楓菴 김홍원 장군 후손들 할아버지 산소 찾아 고령 70k
2016.11.5..
묘소 입구에서 만난 김정웅 부회장
(도암서원) 김말암 고문님과 두 아드님 재철, 재욱 형제,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묘소 참배]
선무원종일등공신 신도비 앞에서楓菴 김홍원 장군 후손들 기념찰영
정호(21:아림약국), 김숙이(善山:재성 配), 재성(20:거창섬유), 준호(21:풍암공 종손),
재영(20:수혜용석서화연구원), 재덕(20:동아미술), 재선(20:웅양,농협출신),기현(19:부산고문), 규호(21:재성 子), ? 민재(22:재성 손자)
[楓菴公 묘소]
楓菴公諱弘遠墓碣銘
壬辰亂松菴先生率家屬門生倡義討賊公其一也年方十九從軍屢立
奇功軍聲大振叔父演以先生命歸保家屬從君弘漢戰死茂溪明年先
生沒公尤極家國之痛代領其衆血戰七年爲國家宣力大矣亂靖錄勳
一等加爵大護軍而無意進取浩然歸鄕綜理舊業而己至更子卒得年
二十七葬七洞山辛坐原公諱弘遠號楓菴其先高靈人高陽府院君南
得後也歷數世至高祖諱莊生兵叅曾祖諱鉤歷典九郡多有功績贈兵
議祖諱斗文部將考諱洁世所稱松溪先生妣昌寧成遵女有淑德萬曆
甲戌公生天資特奇己有長者期待公終始樹立卓卓然也配玄風郭氏
叅奉崙女德配君子後公卒分葬金海郡生林面北谷酉坐原有碣有二
男二女男益輝成輝女辛有瑞孫曾孫不盡載嗚呼公生長法家耳儒者
忠義目染者學問弱冠從軍功成身退終軍請纓異馮屛樹岡俾專美於
前也請銘者其後孫起浩系之銘曰時平强學國亂盡忠隨機應燮是曰
市中錄在麟閣報答鴻功我銘非諛垂示無窮
從後孫 聲燾 盥水敬書
묘갈명
임진란 때 송암선생이 가족과 문생을 거느리고 창기하여 토적할 때에 공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방년 19세에 종군하여 여러번 기이한 공을 세우고 군성이 크게 떨치었다.
숙부 연(演)은 송암 선생의 명으로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보살피고 종제 홍한(弘漢)은 무계전에서 전사하고 익년 계사에 송암 선생이 순절하니 공은 지극히 집안과 나라를 위하여 통분을 금치 못하고 송암 선생을 대신하여 중병을 거느리고 혈전하기를 7년 간에 걸쳐 국위를 크게 선양하고 난이 평정한 후에 녹훈 1등에 대호군을 가작하였으나 나아가서 벼슬할 뜻이 없었다. 호연히 귀향하여 구업만을 다스리고 있었다.
경사년(1600년)에 이르러 졸하니 득년 27세 아까운 나이었다.
장례를 고령 칠동 선영하 신좌원에 하였는데 공의 휘는 홍원(弘遠)이요. 호는 풍암(楓菴)이다.
그 선대는 고령인 고양부원군 남득의 후예이다. 그 후 수세대를 지나 고조 휘는 장생(莊生)인데 병참이고, 증조 휘는 구(鉤)인데 원으로 역임 九군하여 공적이 많아서 병참을 증직 받았고 조부 휘는 두문(斗文)인데 무장이 되고 고의 휘는 길(洁)인데 덕행이 높고 세상사람들이 송계(松溪) 선생이라 칭하고 대학유(大學儒)였다.
비는 창녕성씨 준의 따님인데 부덕이 현숙하였다.
공은 만력 갑술 선조7년(1574)에 출생하여 천자가 특기하여 장자(長者)로 기대되고 시종 입지거지가 탁월하더라. 배는 현풍곽씨 참봉 륜의 여인데 부덕이 높고 군자의 가문을 이었더라.
공이 졸한 오랜후에 졸하여 김해군 생림면 북곡리 유좌원에 분장하였다.
생2남2녀를 두었는데남에 익휘와 성휘이며, 여는 신유서 이용서에게 출가하였다.
손 증손은 다 기록치 않는다.
아~! 공은 예법가문에 생장하여 듣고 따를 것은 충의요. 보는 것은 학문이다.
약관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물러나서 란정 후이나 아깝게도 요절하니 고사에 종군의 청영(미혼 총각)의 군산함과 풍이의 병수(나무에 기대앉아한) 미행은 고금에 다를 바 없다.
그 후손인 기호가 명기를 청함에 명에 이르기를 평시에는 강학에 전념하고 국난때에는 목숨을 바쳐 진중하고 임기응변함이 때에 맞았더라.
기린각에 그 이름을 녹재함이 큰 공에 보답함이라.
내가 명함이 거짓이 아니오니 영원토록 수고하리라
종후손 성도 손씻고 공경으로 쓰다.
1989년 4월 제후손(諸後孫)이합모 헌성하여 수묘개갈하다.
기현 고문과 준호 종손이 故 재천님이 쓰신 비 앞에서 서로 전화 번호를 나누고...
오랫 동안 끊어졌던 후손들의 연락 길이 열렸으니 반가운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