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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세요?" 하는 문자에
"뭐 하긴? 이렇게 전화하고 있쟎니?"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저랑 이슬람전 가실래요?"
가야지, 가야지 하고 있던 차에
느슨한 추석 다음날의 콜은
명사수의 그것처럼 팍 꽃쳤다.
막 내리려던 참에
" 저, 다음이 이촌역이에요." 문자가 왔다.
이상하리만치 늘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현장에 나타나는 것고 그렇고
늘 어디냐고 물어 오는 문자가
연인같은 착각도 불러 왔다.
그 친구는 커피를 좋아해
오늘은 내가 그녀에게 커피를 받쳐야지 하고 있는데
그녀가 가방을 들어 보였다.
한 눈에 소풍나온 가방이었다.
피크닉 기분 나는 게 기분이 UP되면서 가슴이 뭉클하였다.
피크닉 백을 보관함에 넣어 두고
입장권 구입 창구에 서 있는데
나를 밀어 내면서 입구에 있으란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을 때
상기된 표정으로
진흥원 사람이 입장권을 주어 한 장만 구입했다는 것이다.
"진흥원 누고?"
"파란 상의의 남자예요."
파란 상의를 찾아 사람 숲속을 훑고 있을 때
파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윤 선생님! "
지난 5월에 서촌 해설하셨던 윤성기 선생님이셨다
그녀는 수강 태도가 좋아 누가 보아도 모범적이었고
평소 강의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놀랬던 곳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었네?
몇몇이 찾아간 불교 미술이었고
우리도 우문알이지만,
우리 문화유산 알림이의 김향주 선생님 시간이었다.
그 선생님의 열강에 모두가 감탄 했지만
특히 두 여인의 수업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박경숙 쌤과 김혜자 쌤이었다.
왠 남자가 입장권을 한장 주기에
"누구세요?" 했더니
"진흥원" 이라 하면서 사라졌는데 본적은 있는 남자였다고 했다.
이쪽이야 기억하고도 남울 일이지만,
그런 일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선생님 입장에서
그날 21명 출석으로 기억하는데
5월에 수강생 신분으로 한번 만난 사람을 기억해 내시는
윤성기 선생님의 기억력이 놀라웠다.
그녀의 진지한 학습 태도가 인상적이었을까?
아니야, 그게 아닐지도 몰라.
그녀의 분위기가 남다르기 때문?
2시 해설을 재미있게 듣고나니 3시 해설이 시작되었다.
3시 팀에 합류하여 다시 들으니 더욱 재미있었다.
2번의 해설을 듣고도 모자라 다시 천천히 둘러 보았다.
히잡, 차도르도 그런데
눈조차 망사로 가리워진
부르카 속 여인들의 삶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도 큰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서 조차 밖을 맘대로 내다 볼 수 없었다 하니
그들의 삶이 어떠했을꼬?
투박하고 촘촘한 창틈 사이사이로
밖을 보게끔 했다는 것이다. .
볼수록 아름다운 기하학적인 아라베스크 문양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다리 아픈줄도 몰랐다.
아라비아와 이슬람에서 많이 사용하는
여백없이 꽉 채운 연속 무늬의 아라베스크 문양은 현란했다.
궁전의 정원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커다랗다는 말이 너무도 작은 거대한 <정원 양탄자>를 보면서
또,
우리네도 옷에다 수도 놓고 그랬지만
그 고운 수가 놓여진 옷들에서 경외로움도 느꼈다.
왕실 옷도 아니더구만.
요즘 우리는 이상봉이 한글 옷을 많이많이 발표하고 있는데
그 옛날에 알라 글자를 옷에다 수놓아 입고 전장에 나가면
알라신이 자켜 준다고 믿었다 한다.
100은 신의 숫자이기에
99개의 알라 라는 글자를 수놓은 액막이 옷을 입고 출전했다 하니
부르카속 여인의 삶이 짐작되었다.
이슬람전에서 얻어 들은 얘기에 의하면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목욕을 평생 23번 하였다 한다.
물이 귀한 시대여서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머리에 이가 있었다 하고.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혁명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사치의 대명사였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코 그런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뛰어난 미모의 오스트리아 공주로서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왕비가 되어.
처형되기 전까지 감금 되었던 감옥을 잠깐 본 일이 있다.
또,
베르사이유 궁에
고향의 농촌을 그리워하며 만들었다는 농촌 마을을 보고
그 후 나는 그녀의 삶을 들여다 보게 되어
감옥에서 양말을 기워신었다는 기록도 보았다.
영토 문제로 프랑스와의 관계가 껄끄러웠기 때문에
그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인에게는
태생적으로 받아 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었으리라.
가난으로 성난 군중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했다는 말도
그녀의 말이 아니라고 역사서에는 나와 있다.
프랑스 혁명군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했고
오스트리아 인이이게
프랑스를 망하게 할 여자라는 둥
지극히 평범한 성격의 어여쁜 왕비에게
온갖 소문을 붙혀
확대 재생산 되는 과정을 통하여
38세에 단두대로 보내 버렸던 것이다.
사치의 대명사로 불렸던 것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한다.
빼어난 미모와 패션 감각으로 사교계의 모델로 등장하면서
궁중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연회를 자주 베푼 것은 사실이나
검소한 남편, 루이 16세의 짝으로써
사치를 하지는 않았다 한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왕과 왕비의 일상을 공개했는데
백성과의 친밀감을 도모하는 목적도 있었고
왕의 왕성한 식욕을 보게 함으로
백성을 기쁘게 해주는 써비스 차원이기도 했다 한다.
심지어 왕비의 출산 장면을 공개함으로써
왕손이 바뀌는 일을 방지 하고자 했다 하니
타국 출신의 왕비가 받았을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꼬?
마리 앙투아네트는
두번째 출산부터는 공개하지 않았다 한다.
나는 워낙
궁중 여인들의 얘기를 좋아해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공개적인 출산을 했다는
마리 앙투와네트의 방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 일도 있다.
내가 프랑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재불학자 박병선 박사의 영향이 컸다.
재불학자 박병선의 기사를 보고
미테랑이 했던 말을 떠 올렸다.
예전에
우리의 고속철이 떼제베로 결정을 앞둔 싯점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되돌려 주겠다고 했던 미테랑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랬던 일인데
떼제베는 문제점이 있어 차고에서 녹슬어 가고
공사는 무기한 지연되고 있을 때
프랑스 국립 박물관 측에서
되돌려 줄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해 버린 일이 있었다.
미테랑이 쏙 빠지면서
프랑스 국립 박물관장도 아니요,
박물관의 실무진 나부랭이와 주불 대사간에
물밑 접촉을 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미테랑의 말을 나처럼 곧이 들어 버렸던
우리 학자들과 법무팀에서
컴플레인을 제기했을 때
주불 대사관 측에서
안절부절하며 조용히 기다려 줄 것을 부탁했다.
때 맟춰 그 쪽 박물관 측에서
국가 소유로 되어 있는 문화재를
반환할 수는 없는 일이다고 못을 박아 버렸다.
어렵사리,
영구 임대라는 명목으로
우리에게 돌아왔지만,
다 된 일을 놓친것 같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왕실의궤가 돌아 왔다고
우리 진흥원도 흥분해서
여차지차 했던 기억이 있다.
어람용 왕실의궤를 접하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경이로웠다.
천연 물감이기에 그렇게도 선명했고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지금 갑자기
우리 진흥원이 한 문화재 지킴이로
문수산성을 맡았던 일이 생각난다.
전에는 가끔씩 보호 차원의 청소도 하고 그랬는데
어떻게 되고 있기에
이렇듯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까?
독일이 약탈해간 프랑스 문화재에 대해서
독일과의 협상시에
프랑스 외무성장관이 직접 주도하여 문화재를 되돌려 받았으면서
우리와는 민간인 차원의 문화재 상호 교류방식으로
영구 임대 카드를 들고 나왔을 때
우리나라에 영구히 있으면 되지 않느냐는
패배주의적 발상으로
외규장각 도서의 소유권이
공식적으로 프랑스에 있음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약탈된 문화재는 교섭 대상이 아니요,
조건없이 되돌려 받아야 할 일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협상력 부족으로
절호의 챤스를 놓쳐 버린 점을
지금도 분개하고 있다는 나의 말에
싱겁게 웃는 사람들이
대체, 어느나라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병인양요 때 침략으로
문화재 약탈을 해 간 약탈범에게
면죄부를 주고 말았으니
앞으로 있을 유사한 반환 협상시에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된 점이 마음에 걸린다.
병인양요의 침략도, 외규장각 도서 약탈도
엄연한 범죄 행위였건만
인심쓰듯
영구 임대 카드를 내 밀었을 때,
그것도 좋다고 낼름 받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 예산의 3%를 왕실에서 쓰는데
루이 14세, 15세 때는 훨씬 훨씬 초과해서 썼지만,
19년 통치기간의 루이 16세 때는
단 한번도 한도를 초과한 일이 없었음은 물론
예산의 1/10을 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바닥난 재정을 물려 받은 탓에
예산의 1/10을 쓰고도
프랑스를 파탄에 몰아 넣은 죄를 뒤집어 쓰게 된 것이다.
실은 루이 16세 즉위 당시 파탄 직전이었다 한다.
죽음의 전날 사이좋게 지냈던 시누이에게
당신이 있어 참 좋았다며
자기 자식들을 부탁한다는
끝을 맺지 못한 마지막 편지를 보면
그녀가 결코 악인일 수가 없음을 알고도 남을 일이다.
다 쓰지 못한체 날이 밝았다 하고
간수가 펜과 편지지는 주었다 한다.
간수에게 부탁해 봐야 전해줄 것 같지 않아서
검사에게 마지막 편지를 부탁했다는데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즉위하자
그 검사가 정략적으로
형수의 편지를 루이 18세에게 바쳤다는데
형의 처형에 동의한 자들에 대한 처리로
그 역시 추방 되었다 한다.
그 유명한 마지막 편지에
범죄자에게 내리는 치욕적인 죽음이 아니고
당신의 오빠를 만나게 해주는 선고라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식과 시누이인 당신을 위해서 살았노라고
또,
다정한 마음씨로 많은 걸 잃게된 당신을 두고 간다는
소설같은 대목이 있었다..
우리의 죽음에
복수를 위한 복수를 하지 말아 달라고
자식들에게 전해 달라는 대목에서
나는 울컥했었다.
르느와르나 모네의 그림에 나오는 양산도
파리의 시대상이 낳은 산물이란 걸 읽은 기억이 있다.
집에 화장실이 없었다고.
하긴,
베르사이유 궁에도 화장실이 없었다는데 뭐.
궁에서의 긴 연회때
귀족과 대신들조차 베르사이유 뜰에다 용변을 보아
냄새가 진동했다는 기록도 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 루브르 박물관으로 사용중인
루브르 궁전에
화장실이 없어서 오물로 뒤덮혀
더 이상 어찌 할 수가 없어서
베르사이유궁을 짓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더 큰 이유는
귀족과 대신들이 파리를 장악하고 있어서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다 궁을 지어
그들을 궁에서 살게 함으로써
파리에서의 역할을 막을 수도 있었고
그로 인해
부와 권리가 줄어들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다.
그 효과는 적중했다고도 한다.
내 눈으로 직접 읽은 사항이기도 하다.
5층 짜리 집에서 내려 오기도 귀찮고 해서
위에서 오물을 아래로 버렸다 한다 .
그 벼락을 피하고자 양산을 즐겨 쓰게 되었고
땅바닥에 널려진 오물을 밟지 않으려고
하이힐을 즐겨 신었다는 글도 본 일이 있다.
양산의 용도가 또 있었으니
그것은 길에서 뒷일을 볼 적에
엉덩이를 가리기 위함이라고 했다.
잘록한 허리에 긴 챙의 모자를 쓰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그 용도로 그 예쁜 양산을 썼으리라곤
실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박물관으로 놀러 간다더니
인도 무굴제국 얘기까지 정말 재미 있었다.
해설이 없었더라면 그렇지는 못 했을 것이다.
쿠웨이트의 공주가 1970년부터 사 들인 유물로서
국가에 영구 임대했다는 일간지 기사에
석유파동으로 벌어들인 돈이라는 대목을 본 기억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얄미울 정도로 맞는 것 같다.
요즘 전통문화가 점점 더 재미있어진다.
내 손이 닿는 곳에
나를 즐겁게 해 줄 해설사님이 있다는 사실에
요즘 더 감사하고 있다.
그들과 교분을 유지만 한다면
나의 노후는 멋진 문화속에 있을 것이다.
120살까지 살아서
우리를 끝까지 케어 해 주기로 약속한 조태희 쌤도 그렇고
그의 동갑쟁이 최금선 쌤도 120살까지 살게 해 주겠다 했으니
그 커플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금선 쌤이라면 껌뻑하는 태희 쌤이기에
금선 빽이라면
나를 120살까지는 몰라도 100살 정도야 살게 해 주지 않을까?
몇 년 후엔
진흥원에서 같이 수강했던 친구들 중에
누구인가는 내 손을 잡고서 궁궐을 구경시켜 줄 것 같다.
모르긴해도
야무진 조선희 쌤도 그렇고
조석으로 해설사님 속에 묻혀 사는 복실 쌤도 그렇다.
조금은 물렁해 보이는 복실쌤을
한강 해설사 교육에 들여 보낼 때
설마 잡아 먹기야 하겠어?
재미난 얘기 듣고 오라고 가볍게 등 밀어 보내면서
무슨 얘기 들었는지 우리들 앞에서 해 보라고도 했다.
그 복실 쌤이
금선 쌤과 태희 쌤의 도움으로
그 길로 들어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청자정으로 갈까 하다가
운치있는 등나무 그늘의 벤취에 앉아 피크닉 기분을 내 보았다.
우린 그 벤취에서 사람들을 다 보내고 밤도 잊은채
그동안 살아온 얘기로 서로에게 빠지고 말았다.
전철을 타고 보니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이제 우린 설겆이 할 군번도 아니고
그보다 바뀐 패턴으로
명절을 짧게 지낸 영향인지
추석 당일 점심이 지나자 카톡이 요란했다.
시골에서 올라 오는 중이라고,
산소에서 돌아 가는 중이라고.
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작년에도 조금, 재 작년에도 조금은 그랬지만
명절이 그리 바빠 보이지 않았고
명절 후유증도 있어서
연휴가 훨씬 지나야 시작되던 전화질?이
실시간으로 카톡에 올라왔다.
예전 같으면 힘들어 누워 있기도 하련만
간소한 차례 덕분인지
명절 후유증 소리 같은 건 나오지도 않았고
날아오는 문자에
어딘지 비어있는 마음이 묻어 있었다.
허리 끊어지게 음식 만들던 친구들도
소꼽장난 같은 양만큼만 준비하는 관계로
시간이 나기도 했겠지만
즐겁단 느낌보다는 허한 마음이 전해져 왔다.
이슬람전 관전시부터 날아오던 카톡이
피크닉이 끝나가는 싯점까지 온 것으로 보아
변화된 명절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심 자매 친정 엄마 산소 가는 길에
따라 붙었다는 홍순희 쌤도 그렇고
성묘 끝내고
광릉 고모리 까페촌에 앉아 있다는 뉴스도 그랬다.
동생 심씨가 고스톱을 재미있게 잘 치기에
언제부터 갈고 닦은 솜씨인가를 물어 보았을 때
고스톱을 좋아하셨다는
아픈 엄마와 놀아 드리려 배웠다는 것이었다.
물풀처럼 떨렸던 그 때의 잔잔한 기억과
그 엄마를 그리워 하는 심 자매에게서 느끼는
작고도 큰 마음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그 자매에게서 어렸을 때
내가 놀았던 방식을 보곤한다.
내가 골목을 한바퀴 돌았던 것처럼
그 자매는 자전거 타고 휭 하기도 하고
우선,
동네 친구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자매가 같은 동네이기에
언니 친구, 동생 친구가 다 같이 친구로 엮여 있었고
동네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많아 보였다.
어떤 땐 서방파처럼
연신내 파를 몰고 나타나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껌 깨나 씹으면서
골목을 휘젓고 다녔을 것 같은 걸음걸이가 더욱 그랬다.
그런가 하면,
추석 전날 저녁이란 것이
어쩐지 부산하고 스산하련만
나의 스케쥴을 알고 있는 최규자 쌤이
그 일을 체크하는 전화를 해 주었다.
점잖기로 소문난 친구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보내 주는가 하면
쌩뚱 맞게도 O Holy Night 이라니.
어디 그 뿐이랴.
자기 엄마 손등이 고목 밑둥치 같다고 울적해 하는 친구.
아무튼
명절 언저리가 전과 같지 않은 친구들에게서
뜨거운 김이 다 빠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제 찢어졌어요."하는 문자가
늦은 시간이기에 어쩔수 없이 헤어진다는 느낌이어서
"나도 곧 찢어지려고 해" 하고 보니
내 주변 사람들의 허전해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것만 같다는 봉숭아 연정처럼
명절 뒤의 고요라기 보다
어쩐지 밀려드는 허전함이 문자로 나타난 것이리라.
나라고 그들과 다를 리 있겠는가?
"밤 길 무섭소, 일찍일찍 댕기소. 성아!"
전설의 고향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 된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 소리가 희미한 기억속의 야경꾼 호루라기처럼
나의 마음을 아득한 옛날의 그 시절로 데려가 주었다.
심 자매 친구답게 붙임성도 좋아서
심 자매 옆에 두고 보낸 문자가 나를 떨리게 하였다.
그들은 정을 지니고 있었다.
같이 나누자고도 하고 있었다.
나눌수록 커진다더니 그녀들이 그랬다.
먹을 게 지천에 널려 있고
너무 먹어서 생긴 병이 더 많은 세상에 살다보니
명절의 상징성이 옅어져 가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나는 추석하면 땀 흘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음 계절 옷을 사 주시는 엄마 때문에
겨울 옷 같은 걸 입었던 것이다.
두툼한 옷을 입고 땀을 흘릴망정
새 옷을 입으니 기분 좋았던 기억과
정말로 놀랐던 충격의 기억이 있다.
엄마가 추석옷으로 작년것을 입자고
나를 달래면서
입도 다물어 지지 않는 왕 사탕을 물리고
내 손을 잡고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장롱에서 꺼낸 색동옷을 입혀 주면서
" 옷이 작아졌네?"하는 것이었다.
"엄마, 여기다 넣지마!"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거기에 넣었기 때문에 작아진 것이다.
엄마가 거기에 넣어 옷이 작아졌다고 막 울었더니
"아니야. 네 키가 큰거란다."
그날의 그 충격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크고 있다는 게 큰 충격이었고 그건 사건이기도 했다.
내가 크고 있다니?
그러니,
그 게 몇 살때의 일이었을까?
작이진 색동옷을 입기 싫어서 계속 울었더니
별수없이 엄마가 날 데리고 시장엘 갔다.
이번엔 소매가 긴 옷을 사는 것이었다.
한단 줄여서 내년에도 입힐 심산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이치도 몰랐지만,
나중에 커서 생각해보니 그런 내용이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이 있었지만
걔는 물려 입는 것을 질색팔색하여 밥을 안 먹는 통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추석만 되면 그 얘기가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친정이다.
장롱에서 꺼낸 작아진 색동옷.
엄마가 잘못해서 작아져 버린 색동옷.
엄마, 여기다 넣지마! 소리 지르고
그 옆의 앉은뱅이 책상에서 얼굴 파묻고 울었던 기억
그리고,
긴 소매 색동옷
그런 토막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하다.
나중에 퍼즐처럼 꿰맟춰 보니 그러그러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내가 크고 있다는 위대한? 진리를 알게 해 주신 엄마,
그 단아하셨던 엄마가 지금은 조그만 몸집의 노인일 뿐이다.
날이면 날마다 집에 가득한 친척들로 인해
사과를 반쪽씩 배급받던 시절에
명절엔 사과를 하나씩 받아서 기분 좋았던 어린 추억이
오히려 풍성한 추석을 느끼게 해 주니
도무지 귀한 게 없는 지금이
옛보다 나은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해피 추석! " 하고 심플하게 날렸던 나의 문자에
"오케, 메리 추석!" 이라는 답문까지
장르별로 다양한 추석 선물을 받았다.
그림의 떡이라더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 선물도 받았다.
추석 언저리의 이러저러한 상황들이
주부로써의 역할보다는
이제 나를 위한 시간을 갖겠다는 신호로 받아 들이고
이것으로
이번 추석을 마무리하련다.
첫댓글 긴긴 글로 용산국립박물관부터 언니 어릴 적 고향집 풍경. 아주 작은 꼬마 언니모습까지 잘 그려보고 갑니다. ^^
고마워요, 현숙씨.
와~~ 읽기도 숨이 찬 기니긴 글로서 추억과 정과 싦의 편린을 엮어가시는 회장님의 내공에 박수를....
추억과 정과....
네, 제가 좀 그런 쪽입니다. 인연을 중히 생각하는 편이죠. 이강부 선생님, 유네스코 스터디에서 자주 뵙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