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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지 이 름 |
연 락 전 화 |
식사준비 |
성 지 이 름 |
연 락 전 화 |
식사준비 |
1코스 명동 |
02-774-3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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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코스 풍수원 |
033-342-0035 |
성당제공 |
서소문 |
02-392-5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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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재 |
031-521-2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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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
02-795-2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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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성지 |
031-792-8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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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 |
02-716-1791 |
713-3113 |
9코스여산숲정이 |
063-836-5016 |
성당제공 |
절두산 |
02-3142-4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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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지 |
063-263-1004 |
성지게공 |
2코스 단내성지 |
031-633-9531 |
633-9531 |
성거산 |
041-585-48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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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농성지 |
031-636-4061 |
|
10코스 삼성산 |
02-875-2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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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
031-764-5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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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 |
031-441-3531 |
446-7218 |
남한산성 |
031-749-8522 |
749-8522 |
미리내 |
031-674-1256 |
성지게공 |
3코스 치명자산 |
063-285-5755 |
225-0396 |
11코스 배티 |
043-533-0691 |
성지제공 |
전동성당 |
063-284-3222 |
284-1896 |
죽산성지 |
031-676-6700 |
성지게공 |
숲정이 |
063-255-2677 |
|
은이골배마실 |
031-338-1702 |
338-1701 |
4코스 배론 |
043-651-3408 |
653-4960 |
12코스 초남리 |
063-214-5004 |
성지문의 |
묘재 |
043-651-3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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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 |
063-861-9210 |
성지게공 |
부엉골 |
031-885-2031 |
여주성당 |
13코스 해미 |
041-688-3183 |
337-0015 |
세종왕능 |
031-885-3123 |
| |||
솔뫼 |
041-362-5021 |
362-5021 | |||
5코스 갈매못 |
041-932-1214 |
934-4459 | |||
공세리 |
041-533-8181 |
533-8172 | |||
다락골 |
041-943-8123 |
943-8123 | |||
14코스 수도원 갑곶돈대 |
032-932-8819 |
932-4766 | |||
홍성읍성 |
041-633-8891 |
| |||
032-932-6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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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코스 마원성지 |
011-9883-1670 |
054-572-2323 |
이승훈묘 |
032-464-0888 |
461-7080 |
연풍성지 |
043-833-5064 |
성지제공 |
남양성지 |
031-357-5828 |
357-5860 |
감곡성당 |
043-881-2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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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코스 관덕정 |
053-254-0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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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코스 황새바위 |
041-856-3923 |
856-1515 |
칠곡한티 |
054-975-5151 |
875-5151 |
수리치골 |
041-841-1135 |
수녀원제공 |
신나무골 |
054-972-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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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울공소 |
041-332-9559 |
334-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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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 |
041-363-1359 |
363-1061 |
식사 주문은 성지에 미리 연락하여 결정합시다.
성지순례 전례시작
◉ 성지순례 전례
◉ 103위 한국 성인 호칭 기도
◐ 오늘 순례 할 성지와 관련된 한국 교회사 설명
◉ 제 4차 배론성지, 묘재, 부엉골신학당, 세종대왕 능.
배론성지는 1801년 옹기 토굴에서 한국교회의 박해상황과 실정을 명주 자락에 13.384자의 한문글자(한글번역41.500여자)로 울분을 토하는 황사영(黄嗣永) 백서가 쓰여졌고. 바로 옆의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있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이곳 배론 동산에 묻혀있다.
졸지에 재산과 집을 버리고 가족과 생이별한 교우들에게 옹기구이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며, 감시의 눈을 피해 토굴 속에서 신앙을 지켜오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옹기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나서면, 아무 집이나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서 잊어버린 가족을 수소문하고 교회소식을 전하는데 가장 편리했다.
이렇게 신앙을 지켜가던 배론에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황사영은 나이 16세 때 진사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이 친히 등용을 약속한 만큼 앞길이 보장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세상의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벼슬길을 버리고 배론에 숨어들었다.
황사영은 그 해 5월 31일 주문모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듣고,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탄원서를 썼다. 이 백서를 품고 북경으로 가던 황심 토마스가 의주에서 붙잡힘으로 황사영도 대역부도 죄인으로 27세에 능지처참 극형을 받았다.
백서사건이 있은지 54년 후, 1855년 배론 공소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교장 프르티에 신부와 교수 푸티니꼴라 신부는 10명의 신학생을 가르쳤다.
묘재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에서 순교한 남종삼 성인과 양부인 부친 남상교(南尚教) 부자가 살던 집이다. 남종삼은 한국의 103위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던 분이다.
남종삼은 한양 이윤일 집에서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을 만나서 서학에 관한 책을 얻어 읽고, 천주학에 오묘한 진리에 탄복해 영세를 받았다. 그의 가족은 모두 천주교를 신봉하였는데 아버지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신앙에만 전념하고자 관직에서 은퇴하고 묘재로 이사와서 은거 생활을 하다가 결국 공주로 유배되어 순교하기 전까지 여기에서 살았다.
부흥골 신학당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신학교로 1885년 여주 부엉골에 설립되었고, 1887년에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로 이전한 예수 성심신학교는 현재 가톨릭 대학 신학부와 의학부 및 대학원과 부속 연구기관이 있다. 지금의 신학부에서는 1896년 4월 26일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강성삼, 강도영, 정규화 등 세 사제가 탄생했다. 지금 부엉골에 남아있는 유물로는 우물터와 사람이 밟고 말을 탈 수 있는 바침대 돌이 남아있다.
여주에 세종대왕 능이 있다. 중국의 한자는 서민들에게는 손이 닿지 못하는 높은 산의 꽃과 같다. 세종대왕은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오랜 시일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연구를 거듭한 끝에 누구나 쉽게 배워서 쓸 수 있는 한국의 문자 체계인 한글을 창제하셨다. 그런 점에서 한글은 한자를 변형해서 만든 일본의 가나, 또는 거란이나 여진 문자 등과는 확연히 다른 독보성을 지니고 있다. 한글은 웬만한 사람이면 하룻밤 사이에 쉽게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과학적인 음소문자요 최후의 알파벳 문자이다. 그뿐 아니라 한글은 언제, 누가, 어떤 의도에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분명히 밝혀지고 있는 세계 유일의 문자이기도 하다.
제 4차 코스
배론 성지
성지 설명 |
☏ 043-651-4527
☏ 043-651-3408
소재지 :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 2리
옛날 박해를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깊이 숨어들어야 했던 신자들 중 일부가 교우촌을 이룬 곳이 바로 배론이다. 졸지에 재산과 집을 버리고 가족과 생이별한 교우들이 깊은 산 속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옹기 굽는 일이었다. 옹기 구이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며, 감시의 눈을 피해 토굴 속에서 신앙을 지켜오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옹기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나서면, 아무 집이나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서 잊어버린 가족을 수소문하고 교회 소식을 전하는데 가장 편리했다.
이렇게 신앙을 지켜가던 옹기 마을에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황사영(黄嗣永)은 나이 16세 때 진사에 장원급제하여 정조 대왕이 친히 등용을 약속한 만큼 앞길이 보장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세상의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벼슬길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배론에 숨어들었다.
황사영은 그 해 5월 31일 주문모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듣고,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탄원서를 썼다. 이 백서를 품고 북경으로 가던 황심 토마스가 의주에서 붙잡힘으로 황사영도 대역부도 죄인으로 27세에 능지처참 극형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로, 외아들은 추자도로 귀양을 가고 수십 명이 공범으로 처형당했다.
백서 사건이 있은지 54년 후, 1855년 배론 공소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교장 프르티에 신부와 교수 푸티니꼴라 신부는 10명의 신학생을 가르쳤다. 이 신학당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된 교수들이 새남터에서 3월 11일 순교함으로써 폐교되었고, 집주인 장주기 요셉은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와 함께 3월 30일 순교하였다.
여기에 또 하나 귀중한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묘소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부제품은 받았지만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게 사제품을 받고, 11년 6개월 동안 산간 벽지를 찾아다니며 사목하던 최 신부는, 하루 100리(평균70리)이상 걸어서 신자를 찾아다니다 피로와 무리한 활동에 지쳐 쓰러져 배론 신학당 뒷산에 묻힌 것이다.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라 부른다면, 최양업 신부는 땀의 순교자라고 말하는데 그의 업적은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원주교구 시복시성 선정 제출자(3명)
김강이(시몬), 최(비르짓다), (최해성(요한).
성가 59. 주께선 나의 피난처
푸르티에 신 신부의 편지 |
說明 |
조선 정부가 대중에게 알리는 소식은 거짓이 아니면 하찮은 것들입니다. 조공을 바치러 갔던 동지사가 북경에서 돌아오면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말하고, 이런 것은 말하지 말고, 저런 것은 길게 설명하라는 명령을 받으며 그가 받은 명령에 한마디라도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삭탈관직(削奪官職)이나 귀양으로 처벌됩니다.
조선에는 손으로 쓴 신문밖에 없는데 그것도 서울에 한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독하는 양반들은 얼마 동안 훑어보고는 이내 그것을 다음 구독자들에게 전해 주려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속달 파발꾼에게 되돌려 줍니다. 이 신문은 해마다 동지사 일행이 돌아온 뒤에 그들이 중국에서 들은 것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가 실려 있습니다. 예전 보도에는 ‘오랑캐’ 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는 서양의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정당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알고 있는 행위가 거기에서는 비열한 행위, 잔인한 짓으로 취급되었고, 서양 사람들의 성공은 으레 실패와 큰 실수로 변형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국과의 조약 체결 이후로는 이 신문의 문체가 조금씩 바뀌어서 예의와 조심성을 좀 볼 수 있고, 서양 사람의 권위를 좀 더 인정해 줌을 보게 됩니다.
어찌 되었건 조정은 여전히 같은 행동을 하길 고집합니다. 나라에선 전반적인 박해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관장들은 각기 그들의 관할 지역에서 저희들을 괴롭히는 것을 꽤 무관심하게 방관하고 있습니다. 너무 소란을 피우면 조정에서 좀 조용히 행동하라고 권고할 수 있겠으나 일체의 수색을 금하지는 않습니다. 오리려 천주교인들을 사형에 처하는 법률들을 조정이 취소하지 않는 한 박해는 완전히 합법적입니다.
민중 시위의 원인은 모든 종류의 상하 관리들의 게걸스러운 탐욕과 흉악한 도둑질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진정한 궁중의 감독관들인 대신들이 오래 전부터 관직을 수여할 때에 비싼 세금을 받아 왔습니다. 벼슬들이 글자 그대로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폐습이 점점 더해 가므로 새로 임명된 관리로 하여금 그의 1년치 봉급과 맞먹는 액수를 미리 선불하게 하는 풍속을 도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정은 관리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만, 이들은 또 이들대로 백성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백성을 괴롭히기와 세금의 증가, 재판의 부정 거래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 법률은 관장들이 세금을 징수할 때에는 관찰사의 승인을 받도록 요구하고 있지만, 이 법률도 다른 모든 법률과 마찬가지로 아무데서도 지켜지지 않습니다. 조정은 이런 사소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급관리들의 모든 행위는 그들의 주구(誅求)로 생긴 두둑한 액수로 그들의 청렴과 솜씨를 가끔 증명하기만 하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세금이 이렇게 해서 몇 해 동안에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법정 세율은 1전에 대해서 엽전 일곱 닢 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법정 세율만 내는 지방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제가 있는 군에서는 현재 1전에 엽전 14닢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수령이 무사 무욕하거나 탐욕이 있는데 따라 15, 18, 20닢, 심지어 25닢까지 냅니다.
그런데 지난 봄 반도의 남단 바다 가까이 있는 매우 큰 고을의 수령은 1전에 85닢이라는 엄청난 세율로 올렸습니다. 격분한 백성들은 그들의 권리를 행사해서 대표 한사람을 뽑아 의정부에 상소하려고 서울로 파견했습니다. 수령은 자기의 행동이 너무도 명백한 부정이므로 조정에서 내리는 화를 면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부하 관속의 두목에게 이미 길을 떠난 백성의 대표를 쫓아가서 무슨 짓을 해서든지 그 여행을 제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관속은 길을 재촉해서 백성의 대표를 따라가 잡았는데, 간청으로도 약속과 위협으로도 그의 여행 계획을 포기하게 할 수 없으므로 비상을 먹이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희생자는 그 날 밤으로 죽었고 백성은 관속의 두목인 암살자가 상관에게로 돌아오는 시간에 그의 죽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관속 우두머리의 집으로 몰려가서 그를 붙잡고, 관아로 침입해서 좌수(수령의 직무대행)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근처 광장으로 끌고 가서 관장이 보는 앞에서 산채로 불에 태웠습니다. 불에 구워진 그의 부하 두 사람의 살점을 그 파렴치한 관장에게 먹였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백성들의 울분은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불길같이 퍼져서 수령과 무관이 도망을 치게 되었고, 아무도 감히 이 군에 뚫고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이 2, 3개월 동안 스스로 공사를 집행했습니다.
이웃고을 또 다른 수령도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군내의 모든 재력을 바닥내고 나서 세금을 받아낼 새롭고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과부들은 이 나라에서 꽤 수효가 많은 계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특히 양반 집에서는 여인이 재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처지는 비참하고 동정과 보호를 받아야 마땅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이 수령이 하루는 모든 과부를 군청으로 오라고 명령을 내렸으므로 관장이 동정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려는가 보다 생각하고 모두 그가 부르는 곳으로 갔습니다. 수령은 과부들이 모인 것을 보고 각자의 주소와 성명을 적고 대략 이와 같은 연설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재혼을 했다면 남편들과 합심해서 세금을 내는데 이바지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조정에 봉사하였을 것이오.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친정 집에 홀로 있으니 여러분은 국가에 무익한 존재들이며 공공 번영에 조금도 협력을 하지 않고 있소. 여러분을 임금님의 합당한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본관은 여러분에게 특별한 세금을 물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소. 그러니까 여러분은 관장에게 봄에 한 필, 가을에 한 필, 매년 삼베 두 필을 바치도록 하시오.”
이 말에 깜짝 놀라고 어안이 벙벙한 여인들 가운데에서는 뜻밖에 일로 몇 마디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무도 선뜻 “내겠습니다.”하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수령은 말을 계속했습니다. “세금을 내겠다고 언약하는 사람은 오른쪽으로 가서 서고, 내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반대편으로 가서 서시오.” 여인들은 하라는 대로했지만 거의 모두가 반항하는 사람들 쪽으로 가서 섰습니다. 수령은 세금을 내겠다고 약속한 여인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다른 여인들은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옥에 갇힌 과부는 공공연히 알려진 매음굴에 갇힌 여인이나 다름없습니다. 투옥된 과부들의 부모는 체면이 손상되지 않기 위해서 희생을 치르기를 서슴지 않았고, 그 여인들을 구해내기 위해 요구된 삼베 두 필을 관장에게 갖다 바쳤습니다.
이렇게 석방된 과부들은 잔인하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잔인한 방식은 이 나라 풍속에서 잘 알려진 것입니다. 이 수령의 어머니가 조금 전에 아들을 보려고 서울에서 이 고을로 내려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많은 과부들이 모여 떼를 지어 관아로 들어가서 그 이름높은 부인을 뵐 영광을 달라고 큰 소리로 요구하며, 이런 관장 같은 아들을 밸 수 있었던 그 여인은 아주 놀랍고 다른 여인들보다 뛰어난 여자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부들이 그 부인의 옷을 벗기고자 한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수령은 당연히 걱정이 되었으나 조선 풍속에는, 무기를 가지지 않고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는 그 여인들의 무리에 대해 무력으로 대항할 수가 없으므로 심한 모욕을 면하기 위해 애원을 할 수밖에 없었고, 간청하고 꾀를 쓴 덕분으로 그 날은 여인들을 물러가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관장의 어머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되어 몹시 성이 나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너를 보려고 지방엘 내려왔는데 어미에게 이다지도 무자비한 모욕을 당하게 한단 말이냐. 그것도 바로 네 집에서 말이다. 내일 아침 당장 떠나겠다. 아침 일찍 모든 것이 준비를 해놓아라. 명심해라.” 관장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준비하였다. 부인은 해가 뜨기 전에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관장의 어머니 계획을 알게 된 과부들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가마에 덤벼들어 그 부인의 옷을 완전히 벗겨서 알몸으로 만들어 놓고 빈정거리고 아주 상스러운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불쌍한 관장은 창피를 감추기 위해 집안에 들어박혔습니다. 그러나 자기 어머니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게 했고, 또 그로 인해 온 가문의 치욕은 조선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결코 씻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명예가 엄청나게 훼손당한 것입니다.
또 남쪽의 한 군에서는 수령의 재물 갈취에 지친 백성들이 관아에서 가까운 개인 집에 식사를 준비해 놓고 그를 저녁에 초대하러 갔습니다. “아니 그건 왜” 하고 수령은 의외라고 생각해서 말했습니다. 백성들이 “관장님을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수령은 그와 같은 일에 놀라서 오랫동안 거절하였으나 백성들이 자꾸만 청하므로 내키지는 않지만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들어가 상 앞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런데 대관절 무슨 명목과 이유로 이 식사를 내게 대접하는 거냐?” 하고 소리쳤습니다. “우리 관장님은 명목도 이유도 없이 백성의 엽전을 잘도 갈취하는데 왜 백성의 밥은 명목도 이유도 없이 잡수시지 못하시겠습니까” 하고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 교훈이 너무 엄했는지라, 수령은 몹시 창피해서 서둘러 그 고을을 떠났습니다.
8월에 임금의 먼 친척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음모가 적발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음모의 주동 인물은 이하전(李夏銓)이라는 작고 추하고 아무 재주도 없는 사람인데 고문을 받는 중에 신문하는 영의정에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영의정은 그것을 읽어보고 아무 말 없이 이내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 쪽지에 이하전은 전 왕비 조 대비가 음모를 꾸미도록 결심시켰다는 말을 적었다고 합니다. 매우 과격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진 이 여인이 벌써 여러 번 왕을 독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현왕과 전왕 사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의 핵심이기 때문에 죽이지도 못하고 귀양조차도 보내지 못합니다. 이 여인을 없애는 것은 조선 풍속에 의하면 정통성을 없애고 현재 왕을 왕위 탈취자로 만드는 결과가 된다고 합니다. 1862년 이하전은 사약을 받아 마시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의 공범자 중의 중요한 인물은 1839년에 앵베르 주교와 그의 두 선교사 그리고 많은 신자를 배반해서 넘겨준 가증스런 배교자 김순성(金順性)이었는데 그는 참수를 당했습니다. 김순성의 시체는 여섯 토막으로 잘려 썩지 않게 소금에 절여져서 전국에 끌려 다녔는데, 반란자들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수레에 실어 이 마을 저 마을로 끌려 다니는 그 시체를 보았는데 그 앞에는 세 가지 죄목이 달렸습니다. “이놈은 영신의 스승 앵베르 주교를 배반했고, 임금님께 모반을 했으며 제 아비에게 손을 댈 정도로 불효했다.” 라고 써 있습니다.
성가 28.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
최양업 신부 이력서 |
說明 |
최 신부 이력서는 제목이 가르치고 있듯이 최 도마 신부의 전기이다. 이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최 신부의 조카인 최상종(崔相鐘)씨가 저술한 것이고, 또한 해방 후에 쓰여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순교자와 증거자들 180-185)
조선 두 번째 탁덕 최 도마 정구(鼎九)씨는 본디 선대로부터 서울 사람이었다. 이력을 적으려 하니, 먼저 선대 명문과 천주 성교회에 들어온 내력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 선대 세조공은 신라 시절 정축년에 정승 업(業)씨의 친서이고, 온 나라 안의 명현으로 뽑혀서 18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学士)로 품직 된 고운 최치원 선생이다. 그의 30대 후예인 조선 나라 시절에 관은 평정공신 이조판서(吏曹判書) 최확(崔確)의 십일 대 손이다.
천주 성교회에 입교한 내력은 1787(丁未)년 정종(正宗)대왕 시절이다. 그때 최상진(崔相鎮)씨는 여러 고을의 군수를 역임한 40여 세에도 아들이 없으므로, 종중의 항렬에 따라서 최한일 씨를 양자로 맞이한 후에, 경상도 진보 현감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 숙부인은 자제와 함께 세월을 보내는 중에 한일 씨가 천주의 성소를 입었다. 마침 당시에 유명하신 이존창에게 교리를 듣고, 열심한 교우 집안에 혼인하여, 자제인 인주(仁柱)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부인 경주 이씨는 홀어머니가 된지 몇 해 되지 않아, 곧 천붕지통(天崩之痛)을 당하여 과부가 되어 망극 애통한 세월을 보내는 중에 설상가상으로 신유년의 군난을 당하였다. 화를 피하려고 12세 된 자제를 앞세우고, 정처 없이 떠나 향방 없이 가노라니, 충청도 홍주 누곡이라는 지방에 가서 수십 년을 살았다. 그 동안에 주인 없는 공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차차 형세도 넉넉해지고 또 몇몇 교우들의 중매로 열심한 교우 이존창 집안으로 혼인하여 삼 형제를 두었다. 그 셋째 자제가 최 방지거 영눌 씨인데, 뒷날에 복자로 시복 되시었다.
그 맏자제가 최 도마 정구(鼎九=관명 아명=良業)씨이니, 이분이 조선의 두 번째 탁덕이시다. 이때 서울로 다시 이사와서 지내는 중에 최 도마는 12세였다. 모방 나 신부께서 조선 성교회를 확장시키고자 하여, 신학생을 소집하시는 중에 최 도마도 선택되어, 여항덕(余恒徳) 신부께서 귀국하시는 기회에 복자 김 안드레아와 함께 중국 마카오 신학원에 입학하여, 여러 세월을 근실성력(勤実誠力)으로 공부하여, 부제품을 받으시고, 조선 본국으로 나오고자 고 주교와 이 신부 두 분과 함께 한해 동안 백방으로 애를 쓰시다가, 소원을 이루지 못하시고, 몇 해 뒤인 1849년에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마레스가 주교로부터 상해에서 4월 10일의 성신강림주일에 탁덕으로 승품 받으시었다. 그때 주교님의 지시에 따라서 5월에 요동으로 오시어, 주교의 지도하심에 따라, 그 지방 근경에서 선교하시고, 신부의 직무를 연습하셨다. 그러던 얼마 후에 이 신부께서 조선국으로 들어오실 편에 11월 3일에 요동으로 오셔서 먼저와 계시는 최 신부와 함께 길을 떠나서, 매우 위험한 파수막을 지낼 적마다. 천주와 성모님의 보호하심으로써, 때마침 눈바람이 심한 밤중이었으므로, 파수꾼이 모두 제 처소에 들어갔을 때 틈을 타서 무사히 지나서 서울 주교 댁에 도착하여 페레올 주교님을 뵈오니, 얼마나 반가웠고, 얼마나 즐거웠을까?
며칠을 쉬었다. 그때 마침 안 신부(뒤에 안 다블뤼 주교가 되었음)께서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전교 하시다가 병환이 나서 위중하다는 병보가 와서, 주교의 분부로 안 신부께 가시어, 최후 성사를 주시고, 숙질 간이 서로 만나, 반갑고 즐겁기는 물론이고, 신부께서는 순교하신 부모님을 뵙지 못하고, 중 백부만 만나 보시니, 망극지통(罔極之痛)의 슬픔을 어찌 억제하시리요? 가슴이 막히어 말씀을 못하시고, 중 백부께서는 계씨 복자 방지거 내외를 생각하고, 역시 원통하고 슬픈 판국이어서, 숙질 두 분이 말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묵묵히 몇 시간을 맞서 계시다가, 마음에 서린 슬픔을 억누르시고 부모님의 넓은 은혜에 만만 감사하시었다. 한편 그 계씨 4형제가 백씨 신부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히 돌아와서, 형제간에 그 동안 격조했음과 겪은 고통과 아버님과 어머님의 순교하시던 형력을 세세히 설명하며, 한 바탕의 울음바다가 되니 신부께서도 애원 비감한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면서, 좋으신 말씀으로 계씨들을 위로하시고, 수 삼 일간 계시더니, 그때의 장 주교께서 최 신부가 사실 곳을 진천군 등골 공소로 배정하시는 기별이 와서, 즉시 등골 공소로 가시어 몇몇 해를 머무르시어 전교 하시었다. 방인사제(邦人司祭)이시기에 표나지 않으시므로, 번화하고 위험한 지방의 이 산 저 산으로 흩어져서 사는 교우와, 또 양반 집 규수들이 외인 집안으로 출가한 여교우들은 성사 볼 희망이 전혀 없어서, 오직 간절히 애원하는 정경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몇몇 여 교우의 행적을 말한다면 바르바라는 어린 처녀는 외속에 빠질까봐 동정을 지키기로 단단히 결심한 후에, 부모와 오빠들이 시집가라고 강권할 뿐만 아니라. 주교께도 순명하지 않으므로 기절벌(既絶罰 : 파문벌)을 하셨으나, 굳이 결심하고 산중 바위굴로 가 은신하여 여러 날이 되자, 오라버니가 찾아가 강제로 데려왔다. 며칠 뒤에 최 신부께서 근처 공소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주님과 성모님께 구하기를 극중한 병이나 주십사 하고 기도하며, 생각하기를 “병이 중하면 성사를 받으리라” 하였다. 인자하신 주님과 성모님이 허락하시어, 홀연히 병이 나서 매우 위독하여, 최 신부께 종부성사를 청하여 최후의 성사를 마땅하게 받고서, 바르바라는 즉시 선종 하였다.
또 어떤 여 교우는 외인 집으로 출가하여, 세월이 흐를수록 성사 보기를 원하였으나, 무슨 꾀를 낼 수가 없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더니, 하루는 바느질 그릇에 있는 당목 헝겊 한쪽을 들고 탄식의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언제나 나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하실 신부가 오셔서 내 영혼을 구하실꼬?” 하며, 주모께 간절히 간구 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가 받아드려져서 어떤 교우가 이 여 교우의 형편을 품달하여, 신부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전교길로 가시는 도중에, 그 집 앞으로 지난다는 말씀을 들으시고는 성체를 모시고, 그 집 앞 냇물 가의 정자 아래에서 쉬시는 거동으로 머무시면서 사람을 보내어 “그 집 형편을 보아 그 여 교우에게 사유를 말하라.” 하셨다. 그 사람이 즉시 가서 알아본즉, 마침 남자는 하나도 없고 어린 딸 하나만 있기에 사유를 말하였다. 여 교우는 천만 뜻밖의 반가운 말씀이라 꿈인지 생시인지 정신이 개운하고 즐거워서 두고두고 적어 둔 성찰록(省察録)을 주면서 “신부님께 바쳐 주시오.” 하였다.
그 사람이 신부께로 돌아와 집안 형편을 말하며 성찰록을 바치면서, “속히 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신부님은 즉시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빨리 들어가 성사를 주셨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이와 같은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또 어떤 때에는 속촌 공소 집에서 잡힐 뻔하기를 여러 번 당하여, 밤에는 피하시고 낮에는 숨으시며 하시다가, 온갖 위험을 겪어 가면서 경기․충청․경상․전라․강원․황해도 등으로 전교 하시었는데, 1년에 6~7월 두 달 동안만 본댁에 계시고, 그밖에는 전적으로 전교에 근무하시기를 12년 동안 하셨다. 그러시다가 무더운 6월(음력)경에 문경 고을에 오시어서, 점심을 못하시고 약주만 몇 잔 잡수셨는데, 잘 마련하지 못한 소고기를 잡수시고 크게 체하시어 말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시었다. 모시고 가던 복사가 민망히 여겨 여쭙기를 “너무나 불편하신 모양이오니 이 문경읍의 평창 이씨라는 교우 집이 패약(약국)을 하고 있사오니, 그 집으로 들어가셔서 치료하심이 필요한 줄로 아옵니다. 그 집으로 가십시다.” 하고 간신히 고하였으므로 허락하시고 이씨 집으로 들어가셔서 선약으로 치료하셨으나, 백 약이 무효하고 증세가 날로 위중하셨다. 제천 배론에 계시는 신 푸르티에 신부께 병보를 고하니, 신 신부께서는 즉시 오시어서 최후의 성사를 받으시고, 1861년 음력 6월 10일에 편안히 선종 하셨다.
신 신부님의 주선과 지도로 상여를 꾸며 영화로이 운구하여, 제천 배론의 신학원 뒷산에 안장한 뒤에 최 신부의 둘째 계씨 야고보가 상경하여, 장 주교를 뵙고 애절한 기별을 했다. 주교께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도 슬프냐? 나는 주인을 잃었다.” 하시며 몹시 슬퍼하시었다.
그 뒤에 혹독한 큰 군난으로 산소를 손질 못하고, 수십 년이 지나서 나무가 숲을 이루었더니 천주의 은혜로 군난이 잠잠해지고 시절이 태평하여 지자, 교우들이 배론 마을에 모여 살며, 금화벌초(禁火伐草)로 산소를 돌보면서 최 신부님의 조카 최상종(崔相鐘)이 산소의 임목을 베어 내고, 봉분을 밀어 고치고 나니 점점 교우들이 모였다. 태평성대를 만나 안락한 세월을 누리면서 본동 안 회장이 한 문제를 내 놓으며 말하였다. “우리 선조 두 번째 탁덕 최 신부의 공덕을 말할 것 같으면, 조선 성교회에 공도 크려니와 우리 신자의 영신적 부친이시니, 우리들이 애경지포(愛敬之抱)로 표석 하나를 세우자”하고 온갖 정성을 다 드려서 훌륭한 청석을 60리 밖에서 구하여 1~2품 재상의 비석을 본떠서 만들어 가지고 세우려고 할 제, 왜정 시대에 허가를 얻지 않아서 조립하지 못하였다. 해방이 된 즉시로 세웠는데 세 분 신부와 최 신부의 족속 십여 인과 외교인 수백 인이 모여 건립한 비석 앞에서 제막식을 영화로이 거행하였다.
감사하다. 안 회장의 끈질긴 성덕으로 이 같은 큰 일을 성공한 은혜는 길이 잊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 비석(길이 5자 너비 2자) 앞면에는 「사제도마최정구지묘(司祭篤瑪崔鼎九之墓)」라 하였고, 뒷면의 비문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碑 文
主佑玆土第二司祭葉暗向明椅歟盛矣 (주우자토제이사제엽암향명의여성의)
将蒙揀選教導諸方去邪帰正終成大行 (장몽간선교도제방거사귀정종성대행)
西歴 一八二一年 三月一日 忠清洪州郡楼谷誕生 (충청홍주군루곡탄생)
西歴 一八三六年 十二月 入中国香港遊学 (입중국향항유학)
西歴 一八四九年 四月十日 司祭昇品 (사제승품)
西歴 一八四九年 十二月三日 帰本国 (귀본국)
西歴 一八六一年 六月十日 卒享年 四十歳 (졸향년 사십세)
京畿․忠清․全羅․慶尚․江原․黄海等地十二年間伝教 (등지십이년간전교)
堤川郡 信友一同 建尊 (제천군 신우일동 건존)
一九四二年 十二月 日
성가 466. 오 위대한 선물이여
최해성의 순교 |
說明 |
“저에게 원주 고을을 통째로 주신다 해도 배교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가 없고,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도 없습니다.” 이 용감한 말은 그때부터 원주에서 교우와 외교인을 막론하고 어린이들까지도 토론하며 진실을 가장 엄숙하게 주장할 때 “원주 고을을 통째로 준다 해도 나는 싫다.” 는 말을 격언처럼 쓰고 있다. 또한 최해성의 고모 최 브리지다의 순교도 너무나 장한 것이었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중권 474-479)
최해성 요한과 그의 고모 최 브리지다의 순교 이야기이다.
최 브리지다는 황사영 백서를 쓴 알렉시오를 숨겼다는 죄목으로 1801년 귀양간 유라는 사람의 아내였다.
최 브리지다는 남편을 따라 같이 귀양을 갔다. 그런데 남편은 병이 들어 죽을 고비에 이르렀으나 최 브리지다는 그에게 대세를 줄 교우를 불러 올 수가 없었다. 신 친 관계에 대한 교회 법을 너무나 소심하게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녀는 우선 남편이 다시 살아나면 정결을 지켜 남편과 남매처럼 살겠다는 결심을 한 다음 자신이 대세를 주었다. 그러나 남편이 죽었으므로 그는 아무 의지할 데가 없어져 오라버니에게로 돌아왔다. 교우들이 달력을 마련할 수 없던 시절에 그녀는 소재 날인 줄 모르고 고기를 먹은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약간 의심이 나서 알아본 결과 그때가 사순절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절대로 고기를 다시 먹지 않기로 결심하고 죽는 날까지 그 결심을 충실히 지켰다. 이 사실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정확하게 교회의 규율을 지켜 나갔는지를 알 수가 있다. 1839년 원주 옥에 갇혀 있는 조카 최해성 요한을 보려고 8월에 옥으로 갔다. 여자들은 어디에나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이 나라의 관습에 따라 조카에게 가는 것이 쉬우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관원이 그를 발견하고 어떤 여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옥에 갇혀 있는 최 요한의 어미입니다. 아들을 보러 왔습니다.” “그러면 너도 천주교인이 아니냐?” 하고 관원이 재차 물었다.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교우입니다.” “그렇다면 배교한 후가 아니면 네 아들을 볼 수도 없고 너도 여기서 나갈 수가 없다.” “제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가 천주를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여자는 죄인이다.” 이렇게 말하며 관원은 그를 고문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녀는 마음을 굽히지 않고 참아 받았다. 이리하여 관원은 그를 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아, 고통과 곤궁 속에서 4개월을 지낸 뒤 관원은 다시 명령을 내리며 이번에는 3일 안으로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와야 된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굶어서 목숨이 끊어지기에는 시간이 없으므로 옥리들은 밤사이에 그의 감방으로 들어가 목에 씌워 둔 칼을 세게 눌러 목졸라 죽였다. 그것은 1839년 12월이었다. 그가 친아들처럼 사랑했던 조카 최해성 요한을 만나러 간 것은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이 이야기는 옥리의 어머니가 그때 원주 옥에 갇혀 있던 교우에게 말하였다. “최 브리지다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습니다. 그녀의 목을 눌러 죽일 적에 그의 몸에서 한줄기 빛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거든요.”
강원도 수부 원주에 유명한 순교자로 1월에 서지 부락에서 최해성(海成=양복) 요한이라는 용맹한 신자가 체포되었다. 그의 집안은 본시 홍주 다락골에서 살았고,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먼 형제가 되는 사람이었다. 최해성 요한의 할아버지가 1801년 귀양을 가게 되어 자녀들이 고향을 떠나 귀양지에 따라갔고, 최해성은 거기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적 교육의 영향으로 그의 성격은 온순하고 마음이 곧게 자랐다. 그 후 천주교를 더 자유롭게 봉행하기 위하여 그는 가족을 데리고 산골에 있는 서지 동네로 이사가서 몹시 가난하게 살며 특히 자기 영혼을 보살피는 일에 전심하고 재산이 보잘 것 없는데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긍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자주 교우들을 격려하며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말해 줌으로 그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였다. 자기 자신도 순교하기를 간절히 바랬었는데 1839년 3월에 그 기회가 왔다.
그는 힘이 장사였으므로 관가에서는 그를 잡아오라고 쇠도끼로 무장한 군사들을 보냈는데, 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일제히 매질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저항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고 붙잡혀 결박을 당하고 그 동네를 관할하는 원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관장이 그에게 물었다. “네가 사교를 믿는다는 것이 참말이냐?” “저는 사교는 알지 못하지만 천주교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가족과 이웃들이 숨어 있는 장소를 대라고 몹시 매질을 하였으나 그는 한마디도 불지 않았다.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옥졸과 하인들이 어떻게나 포악하게 다루었던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게 되었다. 그의 상처가 낫자 다시 진영으로 끌고 나갔다. 관장은 상냥하게 말하였다. “네 종교를 배반하면 다시 임금님의 충실한 백성이 되는 것이니 네 재산을 모두 돌려 줄 것이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면 모진 형벌을 당하게 할 수밖에 없겠다. 요한은 대답하였다.
“저에게 원주 고을을 통째로 주신다 해도 배교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도 없습니다.” 이 용감한 말은 그때부터 이 도시에서 격언처럼 되어 교우와 외교인을 막론하고 어린이들까지도 토론할 때에 진실을 가장 엄숙하게 주장하는 말로 쓰게 되었다.
관장은 볼기 백대 이상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옥에 가두라 하였다. 부활주일 다음날 월요일에 다시 출두하니 관장은 그에게 말했다. “꼭 죽을 생각이란 말이냐?” “죽기를 무서워하고 살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통된 감정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의를 위배해서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죽으면 대관절 어디로 가게 된단 말이냐.” “천국에 갑니다.” “그러면 배교를 안 하겠다는 것이냐?” “못하겠습니다.” 이리하여 다시 고문을 받았으나 요한은 그 형벌을 기꺼이 참아 받았다. 천주께 대한 그의 사랑은 매를 맞는 중에 더 커지는 것이었다.
그 다음 최해성 요한은 감사 앞에 끌려나갔다. 거기서 태형, 곤장, 팔과 다리에 주리 등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하여 교우들을 밀고하라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라 하니 기꺼이 응하였다. 그의 몸은 참혹한 상태에 이르렀으나, 불평하지 않고 예수 마리아의 도움만을 빌었다. 2일이 지난 뒤 다시 신문을 받고 새로이 고문을 당하였다. 밤새도록 매를 맞아 살이 너덜너덜 떨어져 나가고 뼈가 여기저기 불거져 나오게 되어 의식을 잃게 되었다. 형리들은 이런 꼴이 된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 족가(足枷)를 채워 한나절이나 거꾸로 매달아 두었다. 나졸배 중 하나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그를 끌러 내려주고 물을 먹여 주었다. 그러나 오래 있다가 정신이 돌아왔는데, 정신이 들자 곧 천주와 성모마리아께 자신을 위로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 긴 고문을 받는 동안 어떤 천상 발현이 있었다는 증거인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인내심과 무슨 일이든지 천주의 뜻대로 하겠다는 소심한 주의는 탄복할 만한 것이었다. 하루는 족가 속에 숨어 있는 빈대를 잡도록 그것을 잠깐만 벗겨 달라고 옥리에게 청했는데, 빈대를 잡은 다음 그것을 도로 채우라고 하였다. 옥리가 그에게 그 괴로운 형구를 잠시 풀어놓고 있으라고 하였더니 최해성 요한은 대답하였다.
“안되오 관장이 그것을 끼고 있으라고 했으니 끼고 있겠소.”
여러 주간 동안 2일이나 3일에 한번씩 그는 진영에 끌려나갔다. 형리들은 악착같이 새로운 고문을 생각해 내느라고 애를 쓰고, 매를 때려서 천천히 죽이려 하였는데, 어떻게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기운을 다시 차리고 약 20일 가량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관장 앞으로 끌고 가니 관장은 그에게 말하였다. “올바른 정신이 좀 들었느냐?” 그는 대답했다. “못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면 제 영혼이 영원히 죽기 때문입니다. 임금님께 의를 위하여 죽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배반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는 불충하고 반역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하늘과 땅의 위대한 천주를 섬기겠다고 맹세한 제가, 형벌이 두렵다고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 관장은 화가 치밀어 매질을 한층 더 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다리가 부서져서 두세 치 되는 뼈 조각 두 개가 땅에 떨어졌다. 그의 등과 배가 뻐끔히 구멍이 나서 창자가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는 중에도 최해성 요한의 얼굴은 여전히 안온하였으니,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만을 생각하고, 사랑은 사랑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에 천주께서는 당신 일꾼의 영혼을 한층 더 깨끗하게 하시려고 최해성 요한이 심한 실망의 유혹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마음이 불안한 가운데 그는 우리 주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었고, 거기서 쇠약해져 가는 인생의 부르짖음을 덮어 누를 힘을 다시 얻었다. 오래지 않아 기쁨과 평화가 그의 마음속에 다시 찾아왔고, 그의 충성심에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기까지는 약 2개월 동안 기다려야 하였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그는 사자 밥을 기쁘게 한 그릇 다 먹었다. 사형장에 가려고 옥에서 나오자 옥리들은 모두 섭섭하다는 뜻을 나타냈으니, 그만큼 그의 아름다운 모범이 그들에게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옥에 갇힌 지 8개월 후인 1839년 10월 6일 2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당하였다.
최해성 요한은 박취득 라우렌시오와 그 밖의 몇몇 순교자들과 같이 이 나라의 순교자 가운데에서 가장 가혹한 고문을 당한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조선의 집형자들은 피의자들을 고문하는 솜씨가 믿기 어려울 정도이고, 악마적이어서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이 당장 죽어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그 직전에까지만 이르게 한다지만, 이와 비슷한 경우에는 모든 자연법칙을 벗어나 이 순교자들의 목숨을 보존하여 주신, 천주의 특별한 도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해성 요한은 21회나 신문을 당하였고, 18회나 고문을 당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모두 중요한 교우 집단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그때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인을 통하여 찬미 받기를 원하시는 천주께서는, 그와 함께 갇혀 있던 교우 중에서 너무 용기가 없어 그를 본받지 못한 몇몇 사람이, 그의 싸움을 거의 끊임없이 지켜볼 수 있게 허락하셨다. 이리하여 이 사람들이 옥에서 풀려 나와 전능하신 천주께서, 최해성 요한에게 행하신 훌륭한 일들을 알려 주었다.
성가 436. 주 날개 밑
묘재 남종삼 생가 터
성지 설명 |
소재지 : 충북제천 봉양면 학산리
1812년 충주에서 태어난 남종삼(南鐘三) 요한 성인은 39세 때에 현감 지위까지 올랐다. 묘재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에서 순교한 남종삼 성인과 양부인 부친 남상교(南尚教) 부자가 살던 집이다. 남종삼은 한국의 103위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던 분이다. 부친 남상교가 진사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충주목사 등을 역임하게 되자 부친의 부임지를 따라 다니며 공부를 했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말경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어 다시 임금 앞에서 경서를 논했다. 그때 두만강 건너 러시아군이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면서 통상을 요구했다. 이때 남종삼은 국내에 있는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 수교를 맺고, ‘이이제이방아책(以夷制夷防我策)’이라 하여 서양의 세력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 이때 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쾌히 받아들였으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전교 중이라 약속시간 내에 찾아오지 못했고, 대원군의 초조함이 분노로 바뀌었다. 얼마 후 주교들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는 대원군은 정권유지의 간계로 이미 천주교 박해를 결심한 뒤였다.
남종삼은 왕에게 건의한 것이 부당하게 처리된 것을 알고, 묘재로 내려가 아버지 남상교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는 “너는 천주교를 위해 충성을 했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생명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천주교를 욕되게 하는 일은 삼가 하거라.”하고 가르쳤다. 이에 남종삼은 치명 순교를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에 찾아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꼴라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이미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그는 결국 고양군 축베더리 마을에서 붙잡혀 1866년 3월 7일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부친 남상교는 공주에서, 장자 명희(明煕)는 전주에서, 처 이소사도 순교하였고, 차남 규희와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어 노비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성가 478. 주님께 영광을 드리자
조선교구 제 3대 교구장
페레올 고 주교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앵베르 범 주교와 모방, 샤스탕 두 신부의 순교 사실을 모르고, 앵베르 주교를 돕기 위해 새로이 두분 성직자 페레올 신부와 메스트로 신부를 파견하였는데, 그중 한 신부가 제 3대 교구장이 될 페레올 신부이다.
1838년 8월 14일 교황 그레고리오 I6세로부터 조선 교구 부주교로 임명받았으며, 1843년 12월 31일에 만주교구 주교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았다.
페레올 고 주교님은 연령 미달로 서품(교회법 만 24세가 되어야 사제로 서품)을 미루고 있던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도마에게, 1844년 12월 페레올 고 주교의 주례로 부제품을 주고, 그와 함께 조선 입국 기회를 찾았으나, 서양인의 입국이 극히 어려울 것이라 함을 듣고 감시가 삼엄하여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김대건 부제가 입국하여 배를 가지고 상해로 와서 같이 입국할 것을 약속하고, 고 주교는 혼자 상해로 되돌아왔다.
이에 김대건 부제는 입국하여 길이 25자, 넓이 9자, 깊이 7자되는 작은 배를 타고 상해로 가서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금가함’ 경당에서 조선 교우 11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페레올 고 주교의 집전으로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탄생 시켰다. 이것은 조선교회가 창립(교회 창립 1784년)된지 61년 만에 첫 경사였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 고 주교님은 김대건 신부와 조선 전교를 지망한 다블뤼 신부와 같이, 제물포에서 김대건 부제가 타고 온 작은 목선 라파엘 호에 몸을 맡기고, 서해의 무서운 태풍과 싸우면서 표류하다가 9월 28일에는 제주도 해안에 도착하였고, 이어 전라도를 거쳐 강경포 부근 황산포 나바위 교우 마을에 도착했다.
1845년 8월 31일에 상해를 떠나 52일 만인 10월 12일에 조선 땅에 입국하게 된 것이다. 주교님과 다블뤼 안 신부는 상복으로 변장하고 그곳에서 두 달 동안 머물다가 주교님은 김 신부의 노력으로 서울 석정동(현 을지로 1가) 집에 입주하였다. 그리고 이승훈의 손자이며 앵베르 범 주교의 복사였던 이재의 도마에게 조선말을 배우면서 성무를 집행하였다.
조선교회는 기해박해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다시금 세 성직자를 맞이하였고, 특히 우리나라 사람 김대건 신부를 맞이하여 갑자기 발전할 움직임을 보이므로 조선교회 책임자인 페레올 고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중국 땅에서 입국을 기다리는 메스트로 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바닷길로 맞이할 수 있는 길을 찾게 하였다.
페레올 고 주교는 다블뤼 안 신부와 같이 성모 성심회를 세웠고, 교세 확장에 전념하다가 병오박해로 자식과 같이 사랑하던 김대건 신부를 잃었는데, 1946년 10월에 세도가이며 천주교 박해자인 조만영이 시력을 잃고 신음하다 급사함으로 교우들은 물론이고, 주교님과 신부님도 큰 화를 면하게 되었다.
철종 시대에는, 일찍이 신유박해 때 사형을 받은 철종의 조부모인 은언군 내외의 죄를 씻어 주고, 1856년 4월에는 이신규의 청원에 따라 그의 부친인 이승훈 베드로의 죄를 씻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관대한 정책으로 성직자들이 뒤를 이어 입국하였고, 최양업 신부도 이때 입국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주교님은 다블뤼 안 신부와 최양업 신부에게 신학생을 위하여 라틴어와 한문 등을 가르치게 하였고,사제 양성에 뜻을 기우리면서 김대건 신부를 포함해서,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 가롤로, 임치백 요셉,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데레사, 정철염 가타리나, 이간난 아가다, 남경문 베드로, 한이형 라우렌시오 등 9명의 순교 사실을 기해 일기에 첨가하여 기해, 병오 자전을 편집하고, 이 책을 최양업 신부에게 라틴어로 번역하게 하였다. 페레올 고 주교는, 과로로 병을 얻어 1853년 2월 3일 서울에서 45세로 선종 하였으며, 유해는 고 주교의 유언대로 미리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옆에 안장되었다.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
베르뇌 장경일 주교
만주 교구의 부주교였던 베르뇌 신부는, 페레올 고 주교의 뒤를 이어, 1854년 12월 교황청으로부터 조선 교구 제 4대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해 12월 27일에 주교품을 받은 베르뇌 장 주교는, 이듬해 9월 상해에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중 푸르티에 신 신부와 쁘티니꼴라 박 신부를 만나, 그들과 같이 청나라 어부 배를 타고 오던 중 황해도 해역에서 조선 교우를 만나, 조선 배로 갈아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1856년 3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당시 조선교회에는 한국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안 신부 메스트로 이 신부 외에, 새로 입국한 베르뇌 장 주교와 푸르티에 신 신부와 쁘티니꼴라 박 신부 등 여섯 분의 성직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베르뇌 장 주교는 서울에서 첫 번째 성직자 회의를 열고, 교회 발전책을 수립하는 한편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배론에 신학교를 세웠고. 다블뤼 안 신부를 교장으로 푸르티에 신 신부를 교수로 임명하여, 이 땅에 제일 먼저 서양 학문의 전당을 세우셨다.
신부님들은 한 사람 밖에 없는 주교가 순교하거나 병으로 선종하면 문제가 생길 것을 생각해서, 1857년 3월 25일 다블뤼 안 신부를 승계권 있는 부주교로 추대하고, 베르뇌 장 주교의 집전으로 이 땅에서 최초로 주교 성성식을 가졌다. 주교님은 파리 외방전교회에 서신을 보내 조선의 교회발전 사항을 전하고, 성직자 추가 파견을 요청한 결과 1861년 7월에 4명의 신부가 들어오고, 1863년 6월에는 페낭에 유학 중이던 두 명의 조선 신학생과 함께, 오메트로 오 신부가 백령도를 거쳐 입국하였다. 이러한 경사와 교세 신장기에 앞서 입국한 메스트로 이 신부가 1857년 12월에 병으로 선종 하였고, 1861년 6월 15일에는 유일한 조선인 신부 최양업 사제가, 문경에서 41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 하는 슬픈 일도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성적자들의 헌신적인 전교로, 교세는 황해도 평안도지방까지 퍼져 이만여 명이란 신자를 갖게 되었고, 프랑스로부터는 많은 자금을 들여와 교회 서적을 목판으로 간행하기 시작하였고, 약국을 두어 병자를 구제하였으며 고아원을 세워 부모 잃은 고아들을 돌보았다. 이때에 승지로 있던 남종삼 요한도 입교한 것이다. 이렇게 조선교회를 이끌어 가던 베르뇌 장 주교는, 흥선대원군이 만일 주교가 러시아인들을 물리쳐 준다면, 성교회에 대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겠노라고 말한 일과 고종의 비호 아래, 조선교회는 머지 않아 믿음의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짐작되어, 많은 성직자와 자금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요청하고, 베르뇌 장 주교는 몸소 황해도 지방까지 전교에 힘썼다.
이런 장 주교의 열성으로 많은 은괴와 물자를 가지고, 4명의 신부 브르트니에르 백 신부, 위앵 마르띠노 민 신부, 볼리외 서 신부, 도리 김 신부가 입국하였다.
주교님은 양반 출신 교우 홍봉주 도마의 이름으로 지금의 태평로에 큰집을 매입하고, 주교 댁으로 사용하면서 이제 교회가 햇볕을 보겠구나 할 무렵에, 또 다시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침입하고 통상을 요구함에 크게 놀란 흥선대원군은, 장 주교를 만나기 원하였고, 승지이던 남종삼 요한에게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려는 것을 주교가 막을 힘이 있다고 정말 믿으오?라는 물음에 그는 “주교는 그럴 힘이 있는 줄로 압니다.라고 대답하고 곧 남종삼이 장 주교를 찾았으나, 성탄절 성사를 주기 위해 황해도 평산지방에 가서 있었기 때문에, 대원군과의 면담이 늦어지든 차에 러시아인들의 국경 침입도 뜸해지고, 동지사로 북경으로 가던 이흥교 등이 도중에서 급히 거짓 글을 조정에 보냈다. 그 글에 청나라에서는 그 나라에 있는 모든 서양인들을 죽이고 있다고 알려 왔고, 이에 조정 대신들은 ‘서양인들과 친하게 되면 나라가 망하니, 서양 오랑캐와 서학꾼들을 모두 죽이시오하는 글을 올리니, 대원군의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 할 즈음, 천주교 반대자인 조씨 일가의 책동으로, 1866년 병인년에 대 박해가 시작되었다. 야사에는 장 주교가 가지고 있던 재화를 빼앗아 재원이 부족한 경복궁 공사 때 쓰고자 한데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이 박해는 잔인하기 끝이 없었고, 1866~1872까지 무려 7년 간 계속된 지독히 모질고 끈질긴 박해였다.
박해가 시작되면 성직자들이 일차적인 대상인데, 흥선대원군도 성직자 전멸을 계획하고,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고문하여 배교하게 만들고, 그로 하여금 주교는 물론 우리나라에서 전교하고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숙소와 이름을 낱낱이 고해 바치게 하였다. 이에 따라 1866년 음력 l월 9일 베르뇌 장 주교와 집주인 홍봉주 도마를 구속함으로써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다.
이선이의 정확한 정보로 잡혀온 베르뇌 장 주교는 같은 감옥에서 브르트니에르 백 신부와 볼리외 서 신부, 그리고 도리 김 신부를 격려하면서 지내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그 해 3월 7일(음력 l월 2l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젊은 세 사제와 같이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 이때 조선에는 주교가 두 분이고 신부가 열 분이었는데 이선이는 선교사를 고발하여 주교 두 분과 신부 일곱 분이 순교하였다.
특히, 박해의 주동자를 자처한 조 대비는 그 무서운 오가작통법을 전국에 선포하였다. 흥선대원군 역시 오가작통법을 부활시키고, 피비린내 나는 선참 후계의 어명을 내려 선교사들과 평신도들이 1866년부터 붙잡히는 대로 처형당하였다.
베르뇌 장 주교는 사형 집행하는 날 선교사들을 비웃고 욕설하는 군중들에게 “당신들은 우리를 보고 비웃거나 흉볼 것이 아니라 울어야 마땅하오. 우리가 당신들에게 천국의 복을 전해 주기 위하여 이곳에 왔거늘, 이제 누가 당신들에게 천국의 복과 진리를 가르쳐 주겠소? 당신들은 도리어 슬퍼하시오라는 말을 하고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 베르뇌 주교의 나이는 52세였고, 1856년 3월 15일에 들어 와서, 1866년 3월까지 만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국인 성직자 양성과 도서 출판, 고아 구제사업 등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교우들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새남터에서 선교사들의 유해를 지금의 용산 우체국 뒤 국군 중앙성당이 있는 와고개에 안장하였다가, 명동성당을 거쳐 현재는 절두산 성당 지하 성해실에 안치되어 있다.
부엉골 신학당
성지 설명 |
여주성당 031-885-2031
소재지 : 경기여주 강천면 금평리
지금 부엉골에 남아있는 유물로는 우물터와 사람이 밟고 말을 탈 수 있는 바침대 돌이 남아있다.
병인박해 진상 |
說明 |
수년 전부터 러시아인들은 만주(満洲)까지 와서 부동항을 개척하기 위해 조선 쪽으로 불안스러운 전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병합에 병합을 거듭하며 그들은 작은 강 하나만으로 경계를 이루는 함경도 북쪽 국경에까지 내려왔습니다. 1866년 1월에 러시아 선박 한 척이 원산에 나타나, 거기서 통상의 자유와 러시아 상인들이 조선에 정박할 수 있는 권리를 아주 강압적으로 요청하는 서한을 조선 정부에 보냈습니다. 이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와 동시에 군부대가 함경도의 국경을 월경하였습니다. 아시아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이 사건은 적당히 얼버무려 넘겼습니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므로 조선 정부에서는 황제의 허가 없이는 어떤 다른 나라와도 교섭할 수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북경으로 즉시 특사를 파견한다는 회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매우 불안하였고, 대신들은 그들의 난처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꽤 냉담했던 신자로 박해 기간에 총애를 잃었던 서울의 몇몇 양반들은, 러시아인들의 이 교섭을 천주교인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얻어 주고, 그와 동시에 자기들로서는 수완과 애국심이 많다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김면호(金勉浩) 도마와 교구장이 거처하는 집주인 홍봉주(洪鳳周) 도마와 이퇴일(李堆-) 안또니오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여 러시아인들에게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영국과 불란서와 동맹을 맺는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편지를 쓰고, 조선에 와 있는 서양 주교들을 이용하면 그보다 더 쉬운 일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들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졸렬한 솜씨를 발휘해서 꾸민 이 편지가, 대원군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趙基晋)이라는 사람의 손으로 대원군에게 제출되었습니다. 대원군은 그 편지를 읽고 또 읽고 하더니, 아무 말 없이 깔고 앉았습니다. 징조가 좋지 못한 이 침묵에 김면호 도마는 몹시 겁을 집어먹고 곧 지방으로 내려가 숨었습니다.
김면호 도마가 도망 간지 2일 후에 왕의 유모 박 마르타가, 대원군의 부인을 보러가니 부대부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왜 이렇게 가만히들 있는거요. 러시아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나라를 빼앗는데, 아마도 이 불행을 막을 수 있을 주교가 여기 있는 것이 그렇게도 필요한데 지방 순회를 떠나는구려. 내 남편에게 편지를 한번 더 올리라고 하시오. 내가 장담하겠소. 그 편지는 성공 할거요. 그리고 나서 즉시 주교를 돌아오시게 하시오.” 박 마르타가 홍봉주(洪鳳周) 도마에게 달려가 이 말을 전하니, 홍봉주 도마는 곧 승지 남종삼(南鐘三) 요한을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편지를 다시 쓰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남종삼 요한은 학식이 매우 높은 신자로 여러 선교사에게 조선말을 가르쳤는데 그 중에는 리델(Ridel)신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궁중에 머무르면서 조정 대신의 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남종삼 요한은 편지를 쓰기로 동의하였고, 그것을 직접 대원군에게 제출하러 갔는데 그때 대원군 주위에는 5, 6명의 고관이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매우 주위 깊게 편지를 읽고좋소. 대신에게 가서 이 이야기를 하시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튿날 그는 남종삼 요한을 다시 불러 그와 더불어 오랫동안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교리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참됨을 인정하였습니다.다만 내가 비난하는 것이 한가지 있소. 당신들은 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소하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이렇게 물었습니다.주교가 러시아인들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해요?물론입니다하고 남종삼 요한이 대답하였습니다.주교가 지금 어디에 있소. 서울에 있소?”
아니올시다. 며칠 전에 서울을 떠났습니다.” 그렇지! 황해도에 천주교인들을 둘러보러 갔겠구먼.네 황해도에 계십니다.그러면 내가 좀 보았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알리시오.남종삼 요한은 나와서 여러 사람에게 방금 가졌던 대화를 이야기하였다. 종교 자유의 시간이 마침내 이르렀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습니다. 신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우리나라 수도에 어울리는 큰 성당을 지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김면호 도마는 급히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주교를 만나 보기를 희망했는데도 아직 아무도 교구장과 그분의 보좌 주교를 모시러 가지 않은 것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두 분이 다 서울에서 엿새 길이 되는 곳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먼길을 가기에 필요한 돈이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북쪽에, 다블뤼 주교는 남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 딸의 시아버지 조기진이 이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는 여비로 70프랑과 그의 교군 중의 하나와 교군 두 사람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면호 도마는 베르뇌 주교에게 알리러 떠났고, 이퇴일 안토니오는 다블뤼 주교를 모시러 갔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1월 25일에 서울에 도착하였고, 베르뇌 주교는 4일 뒤에 도착하였습니다. 31일 남종삼 요한은 주교들이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대원군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꽤 냉정하게 맞아들였고, 입을 열기도 전에 흥선대원군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니, 당신 아직 여기 있었소. 춘부장을 뵈러 시골에 간줄 알았었는데.”사실 시골에 가야 합니다. 하지만…중요한 일 때문에 서울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그렇고 말고요.” 하고 대원군은 그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급한 일이 하나도 없소. 나중에 봅시다. 그리고 춘부장을 뵈러 간다니 모든 일에 대해서 그이와 좀 상의하시오.”
남종삼 요한의 아버지 남상교(南尚教) 아우구스띠노는 84세의 노인으로 훌륭한 천주교 신자였다.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들의 입으로 듣고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너는 충성스러운 신민의 일을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너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너에게 사형 선고에 서명하라고 하면 거기에서 천주교의 욕된 표현은 일체 지우도록 명심해라.”
남종삼 요한에 대한 대원군의 대접은 얼마간의 불안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설날이 가까웠다는 핑계로 회견을 늦추는 것을 보고. 그의 주교 순시를 공연히 중단한 것을 후회하였고, 주교는 이웃에 있는 부천과 인천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러 갔습니다. 거기서 3일을 지내고 2월 5일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한편 다블뤼 주교는 내포로 돌아가 늘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치 아니하였고, 5일부터는 집에서 외출한 것이라고는 북쪽지방의 몇몇 신입 교우에게 견진과 그 밖의 성사들을 주기 위하여 5분 거리에 있는 정의배(鄭義培) 마르꼬 회장 집에 두세 차례 간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2월 10일 페롱(Feron)신부에게 보낸 다음 쪽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편지에 이 나라의 평화와 모든 사람의 머리를 번거롭게 하는 사정들이 다행스럽게 타결되기 위해, 미사 한대를 드리라고 신부에게 요청했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렇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임금의 모친이 각 선교사에게 이런 뜻으로 미사 한대씩 드리기를 원하는 것이오. 이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시오. 뭔가 좀 수상하지만, 그것이 이내 밝혀지지 않는구려 나더러 급히 돌아오라는 요청이 있었던 만큼 내가 돌아오는 즉시 대원군과의 면담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지금까지 아직 아무 일도 없어요. 면담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우리는 자유를 향해 커다란 전진을 했어요. 우리 주님과 착하신 성모님께 이 중대한 상황에서 나를 도와주시라고 기도합시다. 또 신자들에게도 아주 조심성 있게 행동하라고 부탁합시다.”
슬프다! 바로 그 시각에 그와 그의 모든 동료의 죽음과 조선의 천주교를 제거하기 위한 박해의 결정이 의결된 길이었습니다.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이 조정은 거의 복음에 대한 철저한 적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벌써 여러 차례 박해령을 다시 선포하기를 요구하였었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들은 유리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는 러시아인들의 문제가 해소되었습니다. 그들의 배가 물러가고 그들의 군대가 국경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처음에 불러 일으켰던 공포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한편 1865변 12월에 북경으로 떠나간 조선 사절단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중국인들이 나라 안에 흩어져 있는 서양인들을 사형에 처하고 있다는 말이 전해졌습니다. 이 편지가 1월 하순에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그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4명의 중요한 대신들은 주교들에 대한 대원군의 교섭을 공공연하게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서양인들을 증오해야 합니다. 그들과 동맹을 맺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끝장입니다. 서양 오랑캐를 모두 죽입시다. 천주교도를 모두 죽입시다하고 외쳤다. 대원군은 영불 연합군의 중국 원정과, 조선이 침입 당할지도 모른다는 점 등등을 상기 시켰습니다. 그들은아니올시다.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우리는 벌써 서양인 여러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누가 일찍이 그들의 죽음을 보복하려고 했습니까. 우리가 그때문에 무슨 손해를 입었습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정 신부를 빗대고 말하는 것이었고, 또 어쩌면 여러 시기에 해안에서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난파자들도 암시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혼자서 의견을 달리하던 흥선대원군은 그들이 내놓는 이유에 설복 당하고 그들의 광신에 질질 끌려갔던 것인가, 혹은 흥선대원군 자신의 권위를 위태롭게 하고, 자기의 지위를 위험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격류에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나중에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들어와서 그 시기에 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더 완전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든 흥선대원군은 굴복하여 모든 서양인 주교와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 판결과 천주교인들에게 국법으로 박해하는데 서명하였습니다.
성가 50. 야훼는 나의 목자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다블뤼 안돈이 주교
조선교구 제 4대 교구장 베르뇌 장 주교는 1866년 3월 7일 순교하여, 다블뤼 안 보좌주교가 조선교구 5대 주교로 자동 임명되었다. 교회창설 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혹한 병인박해 중이었으므로, 4일 후인 11일 내포지방에서 체포되어,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하였으니, 교구장 다블뤼 안 주교는 재임 기간 24일만에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그때 고종의 혼사 말이 오가고 있을 때이므로 서울 근교에서 피를 보는 것은 혼사에 해롭다는 무당의 말에, 새남터가 아닌 서울에서 250리나 떨어져 있는 보령 수영 근처 ‘갈매못’에서 다블뤼 안 주교와 오매트르 오 신부, 위앵 마르띠노 민 신부가 처형되었다. 주교님을 아버지같이 따르던 복사 황석두 루가와, 배론 신학교 집주인 장주기 요셉도 같은 장소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주교 성품을 받은 분으로, 1845년 10월 12일 제 3대 교구장 페레올 고 주교와 우리나라 첫 번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입국하고, 지방 전교는 물론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조용한 곳에 신학당을 마련하고, 최양업 신부로 하여금 신학생을 가르치게 했으며, 병오박해를 겪고 난 후 1856년 3월에는 제 4대 교구장 베르뇌 장 주교를 맞이하여 주교님을 도와 전교에 힘쓰던 중 1857년 3월에는 부주교로 추대됐고, 곧 베르뇌 장 주교의 주례로 승계권 있는 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장 주교가 순교하고, 다블뤼 안 주교 자신도 충청도 내포에서 위앵 민 신부와 오매트르 오 신부와 같이 체포되어, 순교할 때까지 21년이란 긴 세월 동안 조선교회를 위하여, 같이 고난을 겪은 다블뤼 안 주교는 병오․병인의 2대 박해를 겪은 산 증인이었다. 또 다블뤼 안 주교는 한한불사전(韓漢佛辭典) 편찬에 매달리면서 한편으로는 황석두의 도움으로 교리서를 번역하고, 조선 성교회 역사의 필요한 순교자들의 사적도 수집한 안 주교는, 이때부터 문화 사업까지 계획하였다.
다블뤼 안 주교는 1845년 10월 12일 입국하여 20년 5개월 동안 사목하다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1984년 5월 6일 성인으로 승품 되셨다.
세종대왕 능
세종대왕과 한글 반포 |
說明 |
세종대왕릉
우리 조상들은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는데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이 있었기에 그 무서운 박해 중에도 신앙을 전파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 세종대왕 영릉을 참배하는 것도 우리나라 국민으로써 천주교인으로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종묘의 건물은 세부 장식 없이 간결하고 둔중한 양식과 붉은 색의 나무 기둥이 도열한 1백 미터쯤 되는 긴 장랑이 있다.
이 종묘에서 치르는 제례(祭禮)에 연주되는 관현곡(管絃曲)인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이 있는데 이 두 음악의 작곡자는 조선왕조 제 4대 세종대왕(1397-1450)이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은 고취악과 향악에 바탕을 두고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이 작품들을 작곡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중국의 한자는 모든 낱말이 저마다 글씨를 갖는 표의문자체계(表意文字體系)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쉬운 글을 쓰거나 읽기 위해서도 기천자(幾千字)의 문자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중국의 한자는 서민들에게는 손이 닿지 못하는 높은 산의 꽃과 같다. 그뿐 아니라 한국어와 중국어는 어휘가 다르고 어문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일상 일용의 한국어를 한자로 문자화하는 데엔 큰 괴리와 어려움이 있었다.
세종대왕은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오랜 시일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누구나 쉽게 배워서 쓸 수 있는 한국의 문자 체계인 한글을 창제하셨다. 그런 점에서 한글은 한자를 변형해서 만든 일본의 가나(假名), 또는 거란이나 여진 문자 등과는 확연히 다른 독보성을 지니고 있다.
15세기 한국어의 치밀한 음운 분석에 기초하여 창안한 한글은 웬만한 사람이면 하룻밤 사이에 쉽게 익힐 수 있는 최고의 과학적인 음소문자요 최후의 알파벳 문자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언제, 누가, 어떤 의도에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분명히 밝혀지고 있는 세계 유일의 문자이기도 하다. 한글을 창제한 의도는 세종대왕 스스로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오해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말로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말과 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그들의 글자를 가지고서는 서로 통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식한 백성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불쌍하게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어 사람마다 쉽게 배워 날마다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세종대왕은 가난한 백성, 배우지 못한 백성을 어여삐 생각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려는 애민(愛民), 목민(牧民)의 정치 이념, 곧 민본주의 정치 이념을 가진 분이다. 이것은 세계사적으로 보더라도 매우 특이한 사실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15세기의 유럽에서는 백성들이 알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르게 하는 것이 비밀을 유지하고, 그것이 권위의 근원이요, 권력의 보호 장치라는 구이차르디니의 군주론 철학이 풍미하고 있었다.
세종대왕과 같은 해에 태어난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한국보다 약 2백년 뒤졌지만 지식을 보다 빨리, 보다 값싸게, 보다 널리 보급할 수 있는 금속활자의 인쇄 기술을 발명했을 때 유럽의 지배계급은 이 기술의 보급이 두려워 갖가지 인쇄 탄압을 하게 되었다. 출판물에 대한 검열, 인쇄소 설치 제한, 인지세 부과, 그리고 금서 목록의 작성 등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15세기에 한국에서는 달랐다. 세종대왕은 13세기 고려시대에 개발한 금속활자를 개선하기 위해 1420년과 1434년에 각각 경자자(庚子字)․갑인자(甲寅字)라고 부르는 새로운 동 활자를 만들고 인쇄법도 개량해서 서적인쇄 능률을 향상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세종대왕 시대에는 정부가 주도하여 역사서, 지리서, 의학서, 어학서, 음악서, 민속 가요 집, 악보 등 수많은 서적을 저술하고, 편찬하고 간행되어 한국 출판사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1430년에 세종대왕이 세계 최초의 여론조사를 실시했다는 사실이 있다. 일종의 토지 조세제도의 편의성과 공정성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각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가부를 물어 그 숫자를 집계하여 파악한 사실이 그것이다.
세계 모든 지역에서 군주의 권력과 권위를 위하여, 정보의 확산을 막으려고 갖가지 출판 통제가 관행화 되어있던 시대에, 조선왕조의 세종대왕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읽기 쉽고 쓰기 쉬운 글을 만들고, 백성을 위하여 책을 펴내는 출판 진흥의 민본 정치를 구현했다는 사실은, 한반도의 기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다른 군주들과 다른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재위 초기에 연구 기관으로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운영한 것은 다른 군주로부터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 기관에 우수한 신하들을 배속시켜 왕정에 필요한 여러 가지 연구 사업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국정의 방향을 바로잡고 정사의 질을 높였다. 세종은 재위 10년까지는 왕정의 방향을 잡는데 거의 시간을 보냈고, 10년이 지난 때부터 중농정책의 구체적인 방법들을 강구하였다. 농업정책은 농업기술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 수확물에 대한 과세를 공정하게 하는 두 가지에 초점을 모았다.
기술 정책은 한반도 남쪽에서 먼저 발달한 선진 기술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것과 농업 노동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의술을 발달시켜 보급하는 것에 힘을 기울였다.
14세기에 한국에서는 겨울철 휴경 농업의 제약을 극복하는 동향을 보이기 시작하여 세종 즉위 무렵에는 연작상경(連作常耕) 농법(農法)이 전라, 경상, 충청 3도에서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
세종은 이 선진기술을 조사하여 그 요점을 간추린 농서로서「농사직설」을 편찬하여 그것을 이북 지역과 각 고을에 부임하는 지방관들이 반드시 가져가 활용하게 하였다.
농업 기술상의 새로운 동향과 함께 지식인들은 인구를 늘이기 위해 소아과, 부인과 등을 중심으로 의술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부단히 경주하였다. 그 결과 의술 자체의 수준은 중국의 선진 의술과 같으면서 토산 약제를 활용하는 의술로서 이른바 향약 의술을 성립시켰다. 세종대왕은 이를 총 정리하여 체계화하는 정책을 수행하여「향약집성방」「의방류취」등 거질의 의서를 편찬해 내는 한편 일반인들이 활용하기에 편한 부인과, 소아과의 보급판 의서로「태산요록」등을 간행하여 인구 증가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고려 시대까지도 한국의 인구 현상은 소아 사망율이 높아 한 쌍의 부부가 얻는 평균 자녀수는 3인을 넘지 못했으나 세종대왕을 거치면서 그 이상으로 넘어서는 증가율을 현저히 보였다.
조선왕조는 그 새로운 시대적 동력을 체계적으로 이끌어 한 단계 발전한 국가와 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왕의 명령을 받고 전국 각지에 부임하는 지방관들에게 백성들로부터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말라는 당부를 빠트리지 않았다. 그리고 농사의 중요성을 되돌아보면서 자기나라 달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현실적 모순을 발견하였다. 당시 조선은 중국 명나라의 ‘피책봉국’ 이었기 때문에, 새해가 다가오면 사신이 가서 조선에서 쓸 달력을 받아 왔다. 그러다 보니 달력이나 일력의 기준이 되는 책력을 전적으로 책봉국에 의존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았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와 함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천문 과학기술의 발달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재위 14년부터 여러 인재들을 동원하여 대간의(大簡儀)․소간의(小簡儀) 등 여러 가지의 천체 관측 기구들을 먼저 만들어, 경복궁의 위도를 정확히 측정한 다음 16년부터 자격루를 비롯한 시각 측정 기구들을 제작하여, 24년에 마침내 칠정산 내편․외편의 날수 계산법을 완성시켰다. 칠정산 내편은 한 달의 길이를 29.530593일 한해의 길이를 365,2425일로 계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성가 22. 천지 생기기 전
황사영 백서
說明 |
백서는 교회의 중요한 사료가 되고, 그의 순교 장면과 그가 보여준 신앙은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정조(正祖) 임금은 친히 그의 손을 붙잡고 격려했다. 진사에 합격한 그는 학문의 길을 위해 정약종(丁若鍾) 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1791년 이승훈과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하였다. 결국 천주교에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시오를 주보로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령이 내려진 그는, 그 아름답던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배론으로 숨어들었다. 황사영은 옹기가마 토굴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와 김한빈(金漢彬), 황심(黃沁)이 전해 주는 박해 상황을 기록하여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글을 명주에 적었다. 이 비밀 문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의주에서 붙잡힘으로써 발각되어 9월 29일 황사영도 체포되어 27세로 11월에 서소문에서 처형된다. 이 사건으로 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은 추자도로 유배되었다.
이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에 쓰여졌으며, 모두 122행의 13.384자(본한글본은 41.580여자)에 장문으로 쓰여졌다. 이 백서는 세 부분으로 첫째는 신유박해 중 순교한 30여명의 순교 사적을 쓰고, 두 번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 그리고 벽파와 시파에 당쟁을 이야기하고, 세 번째는 조선교회의 희생과 학살에 대한 대비책과 외세의 원조를 청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죄인 도마 등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교님께 호소합니다.
지난 봄에 그 곳에 갔던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와 주교님께서 안녕하시다는 소식은 잘 들었습니다만, 그 후 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 이미 해가 저물게 된 이때에도 기체 만안하신지 살피지 못했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주교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주님의 넓으신 은혜를 충만히 받으사 덕화가 날로 높아지실 것이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여 마지아니하옵니다.
죄인 등은 죄악이 많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의노를 범하고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 아래로는 사람들과 의논조차 못한 채 박해만 크게 일어나게 하여 그 화가 신부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리고 죄인 등은 이 위기에 처하여서도 스승과 함께 목숨을 버려 주님께 보답하지도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감히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리이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교가 전복될 위기에 처하여 있고, 백성들은 물에 빠져 죽는 고통을 겪고 있으나 어지신 아버지를 이미 잃은지라 그를 붙들고 부르짖을 길이 없고, 진실한 형제들은 사방에 흩어져 서로 의논하고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주교님께서는 온정 깊은 부모를 겸하시고 사목의 책임을 지셨으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극도에 달한 고통 속에서 우리들은 다른 누구를 불러야 하겠습니까.
이제 박해의 전말을 대강 아뢰고자 하오나 그 일이 일어난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또 그 실마리가 하도 복잡하여 한꺼번에 진술하기가 어려워 다음에 자세히 적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살펴 주옵소서.
현재 교회 사정은 말이 아니옵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죄인이 다행히 화를 면하였고 요왕이 아직 발각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 나라에 주님의 은총이 아주 끊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오호 죽은 사람들은 이미 목숨을 바쳐 성교를 증명하였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이오나 재능이 적고 힘이 약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세 명의 교우가 비밀리에 모여 당연한 문제들을 의논한 결과 그동안 속에 품었던 사정을 일일이 아뢰기로 하였으니 읽어보시고, 이렇듯 외로운 자들을 가엾게 보시어 조속히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기를 바라옵니다.
죄인 등은 마치 양떼가 흩어져 달아나듯이 어떤 이는 산골로 도망쳐 숨고 혹은 떠돌이가 되어 길에서 헤매면서도 울음마저 터뜨리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습니다. 실로 목이 메고 가슴이 쓰라리고 뼈가 저려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주님의 전능과 넓으신 사랑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님의 도우심을 정성 들여 빌어주시고 자비의 정을 크게 베푸시어 저희들을 이 물불 속에서 건져 주시고 가족들과 함께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날 성교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그 성덕을 노래로 읊지 아니하는 이 없고, 그 영적 감화를 기뻐하며 흥겹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 먼 끝에 사는 백성들이라고 해서 어찌 주님의 자식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지방이 멀고 궁벽하여 가장 늦게 성교를 들었고 또 그들의 기질이 약하여 고통을 견디기가 어려운데다, 10년 동안이나 갖은 풍파로 눈물과 불안 속에 지냈기에 금년의 박해는 얼마나 참혹한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이 어찌 이토록 극도에 처해질 수가 있습니까. 이 난이 비록 끝난다 하더라도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으면 예수의 거룩한 이름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이쯤 미치고 보니 간장이 서늘합니다. 중국과 서양 교우들이 우리들의 이 위기와 고통을 듣는다면 어찌 동정하지 아니하리이까.
감히 바라옵건대 교황께 자세히 아뢰시어, 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쓰셔서 세계 각 국에 알려 주님의 박애 정신을 본받은 성교회가, 그 공동체 의식을 드러내어 죄인들의 간절한 희망을 채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죄인들은 가슴을 부등켜 앉고 눈물을 흘려 울며 이 어려운 사정을 피력하오며 목을 늘이고 발 돋음을 하여 오직 반가운 소식이 있기만 기다립니다. 주교님께서는 죄인들이 드리고 싶은 말씀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함을 가련히 여기소서.
을묘년(1795)에 주문모 신부를 잡으려다 놓친 후부터, 선왕의 의심과 두려움은 날로 깊어져 남모르게 수사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신부의 잠적을 알아내지 못하자, 조화준이라는 자를 시켜 곁으로는 교우인 체 꾸며 충청도 일대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여 드디어 기미년(1799) 겨울 청주에 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충청도의 열심한 교우들은 거의 다 잡혀 죽었습니다.
최필공 도마는 중인 계급의 사람으로써 성질이 곧고 의지가 굳세고, 정의로운데다 재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열심이 대단하여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풍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유년(1791) 박해 때 불행히 유혹에 빠져 배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왕이 몹시 기뻐하여 그를 장가들게 하고 벼슬까지 주니 도마는 하는 수 없이 다 받아들이긴 했지만, 근년에 와서는 집에 돌아와 있으면서 과거의 잘못을 몹시 뉘우치며 항상 몸을 받쳐 속죄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미년 팔월 선왕이 뜻밖에 그를 형조로 불러들여 네가 아직도 사학을 받드느냐고 물으시매, 도마는 자기가 바랐던 대로 이제야 죽게 되었구나 하고 충효에 대한 성교의 도리와 자기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심정을 솔직하게 진술하였더니, 그 말은 빛나게 밝고 위엄이 있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그러자 법관은 몹시 놀라고 분통이 터져 진술 사항을 그대로 임금님께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다시 더 형벌을 내리지도 않고 아무런 판결도 없이 그냥 석방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들이 왕께 상소문을 올려 도마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역시 모호한 대답을 내려 그를 포용하는 뜻을 보여 일은 그 정도에서 가라앉았습니다.
이준배 말딩은 소론의 1명(첩의 자식의 칭호)으로 경기도 여주에 살았는데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고 지조가 쾌활하였습니다. 원래 김건순과 생사를 같이하리 만치 가깝게 사귀어 왔었는데 김건순이 성교를 믿게 되자 말딩도 그를 따라 믿고 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성이 불같이 뜨거웠고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대담하게 행동했으며 남들이 자기의 믿음을 눈치챌까봐 무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경신년(1800) 부활 축일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마을 교우들과 길가에 모여 앉아 높은 소리로 희락삼종(부활삼종)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또 술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는 놀이를 날이 저물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원수진 집의 밀고로 그는 열한 사람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교우 중에는 마음이 약한 이도 있었지만 말딩의 격려와 권면에 힘을 입어 혹독한 형벌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모두 한결같이 버티어 끝내 석방되지 못하고 다들 갇혀있게 되었습니다. 말딩은 본래 의술을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정통하지 못하였는데, 옥에 갇힌 후 혹시 병에 대하여 문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런 다음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해 주면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옥문 밖은 늘 장날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고을 군수도 금할 도리가 없었고, 자기도 병이 나면 와서 약 처방을 얻어 갔습니다. 이래서 옥중 살림이 구차하지 않았습니다.
김건순은 사람들이 혹시 말딩이 병 고치는 능력을 물으면, 칭찬이 너무 과하다 할까봐 열 명중에 여덟 아홉 명은 고친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사람도 효험을 보지 못한 이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루는 감옥에 관리가 의서를 좀 보여 달라고 하니까, 그는 내게는 의서가 없소 다만 천주님을 공경할 뿐이요. 당신도 의술을 배우고 싶거든 천주님을 믿으시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옥리가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는데 무엇으로 배운단 말이요 하니, 말딩은 웃으면서 내 가슴속에 있는 불타지 않은 책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계몽하여 교회에 나오도록 하기에 족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함께 갇혀 있던 원 요왕에게는 한 늙은 여종이 있어 늘 옥에 찾아와 돌보아 주면서 집안에 따분한 형편을 늘어놓으며 배교하기를 꾀었었는데, 요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할멈의 딸이 하도 처참하고 간절하여 요왕도 번민하며 마음의 동요를 느꼈습니다. 이것을 알아챈 말딩이 그 할멈을 노려보았더니 할멈은 겁이 나니까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물러가 다시는 옥에 찾아오지도 않았고, 후에 이 생원의 눈빛이 하도 무서워서 다시는 못 가겠다고 하더랍니다. 말딩은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을 외며 진리를 설명하여 사람들을 권유하였는데, 간수 한 사람도 감화되어 교를 믿었으며 나중에 매우 열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철신은 남인 측 대가의 자손으로 경기도 양근(양평군)에 살았는데 그는 평소에 경서와 예서로 세상에 이름난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온 가족이 다 믿고 따랐습니다. 본시 이름난 집안이라 비방도 대단하였습니다. 그 아우 일신이 신해년(1791) 박해에 죽고 나서부터는 감히 계명을 터놓고 지키지 못하였는데도, 그를 원수같이 취급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심하여, 을미년(1799) 여름에는 드디어 그의 고향에 고약하고 귀신같은 놈들이 터무니없는 죄를 꾸며 관청에 고발까지 하게 되었고, 이에 권씨 집안의 자제들도 맞서 대항하게 되었으므로 사건은 장차 크게 벌어지게 되었는데, 마침 그 고을 군수가 현명하게 처리하여 싸움은 거기서 중재되었고, 고발 내용이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판명되어 간교한 모략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략은 비밀리에 계속되어 서울에 있는 악질 관리들과 결탁하여, 경신년(1800) 5월에는 선왕을 직접 알현하는 자리에서 양근 땅에는 그 고을에 사학이 한참 성행해서 아니 배우는 사람이 없고, 안 믿는 동리가 없는데도 군수란 자는 태평 세월로 사찰조차 아니하니 이 군수를 마땅히 징계해야 한다고 아뢰었습니다. 선왕이 그 보고를 듣고는 옳다고 판단하여 양근 군수를 인책 사임시키고 새 군수를 부임시키니, 그는 부임하자 곧 묵은 사건을 끄집어내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늙고 겁이 많은 권철신은 서울로 올라가서 잠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가두었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벌을 대신 받겠다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군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기어이 철신을 불러들이려고 하여 사건은 오래도록 종결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선왕은 성교에 대하여 의심이 많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그는 본래 무슨 사건이든 크게 확대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 신부 사건은 두 나라 사이에 관계되는 일이라 만일 드러나면, 그 처리가 매우 곤란하겠으므로 을묘년 후 여러 신하들이 성교를 엄금하라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일체를 말단 관리들에게 내맡기고 자기는 간섭하지 아니한 것처럼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지방의 박해는 비밀 지령이 아닌 것이 없었고, 일부러 아니한 체 한 것은 교우들의 마음을 늦추어 놓고 몰래 신부를 체포하여 암암리에 결말을 지으려고 했던 것인데 미쳐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여삼은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 삼 형제가 다 성세를 받고 박해를 피하려고 서울로 이사와 살고 있었는데, 여삼은 근년에 와서 냉담하고 배교까지 하더니 부랑자들과 어울려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두 형들도 이것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이안정이란 사람도 역시 충청도 사람으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재산이 약간 있는 자로서 여상과는 사돈 간이었습니다. 여상은 가난하여 늘 안정에게 돈을 좀 돌려주기를 바랐지만 안정은 그가 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삼은 늘 안정에게 원한을 품고 이를 갈고 있던 중, 그는 안정이 늘 성사를 받고 있음을 눈치채고, 만일 신부가 안정에게 재물을 내게 좀 나누어주라고만 한다면 거절하지 못할 테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 신부께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안정이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자, 이것은 신부가 안정에게 부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트집을 잡아, 이젠 그 분풀이를 신부께로 돌려 모략으로 해치고자 신부의 동정을 살펴 포도부장에게 밀고를 했습니다. 5, 6년 동안이나 수사를 해도 알아내지 못했던 신부의 정체가 알려지니 이 말을 들은 포도부장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들은 일이 성공하면 너를 봉급이 많은 관직에 추천해 주겠다고 하며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신부는 골롬바의 집에 있었는데 여삼이는 이것까지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부장더러 아무 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면 알려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삼이는 약속한 날이 이르기 전에 다른 사람의 집에 갔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집에 돌아올 수 없게 되어 부장은 헛걸음만 하였습니다. 다행히 한 교우가 이 사정을 알고 신부에게 알리고 다른 곳으로 피해 가서 안정에게 돈 수십 냥쯤 가지고 가서 여삼이와 화해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삼의 원한과 분노는 잠시 누그러졌고 또 며칠 안되어 국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관청에선 일이 분주하여 사건은 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삼은 이미 신부를 밀고한 뒤요 또 자기로서도 이제 어찌할 수 없게 되어, 늘 악질 분자들과 어울려 음모를 꾸며 기어코 흉악한 짖을 끝까지 저지르고야 말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 나라의 양반들은 200년이래 당파가 생겨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남인 노론 소론 소북의 네 당파가 있는데 선왕의 말년에 남인이 또 두 파로 갈라져 그 한파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등 몇몇 사람들로서 이전엔 모두 천주교를 믿었으나 목숨을 아끼기 위해 배교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는 몹시 성교를 해치는 척 했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믿음 속에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은 수가 적고 그 세력이 외롭고 위태로웠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은 홍의호 목만중 등 진짜로 성교를 해치는 자들인데 10년이래 양편은 서로 깊은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노론도 또 갈라져 두 파가 되었는데 시파(時派)라는 것은 모두 임금의 뜻을 받들어 선왕의 심복의 신하가 되었고 벽파(僻派)라는 것은, 모두 당론을 고수하여 임금의 뜻을 항거하므로 시파와는 원수같이 지냈으나, 당원이 많고 세력이 크므로 선왕도 두려워하였고 근래에는 온나라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가환은 문장으로 세상을 뒤흔들었고, 정약용은 재주와 기지가 누구보다도 뛰어났으므로 을묘년 이전에는 선왕이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나, 을묘년 후로는 차차 떨어져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벽파에서는 이 두 사람을 몹시 꺼려하여 기어코 해치려고 했습니다. 이가환 등이 배교하고 성교를 해치는데도 벽파에서는 그를 사당으로 몰고 별별 중상과 공박이 가했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번번이 그들을 감싸주므로 벽파에서 마음대로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선왕이 돌아가시자 그 뒤를 이은 임금은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하게 되었는데 대왕대비는, 선왕의 계조모요 본래 벽파 출신으로 그의 친정이 일찍이 선왕에게 폐가 당했던 터이라 여러 해 동안 품었던 원한을 풀 길이 없다가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벽파를 끼고 학정을 펴 경신년(1800) 11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한쪽으로 시파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 조정 중신을 반이나 비게 하였습니다. 또 전부터 성교를 박해하던 악당들은 벽파와 계속 서로 연락을 취해 왔었는데, 세태가 크게 변하자 요란스럽게 들고일어나 큰 일을 저지를 기세를 보였습니다. 경신년 4월에 여러 교우들이 명도회에 가입한 후로 신공을 부지런히 하고, 회원 아닌 사람들을 움직여 자진하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는데 힘을 썼으므로, 그 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회두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는데 부녀자가 3분의 2요, 무식한 평민이 3분의 1이고, 양반 집 남자들은 이 세상의 화가 무서워서 믿고 따르는 자들이 극히 적었습니다.
을묘년(1795) 박해 때 골롬바는 신부를 보호한 공이 컸고, 재능이 출중했으므로 신부는 모든 일을 그녀에게 맡겼고 골롬바 역시 열심히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또 그는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벼슬하는 집안의 부녀들이 입교하는 예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 법이 역적이 아닌 이상은 양반 집안 부녀자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으므로 금령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신부도 이 점을 이용해서 성교를 널리 현양할 근거를 삼고자하여 그들을 특히 후하게 대접하매, 교회 안의 대세는 모두 부녀자 교우에게로 돌아갔고 이러한 인연으로 성교의 소문이 또한 널리 퍼졌습니다.
성교가 이 나라의 큰 정책 문제로 되어 있으므로 새 임금이 즉위하면, 반드시 먼저 어떤 조치가 있을 것은 분명하였지만, 그것이 무엇일지 몰라 신부는 더욱 더 조심하고 교우들도 모두 속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였습니다. 12월 17일 형조에서 포졸을 보내어 최 도마를 체포하여 가두었는데 이 사람은 지난해에 송사가 미결 중에 있었으므로 이번 체포된 일은 뜻밖에 일이 아니요, 또한 그때는 성교를 금하기로 되어 있었을 뿐 조정에서는 아직 금령을 내리지 아니하였으므로, 교우들은 경계는 했었지만 그다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았었습니다.
19일 성모 자헌 첨례날 새벽 최 도마의 종제 최 베드로가 길가에 있는 약방 집 안방에서 몇몇 사람과 함께 경문을 통경하고 있었는데, 마침 창문 밖에서 투전(노름)을 단속하는 관원들이 지나가다가 창문 안에서 가슴을 치는 소리가 나자, 투전 던지는 소리로 생각하고 창문을 열고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투전을 발견하지 못하자 각자의 몸수색을 하여 첨례표 한 장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몰라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자, 글을 아는 관리에게로 가지고 가 보였더니 그것이 곧 성교에 관계되는 그림임을 알려주어 그들은 다시 교우들을 잡으러 돌아왔는데, 이미 날이 밝아 다른 교우들은 다 흩어지고 최 베드로와 오 스더왕이 붙잡혀 관청으로 끌려가 도마와 함께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에 포도부장들은 김여삼이와 불량배들을 끼고, 그들을 정보원으로 삼아 아니 가는데 없이 돌아다니며 눈을 부릅뜨고 교우들을 찾아다니매, 교중이 물결 일듯이 요란했으나 마침 세모가 되어 사태가 잠시 잠잠해 졌습니다. 그러나 정월 초 9일 총회장 최창현 요왕이 잡히고 나서부터는, 부장들이 밤낮 없이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잡아온 사람들이 좌우 포도청에 가득 찼는데, 모두들 무식하고 또 새로 입교한 사람들과 여염집 부녀자들이라 의지가 강한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10일 대왕대비가 교서를 내려 성교를 엄금하기를, 선왕이 늘 말씀하시되 참다운 학문이 밝혀지면 사학은 저절로 꺼져 버릴 것이라 하셨는데, 이제 듣건대 사학이 여전히 수도로부터 경기와 충청지방에 이르기까지 기세를 보인다 하니, 어찌 소름이 끼치고 한심한 일이 아니랴. 서울과 지방에 다섯 집씩 통합한 통 반 제도를 엄격히 세워 그 통 안에 사학을 하는 자가 있으면 통장이 관청에 고발하여 징계하게 하라. 그래도 뉘우치지 않으면 반역죄를 적용하여 모조리 사형에 처하여 씨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고 하자, 각처가 소란하여 지고 환난의 불길이 더욱 맹렬해져 교우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명도회 회장 정 아오스딩은 정약용의 형으로 본시 양근에 살다가 1900년 5월 박해 때에 온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벌써 사학자로 비방을 받아 왔던지라 그 해 여름에 한 악질 관리가 선왕의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지적하여 처형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이 꾸짖어 화를 면한바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사태가 이미 변하여 재난의 불길이 점점 맹렬하게 타오름을 보고 자기도 도저히 면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여 성물과 서적과 신부의 편지 등을 농 속에 넣어 가지고 다른 집에다 맡겨 두었다가 그 집도 곧 습격을 당할까 두려워 본 집으로 도로 가져다 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장들에게 빼앗길까 무서워서 임 도마라는 사람을 나무 장사로 꾸며 농을 마른 솔잎으로 싸 가지고 19일 해질 녘에 거리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농은 크고 솔잎은 엷어서 아무래도 나뭇짐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때에 한성부에 밀도살 감시원이 이것을 보고 몰래 잡은 쇠고기가 아닌가 의심이 나 그 사람을 관청으로 끌고 가 농을 열어보니 모두가 성교에 관한 서적과 상본과 신부의 편지였는지라 부윤(府尹)이 크게 놀라 그 농과 사람을 포청으로 압송하니 이것은 불에다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어 환난이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책과 농이 압수 당하자 교우들은 놀라 조석으로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만 10여 일이 지나도록 잠잠하고 아무 동정이 없더니 2월 초에 포도대장 이유경이 전근되고 신임 신대현이 집무하자 옥에 가득했던 배교자들은 모두 석방하고 최 도마 형제와 최 요왕과 임 도마만을 석방하지 않았는데 이들을 때려죽이려 한다고도 하고 멀리 귀양보내기로 방금 의논 중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밖에서 검거가 잠시 그치니 교우들이 기뻐하며 이대로 계속해서 무사하기를 바랬습니다. 이때에 소북의 박장설 노론의 이서구 남인의 최현중 등이 잇달아 성교를 몹시 헐뜯고 반역죄로 처벌하기를 청원하며 아울러 신대현이 교우들을 가볍게 처리한 것을 죄로 몰았습니다. 그러자 대비가 크게 노하여 대현을 잡아 가두고 이 사람을 금부로 옮겼습니다. 이 나라 국법에 조정의 관리와 역적은 금부에서 처리하고 포도청에서는 도적들만 취급하고 평민의 범죄는 형조에서 다스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교우들은 평민이지만 포도청에 속하게 되어 도적으로 처단되어야 하는데 금부로 옮긴 것은 역적으로 처벌하려고 한 것입니다.
2월 9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을 금부에 가두고 11일에는 권철신과 정약종을 체포하고, 포도청에 엄명을 내려 전에 석방한 사람들까지 재 구속하게 하고 여주와 양근에 가둔 사람들을 금부에 올리도록 하니, 경향에 이름 있는 교우들은 한 사람도 모면한 이가 없었습니다. 길에는 포졸들이 깔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밤낮 그치지 아니하고 금부와 양 포도청과 형조도 만원이 되어 더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24일에는 골롬바의 가족이 체포되고 이어 양반집 부녀자들도 제법 많이 체포되었으나 상세한 것은 잘 듣지 못하였습니다.
정 아오스딩이 관가에 이르자 관원이 농 속에 든 책들에 대해 그 내력을 물으니 그는 다 자기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원이 농 속에 편지를 내놓고 하나하나 캐어물으나 아오스딩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관원이 사람을 그 가족에게 보내어 너의 남편, 너의 아버지가 신부의 성명과 있는 곳만 알려주면 절대로 죽을 리가 없는데, 혹독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아니하니 너희가족들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터이니, 가장의 목숨을 생각하여 바른대로 말하라고 하였으나 가족들도 한결같이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회의를 열어 대역부도 죄로 판결하고 26일에는 아오스딩과 최 요왕, 최 도마, 홍 방지거 사베리오, 홍낙진, 이승훈 등 여섯 사람들을 목을 베어 죽이고, 그 후 아홉 사람 역시 참수형에 처하였는데, 그중 여자 세 사람이 있었지만 가운데 골롬바를 제외하고는 다른 두 여자와 남자 여섯 명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최 베드로 등이 아닌가 하지만 전해들은 말이 정확하지가 않아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 여주와 양근에 갇혔던 사람들도 모두 본 고을로 돌려보내 거기서 참수형에 처하였는데 아직 사실을 조사하지 못하여 일일이 아뢸 수가 없습니다.
총회장 최창현 요한은 중인 출신으로 을묘년에 순교한 최 마디아의 조카이며, 진실한 교훈이 전해 내려오는 집안에서 자라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였고, 몸가짐이 평화스럽고 언행이 공정하여 20년을 하루같이 지냈습니다. 그는 외모가 순수하고 말수가 적으면서도 정의로워서 누구든지 의혹이 생기거나 곤란을 당하거나 혹은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할 때면, 그의 얼굴만 한 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 일이 아니며 어려운 일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또 그의 말은 두어 마디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졌습니다. 도리에 대한 강론도 자세하고 명백하여 재미가 있으므로 비록 듣기 좋게 말할 생각이 없이 나오는 대로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즐겨 들으며, 싫증을 내지 아니하고 또한 그 말이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사람들이 받는 신익이 컸습니다.
그의 순명과 겸손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남보다 특별히 뛰어난 점도 없고 꼬집어 낼 결점도 없습니다. 그는 교우들 중에서 덕망이 제일 높아 그를 사모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의 집이 입정동에 있었으므로 교우들은 그를 관천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조화진이 충청도를 수색할 때 관천이가 교우들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할 수가 없었는데 이때 최 요왕은 박해가 장차 커질 것을 알고, 다른 교우 집에 피해 있다가 신유년(1801) 1월 5일 몸이 불편하여, 부득이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몸조리하던 중 9일날 밤중에, 김여삼이 포도부장을 데리고 와서 집을 둘러싸고 체포하는 바람에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0여일 후 치도곤으로 열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는 동안에도 기절하여 죽어 엎드러진 것 같았으나, 매질이 끝나고 관원이 그의 죄목을 셀 때면 그는 벌떡 일어서서 성교의 10계명을 강론하였습니다. 관원의 말이 네가 부모를 효도로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니, 그는 ‘잘 생각해 보시오 밤에 잠이든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그렇거늘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관원도 대답을 못하고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후 소식이 끊어졌더니 정 아오스딩과 함께 한날에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43세였습니다.
정약종 아오스딩은 성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고 상세하고 치밀함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일찍이 선도(仙道)를 배워서 오래 살 뜻이 있어 천지개벽 설을 믿었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지가 다시 변하는 때는 신선도 역시 함께 사라짐을 면치 못할 터이니, 이것 역시 결국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니 배울 것이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성교의 도리를 듣게 되어 독실히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신해년(1791) 박해에 그의 형제와 친구들은 모두 움츠려졌으나 그만은 유독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세속 이야기에는 서툴렀으나 교리 강론하기를 가장 좋아하여, 병이 들어 괴롭고 양식이 없어 굶주릴 때에도 그런 괴로움은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도리에 한 끝이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잠과 음식의 흥미마저 잃은 듯 전심전력 연구하여 반드시 해독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묵상 공부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몽한 자를 만나면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쳐 주기를 혀가 피로하고 목이 아플 정도까지 하여도 실증 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으며, 아무리 막힌 사람이라도 그의 앞에서 깨치지 못하는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무식한 교우들을 위하여 이 나라의 언문으로「주교요지(主教要旨)」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성교의 여러 책을 인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보태서 아주 쉽고 명백하게 썼으므로,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책을 펴 보기만 하면 환히 알 수 있고 의심나거나 모호한 데가 없었습니다. 이 책이 이 나라에서 목초나 땔나무보다도 더 중요하다 하여 신부는 간행을 인준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학문 연구가 습관이 되어 교우들을 만나면, 안부 인사를 하고 나서는 꼭 도리 강론을 펴놓고 날이 저물도록 계속해 다른 이야기는 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혹 자기가 모르던 도리 한두 가지를 알아 깨닫게 되면 만족하여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혹 냉담하고 태도가 명확하지 못한 자가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딱하고 민망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각가지 도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생각해 내는 기색도 없이 척척 풀어 주어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어려운 문제를 늘어놓아도 가려내는데 조금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질서가 있어 어긋나거나 뒤바뀜이 없었으며 정확하고도 기묘하였으며, 또한 아름답고도 상세하고 확실하여 사람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고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덕망은 관천만 못하였으나 도리에 밝기는 그보다 훨씬 더 나았습니다.
그는 또 천주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광범하고 방대하여, 여러 가지 책에 흩어져 총론이 없으므로 독자들이 납득하기가 어렵다 하여, 장차 여러 책에서 가려 뽑아 부분별로 구별한 것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제명을「성교전서」라 하여 후배들에게 남겨 주려고 하였으나, 그 책의 초를 절반도 잡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자 관원이 국왕의 명을 거슬렸음을 문책하니, 그는 성교의 진실한 도리를 솔직하게 진술하고 그것을 금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밝혀 말했습니다. 그러자 관원이 크게 노하여 국왕의 명령을 반대한다고 해서 반역죄를 선언하였습니다.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위에 올라 처형장에 갈 때에도 그는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음은 당연한 일이요. 공심판 때 우리들의 옳음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요. 여러분의 기쁜 웃음은 변하여 참된 고통이 되리니 웃지들 마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형을 당할 때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이것은 당연히 해야 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를 본받아 후에 이렇게 하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처형장에서 그는 칼에 한번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었는데도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벌려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는 조용히 엎어졌습니다. 최 도마와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때 나이는 42세이었습니다.
최 도마는 병이 많았고 옥중에서 오래 시달려 지쳐서 수레에 오르자 곧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형장이 가까워 오자 비로소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나타났으며, 그는 맨 먼저 형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는 56세 이었습니다.
홍교만 사베리오는 권철신의 외숙으로 경기 포천현에 살았으며, 젊어서 진사에 올랐고 만년에는 경학(経学)을 좋아하였는데 권씨 집안이 입교하자, 그도 따라 믿게 되어 관계(官界)에 나설 뜻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이웃 사람들을 권유하여 그들을 감화시켜 온 고을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딸이 아오스딩에게 시집가자 그로 인해 남들의 비방을 받게 되고 드디어 체포되어 치명하였습니다.
홍낙민 바오로는 원래 충청도 예산현 사람으로 젊어서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서울로 이사한 후 이승훈, 정약종과 어울려 갑진년(1784)과 을사년(1785) 사이에 성교를 믿고 봉행하였습니다. 그는 열심하고 도리에 밝아 교중 사무를 잘 보아 칭찬을 받았으나, 남의 이목을 꺼려 계속 과거를 보아 기유년(1789)엔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詞諫院) 정언(正言)에 이르렀습니다.
신해년 박해 때는 선왕이 억지로 배교를 명하니 나쁜 표양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배교한 자들은 모두 전연 계명을 지키지 않은데 비해 바오로만은 신공을 드리고 재 지키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을유년(1795) 성사 볼 때가 이르러 보례하고 고해성사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판공 때가 오기 전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이 한영익이란 자의 고발에 들어 있어 선왕이 또 배교하라고 압박하였습니다. 그 뒤로 그는 집에 있을 때는 계명을 완전히 지키고 외출했을 때는 세속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그가 을미년(1799)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는 신주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이르러선 약간 열심히 하여 앞으로는 전심으로 주님께 귀화할 작정이었었는데, 이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 전에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옥안에 사정은 엄격한 비밀에 붙여져 있으므로 자세히 알 도리가 없습니다만, 그의 죄목은 본래 큰 것이 아니었으니 만일 관청에 이르러 배교만 하였더라면 죽지는 않았을 텐데, 참수형을 받은 것으로 보아 그가 성교에 어긋난 일을 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겠습니다.
이승훈 베드로는 이가환의 생질이요 정 아오스딩의 매형입니다. 젊어서 진사에 급제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선비 이벽이 참으로 기특히 여겼습니다. 그때 이벽이 성교의 서적을 비밀히 읽고 있었으나 승훈은 아직 이를 몰랐습니다. 그가 계묘년(1783)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매 이벽이 그에게 은밀히 부탁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안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있으니 찾아보고 신경을 한 부 얻은 후 동시에 성세 받기를 청하면, 서양 선비들이 자네를 크게 사랑할 것이니 신기한 물건과 패물을 많이 얻어 가지고 오고, 빈손으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승훈이 그의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성세를 청하매 여러 신부들이 영세하기에 필요한 도리를 모른다고 영세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양 신부가 힘쓰고 우겨서 성세를 주고 또한 성서도 주었습니다.
승훈이 집에 돌아오자 이벽 등이 놀라 함께 전심전력으로 그 책을 읽어보고 비로소 진리를 터득하고는 가까운 친구들을 권유하여 당시 이름난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승훈을 추대하여 영수로 세웠고, 그는 그 후 그의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악한 벗들의 많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아 견디며 성교를 봉행하였습니다.
선왕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경술년(1790) 가을에는 벼슬을 주어 평택 현령까지 지내게 하자, 그는 신해년에 체포되어 배교하고는 성교를 비방하는 글을 여러 번 저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자기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을묘년에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성사 은혜 받기를 준비했으나 며칠 안되어 박해가 일어나매 이승훈은 두려워 다시 움추려들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성서를 전파하였기 때문에 악한 무리들이 성교를 공격하고 배척할 때에는 반드시 승훈에게도 그 죄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선왕은 그를 두호하였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세속을 따랐으나 혹 가까운 친구를 만나면 깊은 정을 잊지 못하여 떠나기를 아쉬워하며,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하다가 화를 당하였는데 그는 서적을 전파한 죄가 있어, 아무리 배교한다 해도 사형을 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선종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가 없어 더 두고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가환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고 성장하면서 풍채가 늠름하고 도량이 크고, 문장가로서는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으며 아니 읽은 책이 없었고 기억력이 장하여 신과 같았습니다. 또 천문과 기하에도 정통하였는데 일찍이 그는 탄식하기를 이 늙은 몸이 죽으면 이 나라에는 기하학의 씨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기학(理気学)을 약간 믿던 그는 천체를 둘러보며 마음 속으로 이처럼 웅대한 조직에 주재하는 이가 없다 하리요 하고 감탄한 적도 있었습니다.
30세가 넘어 진사에 오르고 대과에 급제하니 선왕이 그를 인물로 중히 여겼습니다. 갑진․을묘(1794․1795)년 무렵에 이벽 등이 성교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책하여 말하기를 나도 서양 서적 몇 권을 읽어보았는데(그의 집에「직방의기」「서학범」등이 있었음) 기이한 글이요 궁벽한 저술에 지나지 않고 다만 내 식견을 넓히는데 그쳤는데 어찌 족히 인생을 안정시키고 인명을 확립시킬 수 있으리요 하였다. 이벽이 이치를 따져 가며 답변하니 가환이 그의 말에 굴복하여 드디어 책을 구해서 비밀히 읽었습니다.
…황사영백서 한글번역본 총 41.515자중 뒤 17.014자 생략…
생명의 은인 |
줄거리설명 |
열두 살인 김차희는 큰아버지 김성우와 아버지가 순교한 뒤, 큰집 종형 김성희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교리를 배우는 한편 한의술을 익혀 침술에 매우 능통하였다.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때 포교의 아들이 급환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옥리들끼리 주고받으며 몹시 걱정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김차희는 “침 몇 대만 맞으면 나을 텐데….” 하고 혼자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옥리들이 급히 달려가 포교에게 전하였다. 귀가 번쩍 뜨인 포교는 그를 데려오도록 하는 한편 체포될 때, 증거물로 압수한 침통을 가지고 와서 김차희의 침술로 포교의 아들은 목숨을 구하였다. 포교는 자식을 살려 주었다고 고마워하며 “안 믿는다고 말해 놓고 풀려난 다음 다시 믿으면 될 것이 아니냐?” 하고 은근히 배교를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안됩니다.”라고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마지막 형장으로 끌려가는 날이었다. 한사람씩 끌어내어 최후로 천주를 믿겠느냐 안 믿겠느냐 하는 다짐을 받아 믿겠다면, 형장으로 보내고 안 믿겠다면 그 자리에 남게 하였다. 김차희 차례가 되었다. 관장의 물음에 누군가 뒤에서 “안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물론 안 믿겠다는 대답은 그가 한 말이 아니었다. 아들을 살려 준데 대한 보답으로 포교가 뒤에 서 있다가 대신 대답한 것이었다. 김차희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웬일인지 가슴이 더 떨리고 매맞아 부은 상처가 더 쑤시고 아픈 것을 느꼈다. 그는 마침내 큰 소리로 “그건 내가 대답한 말이 아니오. 난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소.”라고 외쳤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차희를 처형하였다.
☞전국 성지 순례 코스☜
1. 전국성지 순례의 의미
전국의 주요 성지와 유적지를 15개 코스로 나누어 성지 안내 봉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역사적 의미와 관련된 행적들을 묵상하고, 성직자와 신자들의 박해 상황, 서간이나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행적을 되새겨 보는 1일 성지순례 피정입니다.
2. 순례코스
제 1차 명동성당, 서소문,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성지.
제 2차 단내성지, 어농, 천진암 강학터, 남한산성성지.
제 3차 치명자산성지, 전동성당․풍납문, 전주숲정이성지.
제 4차 배론성지, 묘재, 부엉골신학당, 세종대왕 능.
제 5차 갈매못성지, 다락골줄무덤성지, 홍성읍성성지.
제 6차 마원 성지, 최양업선종지, 연풍 성지, 감곡성당.
제 7차 황새바위성지, 수리치골, 여사울, 신리성지.
제 8차 풍수원 성당, 마재성지, 구산 성지
제 9차 여산숲정이성지, 천호산성지, 성거산성지
제10차 삼성산 성지, 수리산 성지, 미리내 성지,
제11차 배티 성지, 죽산 성지, 골배마실.
제12차 초남이 유항검 생가, 나바위 성당.
제13차 해미성지, 솔뫼성지, 공세리 성당.
제14차 갑곶돈대성지, 이승훈묘성지, 남양성지.
제15차 대구 관덕정성지, 한티성지, 신나무골성지,
3. 준비 사항
◉ 안 내 : 한국순교자 현양회 성지안내 봉사자회
◉ 출발 및 도착 : 아침 8시 신청한 성당에서 출발 오후 8시 도착예정
◉ 신 청 : 본당 또는 단체별로 버스 1대 40명 기준
◎ 순교자현양회 주소 : 서울 중구 저동 1가 2-3 평화빌딩 3층
◎ 안 내 전 화 : 순교자현양회 사무국 02-2269-0413~4 F 02-2269-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