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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계승 예맥조선(부여·고구려) ‘진시황 진(秦) 타도’
강대한 예맥조선에 상대가 안됐던 한무제(漢武帝)
들어가며-위서(僞書) 삼국사기와 사기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일찍부터 외적의 강압과 내부의 사대주의자들, 그리고 폭력으로 정권을 쟁취한 자들이 자기의 약점과 비리를 합리화 하기 위한 기만책으로 인해 철저히 굴절되고 왜곡됐다. 예컨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패망하자 신라가 당나라에 추종하기 위해 국사를 개편 할 때, 당나라가 뜯어 고친 지리(地理)를 기초로 북경가까이 있는 낙랑군 등 소위 한사군을 모두 한반도 내에 두었다고 날조했다. 이는 한나라가 우리나라를 정복·지배한 것인 냥 왜곡시킨 것이지만 전혀 근거가 없다. 하물며 ‘삼국사기’가 위서인데도 진서(眞書)인양 잘못 가르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단군역사나 우리의 고대사를 말살하고 있다.
중국 사마천의 ‘사서’ 역시 위서(僞書)인데 이를 인용하며 학자연하는 이들이 있음을 본다. 또 우리 역사에서 누락된 4300년 전의 숙신국(肅愼國)이나 3000년 전의 예맥(銳麥=濊貊)에 대해서도 너무 모른다. 당시 숙신국(肅愼國)이나 예맥조선은 한(漢)나라를 위시해 중국 한(漢族)을 정벌, 정복, 제압한 것이 중국역사에 의해 판명됐다. 예맥조선은 한(漢)나라,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을 지배하고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진(秦)을 타도할 정도로 강대했다. 진(秦)은 중국 4000년 역사상 가장 강대하고 세계사상(世界史上)으로도 보기두문 대제국으로 당시 중국을 통일하고 국위를 떨친 나라였다. 이 진(秦)을 타도할 정도로 예맥은 강했기에 중국은 우리의 예맥이나 부여를 두려워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한 예가 있다. 한서(漢書 九十九中 列傳第六十九中 王莽)에 엄우(嚴尤)가 왕망(王莽)에 대해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나면 대우(大憂)라 말했다. 이 대우(大憂)는 대 정벌을 가리킨 것이다. 당시 부여와 예맥이 중국을 크게 정벌한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전한서(前漢書 七十八 蕭望傳 第四十八)에 당시 예맥조선은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을 지배하고 이들이 예맥에 예속됐음을 방증해 준다. 이번 칼럼은 오늘은 다소 중복되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역사적 기술이기에 기자와 위만 한무제의 허구역사에 관해 짚어보고자 한다.
중국 사서들 기록
“한무제(漢武帝)는 한민족을 지배한 일 없으며 오히려 두려워 해”
기자가 우리 민족을 지배한 일이 없고 위만이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지 못했다.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의 경우도 사마천의 ‘사서’는 물론 어디에도 그 행적이 전혀 없다. 이는 위만조선도 마찬가지다.
고대 예맥조선이 동주(東周)시대부터 한무제시대 까지 천여 년 동안 중국을 정벌, 정복, 지배한 사실이 중국사에 명기돼 있는데, 그 당시 우리의 변두리에 부족집단에 불과한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이 감히 우리를 넘볼 수 없었다.
한무제(漢武帝) 역시 우리 민족을 정복치 못한 것이 세계적으로 판명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한무제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사군을 설치했다’는 중국사의 위조를 그대로 번역해 실어놓고 있다. 한무제가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정복한 일이 없다고 중국 역사서에 분명히 명기(明記)돼 있다.
중국은 문서역사로서 ‘사서’와 ‘삼국지’를 내세우는데, 삼국지(三國志 第三十 東夷傳)에 보면 ‘漢武帝伐滅朝鮮 分其他 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이라고 했다. 즉,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사군을 설치하니 우리 한민족(韓民族)과 중국의 한민족(漢民族)이 분리됐다고 한 것이다.
중국 민족은 사군(四郡)에 예속되어 한무제의 지배를 받고 위만조선에 거류하던 한민족(韓民族)은 한무제의 지배를 받는 중국 민족과 분리되어 한무제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분명히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보고도 불분명하고 잘못된 역사라고 논하는 것은 실로 무책임하다.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했다는 사군(四郡)중 삼군(三郡)도 예맥에 빼앗긴 것을 보면 한무제도 역시 미약한 존재에 불과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한(漢)의 국력으로는 감히 우리 민족을 넘볼 수 없었다.
양계초(梁啓超 著 中國史硏究 六篇, 歷史上 中國民族之觀察32面) 등을 보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중국을 정벌한 민족은 예맥이었지 한(漢)이 아니었다. 당시의 중국은 예맥을 두려워한 시대다. 예맥조선(銳麥朝鮮)은 기자도 위만도 한(漢)도 당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리고 이를 계승한 것이 한(漢)에 밀리지 않은 강대한 부여, 고구려였다.
부여국 영토, 우리 선조들의 땅인 ‘예맥의 고지’(故地)로 기록된 역사적 사실들
산해경(山海經 第十一海內書經)에 보면 부여국이 예맥의 고지(故地)라 하고, 진서부여전(晉書夫餘傳)에 그 왕의 인문(印文)에 예맥왕의 인(印)이 있고 나라 안에 예맥의 성이 있었다. 다시말해 부여국이 본래 예맥이 땅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허구가 많은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와 사마천의 ‘사서’와 똑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는 ‘후한서 동이전’에도 이를 인정하는 내용이 있다. 즉, 삼국지부여전(三國志夫餘傳)에 선대로부터 전해 온 옥벽규찬(玉壁珪瓚)에 예맥 왕의 도장이 찍혀 있다는 것인데, 이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이 예맥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후한서동이전(後漢書東夷傳)에 예맥의 노인들이 한 말들이 기록 돼 있는데, 거기에는 ‘예맥은 고구려와 인종(人種)이 같다’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의 또 하나의 이름이 맥이(貊耳)했다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중국과 역사왜곡을 같이하는 일본 역시 일본서기(日本書紀 )에 예맥을 박(?)이라고 칭했다. 박(?)은 예맥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들 기록들은 부여, 고구려가 예맥조선을 계승한 것을 가리키는 명백한 증거다. 우리 한민족의 계보는 새로 바르게 정립돼야 한다.
한민족의 계보는 환국시대의 환인(桓因)→신시배달국시대의 환웅(桓雄)→고조선시대의 단군왕검(檀君王儉)→숙신씨(肅愼氏)→예맥→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고려→조선→대한민국 등으로 계승·발전해 왔다. 즉, 우리 한민족은 중단 없는 1만여년의 역사를 창조했다.
중국이라는 국호는 원래 우리가 쓰던 것을 중국이 도용해 한족(漢族)이 인류의 중심이라는 뜻을 취하기 위해 가져갔다. (열등의식이 변형된 것이지만) 자존심을 가진 중국인은 소위 대중화(大中華)라는 제국주의에 편향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위조하고 지금도 동북공정을 하면서 엄청난 역사변조 및 왜곡행위를 하고 있다.
고대 중국사를 위조한 중국학자 양계초(梁啓超), 사부아(謝扶雅) 등까지도 이를 긍정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에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을 멸한 후에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임명하고 기자가 주무왕(周武王)의 임명을 받아 조선왕이 되어 한민족(韓民族)을 지배하고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다시 기자조선을 계승, 한민족의 지배자가 되고 한무제(漢武帝)가 또한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허위기록을 하고 있다. 중국사 위조는 이처럼 상상을 초월한다.
가성(假姓)까지 내세운 한씨조선설과 기자가 한민족을 지배했다는 대오류(大誤謬)
70년대 중고교 국사교과서(참고서)에 보면 기자조선을 부인하는 다른 하나의 일설(一說)로서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이 있다. 이 설이 나오게 된 동기는 위만이 기자조선을 탈취하고 후손을 압박함으로, 그들의 본성(本姓)을 감추고 한씨(韓氏)라는 가성(假姓)을 사용한 것이다. 가성(假姓)을 한씨(韓氏)라고 하는 것은 본성이 한씨(韓氏)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한씨조선설은 본래 송나라 왕응린(王應麟), 청나라 고염무(顧炎武), 청나라 가경시대(嘉慶時代)의 왕계배(王繼培) 등이 시전 한혁장(詩傳 韓奕章)의 한씨(韓氏)를 근거로 위조한 것이다. 왕계배(王繼培)는 왕부(王符)의 찬부론(찬夫論)에 ‘옛날 주선왕(周宣王) 때에..한서(韓西)가 또한 한씨(韓氏)로 성(姓)하였다가 위만에게 망하였다’는 문구를 들어 한씨조선(韓氏朝鮮)을 억설(臆說)했다.(王符의 찬夫論, 卷九, 志 氏姓) 왕계배는 한(韓)이 조(朝)의 오자(誤字)로 서(西)는 선(鮮)과 동일하다 해서 한서(韓西)는 즉 조선이라고 억설했다. 그런데 기자가 한씨가 아니라는 실증이 있다.
위략집본(魏略輯本 卷 二十一 朝鮮)에 보면 기자가 후손인 기준(箕準)이 ‘인(因)하여 한씨(韓氏)로 모성(冒姓)하였다’고 했다. 모성(冒姓)은 가성(假姓)을 말함이다.
중국 사가가 무리한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 민족을 중국인의 후손으로 조작하려는 의도다.
시전 한혁장 주(詩傳 韓奕章 註)에 ‘孔氏曰 韓武之穆也’라 했다. 즉 한씨는 주무왕의 후손이라고 한 것이다. ‘한(韓)은 국명(國名)이요, 후작(侯爵)이요 무왕의 후손’이라고 했다.
우리 한민족을 주무왕의 후손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을 위조한 것이다. 이 같은 중국사가의 무리한 조작을 그대로 번역하는 것은 우리 민족을 말살하는 대오류(大誤謬)다. 중·고·교 교과서에 막연한 고조선을 내세우고 기자(箕子)의 후손인 기준(箕準)을 내세웠다. 막연한 고조선을 내세운 것은 기자조선을 부정하려는 것이요, 기준(箕準)을 내세운 것은 기자조선을 긍정한 것이다. 이는 기자조선의 정체를 모름으로 갈팡질팡 앞뒤가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격이다.
은나라 충신 기자(箕子), 조선에 망명했기에 주무왕 임명설 ‘어불성설’
서전필명편(書傳畢命篇)에 ‘비은완민천우낙읍’(毖殷頑民遷于洛邑)이라고 했다. 즉, 은이 완민(頑民)을 뽑아서 주의 서울 낙읍에 이주시켰다고 한 것이다. 완민(頑民)은 은의 독립운동자를 말한다. 주무왕이 은을 정복한 후에 은의 충신들이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주무왕은 그 독립운동 자를 완민(頑民)이라 학대하면서 주의 서울에 강제로 이주시켜 관리한 것이다. 은의 충신인 기자(箕子)가 택할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주(周)의 서울에 강제로 이주되어 포로생활을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강대한 외국에 탈출하여 그 국가를 배경으로 독립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자(箕子)가 외국에 탈출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길을 택할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그 당시에 사방민족 중 강대한 국력을 가진 자는 오직 한민족 뿐이었다. 그러면 기자가 한국에 동래할 것은 또한 명백하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기자가 동래(東來)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가들은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임명하고 기자가 주무왕의 임명을 받아 동래하여 한민족을 지배하였다’고 위조했다.
기자가 주무왕의 임명을 받아 한민족을 지배하였다는 것은 문서역사를 새로 검토하면 그 허위조작이 판명된다. 문명역사를 고찰 할 때에 진과 위를 구별하는 새로운 검토가 있어야 한다. 중국 역사인 한서에는 기자(箕子 去之朝鮮(師古曰 史記云 武王伐紂 封箕子於朝鮮與此不同)라고 했다. 즉, 기자가 스스로 조선에 망명한 것이요, 주무왕의 임명을 받아 한민족을 지배한 일이 없다고 한 것이다.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임명하였다는 주장은 상서(尙書 洪範章 註)에 ‘武王封箕子于朝鮮’이라는 문구에 근거로 주장한 것이다. 봉은 임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원문을 다시 검토하면 봉자(封字)는 분명한 위조다.
그 원문은 ‘箕子嘗言 商其淪喪 我罔爲臣僕 史記 亦載箕子 陳洪範之後 武王 封箕子于 朝鮮 而不臣也 蓋箕子 不可臣 武王 亦遂其志 而不臣也’라고 했다. 즉, 기자가 일찍이 나는 은이 망한 후에 주무왕의 임명을 받는 심복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사기(史記)에도 또한 기자가 천도(天道)인 홍범(洪範)을 설교한 후에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임명하는 심복으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했다. 원문을 보면 임명을 뜻하는 봉자(封字)는 분명한 위조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기자(箕子)가 중국인 5000명을 거느리고 동래(東來)했다고 했다. 당시는 인구가 적고 토지가 많음으로 동일한 부족도 딴 지방에 진출해 부족집단을 창설하고 딴 부족을 형성함으로 많은 부족이 병립(竝立)했다. 기자가 동래할 당시의 조선은 광의적으로 단군조선이요, 협의적으로 예맥조선이다. 기자는 5000명을 데리고 공간지에 중국인 집단인 기자조선을 건설하고 그 지배자가 됐을 뿐이다.
첫댓글 헐!
신라가 당에 추종하기 위해 국사를 개편했다고?
근거는?
또 당이 무슨 지리를 뜯어고쳤다고 하는가?
한4군 등이 대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 명치왕군부가 한 짓이다.
예맥조선이 아니라 예맥과 조선으로 나누어 설명.기록한 것이다.
또 숙신과 예맥이 漢을 정벌.정복.제압했고 예맥은 기자.위만.한4군은 물론 시황의 진을 타도할 정도까지 강대했다는 기록이 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근거도 없는 추측을 마치 진실인 양 단정하는 것은 소설을 넘은 사기.기망이다.
또 부여 강역은 원래 예의 땅이지 예맥 땅이 아니다.
맥은 <단군세기> 등에 의하면 예 중 일부가 서쪽 흉노 지역으로 진출하여 얻은 명칭일 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