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인가?
언젠가 우리 사회의 지성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단순히 지옥 갈까 무서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저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지옥 갈까 무서워서 믿는 예수라니, 그렇게 믿어서야 되겠습니까?”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변을 하겠습니까? 지옥 가는 것이 무서워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 말을 점수로 채점한다면 몇 점이나 주겠습니까? 저는 적어도 70점 이상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지적하는 “우리가 저주 아래 있다. 우리는 죄인이다.”라는 말을 무척 싫어합니다. ‘죄, 지옥, 저주’를 말하지 말고, ‘천국, 영광, 책임, 사명, 수준’ 이런 말을 하자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옥 때문에 예수 믿지 말고, 사명과 영광을 위해 예수를 믿자는 가장 큰 이유는 자존심 때문입니다. 기껏 지옥이 무서워서 믿는 정도밖에 안 되는 그런 기독교로 얘기하지 말고, 좀더 괜찮게 적극적인 구실을 붙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런 태도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처참함을 깨달을 때
죄란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부끄러워 할 것도 없는 자로 자신을 자꾸 높여 하나님 앞에서 일 대 일로 떳떳해진 다음에, 하나님 앞에 보란 듯이 ‘선물’을 들고 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도, 신앙도 아닙니다. 오히려 죄입니다.
....십자가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기로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눈이 멀어서 예수님을 그렇게 채찍질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대해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자신이 그 ‘괄시’의 길을 요구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했겠습니까? 이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채찍과 오해, 경멸과 비참한 상태와 실질적인 육체의 아픔, 영적인 고통의 부르짖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마27:42)는 간악한 무리들의 말이 주는 엄청난 아픔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러한 아픔을 당하셨구나.’ 라는 슬픔을 갖기보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 이만큼 철저하게 이를 갈고 계시는구나.’ 라고 바꾸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프라이드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에 “살려 주십시오!”라고 아우성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면 사도 바울이 전한 “나는 복음이 자랑스럽다.”는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는 이처럼 인간의 구원에 관한 결정적인 해결책이 있습니다. 이 해결책을 갖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복음이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 해결책을 갖지 못한 자들은 모두 큰일 날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해결책을 가진 자는 가진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지닌 축복을 확인하려면 예수를 믿지 않은 상태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해를 얼마나 깊이 하느냐에 따라 예수를 믿게 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에서 감사하는 생활이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그 사실 하나만 붙들고, 죽을 때까지 살라면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을 안 주신다고 해도, 예를 들어 자녀를 안 주시거나, 자녀가 삼수, 사수를 해서도 대학 문전에도 못 가고, 수능고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온다 해도 만족하겠습니까? 머리에는 온통 종기가 나고 발은 낫지 않는 무좀 투성이고. 집은 늘 앉아 있어야만 거동이 가능한 움막집인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만족할 수 있습니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닌 공통적인 문제는 구원을 얻는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도 진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축복은 이 세상이 우리를 할퀴는 것으로도 빼앗길 수 없고. 이 세상이 우리를 환난에 처하게 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늘 이 사실을 확인하고 명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