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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대마도와 쓰시마 해전
재작년 대마도 마라톤 여행의 코스는 남쪽 이즈하라 항구에 도착하기전 여행사에서 미리 준비한 도시락으로 배안에서 해결했다.
여행 코스는 여행사에 따라 조금씩 달라서 지난 번 대마도 갈 때에는 북쪽 하다카츠항에 도착하였다. 여행코스는 비슷하여 재작년에는 이즈하라 항구에서 좁고경사가 심한 길을따라 서쪽의 높은 산 을 넘어가면 타테라산 원시림이 있다.
깊은 계곡과 시원한물 그리고 사람이깍아서 만든 듯 거대하고 평평한 바위와 어우러져 우리나라 설악산 계곡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통행이 적은 시골도로에는 가끔씩 농사를 지어서 거둔 농작물들을 파는 무인 판매대가 있었는데 가격은 표시되어 있지
않고 필요한 사람이 양심껏 적당히 돈을놔두고 가져간다고 했다. 단체여행이라 정해진 시간에 수박 겉핥기식 으로 여기저기 구경하기도 하고 했지만 사실 좀 충격을 받았다. 조그만 섬에 설악산 계곡처럼 사시사철 풍부한 계곡물과 아름다운 바위들이 즐비한 계곡이 있으니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맷돌처럼 거대한 수많은 바위사이로 흘러가는 시원한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계곡에서 좀 휴식을 취하고 이즈하라로 돌아와 면세점 들리고 북쪽으로 돌아가면서만세키다리를 건너 일본의 창조신화가 있는 와타즈미신사에 들렸다. 섬나라라서 그런지세상을 창조한 분은 원래 바다의 용궁과 같은 곳에서 살다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뭍으로 나와서 만물을 창조했다는 신화가 서려있는 와타즈미
신사앞에 있는 5개의 토리이(집모양의돌기둥)중 2개는 바다에 까지 세워져 있어 만조시에는 바닷물에 잠겨 보이지 않으며 용궁의
전설이 전래되고 있다. 그리고 360˚ 로 둘러볼 수 있는 에보시타케 전망대로 올라가다 보면 아소만의 전경이 장관이다.
거기서 휴식과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하고 계속 북쪽으로 가면 히타카즈가 나오고 섬의 북쪽끝단에 위치한 한국전망대에 있어
거기를 드렸다.
한국 전망대는 가을날씨가 좋을 때는 부산이 아련히 보이고 밤에는 부산의 야경도 보인다고 한다. 전망대 바로 옆에는 조선 역관사(요즘의 통역관)위령비가 있는데 1703년 음력 2월5일 조선역관 108명을 태운 배가 거의 대마도를 앞에 두고 갑작스런 폭풍으로 인해 전원사망 실종되어 그분들의 넉을 기르기 위해 세워진 위령비이다.
저녁에는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미우다 펜션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면서 빡빡한 하루의 여행을 마쳤다.
이번 대마도 여행코스는 정 반대로 돌았다. 먼저 한국 전망대와 미우다 해변을 둘러보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에보시다케 전망대 그리고 와타즈미 신사에 들린 후 만세키 다리에 도착 하였다. 러일전쟁(1904~1905)때 일본군의 비밀의 항로이며 동시에 은신처의
출입구로서 러일전쟁의 해전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전략적 요충지였다.
지난번에는 버스만 타고 설명들으며 그냥 다리를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있어 직접 걸어가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다리는
대마도의 가장 좁은 부분을 운하처럼 땅을 파서 두 개의 상도 (上島)와 하도(下島)로 만들어 연결하여 아소만의 북동쪽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다. 대마도는 매년 태풍이 지나가는 통로에 있는지 중요한 항구(이즈하라와 히타카츠)들은 태풍을 막아주는 북동쪽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태풍이 직접적으로 강타하는 남서쪽해안은 가보지 못했지만 수 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넓고 안전한 아소만이 피항지 일 것이다.
이번 여행에는 만세키 다리를 건널 때 차에서 내려 직접 쓰시마해협(북동쪽)에서 아소만으로 들어가는 조류도 보고 지난 세기초에 만주와 조선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주변국인 러시아와 일본의 러일전쟁 말기 마지막 해전의 승부처로서 이 다리는 우리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곳이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8일 일본함대가 중국 뤼순(여순)군항에 정박된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시작되었으며 동시에 일본 육군 선발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고 다음날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와 격돌하였다.
전쟁이 장기전이 되자 러시아는 해군력을 보강하기 위해 북유럽 북해부근에 주둔한 발틱함대를 뤼순항으로 급파하기로 하였다.그러나 영일동맹으로 인해 수에즈운하을 관할하고 있는 영국이 운하를 패쇄하자 일부함대만 운하를 통과하고 주력함대인 발틱함대는 지중해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남진하여 아프리카남단 희망봉을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1905년1월 아프리카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마다카스카르에 도착했을때 뤼순항이 함락 되었으니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라는 전갈이 왔다.
1904년10월 유럽을 출발하여 8개월에 걸쳐 3만7000킬로의 해상을 항해해온 세계적 무적 함대인 러시아 발틱 함대는 오랜 항해와 연료(석탄)부족 때문에 북해도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름길인 대한해협을 통과한다.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황해해전과 울산해전에서 승리한 일본연합함대는 1905년 5월 대한해협(쓰시마 해협)을 지날것을 예상하고 진해만과 아소만에서 최상의 상태로 숨어서 기다린다. 19세기 중엽 물밀듯이 들어오는 서구와 개항이후 조선의 주변국인 청나라가 조선을 좌지우지 하듯 조선을 지배했으나 청일전재의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인정하게된다. 일본연합함대을 이끌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제독은 청일전쟁때(1884~1895)때 조선에서 일본군과 육상전투중인 청나라 자국군을 증강하기위해 청나라육군 1200명을 태운 영국화물선(청나라가 임차)을 경기도 안산시에 속한 풍도근해에서 거의 전멸(생준자는 겨우70명 정도)시킨 영국유학파 해군 장교였다가 제독이 된다. 1905년 5월 27 새벽 정찰선으로부터 발틱함대가 쓰시마해협으로 향하고 있다고 연락 받은 도고제독은 가장 적합한 격전지로 쓰시마동쪽으로 생각하고 진해에서 아침6시 30분 경에 출발해 대마도 동쪽으로 향해 기다린다. 쓰시마해협에서 (2열)종대로 침로를 북동으로 잡아 전진하는 발틱함대을 향해 거의 정면에서 남서로 침로를 잡은 도고의 연합함대는 길게 약간사선으로 가로막는 듯이 점점 가까이 전진하여 발틱함대의 전좌현에서 8킬로 정도 가까워지자 갑자기 발틱함대쪽으로 180도(U턴) 변침하자 뒤 따라온 함정들도 줄줄리 유턴하여 발틱함대의 북동쪽진행방향과 평행을 이루고 더욱 가깝게 전진해 간다.
일촉즉발이 시간이 가까워 지는데 오후2시10분쯤되자 선두에 선 발틱함대의 함정이 도망치듯 침로를 북동쪽에서 동쪽으로 변침하자 선두함정을 일시에 기습집중 폭격하는 정(丁)자전법(영어로 T자전법)으로 침로를 바꿔 도망치는 선두의 발틱함정들를 몇차례 정(丁)자 전법을 써서 집중공격해 발틱 함대의 38척중 21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하며 나머지 5척 중 2척은 중립국으로 도주하고 겨우 3척만이 블라디보스톡으로 귀항하고 만다.
이틀동안 러시아군은 4800명정도 전사하고 발틱함대를 이끈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부상당하여 생포되어 6100명이 포로가 되어 러시아해군은 쓰시마(일본) 해전에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다. 한편 일본해군의 피해는 3척이 침몰하고 사망117명에 불과해 러시아의 그것에 비해 극히미미해 해전사에서 유례없은 파죽지세의 승리이다. 러시아국민뿐만 아니라 그당시 전세계가 러사아가 당연히 승리하리라 생각했지만 거의 전멸하다시피한 발틱함대의 굴욕적인 패배로 세계가 놀랐고 러시아는 내부적인 혼란과 불만으로 인해 혁명의 불길에 휩싸인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북위 40도 이남 사할린섬을 할양받고 조선의 지배권도 인정받아 조선에서 지배권을 더욱 강화하여 만주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며 사실상 식민지 지배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때까지 전함들의 숫자로 볼때 상대가 안되는 일본이였지만 적절한 전략과 정신무장으로 러시아의 방만하고 오랜항해로 심신이 지치고 정신이 해이한 러시아해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한반도 정세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바 없는것 같다. 강대국들의 이권에 따라 남과북으로 반토막나 서로 불신만 팽배해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자주국방을 하지못할 경우 식민지가 되고 있으며 외교협상에서 불리하게 끌려갈 수 밖에 없다.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우방도 없지만 진정한 우방은 군사적으로 예속시켜 계속 의존하도록 하는게 아니고 군사적으로 상대우방을 스스로 일어서서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이 19세기중엽 서구의 개항압박의 도전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주변국의 속박과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원인은 여러요인이 있겠지만 주요인은 조선시대의 정신을 뒷받침해온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며 패쇄적인 유학의 한 학파인 성리학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불교는 물론이고 유학의 진보성향이 있는 양명학이 들어왔지만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이 조선 선비들사이에 팽배해서 양명학이 정착하여 유학의 양대산맥을 이루지못한 것은 뼈저리게 아쉬운 일이다.
개인의 사고나 국가의 이념이 너무 경색되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다양한 정치이념이 받아드려지기 어려우며 변화하는 사회나 국제정세와 시대정신에 결국 뒷처지고 말 것이다.
끝으로 대마도를 여행하면서 과거 우리의 역사와 연관된 장소에 대한 예비지식을 가지고 방문하면 훨씬 재미있고 의미있을 것이다.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조용히 가족과 함께 피서지로서 좋으며 적은 비용으로 일본의 문화를 접할 수있는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며 현재 우리사회의 정세와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맨뒤의 건물이 미우다 팬션
미우다 해변
한국 전망대안의 부산야경 사진
안개로 부산이 안보임
조선 역관 위령비
에보시타케 전망대 올라가는 입구
전망대올라가면서 보이는 아소만
와타즈미신사의 토리히
신사의 정면
만세키다리의 항로
아소만쪽에서 역류타고 나오는 어선
다리를 지나 쓰시마 해협쪽으로 항해
첫번째 만세키다리(1900년)과 두번째 다리(1956)
오른쪽 아치형이 최근다리(1996년)
마라톤후 노천탕에서
발틱함대의 항적과 도고의 정(丁)자 전법
첫댓글 잠시 역사의 현장으로 빠져 봤습니다. 민비시해ㅡ 제물포 해전 ㅡ 쓰시마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