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년 전이다.
종로 서울극장이었던가?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설때 화면에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김윤아가 부르는 영화 메인 테마가 흐르고 있었다.
평범할 수도 있는 사랑 이야기를 섬세한 터치로 그려 낸 '봄날은 간다' 는 그의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 이어서 허진호 감독에 대한 인상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 뒤 그 영화가 수록된 DVD를 구입해서 두 번은 더 봤던 기억이 난다. 깔끔한 영상과 조성우 음악감독이 호흡을 맞춘 영화 음악도 일품이었다.
영화 '행복'은 허진호 감독의 네 번째 사랑 이야기다.
배우자의 외도가 또 다른 불륜과 파국으로 이어지는 자극적인 영화 "외출"이 허진호 감독의 외도였다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은 작품이다.
'행복'은 그가 만들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처럼 어찌 보면 그저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일 뿐이다.
두 편의 전작처럼 '행복'도 허진호 감독의 사랑에 관한 그 만의 스타일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지루하지는 않다. 그 만의 섬세하고 여린 사랑 이야기는 보는 내내 가슴이 아려 온다.
서울에서 클럽을 운영하다가 망하고, 애인(공효진)과의 사이마저도 멀어진 영수(황정민)는 설상가상으로 간경변으로 건강마저 악화돼 시골의 한 요양원을 찾는다.
그 곳에는 심한 폐질환을 앓으면서 요양원 일을 돕고 있는 은희(임수정)가 있다. 어찌 보면 삶의 희망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그 곳에서 둘은 쉽게 사랑에 빠져 든다.
"우리 같이 살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 땐 헤어지죠, 뭐"
은희의 이 말은 짧은 '행복'을 예고 하듯 운명적이다.
그렇게 둘은 보통 연인들처럼 사랑에 빠져 들고 요양원에서 벗어나 허름한 농가를 얻어 행복한 생활을 시작한다.
은희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영수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된다. 그러나 애초부터 영수의 그런 시골 생활은 몸에 맞지 않는 옷과 다름없었다.
어느 날 서울에서 클럽을 인수했던 친구와 옛 애인이 찾아 오면서 이들의 짧은 행복은 파국을 예고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슬프다.
결국은 영수가 서울로 떠나 다시 예전의 무절제한 생활로 돌아가면서 짧았던 행복은 끝이 난다.
다시 건강을 잃은 영수가 은희를 만난 것은 그녀가 산소 마스크에 의지한채 죽음을 앞둔 병실에서다.
은희는 결국 그녀의 '행복'처럼 짧았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유골을 그녀와 사랑을 시작했던 요양원 근처 산자락에 뿌린 영수가 다시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쓸쓸한 장면을 롱테이크 부감 샷으로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행복은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다.
그러나 '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은 간다'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몸이 아픈 남녀의 사랑과 가슴 아픈 이별, 참으로 통속적이고 신파적일 것 같은 사랑 이야기를 허진호 감독은 섬세하고 깊이있게 그려 낸다.
관객들은 마치 자신의 사랑 이야기처럼 공감하고 울고 웃는다.
절반도 채 남지 않은 폐 때문에 달리면 죽는 줄 알면서도 숨이 차도록 뛰다가 쓰러지는 은희를 보면서는 영수의 배신에 분노한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발군이다.
새롭게 변신한 황정민의 연기도 좋지만 20대의 스타 임수정의 성숙한 연기는 그녀가 아닌 영화 '행복'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지금까지의 앳된 소녀 연기에서 완전히 탈피해 새로운 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한 것 같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영상과 '봄날은 간다'에서 허진호 감독의 사랑 이야기에 그 만큼 잘 어울리는 음악 감독도 없을 것 같았던 조성우가 작업한 이번 영화의 잔잔한 음악도 좋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울려 퍼지는 '행복의 나라로'는 다소 파격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해피엔딩이거나, 비극이거나 둘 중 하나인 멜로의 진부하고 뻔한 결말과 구성을 갖고도 이처럼 섬세하게 그려내고 아련한 여운을 주는 영화라면 '어차피 사랑은 영원하지 못하다'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면서도 누구에게나 영화같은 사랑을 꿈꾸게 한다. *** <izzy 70 이미지에게 말걸기>
첫댓글 전 눈병걸려서 학교엘 가지 않은 여덟살 짜리 딸과 조조로 봤어요. 중간에 조금 야한 장면에선 눈을 감겨주고, 둘이서 얼마나 재밌게 봤나 모릅니다. 아직 사랑을 알지 못 하는 딸 아이가... 나중에 커서 엄마와 둘이서 본 첫 영화에 대해서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ㅎㅎㅎ 사랑에 대한 아주 솔직한 영화였지요?
바우씨의 이처럼 멋진 글을 우리 카페에서 처음 보게 되다니! 앞으로는 자주 써 주세요. 무슨 글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