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무 회장이 처음 팁 주셨죠”
박용곤 명예회장 때부터 두산家와 각별 … 김승연 회장도 가끔 찾아 동화반점 진 사장과 재벌 총수의 인연
[이코노미스트]2007.07.30 14:39 입력 / 2007.07.30 16:34 수정
끈 떨어진 뒤웅박. 이 말처럼 대한민국에서 화교들의 삶은 의지할 곳도 없고 불안했다. 1970년대 초, 많은 화교가 한국을 등진 이유다. 그러나 한국과의 인연 때문에 돌아온 화교도 있다. 그 주인공은 동화반점 진장원 사장. 그는 두산, LG, 한화 등 대기업 총수들을 비롯해 전국 병원장, 대학교수, 국무총리, 국회의원 등과 굵고 긴 인연의 끈 때문에 식당 자리도 못 옮기고 있다.
동화반점은 동대문 밀리오레 옆에 있다. 젊음을 뽐내는 행인들과는 대조되는 작고 허름한 모습이다. 맛집으로 소개됐다는 방송기념 액자만이 퇴역군인의 훈장처럼 빛나고 있다. 그러나 속내는 겉모습과 달랐다. 매일 저녁 예약은 만원사례. 그것도 대기업 총수나 의사, 교수 등과 같은 내로라하는 사람들로 말이다.
“대려도가 없었다면 저도 없었습니다.”
대려도(大麗都)는 1960~70년대 아서원(雅敍園), 태화관(泰和館)과 함께 정·재계 인사들이 총출동하는 고급 중국요릿집 중 하나였다. 결혼식이나 돌잔치뿐 아니라 과거 신민당 전당대회가 대려도에서 열렸다고 한다.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김대중·이철승 의원의 무대가 이곳이었다. 군산의 ‘빼갈 공장’을 떠난 17세의 진장원 사장은 바로 그 대려도에서 30년 이상 이어 온 인연의 끈을 만들었다.
“(요리가 아니라)식사밖에 못 만들던 시절에 대려도를 찾은 대기업 창업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댁에출장요리 부르면 따라가기도 하고…. 대려도 맛을 잊지 못하는 그때의 단골들이 지금도 저를 찾고, 그들의 2세도 이곳에까지 오는 것입니다.”
대려도에는 유독 정치인이 많았는데, 장군의 아들 김두한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미스터 진, 잡채밥 좀 만들어 와” 하고 큰 소리로 주문을 했다고 기억했다. 또 한화 김종희 회장은 그야말로 ‘팔등신 미인’이었다.
“한화 김승연 회장이 식사하러 와서는 아버지 이야기를 묻기도 했습니다. 김승연 회장에게 아버지는 키가 크고 호남이란 말씀을 드리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곤 하셨죠. 지금 생각해봐도 그 아버지는 ‘팔등신 미인’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분이었습니다.”
대려도는 1972년 문을 닫았다. 사장이 대만행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 중국 음식점을 중심으로 화교 경제가 꽁꽁 얼어붙었던 시기다. 박정희 정권이 화교 경제가 지나치게 커질까 염려해 차별조처를 시행했고 외환관리법 등을 적용해 한국을 등진 화교들이 늘어나게 됐다. 진 사장이 조리장 자격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 따자마자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 전엔 저런 게 어디 있기나 했나. 이제는 요리사도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면서 정부에서 만들어놨죠. 대려도의 우리 쓰부(사부들)랑 저랑 다같이 우르르 시험 보러 갔는데, 저만 붙었습니다. 무슨 한국말을 알아먹어야 시험에 붙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나마 대려도에서 한국말 제일 잘했으니까 붙을 수 있었죠. 물만두 만들고 양장피 만드는 데야 선수 아닙니까.”
1973년이라고 적힌 자격증을 들고 미국에 갔는데,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등지의 차이나타운은 남방 사람들이 꽉 잡고 있었다. 북방 출신인 그는 남방 출신들의 텃세에 금문교에 갈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한국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찾아갔다. LA 코리아타운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장사도 그럭저럭 되고 살만해졌지만 미국은 불편한 동네였다. 한국에 3년 만에 돌아와서는 지금의 동화반점을 인수했다. 당시 동대문운동장 근처에는 청계천에?흘러온 물이 진흙바닥을 만들어 연꽃을 피우던 때였다.
·변화하라 전통 그대로의 요리를 만든다. 그러나 같은 요리를 내지 않는다. 네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면 한 가지는 이제까지 먹지 못했던 새로운 메뉴를 선보인다. 지난번 먹은 메뉴를 기억해 두는 것은 필수.
·챙겨라 주소와 생일을 장부에 적어 꼭 기억한다. 설에는 월병을 보내고 좋은 술이 있으면 챙겨 놓는다.
·공평하라 짬뽕에 소주 먹는 손님이나 풀 코스를 시키는 손님이나 먼저 예약한 손님부터 받는다.고 이양구 회장 집에서 출장요리
1970년대 후반, 동화반점은 잘나갔다. 동대문야구장에 황금사자기, 청룡기가 열릴 때마다 손님은 미어 터질 듯했다. 자장면이 인기 메뉴였는데, 하루에 10~12포대의 밀가루가 소비됐다. 적어도 1500그릇은 팔린 셈이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와의 인연도 있어요. 고된 훈련 탓에 도망친 학생들을 받아줬죠. 학생인 걸 몰랐어요. 그중 한 명이 부모에게 편지를 써 군산에서 부모, 코치, 교장이 왔습니다. 제 손을 붙들고는 아이 셋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은 게 제 덕이라며 감사했었죠. 근처 중국집 사람들과 주말축구를 하는데 군산상고 아이들이 있을 때는 늘 이겼죠. 어찌나 도둑놈들처럼 잘 뛰던지….”
그러나 1982년 프로야구가 등장하면서 지방에서 야구를 보러 온 손님들이 줄기 시작했다. 그때까진 요리를 만드느니 그 시간에 더 많은 자장면을 팔려고 했지만, 이젠 가게에서도 요리를 좀 더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했다. 대려도가 잊혀질 때도 되었건만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하나 둘 동화반점을 찾기 시작했다. 오랜 단골들은 또 새로운 단골을 데려왔다.
“그 전에는 출장요리를 갔었죠. 제가 대려도 요리사였던 것을 아신 고 이양구 동양시멘트 회장이 처음 집으로 불렀어요. 그 이후로 평창동이나 성북동에 자주 찾아갔죠. 어느 집에서는 차고에서 요리를 하고 있던 저를 급하게 부르더라고요. ‘거봐, 대려도 사람 맞잖아’하는데, 알고 보니 ‘이 맛이 대려도냐, 동화반점이냐’ 하며 두 회장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동화반점 요리장으로 처음 집으로 가게 된 곳이 고 이양구 회장 댁이었다면 식당에서 팁을 처음 준 사람은 LG 구본무 회장이었다. 술병 ‘주둥이’를 깨뜨려 먹는 중국술을 먹었다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두산에 애사심을 갖고 있을 정도로 두산과의 인연에 특히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맥주는 OB, 소주는 처음처럼’. 그는 두산 주류만을 고집한다. 진열장에는 OB맥주가 보란 듯이 늘어서 있다. 두산 식구들을 생각하면 다른 술은 올려놓을 수 없다고 한다.
“애사심이 강해 두산 사람들은 두산 것만 마십니다. 저도 단골손님을 따라가야죠. 심지어 ‘가끔 손님 중 한 분이 난 다른 회사 술이 좋으니 수퍼 가서 사오라’고 해도 제가 두산 것을 권할 정도입니다. 박용곤 명예회장이 옛 대려도를 찾아주셨고 동화반점을 한 후에도 그 인연으로 두산가(家)에 직접 가 요리를 하기도 했죠. 박용오 전 두산 회장도 제 요리를 즐겼죠. 박용현 두산건설 회장이 부인과 사별했을 때도 그곳에 가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사실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전 서울대원장이었던 박용현 회장이 진 사장이 화교이기 때문에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여러모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누가 미소주 두 박스를 들고 저희 가게에 찾아와 진열만이라도 해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저야 당연히 ‘못한다’고 했는데, 그 분이 명함을 내미는데 두산이라고 써 있지 않습니까. 그땐 제가 두산이 경월소주를 인수했는지 미처 알지 못해서….”
그는 “미소주가 시판되기도 전에 전국에서 가장 먼저 우리 가게에 진열됐지만 미소주는 참 안 팔렸다”고 회고했다. 그 후 두산주류 사람들이 와서 “미소주 몇 병 남았수? 남은 것 지금 다 따버려요!”라고 한 적도 있었다고.
지금도 두산타워와 가까이 있어 두산 직원들을 매일 만나고 있다. 비서실에서 직접 두산타워 안에 좋은 조건으로 중국집을 차릴 기회를 제시하기도 했는데, 가게 자리를 옮기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아 거절한 일도 있다고 한다.
한번은 두산 비서실에서 왔다며 회장님이 먹은 음식의 재료를 말하라는 사람도 있었다. ‘비서실에서 그런 것을 물을 이유가 있느냐’고 내쫓았는데 알고 보니 근처 중국집에서 그의 요리비법을 빼내려고 한 것이었다. 두산과의 인연을 알고는 요리 맛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제가 얼마 전에 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박용현 회장이 자신의 아들이 군대 간다고 집에 와서 요리 한 번 해주라고 했는데, 그냥 차로 음식을 가져가시는 게 낫지 않으냐고 한 것입니다. 전화를 주시겠지 했는데 전화가 오지 않았습니다. 더 좋은 음식을 먹일 수도 있는데도 절 불러주신 그 마음을 지나쳐 버린 것 같아 두고두고 후회가 됩니다. 아드님께도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지 못하게 한 채 군대에 가게 한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그는 박 회장의 아드님이 휴가 나왔을 때, 다시 자신을 부르면 그날 하루 가게 문을 닫더라도 달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 제 나이 정도 되면 옷 벗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 선후배 대부분이 주방을 떠났습니다. 은퇴한다는 것은 쓸쓸한 일입니다. 여기 있다 보면 후임 본부장이 전임을 대접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는 은퇴를 앞둔 단골 손님에게 꼭 고량주 두 병을 쥐어준다. 한 병은 정이 없으니 두 병이다. 밥값 안 받아도 그만이다.
세상을 은퇴하면서 그 앞에 유품을 남긴 이도 있다.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여사다. 부를 상징하는 붉은 목단이 그려진 그림은 그녀가 자주 가던 룸에 걸려 있다. 그곳엔 이태영 여사의 자필 메모가 있었다. ‘외국에 와서 고생한 아들(그녀는 그를 아들처럼 대했다)에게 늘 기쁜 일이 있길 바란다’고 손수 써놓고 가신 것이다.
그의 고향 산둥은 가난했다. 고구마·콩·밀이 전부였던 산둥에 비해 북한은 쌀이 있던 곳이었다. 가족 모두 압록강을 넘었다. 원산에서 지냈는데, 이후 중국이 공산화되었고 잡혀가면 사상검증을 받아야 했기에 그대로 남았다. 6·25가 터지면서 이남으로 내려와 17세부터는 음식을 만들었다.
어느 해 설에 어머니가 서럽게 우셨다. ‘이북에 큰형님이 남아 있고 중국엔 두고 온 큰누나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 수교를 맺기 전 ‘5cm 작은 발’의 어머니를 모시고 중국에 갔다. 위법행위였다. 우여곡절 끝에 누나를 만났지만 뒷돈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던 중국에 실망했다. 눈물을 머금고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속으로 삼키며 손님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인연이 되었다. 허름하고 마땅히 차 댈 곳도 없는 동화반점에 단골이 넘치는 이유다.
“손님께 당부하고 싶은 단 한 가지가 있습니다. 대려도 식당 벽에 이 말이 있었습니다. 酒肴本爲賓可備 把盞莫問是非言(술과 음식이 즐기라고 준비돼 있는데, 술잔을 쥐었으면 시비를 따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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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름 |
소속기관 |
생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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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무 (具本茂) |
[現]LG 대표이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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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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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곤 (朴容昆) |
[現]두산그룹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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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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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金升淵) |
[現]한화 대표이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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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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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金泳三) |
[前]대한민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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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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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金大中) |
[前]대한민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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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