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뭐야..?"
"보면 모르니? 삐삐야. 이게 새로나온건데 무진장 좋다..."
"삐삐인줄을 알겠는데 이걸 나보고 어떡하라구..?"
"너...하라구..."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이걸..."
"우리...이제 곧 고3이야. 앞으로 일년간은 계속 만날수도 없을거구...
게다가 난 대구에 있구 넌 경주에서 학교다닐꺼잖아....
그래서 너 보고싶을땐 음성메세지남기고 삐삐칠께...."
"야아..한달에 돈만원씩....들어간다며...? 나 유지비도 없어..."
"훗...이번에 집에 외박갔을적에 형한테 이야기하고 대출(?)받은거야.
내가 대학가서 아르바이트해서 갚아주기로하구...그러니까....걱정마..
우리약속 잊어버리말기...둘이 나란히 K대 다니는거다..알았지..?"
"....으응...."
길우는 그렇게 말하고 난뒤 감격해있는 내게 삐삐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삐
삐는 커녕 무선 전화기도 하나없는 미개한 집에서 살고있는 난 그게 신기
할밖에...게다가 삐삐를 선물해주는 남자친구라니.... 잘키운 남자친구 하
나 열 오빠 안부럽군.. 난 입이 찢어져라 기뻐하며 삐삐를 받았다. 공짜라
면 양잿물도 받아마신다는 한국인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있었던 탓일
까....?
암튼 길우와 만났던 대구기숙학원에서 돌아와 이내 인간취급도 못받는다는
고3시절로 들어갔다. 한숨과 걱정, 참담한 상상과 함께.....길우가 보내
준 응원에 약간의 기운을 내며...(물론 그렇게까지 최악의 시간...
길우가 음성메세지를 남길때면....난 공중전화앞에서 입을 가리고 킥킥거
리고 웃으면서 그 음성메세지를 몇번이고 몇번이고 다시 들었다. 결국 가
지고나간 동전이 다 떨어질때까지 뒤에 있는 사람이 째려보는데도 꿋꿋하
게....말이다.
그런데 하루에 혹은 더뎌도 이틀에 한번은 꼭꼭 들어오던 길우의 음성메세
지가 뚝 끊겨버린건 시험 50여일전 내 생일날이었다. 난 처음엔 삐치고 다
음엔 당황해하다 결국 대구의 길우집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사흘여를 꼬
박 전화기에 매달렸지만 길우네집전화는 아무도 받지않았다.
계속 울리는 전화벨소리.....
텅빈 집....?
안그래도 망상이 해수욕장이던 내게 그런 상상은 길우에게 무슨 큰 사고라
도 났나보다 하는 생각까지 들게했다. 그래서 10월 모의고사가 끝나면 무
리해서라도 길우네 집에 찾아갈 각오를 하고있을때였다. 일주일만에 음성
메세지가들어왔다는 신호가 왔다.
난 야간자습중에 복도를 이리저리 순회하며 눈을 부릅뜨고 학생들의 영광
의 탈출을 저지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담임선생님과 이사도라(이리저리 사돌
아 다니신다고 붙여진 별명)선생님의 눈을 피해 일층의 공중전화박스로 내
달렸다.
- 미안....감기가 너무 심하게 걸렸었어.
목도 팍 쉬구....내 목소리 좀 이상하지...?
암튼 그 동안 말도 못했다는거아냐.....
병원가니까 신경성몸살감기인데다 좀 무리했다고 입원하라구
그래서 일주일 푹 쉬었지.뭐..
넌 잘 지냈지...?
일주일 쉰것땜에 좀 바쁠것같애....
아마 자주는 음성 못넣을거구...이해할수있지...?
그럼 시험끝나고 보자..그때까지 기운내구- 안녕, 유정아-
삐익- 음성메세지보존은 7번, 삭제는 8번....뚜-뚜-뚜-뚜-뚜-------
뒤늦게 변성기라도 지난건지 조금 쉰듯한 길우의 메세지가 끝나고 언제나
처럼 인형목소리같은 여자의 안내가 들리고......내가 멍하게 서있는 동
안 전화는 끊겨 수화기너머에서 신호음만 계속 울렸다.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해할수있냐구..? 당연히 이해할수있지..아니
이해가 아니라 감사해야하는거겠지..? 난 마음한구석의 긴장이 허물어지는
걸 느끼며 주저앉아버렸다.
다행이야...정말 다행이야..큰 일...아니었던거지...? 길우..인제 괜찮은
거지....? 하느님, 부처님이며 공자, 맹자, 순자, 장자...마호메트...심
지어 누군지도 모르는 통일교교주 문씨아저씨한테까지 감사하다는 말을 중
얼거렸다. 물론 그러구서 한참 서있다 담임에게 걸려서 된통 혼나긴했지
만 누가 뭐라고 해도 내 기분을 망쳐놓을수는 없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넣어지는 길우의 음성을 들으면서 난 막바지 공부에 신경
을 쓸수있었다. 시험당일날.... 예년보다 어렵다는 시험출제위원들의 말에
도 불구하고 난 내 실력이상을 발휘할수있었다.
순전히 나보다 공부잘하는 길우와 함께 K대시험을 봐야겠다는 응큼한 속셈
때문이었겠지만.... 내 성적을 보고 제일 기뻐한건 누구보다 나였다. 이
정도 점수라면 K대에 내도 무난할것같다는 선생의 말....난 길우에게 음성
을 남겼다. 이제 길우와 같이 K대 나란히 다닐수있다구...그러니까....원
서내러가는날 같이 내자며....그리고 녹음된 길우의 음성....
-시험 ...잘 봤지...?
K대...가능하다구...그래..축하해...
그럼 원서내는 마지막 날 3시에 K대시계탑앞에서 보자,
원서내고 와라...-
어쩐지 낯선듯 들리는 길우의 목소리..난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들었다.
다소 쉰듯한 목소리에 긴장한 듯한...그런 목소리였다. 난 최악의 상상까
지
각오했다. 길우가 시험을 무진장 못쳐서 나랑 그 학교에 같이 다니지못하
나
보다....바보같은 녀석, 그런다고 내 맘이 달라질것같애...재수하면 기다
려주구 삼수해도 기다려줄껀데...말야. 설마 다른 여자가 생긴건 아닐
까..? 그럴리가..근데 왜 기분이 이렇게 이상하지...?
빌어먹을 상상력은 어쩌자고 그렇게 발달해있는건지.....별의별 생각을 다
하느라 난 한숨도 못잔 얼굴로 길우와 약속한 날을 맞았다. 그리고 그 날
이되자 난 원서 낼것보다 길우와 만날것땜에 더 흥분해 있었다.
"유정아. 면접보러가는날도 아닌데 왜 자꾸 거울앞에서난리야...안늦어?"
하는 핀잔섞인 엄마의 목소리에 몇번이고 보았던 거울을 아쉬운듯 다시보
며 집에서 나와 대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k대..일년동안 내 책상머리
에 붙여 놔서 지겹도록 본 건물들..난 심장이 꼭 죄는 긴장감을 느끼며 원
서를 제출하고 시계탑앞으로갔다.
2시 20분....내또래로 보이는 여자애한명이 더 있었다.
2시 40분, 그 여자애가 일행을 만나 가버렸다. 아..무진장 썰렁...
2시 50분...아직도 아무도 보이지않았다.
2시 55분.....아-무-도....없다...
3시 10분....시계탑에 눈길을 주는 사람도 없다......
3시 20분....정말이지 이렇게 추운날 바람을 맞히다니, 주겨버리겠어...!
3시 25분...길우네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않는다...
그리고...3시..35분......울음이 터지기직전이었다....
내가 서있는 앞에 왠 은회색 소나타가 한대섰다. 나는 이 학교사람도 아닌
데 나한테 길을 물을래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창문을 내리고 왠 남
자가 말을 걸었다. 순간적으로 "길우?"하는 소리가 튀어나올만큼 길우와
닮아있는 남자였다. 아마도 길우가 나이를 열살만 더 먹으면 꼭 저렇겠
다...라는 생각을 하고있을때...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유정이 학생...? 늦어서 미안해요..."
"..네?"
"나 길우형이예요...길우가 지금 기다리는데 타요..데려다줄께요..."
"내가 아저씨 뭘 믿고 그 차에 타요..."
불안해하며 튕기자 말없이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내보였다. 그리고 길우의
학생증도 함께...난 그래도 못믿겠다는 표정을 하자 그는 말없이 차에서
내려서 조수석 차문을 열어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난
더 이상 실랑이를 할기운도 없고해서 차에 올랐다. 길우 만나면 무진장 욕
해줄꺼야.. 하는 생각을 하며......
"길우...어디서기다려요..? 왜 직접 안왔어요..? 원서 안낼꺼래요...?"
불만섞인 내 물음에 그는 아무말없이 날 힐끗보더니 묵묵히 운전만 계속했
다.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길우 사고난거아네요...? 그런거예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앞에서 차가 하나 끼어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계
속 침묵....그는 한참동안을 도로를 따라 달리더니 인적이 뜸한 길한곳에
차를 세웠다. 아무리 둘러봐도 초겨울 한겨울추운 날씨에 사람은커녕 개한
마리보이지않는 그런 국도변이었다. 아차..속았구나...하는 생각이 들 겨
를도 없이 그는 차에서 내려 내쪽 차문을 열어주었다.
"아...아저..씨..누구예요...누군데...."
"길우....여기있어요..."
"...?"
"....아가씨한테 이야기해줄게 있어요....
이야기 다 듣고도..나 미워하지는 말아요...길우부탁이었으니까...
일단 나...따라와요..."
그는 차뒷좌석에서 국화꽃다발을 들고서 묵묵히 내 앞으로 걸어갔다. 난
어
리둥절해하며 그를 따라갔다. 도대체 길우는 왜 이렇게 말도 안되는 장난
을 하는거야..하는 생각과..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목
소리....말투..억양....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서 많이 들어본..목소리, 길우가 남긴 음성..메세지...? 그리고 그가 들
고있는 흰국화....
무슨...일이야...?
뭐가 이렇게 제멋대로야....?
머리속이 하얗게 텅텅 비어버렸다.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잘못된 건지 알수
없었다. 하늘과 땅이 번갈아가며 빙빙 도는것같았다. 아무런 생각없이 좁
은
산길로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만 쫓아 한참을 올라갔다. 그리고 마른 나뭇
가지를 밀치고 빈 공터에 올라선 내가 본 것은...... 묘지였다. 두개의
무덤이 나란히있고 그 조금 아래쪽에 작은 무덤이 하나 더 있었다....
뭐야....이건....
왜....날 이런데로 데려오는거야....
"...기...길우....어딨어요....? 이건 아냐...이런게 아냐...."
작은 무덤옆에 서있는 돌에 새겨져있는 글씨.....
[짧게 살았지만 많은 것을 사랑하며 살았던 아우..]
[이제 편안히 눈을 감길.....]
[1994년 10월 2일....고 강길우 형 성우 씀, 해운 새김....]
몇번이고 되풀이하며 읽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수없었다..무슨 소리인걸
까..? 왜 이런 글씨가 새겨진걸까...? 10월 2일...? .....눈을 감길....
무슨소리야...? 고 강길우..라니..이건 무슨 소리야..하나도 모르겠어...
무슨말인 지 알수가 없어....
난 쓰러지듯 그 비석에 기대어 스르르 주저앉았다. 마른 흙위에 무엇인가
가 툭 떨어졌다. 작은 흙먼지가 일었다. 물....? 눈물인걸까... 내가 지
금 울고 있는건가...? 내가 지금 여기 왜 있는걸까...저 남자는 왜...길
우를 만나게해 주지않는걸까.....?
"길우...어디있어요...? 왜 거짓말을 하는거예요?...."
"....교통사고였어요. 심야자습마치고 난뒤 돌아오던 길....아버지와 엄
마
가 오랜만에 그 애를 데릴러갔었죠. 다른날엔 그냥 택시를 타고 돌아왔었
는데 그날따라 아버지가.....데릴러가겠다고...그리고 돌아오던길에.....
음주운전하며 차를 몰던 반대편 차랑이 중앙선을 넘어 ......부딪쳤어
요.... 앞에 앉으셨던 아버지,..엄만 ...병원에 옮기기전에 숨이.....멎
으셨고....길우도 위독하다고.....결국...하루를 넘기지못했어요... 내
가 연락을 받고 갔을땐 의사가 산소호홉기를 떼고...마지막 말을.....들
으라고.....길우는...끝까지... 학생에게 알리지말라고...하더군요. 시
험..얼마 남지않았다며..그리고 내게...부탁했어요...일주일에 한번 정
도...음성을 넣어달라구요.......그리고...."
"아냐..그게 아냐! 사기꾼...거짓말장이....이게 아냐..왜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왜 길우 못 만나게해요...! 이러지말아요..이렇게....거짓말
하지...말아요...."
난 그에게 매달려 욕을 하며 엉엉 울었다. 뭐라고 지껄이는지 나 자신도
알수없었다...이건 잘못된거야. 이렇게 엉망진창일수는없어.....! 난 거
짓말이죠..? 거짓말이죠?..하며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길우와 닮은 얼굴...마치 10년의 시간을 뺀다면 그애와 쌍동이라고 불릴수
있을만큼 닮은 그의 눈자위가 붉어져있었다.....
난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꺼이꺼이하는 쉰소리가 날때까지 무덤을 때리
면서 울고...흙위에 엎어져울고...울고....또 울었다....내 울음소리에
날더러 울보라고 놀리던 길우가 살아날꺼라고 믿으면서...어디선가 나타
나 내 머리를 톡톡 치며 "울지마..나 여기있어..놀랐지?" 라고 말해줄것
같아서 또 울었다.....해가 빠지고 어둠이 내릴때까지....그러나...길우
는 오지않았다....
그날 날 터미날까지 바래다주던 그는 차표를 사주고 차에 태워주며 그랬
다.
"열심히 살아줘요..길우몫까지요..길우가 마지막까지 걱정했던건...학생이
었어요....난 이제 이땅을 떠냐요....길우...잘 보살펴..주겠죠...?"
난 희미하게 웃었지만...그 웃음은 그의 말을 알아들은 대답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인정할수도 받아들일수도 없었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자말자 침
대에 쓰려져 몇일을 끙끙거리며 앓았다. 열이 얼마나 올랐는지 알수도 없
었다.며칠 동안의 기억은 내머리속에 하나도 남아있지않았다.
살아갈 힘도 없었지만...살고싶지도 않았지만....그렇지만 난 결국 자리를
털고일어났다. 세상은 하나도 바뀐게 없었다. 내가 감히 [사랑한다]라는
수식어를 붙였던.....한 사람이 이미 사라져버린 세상이었지만 여전히 다
들 바쁘게 돌아갔다. 난....잊어버리기로했다. 잊어야했다. 잊어버리고 살
아야했다....생각하면....생각할수록...너무나 많은 것들로인해 내가 힘
들어졌으니까.....
나란히 다니자던 학교에 합격했지만 난 다닐수가 없었다. 엄마에겐 떨어졌
다며 거짓말을 하고 담임이 원서내라고 강요해 엉겹결에 함께 원서냈던 다
른 학교의 입학증을 받았왔다.
겨울의 끝이 보였다. 3월....신입생의 웃음소리....난 그들과 어울려 바
쁘
게 살았다. 즐거워야할 1학년의 시간들....그러나 내겐 길우를 잊기위한
시간일뿐이었다. 그럼에도 점점 더 선명해지는듯한 영상....
그리고 어느날부터인가...자취방에서 밤마다 누군가의 숨소리를 들었다.
쌕
쌕거리는 김게 잠듯듯한...사람의 숨소리......이따금 갸릉갸르릉거리며
목을 울리는 소리.... 잠을 자다 잠시 비몽사몽간에 눈을 떠보면 그 소리
는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누군가....내 방안에서 숨죽이고있는 나와
같이 잠이 들어있었다.
어둠속에서 울리는 그 소리가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않았다. 어떨때, 유난
히 길우가 많이 생각나 엉엉 울면서 잠이들면 난 누군가 내 눈물을 닦아주
는 손길을 느끼기도했다. 나밖에 없는 어둠이 가득한 방에..나 말고.....
누군가가 같이 있었다. 난.....그 보이지않는 존재를 믿었다. 그게 길우
라고....길우가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있어주는거라고 믿었다.
궁씨렁거리는듯한 내 혼잣말은 모두 길우를 위한거였다. 자취방에 들어오
기 만하면 내뱉는 말들..난 길우와 함께 살고있었다. 그 애의 호홉....숨
결...모두 느껴지는데....그애가 죽었다지만 내 곁에 이렇게 머무르는
데......따뜻한 호홉을 느끼는데... 누군가가 날 안아준다는 그런 편안함
에 더이상 울먹이지 않고 깊이 잠들수있는데...길우는 나와 함께 있었다.
조금씩...웃는 법을 배웠다. 내가 우울한 모습보이면 길우가 더 미안해할
거 라는 생각에, 내가 지쳐있으면 길우가 삐칠까봐...난 웃고..기운내
고...조금씩....마음을 열어놓고 살기시작했다. 세상은 회색빛이 아니
야. 살아있으니까....더 열심히 살아야해..내 몫까지.....그게 길우의 부
탁이었으니까....
이내 10월 2일이 다가왔다. 길우가...죽었던 날...그리고 내 생일....하
염
없이 전화를 기다리며 울먹였던 일여년전의 그 날이 다시 생각나 미칠것만
같았다. 길우.....얼마나 힘들어했을까....? 많이 아프지않았을까...?
내 머리속엔 온통 길우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내 생일 며칠전부터
길우의 숨소리는 더이상 들리지않았다.
빈방...어둠속을 감도는건 차가운 가을 바람뿐이었다.
난 뜬눈으로 자취방을 지켰지만 내 몸을 감싸는건 텅 빈 방을 감도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결국 가방을 꾸려 며칠동안 집에 내려가있기로했다. 내 생
일....조용하게 보내고싶었다....
오랜만에 앉은 내 책상은 엉망이었다. 동생이 나 없는 동안 쓴다면서 여기
저기 서랍을 다 뒤져놓은 모양이었다. 책들을 책꽂이에 챙겨넣고 서랍을
정리 하는데 어디선가 희미하게 삐삐소리가 들렸다. 난 화들짝 놀랐다. 길
우가 죽었다는걸 알았던 그날..이후로 삐삐는 내 눈에 안뜨이게 서랍깊숙
한곳에 넣어버렸는데, 건전지도 모두 빼버렸다. 정말은...버리고싶었지
만....길우가 선물 해준거라 차마 버릴수가없어 놔두었던거였는데.....
동생에겐 삐삐가 없었다. 우리집에서 삐삐를 가졌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가 잘못들은거려니..하고 무시해버렸지만 희미하게 들리던 삐삐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난 서랍을 뒤져 서류봉투에 둘둘 말아넣어두었던 삐삐를
꺼냈다.
일여년만에.....
화면엔 처음보는 전화번호가 뛰워져있었다. 난 말도 안되...하고 생각하면
서도 수화기를 들고 그 번호를 차례차례 눌렀다..... 신호가 갔다...심장
이...멎어비릴것같아...입안의 침이..바짝 말라버렸다....수화기를 들고
있는 내 손이...덜덜 떨렸다. 누군가.....전화를 받았다.
"유정이...?"
"..............."
"나야......나, 잊어버렸어....?"
"....뭐야..누..누구야.....?"
"길우야....나, 벌써 잊어버린거 아니지....?"
"......?"
난 혹시나 길우형이 장난치는게 아닐까 생각했지만.....그 목소리는 너무
도 생생히 기억할수있었다. 하이소프라노의 맑고 깨끗한 장난기섞인....
그 목소리는 내가알던 ...길우의 목소리였다......다소 쉰듯한 그 형의
목소리는 아 니었다....
그리고 잠시..잡음.....
"나...이제 가봐야해....미안해.."
"바보야....인사도 못했는데 난 한마디도 못했는데......."
난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길우였다....무엇을 의심할수있을까...? 그 목
소리..너무도 생생한 그 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고있는데....
"미안해..유정아.....
하지만 나 이제 가봐야해...너무 늦었어....."
"싫어..싫어..길우야..가지마......."
"....우리 유정이...울지말구...
울보야..또 우니...?
나 항상 네 기억속에 있잖아...알지?
건강하고..내 몫까지 열심히.....살아...."
"......길우야....?"
"사랑해...유정아....
그리고...미안해...내 마음..알지...?"
"..응...."
"유정아..나...이제 가봐야.....해...가야....네가 웃어..줘야....
지...."
길우의 목소리는 점점 더 희미하게 들렸다. 난 들고있던 삐삐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수화기를 꼭 잡고 길우이름을 부르면서 울먹였다....길우의
목소리와 섞여...[지금 거신 번호는 결번이오니....다시 한번 걸어주시기
바랍니다....지금 거신 번호는 결번이오니...]....시끄럽게 윙윙거리는
녹음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울음소리에 놀라서 마루로 나왔던 동생
이 삐삐를 주워들 었다.....
"누나....이 삐삐 건전지도 안들었네?
근데 전화하다말고 왜 울어...?"
지금 거신 번호는 결번이오니....다시 한번...
지금 거신 번호는 결번이오니....
지금 거신 번호는 결번이오니....
지금 거신.......
뚜-뚜-뚜-뚜------------------
동생이 건네준 삐삐를 꼭 쥐고있는 내 손등위로 눈물이 한 방울..툭 떨어
졌 다. 내 입가엔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웃어줘야...길우가 맘
편하게 떠날거니까.....그러니까.....
길우야....안녕....
..............................................
***********정말 슬프져????.,,,,,ㅡ.ㅜ.....
읽느라 수고 많으셨어여..좀 길져?..하하..
근데 전 이거 읽고 울었어여...
넘 아름답지 않아여?.....흑..ㅡ.ㅜ...
참,19대 선배님 결혼 축하드리고요...
언제나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