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1887년작 〈폐용된(廢用된) 해바라기 네 송이(Vier uitgebloeide zonnebloemen)〉이다.
☞ “정신승리”라는 비아냥·혐오용 언사의 극랄한 모순성
☞ 精神과 文章의 Irony와 비유
☞ 精神에 걸린 物質의 咀呪
윗모깃글 세 쪼가리는, 비록 물질들로 조성되었으되 이따금 기묘하고 해괴하게도 얼핏 깜박 문득 생각을 한다고 생각할, 지구상에 아예 없지는 않을, 이족보행포유개체(☞ 참조)의 뇌를 미미하게나마 자극하여 이른바 유물론(물질주의 ☞ 참조)이라는 이즘(ism; 주의; 主義)이나 이념(理念; 이될로기; 이데올로기; ideology)을 움찔 발끈 버럭 히스테릭하게 상기시킬(기억시켜 생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뭐, 설마, 그러거나 말거나, 하여튼, 죡변이 2009년 3월 16일 몇 시쯤에 끼적였을 아랫모깃글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얄궂고 추레한 갖가지 덧거리, 부연설명, 자초지종, 객설, 객담이 주렁주렁 어울렁더울렁 들러붙을 수 있었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게을러터졌으면서도 꽤나 꾀까다로운 죡변의 인심인신(人心人身)은 결코 아닐 괴심괴신(怪心愧身)은 그따위 덧거리질은커녕 그런 짓의 핑계, 빌미, 구실 따위를 물색하려거나 꾸미려는 시도조차, 당장에는 일단, 언감히 생심할 수 없겠으리라.
(2024.01.25.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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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관심이나 마음을 “준다, 기울인다, 전달한다, 가진다, 빼앗긴다, 빼앗는다, 받는다, 품는다”고 여기는 “생각”의 물질성!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고 입말되거나 손글쓰이는 “표현”의 물질성!
게다가 이렇게 생각되거나 입말되거나 손글쓰여서 표현되는 “관심”이나 “마음”의 물질성! 그러니까 인심(人心)의 물질성!
이토록 징그럽게 지독하게 보편적인 사고습성(생각버릇)과 언어습성(말글버릇)의 극심하고 극랄한(極剌한) 모순, 부조리, 일률배반, 자기배반, 자충질, 자승자박 …… 따위를, 무려, 감히, 생각해보려던 죡변이 자충스럽게 킥킥거려보나니.
이따위 버릇(습관; 습성)들은 인간관(人間觀)과 랑사관(量思觀, 그러니까 이른바 사랑관; 思量觀; 사모관; 思慕觀; 연모관; 戀慕觀)에까지 심대하거나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리라.
심지어 겉으로는 여태껏 모든 물질을 모멸하려거나 섬멸하겠다고 안달복달 몸부림발버둥친 듯이 보이는 선불교(禪佛敎; 선종; 禪宗; 능가종; 楞伽宗)를 동아시아에서 개창한 제1조 달마(다르마; 보디달마; 菩提達磨; Bhodidarma; 달마조사; 達摩祖師, 382?~536?)와 제2조 혜가(慧可, 487~593)의 사제지연을 흥건하게 적신 유혈사태, 붉은 눈, 쩍설(赤雪), 혈썰(血雪)도 차마 저어하지 못할 억세게 부조리한 이따위 습성들.
그러니까 “너의 마음을 보여줘!” “내가 너에게 줬던 나의 마음을 돌려줘!” “나의 마음을 받은 네가 어찌 나를 배신할 수 있어?”
이토록 치명적인, 통절할, 모순요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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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그림은 중국 화가 석각(쉬커; 石恪, 10세기후반~11세기초엽)의 〈이조조심도(二祖調心圖)〉이다. 이 제목에서 “이조(二祖)”는 달마의 법통을 직계한 수제자 “혜가”이고, “조심(調心)”은 “마음을 가지런히 고르다, 생각하다, 묵상하다”를 뜻하는 듯이 보인다.
이 그림에 묘사된 혜가의 잘려나간 왼팔은 ‘달마에게 보이겠다고, 전달하겠다고, 바치겠다고, 하얀 눈밭에서 스스로 잘라 내뿜은 자신의 피로써 대신한, 비유한, 자신의 진심을, 자신의 지극한 마음을, 상징할 것이다’고 추정될 수 있다.
그런데 이따위 괴행(怪行)은 ‘잘라서 없앤 왼팔의 무(無)에서 분출한 피로써 붉게 물들여, 비유하여, 자신의 눈처럼 하얀 마음을 유화(有化)시키려는, 어쩌면, 정녕, 무지막지한 마음(心)’을, 그러니까, 정녕, 물화(物化)되고픈, 물질화되고픈, 무분별한 마음의 극랄한 아이러니를, 어쩌면, 히스테릭하게, 아니면, 강박적으로, 암시할 것이라고 억측될 수도 있을랑말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