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수업을 듣고 있는 과목은 이널러지 Enology, 즉 '양조학'입니다. 저는 와인메이킹 쪽에는 사실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 하기에 이 과목을 굳이 들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지만, 이게 말하자면 '교양 필수'이기 때문에 듣습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와인감정학, 세계의 와인, 그리고 지금 듣는 이널러지, 이 3개는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필수과정이고, 학점을 이수해야만 나중에 졸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듣는 셈입니다. 그러나 학교 수업이 진행될수록 점점 재미있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와인메이킹에 있어 '어두운 면들'에 대해 배우고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와인을 만들 때 물을 섞는가 섞지 않는가? - 포도가 적당하게 익었다면 물을 섞지 않습니다. 그런데 포도가 덜 익었다면 여기에 설탕을 넣어 버립니다. 물론 이런 짓은 유럽이나 캘리포니아에서는 불법으로 규정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상황에서 캘리포니아나 유럽의 대처법은? 얘들은 포도 주스 농축시켜놓은 것을 사용합니다. 물론 캘리포니아 같은 곳은 포도가 너무 잘 되어 '당분이 너무 높아서' 이것을 낮추기 위해 물을 섞어 희석시키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워싱턴주도 마찬가지. 유럽에서는 물을 섞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그만큼 당도가 높은 포도가 생산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학교 안에서 와인을 만들다 보니 별 실험을 다 하고, 우리 클래스에서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포도가 너무 더운 환경에서 자라났을 때 산도의 밸런스를 맞출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고 합니다. 당도와 산도는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 밸런스가 안 맞을 때는 인위적으로 맞춥니다. 이럴 때는 포도를 으깬 상태, 아직 압착은 하지 않은 상태인 '머스트 Must(조동사가 아니라 명사라는 점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포도를 제경파쇄 해 놓은 상태를 이렇게 부릅니다)' 단계에서 대략 당도와 산도의 밸런스를 체크해 본 다음에 주석산을 투여하고, 이 머스트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산화황을 투여합니다. 즉, 우리가 순수하게 포도즙만을 가지고 만든다고 생각하는 와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외에 엄청난 공정이 들어간다는 것을 이 수업을 통해 배우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수업을 가르치는 피터 보스 선생님은 실제로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주의 와이너리에서 30년 이상 와인메이커로 일해온 사람입니다. 학교에서는 와인 사이언스와 양조학 전반에 걸쳐 수업을 맡고 있으며, 프레스턴 셀러, 콜럼비아 와이너리, 배저 마운틴, 파워스, 타가리스, 실버 레이크, 마운트 베이커 와이너리, 하이야트 와이너리 등에서 활약해왔습니다. 특히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콜럼비아 와이너리 셀라마스터즈 리즐링'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 바로 이 사람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런 저런 와인에 관한 새로운 시도를 해본 사람답게, 우리가 배우는 것들은 전통적인 와인메이킹보다는 신기술 쪽의 이야기를 더 듣게 됩니다.
어쨌든, 와인에 대한 '어두운 숨은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특히 유럽 쪽에서도 이런 일들 때문에 말이 많다고는 하지만 이 때문에 스페인 와인의 약진을 막을 수 없는 프랑스 와인의 비애 같은 걸 듣고 있노라면 수업은 종종 원래 가야하는 방향이 아닌 엉뚱한 쪽으로 빠지기도 하고, 피터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인지 마치 수업인지 옛날이야기 타임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왕왕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회를 거듭할수록 수업은 흥미진진해져가고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학교에서 만든 와인들을 얼마전에 몇 병 사왔는데, 그중에서 무베드르 품종을 써서 만든 남부 론 스타일의 와인 '필드 블렌드' 한 병을 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내가 냉동고에 꽁꽁 얼려 놓았던 커다란 돼지고기를 덩어리를 내 놓았길래 무엇에 쓸 것인가 물어봤더니 콩비지를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와인 선생님도 엉뚱한 실험들도 많이 하셨다는데, 그 제자가 실험 하나 못 하겠냐 싶어서 저도 생각을 해 봤던것이, 남부 론 스타일의 와인이라면 어쩐지 콩비지와 잘 가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콩비지를 너무 스파이시 하게만 만들지 않는다면, 충분히 와인과도 승산이 있을만한 음식이고, 또 요즘 들어 키가 저만큼이나 커 버린(겨우 만 열 두살인데 이제 조금 있으면 올려다보게 생겼습니다) 지호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아내가 끓인 콩비지를 무척 좋아하는지라, 수업 갔다 오면 해 봐야지 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딴건 뭘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기가 어려워도, 이런 거 실천에 옮기는 거라면 거의 의지가 아니라 본능 수준 되겠습니다).
오후 여섯 시부터 시작하는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흠... 역시 구수한 콩비지 냄새. 아내는 한국에서 온 '초록마을'의 콩을 썼다고 합니다. 하긴 어떤 콩을 쓰는가도 중요하죠. 때로는 멕시코산 콩을 쓰기도 하고, 캘리포니아산 콩을 쓰기도 하는데, 한국산 콩이라. 약간의 풍선껌 냄새? 와인을 따르니 이런 느낌이 나는데 이것은 우선 무베드르 포도의 특질이기도 한 것이지만 남부 론 와인답게 오크통 숙성을 별로 거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포도를 통째로 탱크에 넣고 발효시키는 기법인 '탄화 마세라시용' 방법이 쓰였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이 와인을 만드는 데 있어서 학생들을 데리고 진두지휘했을 피터 선생님께 여쭤봐야 하겠지만, 아마 틀림없이 일부 포도는 탄화 마세라시용 방법으로 발효시켰을 겁니다. 역시 태닌의 영향이 적은 루비의 빛깔. 그리고 적절한 산도와 태닌은 이 와인의 한가지 결점인 높은 알콜을 상쇄시키고 있습니다. 14.8%의 알콜. 이것은 포도를 제경파쇄했을 당시 당도가 엄청 높았다는 것이고, 역시 거기에 대해서 피터는 전에 이 와인을 만들 때의 '모험담'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느닷없이 전화가 와서 가 보니 와인이 부글부글 넘치더라는 것이죠. 하도 당도가 높았고, 또 누군가가 알콜을 낮추기 위해 약간 높은 온도에서 발효를 시켰더니 이스트의 활동이 너무 왕성해져서 발효조가 넘쳐버릴 정도였고 이미 학교 내 양조장은 난리가 나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물을 들이부어야 했다...는 그런 이야기였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고도 이렇게 괜찮은 완성품이 나왔네요.
그리고 피터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떤 와이너리들은 그냥 이 상태에서 머스트를 만들어 낸 후에 같은 머스트를 가지고 그냥 와인을 만들고 이걸 오크통에 저장하면 리저브로 이름붙이고, 남은 머스트에 물 타서 당도 조절한 후에 약간 낮은 알코올 돗수의 와인을 만들면 꽤 많은 양의 포도주를 더 만들어낼 수 있기에 이런 방법으로 돈을 버는 와이너리들도 '세계 각국에 있으며 그것은 프랑스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기업비밀(?)을 이야기해주더군요. 그게 어떤 와이너리인지 구체적으로 이름을 대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뜻밖의 이야기들을 들어가며 수업은 흥미진진하고, 그렇게 클래스메이트들이 만들어 놓은 와인을 마시면서, 저는 휴가가 주는 여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월요일엔 침 맞으러 갔다오고, 어제는 치과 다녀오고, 오늘은 내과 정기검진 했으니 '튠업'도 마친 셈이고, 이제 좀 푹 쉬고 나서 다음주부터는 다시 열심히 일해야지요.
아참, 고소한 콩비지와 남부 론 스타일 와인의 궁합은 꽤 괜찮습니다. 그 말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와인들과도 무베드르 베이스의 와인은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란 이야기지요. 즉 저렴한 리오하산 크리안자든, 리베로 델 두오로든, 혹은 그냥 라만차의 템프라니요 베이스의 와인이든... 콩비지와의 궁합, 어쩌면 우리 식으로 요리한 '돼지고기와의 궁합'은 일품일 수 있다는 이야기 되겠습니다. 요즘 들어 과식 안 하는 편인데, 오랫만에 배를 두들겨 봤네요. 콩비지를 두 그릇 거침없이 싹싹 비우고, 와인 반 병을 비웠으니... 아직 우리 학교에서 만든 와인들이 몇 병 남았네요. 그리고 학생들이 직접 만든 와인들이어서 그런지, 그 와인이 코와 입에서 전개되는 과정들도 꽤 흥미진진합니다. 아내도 와인이 콩비지와 잘 어울린다 하는군요.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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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eattle Story 원문보기 글쓴이: 권종상
첫댓글 포도주 제조 과정에 주석산,이산화 황이 들어가고,물도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니 흥미롭군요. 포도주는 그져 집에서 포도에 소주 붓고 만든 것밖에 모르니 참 인생의 절반도 모르고 살은 것같습니다~^ ^
하이고... 아닙니다. 인생이란 게 어디 한두면으로만 이뤄진 단편 단면이겠습니까. 또 '사람'이란 것도... 모두 이 세상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겠지요.
술이야기 재미있게 읽다 보니 나도 본격적으로 함 담아 볼까 생각이 듭니다.
리저브가 비싼 이유가 있었군요. 그것도 모를고 뭐 이건 꼬불쳐 놓았다가 지금 내 놓았는 건가 했지요.
콩비지 찌게와 진한 술이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먹어 봐야 알겠습니다.하하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 백독이 불여일음이죠. 하하.
불란서에 가정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조합에가서 자기집 포도물 짠 것과 다른 집 포도 짠 물을 바꾸어서 집에 들고 가서
포도주로 만듭니다. 무슨 킷 같은 것에는 엔자임도 있고 얄궂은 가루도 있는 데, 그런 건 장사로 만드는 양조장에서 쓰는 거고, 우리는 그냥 순수한 포도물 짠 걸로 통하고 병에 넣어 포도주를 만들어 하루에 두끼 먹습니다.
그 순수한 포도주 맛은 사 먹는 포조주에서는 못 느끼겠습디다. 약품 집어 넣은 게
속에서 신물이 틀어 올라 오게도 만들고..
오크통 등을 사용해 오래 보관할 목적이 아니라, 만들어서 바로 마실 거라면 그렇게 해도 좋을 겁니다. 포도 종류에 따라서 또 그럴 수 있는 포도가 있고, 그렇지 않은 포도들도 있죠. 지역에 따라 잘 자라는 포도도 틀리구요.
어흑......부럽습니다. 미쿡에서도.. 콩비지를..
한국에 살면서도 먹지 못하는 이 슬픈 현실..ㅜ
예? 콩비지 하는 곳이야 한국이 당연히 훨씬 많을텐데요.
한국은 그런데요.. 제 주변환경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