 왕의 권한을 행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주관하고
十八子자 즉 李(이)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이 자신을 두고
예언한 것처럼 생각하고 욕심을 내서 왕을 폐위시키기 위해
독살 음모를 두차례나 꾀하였으나 자신의 넷째 딸인 왕비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같이 이자겸이 왕을 독살하려 한다는 것을 들은 척준경은
왕을 보위하고 충성해야 겠다는 마음에 결정을 내린다
척준경이 충성을 맹세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종은 내의 최사전을
시켜 교서를 보낸다
“내가 살해당한다면 그것은 내덕이 없음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원통한 것은 태조가 창업하고 역대 성왕이 이어온 왕통이
내몸에 이르러 만약 타성으로 바뀐다면 이는 나만의 죄가 아니라
나를 보좌한 대신들의 심대한 치욕으로 남을 것이다 그대는
속히 대책을 강구하라“
이자겸을 제거해 큰 공을 세워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교서를
보내는 한편 김부식의 형인 김부일을 척준경에게 보내 이자겸
제거 계획을 독촉하게 하자
왕의 친서를 받은 척준경은 인종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감지하고
계책을 강구하고 무력을 동원해 이자겸를 체포하는데 성공한다
1126년 5월에 일어난 인종에 대한 이자겸의 난은 종결되었다
인종은 장인 이자겸 그의 처 최씨와 아들 이지윤을 영광으로
이지미는 협주로 이공의는 진도로 이지언은 거제로 각각 유배
됐으며 측근30명과 사노비 90명도 각지로 유배되었으나
이자겸은 그해 12월에 영광에서 죽었다
이자겸이 죽고 3년이 흐르자 인종은 자신의 외조모이자 장모인
최씨를 개경으로 소환하였다
세월이 흘러 인종은
“옛 정장공이 자신의 모친 강씨를 성영에 유치하고
맹세하기를 황천에 가지 않으면 서로 보지 못하리라 하였다가
얼마후 뉘우치고 다시 모자가 처음같이 되었고 또한 진시황이
옹에 가두었던 자신의 모친을 함양 감천궁에 모시게 하였으니
이 두임금은 모의 구악을 잊어버리고 인자의 효를 이루었으니
짐이 매우 이를 생각한다면서 이자겸을 한양공에 봉하고 최씨를
변한국대부인에 봉 할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자겸의 셋째 딸 연덕궁주와 넷째 딸은 왕후마마로
계속 있을때 죽었으면 왕후 시호를 받을수 있었으나
이자겸의 난을 계기로 딸들이 모두 폐비된 상태에서
죽었기에 시호를 받지 못했으나 왕비가 인종의 목숨을
살린 공을 인정받아 폐비는 궁주로 시호를 받았다
이자겸의 난으로 경원이씨 왕비 배출은 물론 경원이씨 가문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이자겸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이자겸을 체포하는데 공을 세운 척준경 이수 김향
최사전에게 공신호와 관작을 내렸다
문하시중을 사양하고 문하시랑의 직을 받은 척준경은
무신으로서 권신임을 내세우며 공을 믿고 지나치게
발호하다 좌정언 정지상이 척준경을 탄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고
이에 인종은 문벌귀족과 권신들을 견제 세력에 못이겨
1127년 척준경을 잡아 암태도를 거쳐 곡주에서 살게
했으나 후에 사면을 받고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를
제수받았으나 수십일 만에 등창으로 죽었다
이자겸의 난을 통해 당시 귀족들이 정권 왕권을 둘러싸고
상호간에 얼마나 치열하게 싸움을 되풀이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자겸의 난으로 정치기강은 더욱 문란해졌으며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궁궐이 모두 불탐으로써 귀족층의
분열 대립이 표면화되거나 귀족사회 자체가 동요되고
있었다
즉 (이. 척)이 제거된 이후 개경의 귀족세력 가운데서도
특히 김부식 형제(경주김씨)와 이수(경원이씨) 및 새로이
외척이 된 임원애(정안임씨)의 계열등이 크게 부상했고
한편 척준경을 탄핵한 공로를 세운 정지상을 중심으로
하는 승려 묘청과 일자인 백수한 등의 서경 출신
신진관료가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
이후 서경천도를 주장하는 서경출신의 귀족과 이에
반대하는 개경(지금의 개성) 귀족의 충돌로 귀족세력
자체 내의 분열이 극심해지면서
지덕쇠왕설이란 일정한 지역에 사람들이 오래 살거나 한
지역에 무리하게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면 땅의 기운이
쇠하여 인심이 사나워지고 부와 권력이 한쪽으로
편중되어 민중으로부터 불평과 불만이 커지게 되면서
사회의 갈등도 덩달아 커진다는 일종의 설(說)을 말함
을 주장하며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하자는 묘청의 편에 섯던
인종이 개경귀족들의 반대와 여론에 밀려 서경천도를
포기하자 묘청이 서경에서 난을 일으킨다
묘청이 일으킨 난은 왕권을 찬탈하자는 것도 아니고
도읍을 옮겨 천하를 합병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원대한 꿈을 가진 승려 묘청의 난이
실패하므로서 지방 신진 세력들은 힘을 잃게 된다
이자겸 김부식과 같은 정권 기득권 세력들로 인해
권력유지 세력다툼과 자신들의 안정만을 꾀하기 위해
이웃나라에 아부하는 사대주의 정책을 펴고
문벌귀족들 사이의 분열과 대립만을 일삼다가
마침내 1170년(의종24) 이고 이의방 정중부등의 무신들의
무신정변의 발발로 문벌귀족 사회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