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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9월 26일 토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코헬렛은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며, 먼지는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데 모든 것이 허무라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복음).
제1독서
<먼지가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이 하느님께 되돌아가기 전에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 11,9―12,8
9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10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12,1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2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3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들은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은 생기를 잃는다.
4 길로 난 맞미닫이문은 닫히고, 맷돌 소리는 줄어든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에 일어나지만 노랫소리는 모두 희미해진다.
5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6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7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8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그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9,45).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수난을 당하고 사람들의 반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께서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신다면, 자신들의 삶도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달았고, 더 큰 믿음으로 그들의 삶을 예수님 뜻을 전하는 데 바쳤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겪은 시행착오를 이미 알고 있기에 우리 앞에는 더 유리한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한 순간만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올 때까지 그 어둠 속에서 우리와 함께 머물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왕태언 요셉 신부)
오르막이 점점 두려워질 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출산과 초고령화로 인한 심각한 현실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로 시끄러웠던 학교들은 더이상 입학생들이 없어 폐교되어 잡초가 무성합니다. 어린이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농촌의 현실은 더욱 심각합니다. 산부인과나 산후조리원 같은 간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대신 요양원이나 치과나 정형외과는 노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그나마 근근이 마을을 지켜오시던 주민들도 점점 노쇠해지셔서, 동네 전체가 생명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 코헬렛의 말씀과 어찌 그리 딱 맞아떨어지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코헬렛은 불행한 날에 만나게 될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비가 오고 구름이 몰려오는 날은 희망이 사라진 노년기를 상징합니다. 파괴된 집은 노년기에 맞이할 고통을 의미합니다.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의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을 생기를 잃는다.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는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트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기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코헬 12, 3-5)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라는 표현이 어찌 그리 제게 ‘확!’ 와 닿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허리가 삐끗해서 거동이 많이 불편했었는데, 오르막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노쇠한 어르신들이 하루하루 얼마나 힘겹게 견뎌내고 계시는가를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한 인간이 수명을 다해가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현실이 있습니다. 노화와 그로 인한 고통입니다. 심각한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장애를 겪기도 합니다. 심연의 고독과 소외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코헬렛은 노화로 인한 고통과 슬픔의 순간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외칩니다. “여러분들, 이제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향한 여행 가방을 쌀 시간입니다.”
나이 들어간다고,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시작하는 서곡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기본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지속적인 겸손입니다. 노화나 병고, 죽음과도 같은, 견디기 힘든 극심한 고통이나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 다가올 때,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서고 극복이 가능한 것이라면 백방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님께 청해야 할 것입니다.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2,7)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은 거의 읽지 않는데 예전에는 ‘시조’를 읽곤 했습니다. 작가는 짧은 글에 ‘희로애락’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시조 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의 충신 길재가 고려가 멸망한 뒤 옛 도읍 개경을 돌아보며 지은 시조입니다. 오백 년 동안 찬란했던 고려의 도읍은 산과 강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영화는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길재는 변함없는 자연과 사라져 버린 인간의 역사를 대비시키며 인생과 권세의 무상함을 노래합니다. 한때 영원할 것 같았던 태평성대도 지나고 나면 한바탕 꿈처럼 느껴집니다. 산천은 남아 있어도 사람은 떠나고, 권세와 영화도 사라진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무엇을 남기며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시조입니다.
‘비 갠 긴 둑에는 풀빛이 짙어지고 남포에서 그대를 보내니 슬픈 노래가 절로 나오네.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 것인가.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는구나.’ 고려의 문인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은 대동강 남포에서 벗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노래한 아름다운 이별 시입니다. 비가 그친 뒤 풀빛은 더욱 푸르고 대동강 물은 유유히 흐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특히 “대동강 물은 어느 때 마를 것인가,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는데”라는 마지막 두 구절은, 강물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이별과 그리움도 끊이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변함없이 흐르는 강물과 덧없이 헤어지는 인간의 삶을 대비시키면서, 만남의 소중함과 이별의 애틋함을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렇게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식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별은 단순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내 눈앞에 일어나는 사건 안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듣는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실패했다고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닙니다. 박수받는다고 반드시 하느님의 뜻인 것도 아니고, 어려움이 있다고 하느님께서 떠나신 것도 아닙니다. 식별은 겉모습을 넘어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코헬렛은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젊음도 지나가고, 건강도 쇠하고,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잘 들리지 않으며, 마침내 인간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코헬렛은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러나 코헬렛이 우리에게 절망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을 식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은 사라지고, 명예도 사라지고, 젊음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베푼 사랑은 남습니다. 우리가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는 남습니다. 용서했던 마음은 남고, 누군가를 위해 흘린 눈물과 기도는 하느님 안에 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식별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보고 모두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성공과 영광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기적과 박수와 영광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너머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까지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눈앞의 일만 보면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건강을 잃을 때도 있고, 관계가 힘들어질 때도 있고,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묻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러나 신앙인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주님, 이 일을 통해 제가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무엇을 내려놓아야 합니까?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합니까?” 이것이 식별입니다. 길재는 폐허가 된 옛 도읍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보았습니다. 정지상은 흐르는 강물에서 인간의 만남과 이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십자가를 보셨고, 십자가 너머에서 부활을 보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눈이 필요합니다. 지나가는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영원한 것을 선택하는 눈입니다. 눈앞의 성공과 실패에 흔들리지 않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눈입니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손을 내밀어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반기는 손을
내밀어요
밀치는 손 말고
따뜻한 손을
내밀어요
차가운 손 말고
부드러운 손을
내밀어요
억센 손 말고
모으는 손을
내밀어요
가르는 손 말고
어르는 손을
내밀어요
괴롭히는 손 말고
받드는 손을
내밀어요
누르는 손 말고
살리는 손을
내밀어요
죽이는 손 말고
오늘의 성인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인술도 신앙의 길도 함께 한 쌍둥이 형제 의술 베풀어...갖은 고문에도 신앙 지켜 순교
287~303. 아라비아 출생,
쌍둥이 형제. 의사와 약사의 수호성인.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는 아라비아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다. 시리아로 유학을 떠난 형제는 의학을 전공해 의사가 됐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시칠리아의 한 섬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의술'과 함께 '인술'을 펼쳤던 두 성인은 명의(名醫)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료로 진료해줘 사람들에게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또한 형제는 자신들을 찾아오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면서 마음의 고통까지 어루만져줬다.
때로는 기도를 통해 치유 기적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형제 성인의 청렴한 생활과 겸손한 자세, 늘 하느님께 기도하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믿게 됐다.
303년 이탈리아 전역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의 바람이 불었고 두 성인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환자들은 물론 만나는 사람에게 늘 하느님 말씀을 전했던 터라 이들은 즉시 체포 대상이었다.
이들은 갖은 고문과 배교 회유 끝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두 성인이 순교한 뒤에 성인의 전구로 인한 치유의 기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훗날 유스티아노 황제는 두 성인의 삶을 칭송하며 콘스탄티노플에 거대한 성당을 지어 봉헌했다.
교황 펠릭스 4세도 로마에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성당'을 지어 많은 이들이 두 성인을 현양하도록 했다.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는 아라비아 태생으로 쌍둥이 형제였다고 전해오는데, 그들의 전기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므로 전설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실리시아(Cilicia)의 에게해 (Aegean Sea) 근방에서 살았는데, 그들의 의료기술이 남달리 뛰어나 그 명성이 널리 퍼져서 명의라는 높은 칭송을 듣고 살았다.
또한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던 두 형제는 박해가 일어나자 실리시아의 집정관 리시아스(Lysias) 앞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신앙 때문에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들 외에도 그들의 형제이던 안티무스, 유프레피우스 그리고 레옹시오도 함께 처형당하였다. 이들의 순교 후에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또 그들의 높은 신앙심을 증명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전해온다.
고스마와 다미아노는 이발사의 수호자이고, 루카 복음사가 다음으로 의사들의 수호성인이다.
성 닐로 (Nilus)
활동년도 : 910-1004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로사노(Rossano)
같은 이름 : 닐루스
성 닐루스(또는 닐로)는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 로사노 출신의 그리스인으로서, 젊었을 때에는 고향에서 세리 일을 맡아 보았고, 젊은 여인과 함께 살았으나 아내는 아니었다고 한다. 940년에 그 여인과 아이가 죽자 그는 캄파니아(Campania)의 팔마(Palma)에 있는 비잔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40년을 살았다. 그가 유명 인사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뛰어난 선성과 지혜 때문인데, 성 데메트리우스 코로네 수도원의 원장이 되면서부터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사라센인들의 침략으로 수하 수도자들을 데리고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와 인접한 곳으로 피신하여 벨레루치오(Vellelucio)에 정착하였다. 성 닐루스는 임종하면서 벨레루치오를 자신의 수도원을 위한 새로운 장소로 선포하였고 그곳에서 그로타페라타(Grottaferrata)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리스 수도자의 아버지로 공경을 받는다. 그의 세 번째 계승자인 그로타페라타의 성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 11월 11일)는 성 닐루스가 세운 수도원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던 그의 수제자였고, 스승과 같이 찬미가를 짓기도 하였다. 또 그는 노련한 서예가였다.
성 치프리아노 (Cyprian)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안티오키아(Antiochia)
활동연도 : +3세기경
같은이름 : 치쁘리아노, 치쁘리아누스, 치프리아누스, 치프리안, 키프리아노, 키프리아누스, 키프리안
성녀 유스티나(Justi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3세기경
같은이름 : 유스띠나
• 역사적인 확실한 근거는 희박하나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또는 치프리아노)는 안티오키아에 살던 이교도로서 잡귀신들을 불러 마술을 부리는 마법사였다고 한다.
그는 이런 일 때문에 그리스,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까지 두루 여행하면서 그의 능력을 과시하고 추종자들을 모았다.
그런데 이교도 청년인 아글레데스란 사람이 안티오키아의 신자이던 미모의 성녀 유스티나(Justina)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키프리아누스에게 그녀의 사랑을 완전하게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고, 키프리아누스는 자신의 온갖 예식을 거행하였지만 유스티나의 신앙심 때문에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났다.
그는 자기 창고에 있는 모든 무기를 다 동원하여 유스티나에게 덤비는 악마를 불렀다.
그러나 유스티나는 십자가의 표지로 마귀들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이에 그는 갑자기 자신이 무력해지면서 억누를 수 없는 어떤 무서운 힘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자신이 오히려 위험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악마의 도움을 구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악마가 그를 덮치고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지난날의 과오를 깊이 뉘우친 키프리아누스는 십자가를 만들어 악마의 세력에서 빠져나오는 행운을 맛보게 되자, 즉시 에우세비우스(Eusebius)라는 사제에게 달려가서 교리를 배우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온갖 마술 서적을 불태웠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희사하였으며, 마침내 아글레데스와 같이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사제가 되었고 또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성녀 유스티나는 수녀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다마스쿠스(Damascus)로 압송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고문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신앙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은 황제 앞으로 끌려 나가 재판을 받았으며,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의 이즈미트)의 갈루스(Gallus) 강 언덕에서 황제의 명으로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때 성 키프리아누스를 찾아와 위로하였던 테옥티스투스(Theoctistus)라는 신자도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매장되지 않고 방치된 채로 있었지만, 6일 후 신자인 선원들이 발견하여 로마(Roma)로 옮겨 갔다고 한다.
이들의 유해는 루피나(Rufina)라는 귀족 부인의 영지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콘스탄티누스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성 바오로 6세 (Paul VI)
신분 : 교황
활동지역 :
활동연도: 1897-1978년
같은이름 몬티니,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콘체시오(Concesio)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 조르지오 몬티니(Giorgio Montini)는 일간지 ‘브레시아 시민’(Il Cittadino di Brescia)의 편집자로서 반교회적 사상과 투쟁하였고, 어머니 주디타(Giuditta Alghisi)는 교회 여성운동의 지도자였다. 허약한 체질에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으나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던 그는 1903년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 학교(Cesare Arici Institute)에 들어가 1914년까지 공부한 후 아르날도 다 브레시아(Arnaldo da Brescia) 고등학교를 거쳐, 1917년 브레시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서 통학하였다.
1920년 5월 29일 사제품을 받고 그는 같은 해 11월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회법을, 로마 대학에서 문학을 배웠으며, 1922년부터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Academia dei Nobili Ecclesiastisi)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3월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 주재 교황대사 보좌관으로 파견되었으나 그곳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11월 로마로 돌아와 1년 동안 교회법과 외교학을 연구한 후 1924년 10월부터는 교황청 국무원에서 근무하였다. 1925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 학생연맹(FUCI)의 지도신부로 임명되어 파시즘 학생연맹과 대립하여 싸우기도 했다. 1931년 다시 국무원에 근무하면서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교황청 외교사를 강의하였다.
그는 1937년 12월 13일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교황청 국무원장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되어 몬시뇰로 임명되었다. 1939년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 선출된 후에는 새 국무원장 루이지 막리오네(Luigi Maglione) 추기경을 보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포로 문제, 유대인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집을 잃은 무주택자들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미국가톨릭복지협회(NCWC)와 교황청 간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와 국제 가톨릭 이주자위원회(International Catholic Migration Commission)의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밀라노(Milano)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왕성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많은 성당을 신축 · 보수하고 사목방문에 힘쓰며, 교회를 떠난 노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복음의 사회교리를 설교하여 그들이 교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힘썼다. 그는 평신도 사도직과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가톨릭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도록 권했으며, 그리스도교 노조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청소년 문제에도 큰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1958년 12월 15일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된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와 실무조정위원회의 임원직을 맡아 공의회 제1회기(1962년)에 참석하였다.
1963년 6월 3일 교황 성 요한 23세가 선종한 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를 교황명으로 택하고, 6월 3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바오로 6세 교황으로 착좌하였다. 그는 곧 공의회의 속개를 발표했고, 제4회기까지 열린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폐막되었다. 제4회기(1965년) 때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영속적 기구로서 주교대의원회의 설립이 착수되었다. 그리고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 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인 및 무신론자들과의 대화 등 가톨릭교회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1964년 1월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12월에는 세계 성체대회 참가를 위해 인도 뭄바이(Mumbai)를 방문하였다. 1965년에는 미국 뉴욕의 국제연합(UN) 본부를 방문해 평화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1967년에는 터키 이스탄불(Istanbul)을 방문했다. 1968년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콜롬비아를 찾아 보고타(Bogota) 세계 성체대회와 메데인(Medellin)의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연합회 총회에 참석했으며, 196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교회일치사무국과 중앙아프리카를 방문하였다. 1970년에는 아시아를 방문하던 중 필리핀 마닐라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다수의 교황 문헌을 통해 교리를 해석하고 세상 속 교회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대표 문헌으로는 성체성사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재확인한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의 공동 발전을 위한 방법들을 제안한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부부 관계와 정결의 가치, 올바른 자녀 출산을 위한 부모와 의료인과 사목자의 역할을 설명한 “인간 생명”(Humanae vitae, 1968), 현대 세계에 부응하는 선교의 방향을 논한 “현대의 복음 선교”(Evagelii Nuntiandi, 1976) 등이 있다.
공의회 이후 전통주의자들의 반발과 국제 정세의 불안 등으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 참여를 증진하고 허례허식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의회 제3차 회기를 앞둔 1964년에는 여성, 수도자, 평신도의 공의회 입회를 허용했고, 1970년에는 여성 최초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와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으로 선출될 때 받았던 삼중관(tiara)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78년 8월 6일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 별장에서 미사를 드리다 심장마비로 선종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인 1963년 교황으로 선출된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5년까지 공의회를 이끌었으며, 공의회 문헌을 반포하고 결의사항을 실행해 나갔다. 1964년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해 정교회 수장이었던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 만나 그리스도교 일치에 앞장섰고, 세계 성체대회 개최지인 인도를 방문하며 아시아 땅을 밟은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196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를 제정했으며, 재임 기간 중 추기경단을 꾸준히 늘리고 제3세계 출신을 발탁하는 등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969년 한국 최초의 추기경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임명한 교황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2014년 10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성 요한 23세와 더불어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끈 주역인 제262대 교황 바오로 6세의 시복식을 거행하였다. 시복식은 바오로 6세 교황 재임 중 제정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제3차 임시총회 폐막 미사 중에 이루어졌다. 바오로 6세 교황의 시복은 그의 전구(intercession)로 일어난 기적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5월 9일 승인함으로써 결정되었다. 본인과 태아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낙태를 종용받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임신부가 한 이탈리아 수녀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그 수녀가 바오로 6세 교황의 상본(holy card)과 제의 조각을 임신부의 배에 놓고 기도한 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2018년 10월 14일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가 열리는 중에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신을 시복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 미사에서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바오로 사도처럼 새로운 경계를 넘어서, 복음 선포에서나 대화에서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외향적인 교회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당신 스스로 지혜로운 길잡이 역할을 하셨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우리의 공동 소명, 곧 성덕을 향한 보편적인 소명을 살라고 오늘도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대충대충 사는 것이 아니라, 성덕을 살라고 권고하십니다.”라고 그의 성덕을 칭송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시성으로 역대 교황 중 성인은 82명(대립교황 교부 히폴리투스 포함), 복자는 9명이 되었다. 20세기 교황 중에서 성인품에 오른 이는 비오 10세(Pius X, 8월 21일),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와 더불어 총 4명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2월 6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을 통해 성 바오로 교황의 기념일을 제정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일반적 관례에 따르면 성인의 축일은 선종일로 지정하는데, 선종일인 8월 6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임을 고려해 5월 29일을 선택 기념일로 지정했다. 5월 29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1920년 사제품을 받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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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하고 혁신적이며 참된 그리스도인 성 바오로 6세 교황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편집장 안드레아 몬다는 41년 전 1978년 8월 6일 선종한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모습을 소개했다. 그는 1900년대 ‘가톨릭 운동’ 역사의 참된 주인공이었다.
Andrea Monda / 번역 이창욱
1978년 8월 6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세속명: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의 ‘천상 탄일(dies natalis)’이다. 1900년대의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 백성 안팎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과의 영적인 가까움을 전혀 숨기지 않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6년 재임기간 동안에는 그 이해가 더욱 증폭됐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선임자인 성 요한 23세 교황의 선종 이후 중단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무사히 재개했고,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을 반포했으며, 최초의 해외 사도적 순방과 교회 일치 운동에도 박차를 가했다.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주(州) 콘체시오에서 태어나 냉전과 같은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됐던 그 끔찍한 해에 선종함으로써 20세기의 3분의 2를 거쳐간 그의 삶은 풍성한 모자이크화처럼 수많은 측면을 탐구할 수 있는 인물이다.
*정치적 차원
그 다양한 측면 가운데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말년 생애에서 필자는 그의 정치적 차원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지난 5월 22일부터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 실린 사회학자 주세페 데 리타(Giuseppe De Rita)와의 인터뷰 시리즈를 통해서다. 여기엔 이탈리아와 유럽의 위기, 서양 사회에 대한 커다란 난관의 순간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역할에 관한 대화가 담겼다. 데 리타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성 바오로 6세 교황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25-1933년 이탈리아 가톨릭 대학 연맹(Federazione Universitarià Cattolica Italiana, 이하 FUCI)의 전국 지도신부를 맡았던 순간부터 1900년대 정치에서 가톨릭 운동사의 참된 주역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 토론에 발제자로 참여한 약 25명의 학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특히 사회 투자 연구원(Centro Studi Investimenti Sociali, CENSIS)의 설립자 주세페 데 리타는 이탈리아 정치가 알치데 데 가스페리(Alcide De Gasperi)가 이끈 기독 민주당(partito della Democrazia cristiana)의 출범을 통해 전쟁의 비극에서 이탈리아가 벗어나는 데 있어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활동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강조했다. 이 견해는 이탈리아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긴 역동의 시기에서 또 한 명의 중심인물은 알도 모로(Aldo Moro)였다. FUCI에서 활동하던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몇 년 동안 알도 모로를 알았고, 끝까지 그와 함께했다. 5월 13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도 기념비적인 언급을 통해 그를 기억했다. “주님께서는 이 착하고, 온유하며, 지혜롭고, 무고하며, 친구였던, 알도 모로의 안전을 위한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새로운 욥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3개월 전인 1978년 비극적인 봄에 일어난,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악(알도 모로의 암살)에 대해 하느님께서 갚아달라고 탄원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인터뷰 시리즈는 오늘 (이탈리아 주교회의 의장) 괄티에로 바세티(Gualtiero Bassetti) 추기경의 언급으로 끝을 맺는다(세 번째 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바세티 추기경은 다른 대담자들에 의해 부각된 예언이라는 주제에 관한 몇 가지 실마리를 얻으면서, 오늘날의 이탈리아를 위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활동적인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면서도 혁신가들입니다. 신앙과 절제된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에 온유해야 합니다. 혁신이란 세상(세속)의 정신, 곧 이기주의, 허무주의, 소비주의와 외국인 혐오주의를 반대하며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언적인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탈리아 주교회의(CEI) 의장이기도 한 바세티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정치가) 조르조 라 피라(Giorgio La Pira)를 언급했지만, (그 인물에 대한) 묘사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모습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적용할 수 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온유하고 혁신적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천상 탄일을 기억한다. 지난 1978년 8월 6일 고령의 교황은 삼종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훈화를 마무리했다. “그 무엇과도 비할 데 없는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영예롭게 했거나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받은 책임인 말과 행동으로 논리적인 결과에 맞게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그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운명을 이미 맛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교회 전체도 그렇게 확신한다.
