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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산다는 것은...
글 :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 신부>
때론 넘어지기도, 절망하기도...
때론 기뻐하기도, 희망하기도 하는데...
과거, 현재, 미래 속에서
사람과 사람들의 인연과 관계들 함께...
하늘을 이고, 땅에 디딘 채 살아갑니다...
부끄러운 영혼일지라도 기도하며,
아픈 가슴이래도 사랑하기도 하는데...
어제, 오늘, 내일 속에서
신앙도, 삶도 흘러갑니다...
어느 때는 거룩함인 듯 마음을 모으고
새 영혼을 우러러 기도하고...
어느 때는 단정함처럼 옷깃을 여미며,
새날을 다짐하기도 하는데...
내 기도하는 조촐한 영혼과 내 살아가는 누추한 모습이야,
하늘은 알리, 땅도 익히 알고...
이 아침에도 생각하는 또 하나의 아침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건데...
잘 살아야 하는데...
오늘 내 비록 이토록 남루한 목숨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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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서로를 위한 기도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 신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지고 말해지는 아름다운 전통가운데 하나가 ‘서로를 위한 기도’의 말씀들일 것입니다.
“기도해주십시오... 기도해드리겠습니다... 기도합니다... 기도를 부탁합니다... 기도 안에서 뵙겠습니다... ”
이렇듯 기도의 말씀들은 우리 그리스도인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우리는 첫 번째 성서말씀인 야고보서에서 기도에 관한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고통 겪는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은 찬양하십시오... 앓는 사람은 원로들이 기도하고 기름을 바르십시오...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야고 5,13-16 참조)
사도 야고보는 기도의 아름다움을, 기도의 효과를, 기도의 은총을, 기도의 신학을 잘 알고 계셨던 분으로 생각됩니다. 서로를 위한 기도와 기도의 기쁨에 대하여 참으로 아름답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 기도하고, 즐거움에는 찬양하며, 앓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어느 절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느 날 서로 내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기도를 하느님은 더 잘 들어주시는가에 것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들을 하느님은 거의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한편 다른 친구의 기도를 하느님은 들어주시지 않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자신의 인생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거의 실패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번째 친구는 자신의 역경과 고난에서도 항상 행복한 얼굴을 간직했습니다.
마침내 두 친구는 인생이 다 끝난 다음 하느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애를 하느님께 평가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평가가 세상에서의 기준과는 다른 듯 했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기도를 다 들어주신 첫 번째 친구가 아니고, 당신이 거의 기도를 안 들어주신 듯 했던 두 번째 친구에게 하느님은 최고의 평점을 주셨습니다. 의아하게 여기는 첫 번째 친구에게 하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의 기도만으로 내가 너에게 너의 꿈들이 이루어지게 했던 것은 아니란다. 네 친구의 기도가 너의 꿈을 돕곤 했었단다. 너의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기도하곤 했지.”
”하느님, 저의 기도는 제 친구의 기도를 들어주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오늘의 복음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 같은 이들의 것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르 10,14-16)
어린이의 특징은 단순, 순수, 신뢰, 겸손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 인간자신들이 어떤 위치, 신원, 부유함, 연령, 인종, 학식, 소유를 가졌다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 인간자신의 어떠한 것들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것이니...”
우리 모두는 피조물이고 하느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들입니다. 하느님은 어린이와 같은 마음과 영혼으로 당신께 의탁하고 청하는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는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시련과 고난의 때에 기도하고, 기쁨과 감사의 때에는 찬송하며, 더욱이나 병고에 지치고 힘든 이들을 찾아가고 기도해 주어야 함을 오늘의 말씀이 더욱 우리를 일깨워 줍니다. 서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주고 기도의 말씀을 건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것을 오늘도 감사하며 이처럼 새로운 하루를 힘 있게 시작합니다.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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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31주일
2019. 11. 3
루카 19, 1~10
♠ 복음 공부 :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
☞ 들어가면서 :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공생활을 통해 단 한 번 예루살렘 여정으로 예수님의 사명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분에게 드라마틱한 운명의 도시인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19장까지 전 장을 통해 증가되고 있는데, 놀랍게도 자캐오와의 만남은 그분의 예루살렘 여정의 마지막 사건으로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특수사료다. 이 사화는 예리코를 중심으로 눈먼 이를 고치신(18.35-43) 이야기가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18.35), 후자는 들어가신 후(19.1) 일어난 일이다. 두 이야기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비를 입는 구원문제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 1~10절 : 예리코는 부촌이며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기름진 곳으로 외국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세관이 있고, 이곳 세관장인 자케오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그 당시 세리는 경멸의 집단이었다. 왜냐하면, 부자가 되기 위해 로마의 식민지 통치 정부를 위해 일하고, 백성들과 국가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이에 자캐오는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처지로 소외감과 고독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키가 작은 그는 예수님을 보려는 열정에 체면도 버리고,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다. 예수님이 자케오를 보시고 “자케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라는 말씀에 예수님의 구원의지가 담겨있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변화된다. 회개의 표시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다른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선언한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네 곱절로 갚는 경우는 양을 도둑질했을 경우(탈출21.37), 남을 속여 재산상의 손해를 끼친 경우는 손해의 오분의 일을 보태서 변상하는 것이 관례였다. 실로 자캐오의 선언은 파격적이나 이런 행동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집중시킨 루카의 사상을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겠다는 결심을 한 죄인 자캐오는 재산 때문에 망설이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떠난 의로운 부자 청년과 대조를 이룬다.
♠ 복음 요약 : 창녀나 세리와 같은 인물은 공적으로 죄인이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언제나 그들을 회심으로 초대하셨으며,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셨다. 자캐오 역시 이미 모든 이들에게 죄인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굳이 자신의 모습을 거짓이나 위선으로 가릴 필요가 없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할 수 있었기에 예수님이 어떠하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져 키가 작은 그가 돌무화과 나무에 오른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의 부르심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요한 1.35-51절까지의 구절들은 자캐오의 부르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캐오의 이야기에서도 세관장의 마음에 당신을 보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열망을 불어 넣어 주셨고, 그 열망에 자존심까지 잊고 나무에 올라가 응답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행동은 자캐오의 전 인생을 변화시켰다. 예수님께서 위를 쳐다보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겠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죄인을 부르시고 그의 집에 찾아가신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비난하지만, 예수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신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 각자를 고유하고도 개별적인 방법으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자케오는 죄를 짓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인 한복판에 살아가면서 제자로, 그리고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희생제물을 드리려 했다. 자캐오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야만 예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 길을 지나가시다가 자캐오를 향해 내려오라고 하신다.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사제나 수도자의 생활이 아닌 두 발을 땅에 디딘 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평신도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가정 바로 그곳이었다.
♠ 대화 방향 : 이런 일화는 “평신도 삶에로의 부르심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캐오의 부르심에서처럼 어떠한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주나, 가정을 떠나지 않고 함께 머무신다. 그러면 예수님의 만남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요?
♠ 참고 문헌 : ▪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토마스H 그린 지음. 손우배 옮김 / 예수회 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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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32주일 / 평신도 주일
2019. 11. 10
루카 20, 27~38
♠ 복음 공부 : 부활 논쟁
☞ 들어가면서 : 한 해의 막바지 시기에 이미 돌아가신 조상님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20장에서 율법학자들과 수석사제들과의 논쟁으로 예수님을 공격하는 모습을 대한다. 1-8절의 사회적인 문화에서 부터 20-26절의 신학적인 공격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부활에 관한 신학적인 논쟁으로 신명기 25. 5-10에 나오는 수혼법을 내세워 질문을 한다. 이에 예수님은 죽은 이들이 어떤 모양으로 부활하신지를 답변하시고(34-36절), 부활을 뒷받침 하는 성경 구절을 제시한다(37-38절).
* 27~38절 : 사두가이는 다윗 임금 때의 사제인 ‘차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며,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후, 유다인들은 차독의 후손들에게 사제 직무를 수행하게 했다. 이들은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여겨 부활신앙도 천사도 부정한다. 그들은 자식 없는 과부가 대를 잇기 위해 죽은 남편의 형제와 혼인해서 자식을 얻는 수혼법을 극단적으로 적용하여 부활이 없음을 적용하고자 한다. 부활 이후에도 현세의 사정이 그대로 계속된다는 전제 하에 ‘일곱 명의 남편 중 누가 부활 후의 남편이 되겠느냐?’ 는 질문을 한다. 예수님은 결혼생활은 현세적 차원에서 속할 뿐 하느님의 능력으로 부활한 사람들은 천사들과 같아 죽는 일이 없어 다시 결혼하거나 아기를 낳아 대를 잇기 위한 결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두가이의 주장은 모순이다. 부활의 세계는 이승의 연장이 아니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창조되는 온전히 새로운 세계다. 모세가 이미 밝혔듯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도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있으며(탈출3.6),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이사 26.19; 에제 37장 다니 12.2) 때문이다.
♠ 복음 요약 : 복음에 등장하는 사두가이들은 부활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하느님 신앙은 현세적인 축복들만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세를 행복하고 기쁜 삶에 필요한 만큼의 신앙만이다. 그런데 가끔은 그들의 신앙이 세상을 ‘하늘나라로 가는 눈물의 골짜기’ 정도로 여기며, ‘현세의 삶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신앙에 저항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예수님의 답변은 사두가이들의 현실주의적 신앙뿐만 아니라, 자칫 현실을 외면한 신앙을 살 수도 있는 사람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처럼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하느님께서는 ‘살아있는 사람’이라 하신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지닌 삶과 죽음이 풀리지 않는 의문을 “오늘 내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 라는 의문으로 바꾸어 주신다. ( [거룩한 독서 쉽게 따라하기] 에서 발체함 )
♠ 대화 방향 : 우리는 사도신경을 바칠 때마다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나는 “죽음”과 “영원한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 참고 문헌 : ▪ 거룩한 독서 쉽게 따라하기 (김인호 지음 / 대전 가톨릭대학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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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33주일 / 세계 가난한 이의 날
2019. 11. 17
루카 21, 5~19
♠ 복음묵상
1.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의미는 단순히 마지막이라는 차원을 뛰어 넘어서 보다 희망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오늘이라는 적극적인 현실을 지향하는데 그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고,’ ‘어디를 향해 있느냐’ 에 따라 종말을 바라보는 관점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즉, 깨어 살아가는 의인들에게는 이 종말의 표징이 새로운 시작과 희망의 가르침으로 다가오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한낱 별스런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2. 예루살렘 파괴 사건을 예표로 삼아,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종말의 징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그 때에 드러날 징조들은 성전이 무너질 것이며 ‘내가 그리스도’라며 거짓 교설이 난무할 뿐 아니라, 전쟁과 기근, 전염병마저 도는 혼돈과 무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복음은 최후의 시간을 예고합니다. 또한 믿는 이들마저 끌려가 무고한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복음이 말하는 이러한 내용들은 세상에 부조리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말씀들입니다. 화려함의 유혹, 거짓 교설의 난무함, 인간 이기심으로 인해 야기되는 자연 파괴와 전쟁, 폭력 등은 물론이고, 진리가 통하지 않는 현실 속에 의롭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바로 오늘의 우리 모습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복음은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3. 복음의 결론은,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말도록 믿음의 인내와 결단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부당한 현실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 이러한 ‘인내’야말로 종말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 대화 방향 : ①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오로의 단호한 경고 말씀을 생각하면서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태만했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봅시다.
② 성서형제회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③ 그리고 50주년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슨 의미일까?
♠ 참고 문헌 : ▪ 보득솔 ( 청년 성서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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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 성서 주간
2019. 11. 24
루카 23, 35ㄴ~43
♠ 복음 공부
* 35절 :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지만, 백성들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몰았던 유다 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면서 빈정거리기 시작한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린다.
* 36절 : 그러자 군인들도 따라서 조롱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예수님께 신포도주를 들이 댄다. 신포도주는 포도주에 쓸개나 몰약을 탄 일종의 마취제이다. 십자가에서 손발에 못박히시고 체중의 중력으로 인해 심한 통증을 느끼기에 입에 대준 것이다.
* 38~39절 : 지도자들이 의도적으로 말한 조롱은 부근에 있는 군인들에게 전염되며, 그것은 십자가상 좌도에게 까지 전염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좌도 역시 예수님을 조롱한다. 그 역시 고통이 심한 와중에서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다.
* 40절 :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부정적인 분위기를 전염시키지만, 우도는 거기에 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좌도를 꾸짖는다. 그는 비록 십자가상에서 사형 받을 죄를 지어 사형받지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임을 그의 언어 통해 알 수 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 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우도는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심을 고백한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구원해주신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이 심하시기에 이 말씀을 하시면서 구원해주시는데, 개인적인 묵상으로는 십자가상이 아니었으면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넌 사형수이지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너는 내가 천국으로 데리고 가겠다.”
예수님 공생활 중에서, 극히 적은 사람들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성 요한크리소스토모는 우도를 향해서 ‘천국을 한 순간에 훔친 사나이’ 라고 표현하였다. ‘은총의 벼락을 맞은 사람’ 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 복음 요약 :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는 살인강도였다.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큰 죄인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그의 청원에는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라는 고백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 한마디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즉각 구원하셨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다. 강도는 외마디 소청으로 복음 대박을 터트린 셈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횡재였으면 ‘황금 입’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탄복했을까? “드디어 이 강도가 낙원을 훔쳤구나!” 어쨌건, 십자가상에서 숨을 고르며 얼떨결에 바친 강도의 감사기도는 짧고 떨렸으리라. 낙원? 평생 강도짓을 일삼은 이 파렴치한 죄인에게 낙원이요? 어떤 책벌도 마땅할 판인데, 이 어인 은총의 벼락인가요. ‘낙원’ !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당신 절규가 순수 희망의 외침으로 들리더니, 이젠 환청처럼 들려오는 소리, ‘낙원’! 겨자씨만한 믿음에, 천부당만부당한 횡재로군요. 낙원에 든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외마디 소원에, 돌아온 약속 말씀 “함께 낙원에 든다”?! 찰나의 교감으로, 졸지에 낙원 영주권을 얻었네요. 낙원, 절대로 훔쳐질 수 없는 것을 훔쳤네. 낙원을 훔친 자, 천상 강도였던 내게 새 이름이 생겼네. 낙원의 증거자, 역사 이래 가장 큰 강도, 대도(大盜)로서 나 천국에서 복음의 기쁨을 길이 증거하리라.
♠ 대화 방향 : 우리 삶의 여정에서 ‘은총의 벼락’을 맞은 경험에 대해 서로 나누어 보자.
♠ 참고 문헌 : ▪ 가톨릭신문 ( 2015년 10월 25일, 차동엽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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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묵상자료 기고 >
불의하고 약은 ‘집사의 선견지명’
< 루카복음 16. 1 ~ 13 >
임 젤뚜르다 (성자)
이문동 일반팀
16장 1절 이하의 ‘약은 집사의 비유’는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특수사료입니다.
1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이 매우 특이합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집사가 요새 말로하면 해고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집사’ 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오이코노모스’라고 하는데,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관리인’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로마서 16장 23절의 공공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정관’을 뜻하기도 합니다. (16.23: 이 도시의 재정관 에스토라스, 그리고 코르투스 형제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집사는 일을 그만 두라는 주인의 말에, 불안한 나머지 자신의 미래를 미리 설계하여 주인에게 빚진 채무자들을 불러 빚의 많은 부분을 탕감해줍니다. 기름 백 항아리를 빚진 채무자에게는 그 절반인 쉰 항아리로 적으라고 합니다. 항아리의 그리스어는 ‘바토스’입니다. 대략 한 바토스는 적게는 21리터에서 많게는 45리터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기름을 탕감해 줍니다. 또한 밀 백 섬을 빚진 사람에게는 여든 섬으로 적으라고 합니다. 한 섬의 그리스어로는 ‘포로스’이며, 적게는 240리터에서 많게는 450리터입니다. 이를 알게 된 주인이 그 집사를 불러 지혜롭게 대처한 집사를 칭찬했다는 내용입니다. 주인에게 사기 친 집사를 혼내고 해고해야 마땅한 일인데, 주인은 그러지 않고 칭찬을 합니다. 이 비유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루카복음의 이 대목을 읽는 사람들은 의아해 하셨을 것입니다. 주인이 집사를 나무라고 해고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칭찬하시냐고요. 예수님은 집사의 비양심적인 부분을 덮으시고, 그가 위기 대처능력이 빠름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집사의 비양심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가 행동한 빠른 위기대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다가올 종말에 대비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이 집사 같이 서둘러 회개하고 하느님 앞에 나와야 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행여 당시의 초대교회의 공동체에서 본받는 일이 없도록,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빛의 자녀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고, 이 세상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9절 이하부터는 재물의 사용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제자들의 재물 사용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작은 일에 성실하지 않는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9절의 ‘불의한 재물’은 더럽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적인 재물의 소유, 불의한 세대에 속한 재물을 뜻합니다. 9절의 ‘친구’는 성경학자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대개의 의견들은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결국 ‘이 세상의 재물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살라’ 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결국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 고 하신 12장 33절의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보시지요, (12,33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터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쓸지도 못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재물을 ‘불의한 재물’, ‘작은 일’, ‘남의 것’들 세상의 재물을 성실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은 훨씬 더 소중한 것을 성실하게 다룰 수 있다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 13절 이하의 말씀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의 비유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인데, 바리사이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비웃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시대의 유다인들을 재물이 많은 것은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복’ 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태어나서 성공하는 것과 재물이 많은 것은 ‘의로운 사람’ 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을 요약해보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신 것은 도둑의 음흉한 속임수나 몰염치한 뻔뻔스러움이 아니다. 오늘 지금 현재의 상태의 위치를 이용하여 대담하게 장래를 대비한 그의 선견지명을 실천으로 옮겼다는 ‘비유’ 이야기이다. 간악하고 부정직하고 사기질하는 관리인 ‘집사’라는 충격적인 비유를 들어 기억시키면서까지 ‘종말론적 호소’를 하고 계신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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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ㆍB 전국 봉사자 월례회합 스케치 >
길게 준비한 설립 50주년 준비위원회‘기획분과’회의
전국 서기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
올해의 주요한 행사, 성언농장에서의 ‘큰모임’과 김대건신부님의 자취가 깃든 나바위에서의 연수회‘를 마친 우리는 내년의 50주년을 위해 준비를 하나하나 다시 하기로 한다.
좋은 날씨, 10월 당산동성당에서 모인 우리는 하루를 숨가프게 내달렸다.
오전에 코이노니아로 시작해서, 새로 단장한 식당에서 식사한 후에 오후에는 내년도 묵상회를 위한 장소와 일정 등을 의결했다
그리고 50주년 준비를 위한 봉사자 피정 일정과 장소 등을 조율했다. 일정 장소 등은 몇 군데를 고려해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50주년 기획분과 모임을 열띤 논의 속에서 이어갔다.
아직 회계의 역할이 다소 어려움이 있어 50주년과 관련된 회계는 부봉사자인 한 베드로(남기) 형제님이 맡기로 하였다. 안건이 별로 나아지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내년에 창립기념일에 몇분이 초대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얼마나 많은 비용이 지출되며, 이들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지도 미지수인 셈인데, 일단 성언농장에서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12월에 50주년 준비모임을 위한 피정은 천안의 아퀼레오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신부님과 조율 없이 논의하는 것이라서 신부님과 협의 후에 확정하기로 했다.
필자는 전국 봉사자 월례회합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관계로 준비모임 이외에는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획분과 외에는 아직도 분과모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얼마 남지 않는 일정 속에서도 기획분과 안에서도 도무지 일정을 의결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하루였다.
사족으로는 필자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마련한 롤케익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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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
F․B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면서... - 제 4 부 -
: 권 토마 (순)
안산 원곡본당 FB
< 성서형제회의 정체성은 어디서부터... >
중국문화를 통해서 천주교를 접한 조선선비는 조선에서 뿌리를 내린 성리학과의 마찰로 박해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큰 박해의 시작은 정조임금이 승하한 이후였다.
그 박해로 천주학의 중심이던 양반계급에서 차츰 여인네와 중인들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인데, 그 중심은 역관이었던 것이고 과부들이었다.
조선 천주교회사를 말하면, 교우촌을 생각할 수가 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서 전국을 떠돌이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조선보다 200년 앞서 천주교가 들어간 일본은 일본막부가 천주교회와 함께 들어오는 서양문물로 인하여 많은 호기심을 자극받았지만, 일본의 중심 종교인 불교와의 마찰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일본도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도꾸가와 시대에 들어서는 선교사와 관련자들을 모두 일본에서 추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아시아로 복음의 씨앗이 퍼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임진왜란 때에 끌려온 조선 선비 중에는 일본 내에 들어온 서양수도회의 교육으로 선교사가 된 이가 있었는데, 그들도 역시 추방되어서 아시아에 활동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황사영이라는 선비는 토굴 속에 숨어 있으면서 이런 박해현장을 교황청에 알리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교황은 프랑스에서 유폐된 생활을 하는 시절이었다고 한다. 조선으로 주문모 신부님이 들어오고, 그분이 순교한 후에 몇 십 년 동안 조선에 파견된 사제가 없었던 것이 이러한 연유였다고 한다.
이는 마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친 한국으로는 당시 한권의 한글성서도 갖지 못한 한국가톨릭교회에서 새로운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성서를 젊은이들을 위해 어떻게 읽힐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1970년대는 젊은이들에게는 격동시기의 시작이었다. 유신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수도회를 중심으로 시작한 성서운동이었으니, 우리가 하는 ‘성서형제회’와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에서 시작한 ‘청년 성서모임’ 이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의 청년 성서팀은 서울교구와 연결되었고, 서울교구는 교구관할 본당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이전부터 지도사제를 임명했다.
반면에 성서형제회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파급되기도 하였으나, 창설자 최 바오로마리아(규업) 신부님이 에쿠아도르로 선교하러 가시면서 그 모임이 점차 성인들 모임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성서형제회의 초창기 봉사자들은 이런 환경들이 그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이는 한국천주교회의 실상이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말씀은 처음부터 존재해 왔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종교가 승인을 받고 난 후인 4세기 무렵에 정경화가 된 것이었다.
그 이후 각종 이단에 시달리는 천주교회는 여러 가지 필사본이 난무하는 가운데 평신도들의 성경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
조선에 천주교회가 들어오는데 성경은 들어있지 않았다. 다만 성경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교리만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는 천주교회보다 100년이 지나서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는 들어올 때에 배에 한가득 ‘한글번역본 성경’을 싣고 왔던 것이었다.
한국 천주교성당에는 성경책을 비치하여, 일반 신자들이 성당에 와서야 성경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1970년대 중반에야 개신교와 함께 만든 공동번역본이 배포되기 시작했다.
1970년도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는 성경 운동은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들은 1960년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이라는 점에서 놀랍기도 하였다. 공의회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정신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아주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평신도 사도들의 역할이 아주 미비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런 미비는 평신도 지도자양성과 교육의 미비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이는 한 때 서울교구에서도 여러 신부님에 의해 제기된 문제이기도 하였다.
저는 초기 성서형제회의 경험은 없었지만, ‘청년성서모임’을 통해서 이런 어려움을 겪어왔기에 추측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의 이런 생각들을 초기봉사자들을 통해 점검해 보려고 한다.
상당히 어려운 점이다. 지금 평신도들, 특히 평신도 지도자들이 처해있는 모습들, 그리고 나아가야 방향은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만, 무엇 때문인지 진전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회에서 현직검사가 국정감사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법이 신통치 않아서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한다.
이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서형제회가 생겨난 지 50주년이 다 되도록 창설자 신부님이 고생 끝에 내놓은 정신과 규칙은 초창기에 지켜진 이후에 첨차 이를 상실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당에서 여러 단체를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오해할 수 있는 일중에는 아주 상식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단체라는 것은 그들의 지향하는 바가 분명히 들어있다는 것인데, 가톨릭을 이들에게 보편성을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1990년에 이로 인하여 그 당시 생겨난 소공동체운동은 기존의 레지오활동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레지오는 그 나름대로 나아가는 방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소공동체의 잣대로 이를 재단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지금 생각해본다면, 천주교의 특성을 고수한 채로 소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잘 살펴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기존 성직자와 수도자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가 있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성서형제회 50년 동안 우리는 여러분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참여해 왔음을 알 수가 있다. 그 많은 시간은 교구장의 승인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작금에 와서는 인준을 받은 전주교구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런데 봉사자들이 가장 우려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모임이 활성화되지 않고 축소되어 가는 현상을 자꾸 밖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9일기도를 해왔다는 것을 상기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어려움을 인지하고 있지만, 이들을 타개하고자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년 50주년을 위해서 봉사자만이라도 영적인 준비와 시스템을 좀 더 정비하기 위해 곧 천안 신부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갈 것이지만, 이 짧은 시간에 얼마나 준비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아마도 신부님의 원칙적인 얘기를 듣는 것으로 끝이 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지난번에 신부님이 준비해 오신 것을 중심으로 피정도 하고, 각 내용 별로 대표자들이 나서서 의견을 개진하였지만, 이들에 대해서 그 때 뿐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행동요령이 전혀 생겨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감히 말을 끄집어내지는 못하지만, 이런 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왔는지는 잘 알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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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소식란 >
♠ 11월 <전국 봉사자 월례회합> 안내
- <FB 전국 봉사자 월례회합>을 아래와 같이 공지합니다...
※ 일 시 : 2019년 11월 9일 (토) 오전 11시
※ 장 소 : 안산 원곡 성당
※ 안 건 : FB 동계묵상회 프로그램 준비 및 2020년 연간 계획 수립 등
※ 문의 사항 : 전국조정 말씀선포자 : 방 레오(인석) ☎ 010-5477-2243
♠ <F·B 설립 50주년 준비를 위한 ‘영적 준비 피정’ > 안내
- 50주년을 맞이하기 위한 ‘영적 준비 피정’ 에 많은 봉사자님들이 참가 바랍니다...
※ 일 시 : 2019년 12월 8일 (일) 오전 10시 ~ 오후 5시 (주일미사 포함)
※ 장 소 : 미정
※ 피정 지도 : 정 아퀼레오(지풍) 신부님
※ 문의 사항 : 50주년 준비 봉사자 : 이 보나벤뚜라(강진) ☎ 010-3066-5147
♠ <F·B 설립 50주년 행사를 위한 후원금> 안내
- 2020년 5월은 성서형제회(F•B) 설립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
이 날을 기념하고 성서형제회를 좀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기도와 예산이 마련되어야 하기에 회원들의 자발적 십시일반으로 ‘50주년 행사 후원금’을 모금하고자 합니다.
[ 50주년 행사 후원금 전용 통장 ]은 [ F•B 본부 회계 통장 ]과는 별도로 준비하였습니다.
계좌는 전국 F•B 부봉사자이신 한 베드로(남기) 형제님이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 모금 기간 : 올해 11월초부터 내년 4월말까지
* 모금 계좌 : [ 우리은행 1002-860-557530 한남기 ]
♠ <F•B 본부 회계통장 송금 방법> 안내
- 성서형제회(F•B) 본부 회계통장으로 ‘각 팀 의연금’, ‘행사비‘, ‘일반 후원금‘ 등을 송금할 때에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농협 100071-51-033709 이강진 ]
☞ 계좌에 송금을 하실 때 표현을 분명하게 해주세요...
각 팀의 매월 송금하는 의연금은 팀의 명칭을 적어주시고, 일반 개인 후원금일 때는 개인 성명을... 일반 팀 후원금 및 행사비일 때는 팀의 명칭도 함께 표현해 주세요.
☞ 표현 예시 : 의연금산상수훈 / 의연금로고스 / 의연금천국의문 / 후원금이강진 / 후원금한남기 / 후원금로고스 / 후원금천국의문 / 행사비이강진 / 행사비한남기 / 행사비로고스 / 행사비산상수훈
♠ 전국 모든 회원들께 드리는 부탁사항
※ 과거에 발행됐던 [F•B 기쁜소식지] 를 수집합니다.
- ‘F•B 설립 50주년’을 앞두고, 그동안 성서형제회에서 발행해왔던 [F•B 기쁜소식지]를 모아 책자로 제본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특히 오래 전에 발행된 [F•B 기쁜소식지]를 찾기가 쉽지 않네요. 회원들께서 개인 및 각 팀별로 혹시 캐비넷 속에 보관하고 있는 ‘창간호(1호)’ 부터 ‘2010년 12월호’ 까지의 [F•B 기쁜소식지] 를 모두 수합하여 서류봉투에 넣어서 아래 주소로 보내주시면 가능한 한 여러 권을 제본하도록 하겠습니다. (각 팀, 지구 봉사자를 통해서 보내주셔도 됩니다.)
☞ 주소 : < 07263 >서울 영등포구 선유동1로 12-18 , 4층방 (당산동2가) / 이강진(보나벤뚜라) 앞
※ 과거에 찍었던 [F•B 관련 행사 사진] 과 [F•B 관련 각종 기록물] 을 수집합니다.
- [ F•B 설립 50년사 ] 를 편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고해야 할 ‘사진’ 또는 ‘기초 자료’들이 부족합니다. 회원들께서 개인 및 각 팀별로 혹시 캐비넷 속에 소중한 자료가 있으면 서류봉투에 넣어 보내주십시오. (각 팀, 지구 봉사자를 통해서 보내주셔도 됩니다.)
- ‘사진’ 에 대한 참고사항은 사진 뒷면 또는 별도의 용지에 적어주시면 됩니다.
- ‘사진’ 또는 ‘기초 자료’ 들은 활용 후에 돌려드리겠습니다. (서류봉투에 자료제공자의 성명 / 전화번호 / 주소를 꼭 적어주세요.)
♠ 각 팀과 각 지구 말씀봉사자에게 드리는 부탁사항
1) 각 팀 의연금 성실하게 보내주십시오
- F•B 본부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와 월간 발행하는 [기쁜소식지]가 발행비 부족함 없이 현재처럼 매월 발행되기 위해서는 각 팀에서 적은 금액이라도 매월매월 꾸준히 본부로 의연해주셔야 합니다.
2) 각 팀이나 각 지구의 ‘소식’이나 ‘묵상나눔’을 홈페이지에 올려주세요
- ‘기쁜소식지’ 에 올릴 이런저런 ‘각 팀의 소식’, ‘묵상나눔’을 올려주시길 부탁해요.
♠ <FB 창립50주년 준비위원회> 봉사자 추가모집 안내
- < FB 창립 50주년 준비위원회 > 의 각 분과에서 봉사하실 ‘분과장’과 ‘분과위원’ 봉사자를 추가로 찾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지고 있는 성의와 달란트를 봉헌하는 마음으로 봉사에 자원 바랍니다...
희망자는 이 보나벤뚜라 (강진 / ☎ 010-3066-5147)에게 신청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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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I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많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9년 9월 입출금 내역
일자 | 내 용 | 수 입 | 지 출 | 잔 액 |
8 /30 | 전월 이월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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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1,450 |
9 / 7 | (서울 목3동) 성가정 팀 F·B | 30,000 |
|
1,92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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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8 | (전주 효자우전) 성모마리아 팀 F·B | 100,000 |
|
2,02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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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9 | (서울 당산동) 로고스 팀 F·B | 50,000 |
|
2,071,450
|
9 /20 | (전주 서신동) 천국의 문 팀 FB | 30,000 |
|
2,10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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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9 | (안산 원곡성당) 자매님 팀 F·B | 31,000 |
|
2,132,450
|
9 /30 | (서울 이문동) 일반 팀 F·B (7,8,9월분) | 150,000 |
|
2,282,450
|
9 /30 | (서울 당산동) 산상수훈 팀 F·B | 50,000 |
| 2,332,450 |
9 /31 | <기쁜소식지> 인쇄비 (10월호) |
| 168,000 | 2,164,450 |
9 /31 | <기쁜소식지> 발송 우편요금 (10월호) |
| 45,500 | 2,118,950 |
9 /31 | 사회복음화 지원금 (전주 교도소) |
| 50,000 | 2,068,950 |
9 /31 | 예수그리스도 수녀회 후원회비 |
| 30,000 | 2,038,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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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전체 입출금 합계 | 441,000 | 293,500 | ****** | |
다음 달 이월금 (통장 잔고) | 2,038,950 | |||
<< 입금할 계좌 : 농협 100071-51-033709 이강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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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의 기도 지향
“ 다양한 종교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근동 지역에서 대화와 만남과 화해의 정신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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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교회의 목자이신 교종 프란치스코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연약해보이시는 외모와 달리,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를 돌보면서도 주님의 교회를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교회 안팎의 더러운 악의 세력과 목숨 걸고 단호한 싸움을 하고 계십니다...
교회개혁을 반대하는 엄청난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목자이신 교종 프란치스코를 보호해주시도록 열절한 기도를 해주십시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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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 욥기 19장 25~2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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