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많은 대동강」, 「비 내리는 호남선」, 「해운대 엘레지」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부르고도 우리에게는 「얼굴 없는 가수」로 알려진 孫仁鎬(손인호·본명 손효찬·77)씨. 그에게 이런 별명이 따라다니는 것은 1953년 「나는 울었네」로 데뷔한 이래 근 50년 가까이 TV나 언론 매체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2001년 6월 KBS의 가요무대 「손인호 특별무대」를 통해서였다. 孫씨는 당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에 대해 『영화녹음기사로 일을 했기 때문에 바빠서 TV에 나갈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2003년 11월28일, 경기도 광주 퇴촌에 있는 한 식당에서 孫仁鎬씨를 만났을 때 그는 『이번에 新曲을 발표했다』며 소년처럼 들떠 있었다. 그의 新曲은 인터뷰가 끝난 후 자동차 안에서 들어 볼 수 있었다. 분단과 이산의 아픔을 노래한 「휴전선아 말해다오」라는 곡이었다. 금방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곡조가 쉬웠다.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만 듣고서는 이 노래를 부른 주인공이 77세의 노인이라는 것을 쉽사리 느끼기 힘들었다. 孫仁鎬씨와 동석한 이 노래의 작사가 金仙大(김선대·69·前 외환은행 지점장)씨는 『원로 가수들이 노래를 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따라 주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孫仁鎬씨는 예전보다 노래의 맛이 더 살아난다』고 평가했다. 孫씨는 『이번 新曲이 뜨면 가수활동을 열심히 할 것』이라며 의욕을 보였다.
孫씨의 고향은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이다. 1937년에 시작된 수풍댐 건설로 창성면 일대가 수몰되자 孫씨 가족은 만주 長春(장춘)으로 이주했다. 長春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孫씨는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평양 관서음악 콩쿠르대회가 유명했었는데, 여기서 孫仁鎬씨가 1등을 하자 심사위원장은 『이남에 가야 당신의 소질을 살릴 수 있다』고 충고하여 孫씨는 가족과 함께 월남하게 되었다고 한다.
孫씨는 6·25 전쟁 동안에는 연예인 공작대(軍 위문공연단)에 편입되어 국군과 함께 戰場을 누비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가수가 아니라 영화녹음기사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월남 직후 金海松(김해송)이 이끄는 「K.P.K. 악단」의 가수 모집에 응모해서 1등을 했으나 특별한 활동은 없었어요. 6·25 전쟁 후 공보부에서 녹음기사 채용 공고 낸 것을 보고 응시해서 합격했습니다』
이후 孫씨는 공보부에서 「대한뉴스」를 제작하면서 많은 음악가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친하게 지낸 음악인 중에는 당시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는 朴是春(박시춘)씨도 있었다.
『어느 날 朴是春씨에게 「내가 가수가 되려는 것은 아니지만 노래에 취미가 있으니 두어 곡만 녹음하게 해 달라」고 하자 이 양반이 곡을 줬어요. 그래서 받은 곡이 「나는 울었네」였는데 이것을 음반회사 사장이 시중에 내놓자 대단한 히트를 했습니다』
孫仁鎬씨의 노래 중 「비 내리는 호남선」에 얽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53년, 제3代 대통령 선거에서 李承晩 대통령에 대항해 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海公 申翼熙(해공 신익희)가 호남 유세 도중 호남선 열차 내에서 심장마비로 急逝(급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申翼熙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비 내리는 호남선」을 부르며 애통해했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유명곡이 됐다.
『그 곡은 申翼熙 선생이 돌아가시기 일년 전쯤에 만들었습니다. 작곡가 朴椿石(박춘석)씨가 곡을 주었는데 저는 너무 바빠서 녹음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잊어 버리고 몇 달 지났는데, 어느 날 일이 일찍 끝나서 녹음을 하게 됐습니다. 따로 연습도 하지 않고 한 번에 녹음을 끝냈어요. 음반이 나오고 나서 일주일 후쯤 申翼熙 선생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주 우연찮게 히트한 곡입니다』
이 노래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申翼熙가 자유당에 의해 암살됐으며, 그 부인이 작사를 했다는 소문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孫仁鎬씨는 이 노래 때문에 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담당 수사관이 나보고 「어떤 감정으로 그 노래를 불렀냐」고 묻기에 나는 「가수는 감정을 가지고 노래를 해야지 감정이 없이 노래 부르면 그건 가수가 아니죠」하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수사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야. 작곡가 朴椿石씨와 작사가 손로원씨도 줄줄이 불려 갔지요. 하하하』
공보부에서 대한뉴스를 만들던 孫仁鎬씨는 5·16 후 서울 중구 예장동에 「한양스튜디오」라는 개인 녹음실을 차리고 73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영화녹음기사로 활동했다.
영화 일선에서 물러난 孫仁鎬씨는 2003년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에 등록했다. 나이 76세에 정식 가수로 이름이 오른 것이다. 孫씨는 부인 李善子(이선자·72)씨와 사이에서 3남1녀를 두었으며, 현재 가수 활동을 하고 있는 맏아들 손동준씨와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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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수손동준 원문보기 글쓴이: 손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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