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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회심과 3차례의 선교 여행
바울의 회심 기록은 사도행전에서 3번 나온다. (9장, 22장, 26장)
이 3번의 내용은 모두 똑같지는 않다. 바울의 회심은 이 3번의 내용을 종합해볼 때 자세히 알수 있다.
26장의 회심에서는 앞의 2번의 내용과 한가지 다른 말씀이 추가 되어있다. 26:14절을 보라
부활의 주님께서 바울에게 “네가 지금 하는 일이 마치 말이 뒷발로 가시밖힌 채찍을 스스로 차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회심이전의 바울이 하는 일은 결국 주님의 일에 반항하고 도전하는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7장 스데반의 순교기사에서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행7:58).
그는 22장20절에서 보면 스데반을 죽일 때 찬성했고 그 죽인 사람들의 겉옷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더 많은 사람들을 잡아서 죽이려고 정부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말에서 떨어지고 강한 햇빛을 보고 3일동안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 후 아나니아 라는 제자에게 안수 받고 눈이 보이게 되었다.
사도행전 9장20절을 보면 그는 즉시 예수님을 증거했다.
그리고(갈1:17)에 보면 그 후 3년간 아라비아에 있었다고 밝힌다
(고후11:32-33)에 보면 바울이 아라비아 페트라의 통치자 아레다 방백으로 부터의 위협(고후11:32-33)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갈1:21) 바울은 다시 다메섹으로 갔다가 이후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건너가 몇년간 지내며 복음을 전하다가.
(사도행전 11:25절) 바나바가 길리기아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러 가서
안디옥에 와서 바나바와 함께 1년간 동역하게 된다(행11:26).
이 기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고, 안디옥교회의 공식적인 파송을 받게 된다.
제1차 선교여행을 떠나기전에 먼저 바울과 바나바는 (행11:27~30)절에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흉년으로 어려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서 모금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서 전달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12:25)
2. 제1차 선교여행: 구브로, 남갈라디아, 버가
이 최초의 선교팀은 안디옥에 인접한 항구도시인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210km 떨어진 살라미 항구에 도착했다(행13:4-5).
안디옥교회로 부터 이방인 전도를 위하여 파송을 받은 바나바와 사도 바울 그리고 마가 요한이 처음 찾아간 곳은 구브로 였다.
왜 1차 선교 여행지가 구브로였을까?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구브로를 첫 방문지로 삼은 것은 이 섬이 바나바의 고향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행4:36).
바나바는 왜 마가요한을 데리고 갔을까? 골로새서 4장10절에 “바나바의 생질 마가”
마가 요한은 누구인가? (행12;12, 마가 요한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행16:37절 마가 요한)
사도행전 1:12~14 을 보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몇몇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 여자중의 한명이 아마도 이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였을 것이다. 이 다락방의 주인은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였을 것이다.
마가복음 14장 15절의 큰 다락방도(큰 방) 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었을 것이다.
살라미에서의 사역을 마친 사도바울 일행은 총독이 거주하는 구브로의 수도 바보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이 주님을 믿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사도행전을 사울을 가리켜 그의 로마식 이름은 바울로 부르기 시작한다(행13:9).
이것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이 유대인을 통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이방인 사역에 돌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바울 일행은 바보를 떠나 소아시아 밤빌리아 지방의 주요 도시 버가에 도착했다. 이곳에 도착한 사도바울 일행은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심각한 내부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마가 요한이 어떤 이유로 해서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행13:13).
사도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앗달리아 라는 곳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14:26)
1차 선교여행은 선교팀의 분열로 인해서 기간이 짦게 끝난 것 같다.
3. 제2차 선교여행: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다시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싸우고 헤어져서 서로 각자 따로 선교팀을 구성해서 떠났다.
( 질문) 여러분 같으면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갈 것인지?
(행15:40)사도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제2차 선교여행을 시작했던 것 같다.
바울의 고향은 길리기아 다소 이다. (행21:39, 행22:3)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고향 부근 지역을 전도 하였던 것 같다.
바울과 실라는 길리기아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하여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전달하고 그곳의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였다(행15:41).
그 다음 다소를 거쳐 길리기아의 관문을 통과하여 갈라디아 지역으로 들어가서 1차 전도여행 방문지였던 데베와 루스드라 등 (행16;1) 교회를 방문하여 거기서 디모데를 만났고
질문: (행16:3) 바울은 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을까요? 안해도 되지만, 디모데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행16: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성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였다.
그 결과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게 되었다(행16:5).
그 다음 여정을 위해 출발했을 때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셨다는 말씀에 직면하고(행16:7), 드로아에서 마케도냐 사람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행16:10).
이곳 드로아에서 바울은 동역자 누가를 만나게 된다. (행16:11) 우리 (저자 누가포함)
(행20: 5~6) 여기서 “우리” 도 역시 저자 누가를 포함한 인칭대명사
누가는 의사 (골4:14)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 (몬1:24),
바울의 2차 선교여행때 디모데와 의사 누가가 선교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1) 마게도냐 사역: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마게도냐로 건너온 선교팀은 그 지역의 첫째가는 성 빌립보에 도착하여 수일을 머물렀다(행16:12).
그들이 빌립보에 머무는 동안 자주장사 루디아와 가족들이 세례를 받고, 점치는 귀신에 사로잡혔던 여인이 해방된다. 그리고 점치는 여인의 일로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를 통해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된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풀려난 후 누가를 빌립보에 남겨두고(행16:40 두 사람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갔다.)
(17:1). 그들은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다.
(행17:2). “세 안식일” 즉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최소 삼 주 혹은 최대 3개월 정도를 머물렀고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인한 폭도들의 난동과 거처를 제공한 야손에게 가해진 선동과 방조 혐의 때문에 바울 일행은 밤에 데살로니가를 탈출해야했다(행17:10).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온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60마일 정도 떨어진 베뢰아에 도착하여 다시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유대인 지도자들의 선동으로 위협을 받자 바울은 디모데와 살리에게 남은 일을 부탁하고 배를 타고 아덴으로 갔다. (행17:14~15)
2) 아가야 사역: 아덴, 고린도, 수리아
홀로 아덴에 남아있던 바울은 날마다 변론하고(행17:16-17) 아레오바고 라는 철학을 토론하는 광장에서 설교하였다. 이곳에서 외형적으로 큰 성과는 없었지만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를 비롯한 몇 명이 믿게 된다. (행17:33~34)
이후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의 중심지인 고린도로 이동해서(행18:1).
18개월 이상 머물며 복음을 전한다. (18:11)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던 시점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내린 유대인 추방령을 받고 이탈리아로부터 이곳으로 이주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함께 일하고 함께 머무르며 평생의 동역자가 된다(행18:2).
디모데와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도착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18:5)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즉시 데살로니전서를 쓰고, 몇 달 뒤에 데살로니가후서를 섰을 것이다.
(고전16:15).
그리고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은 스데바나의 가족과 회당장 그리스보의 가족을 비롯한 여러 사라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고린도교회가 설립되었다.
바울의 사역은 많은 반대와 어려움이 직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계속 말씀을 증거하라고 격려하셨다(행18:9-10).
바울은 겐그레아 항구에서 머리를 깎고 서원을 드린 후(행18:18),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고린도를 떠나 이들 부부는 에베소에 남겨두고 (18:19)
자신은 수리아로 돌아간다. 그리고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형제들을 방문하고 안디옥의 파송교회로 돌아갔다.
2차 선교여행의 결과로 이제 복음은 많은 장애와 반대를 극복하고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에게해의 서쪽 연안에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졌다.
4. 3차 선교여행: 에베소, 마게도냐, 일루리곤, 아가야
바울은 얼마 동안 머물다가 안디옥을 떠나(행18:23). 여기서 “떠났는데” 이 떠남이 바로 3차 선교 여행을 말한다. 3차 선교 여행은 2차 여행때 에베소에 남겨 두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먼저 찾아간다.
이 여행에는 선교팀원 가운데 디모데만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행19:22).
1) 에베소 사역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3년간 머물며 복음을 전했다(행20:31).
바울은 복음증거를 통한 진리대결과 함께 능력대결도 벌였다.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얹어도 병든 자가 낫고 악귀가 쫓김을 당하는 역사기 일어났다(행19:11-20).
이렇게 해서 에베소에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황하여 세력을 얻었다(행19:20).
누가는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행19:10).
이 기간 동안 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골로새교회가 세워졌을 것이다.
바울은 다음 행선지를 로마로 결정했지만(행19:21),
그 전에 2차 전도여행 때 세웠던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을 방문하고, 그 다음 그곳에서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전달하고 로마로 가려고 계획하였다.
(롬15:19) 바울은 일루리곤을 포함한 마게도냐 지역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다음에 그는 그리이스로 가서 고린도를 방문하여 삼개월 동안 머물렀다(행20:1-3).
그리고 3차 선교 여행 기간 동안에 로마서를 써서 겐그레아 교회의 자매 뵈뵈를 통해 로마로 보냈다(롬16:1).
2) 예루살렘교회로 귀환 과정
(행20:3). 뵈뵈를 통해 로마서를 보내고 난 직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은 헌금을 이방인 교회의 대표들과 함께 겐그레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려고 했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알고 육로를 따라 마게도냐를 거쳐 빌립보로 향했다 .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은 누가를 다시 만났고(행20:5~6) “우리”라는 단어를 보면 안다.
바울은 오순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에베소에 방문하는 대신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그들에게 고별설교로 알려진 유명한 설교를 하였다(행20:17-38).
그리고 밀레도를 떠나 고스 섬과 로도 섬을 거쳐 바다라에서 항해하여 두로에 상륙하였다. 두로에서 가이사랴를 지나 57년 초 여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의 집에 머물렀다(행21:10-16). 이렇게 해서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끝이 났다.
바울의 3차례의 선교 여행은 A.D 47년에 시작되어 A.D 57년에 끝이 났다. 10년동안 세 차례 선교여행 이탈리아 와 지중해 연안의 넓은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고 바울은 로마를 넘어 서쪽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선교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5. 사도행전 28장 이후의 사역
(행28:16) (행28:30)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서 가택구금 상태로 2년을 지내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마감한다.
그러나 목회서신서의 기록을 비춰볼 때 바울은 가택구금상태에서 풀려나 그레데섬(디도서), 소아시아(디모데전후서), 마게도냐, 아드리아해 근처의 일루리곤 지역을 여행했고 다시금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었음을 알려준다.
사도바울은 이 기간 동안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성경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지만 AD 95년 경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스페인에 바울이 왔다는 기록이 그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를 보낸 직후 66-68년 사이, 전승에 의하면 로마의 오스티아 가도의 세 번째 지계석 근처에 있는 트레 폰타네에서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120년 정도가 지난 후 그 장소에 바울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A.D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4년 그곳에 작은 바실리카를 세웠고, 4세기 말에 더 큰 바실리카( 예배드리는 공간, 작은 성당) 로 대체되었다. 그 바실리카는 1823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화재 이후 바실리카를 복원하던 과정 중에 두 개의 석판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PAULO APOSTOLO MART’(사도이며 순교자인 바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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